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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세계유산` 남한산성.(상)
남한산성.,옹성.
우리나라 전통정원 - '세계유산' 남한산성.
세계유산 위원회 -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제의 변화상을 가장 잘 나타내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실제 거주하고 있는 유산으로서 가치가 높다."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
남한산을 중심으로 축성한 산성이 남한산성(南漢山城)
병자호란 때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
한강과 함께 삼국시대 패권 요충지.,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서울시에서 약 24km 거리에 위치.
5호선 마천역 1번 출구 or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산성역~ 남한산성 가는 버스(9번)을 타고 남문 하차.
9번 마을버스로., 약 20분 소요거리
산성역~ 남한산성 남문( 2차선 도로)
남한산성의 남문(南門) 밖에 위치한.,성남(城南)
'성남~남문~수어장대'는 차량 통행도 가능한 도로.
조선시대에는 우마차 통행도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은., 산성 내 중심에 위치.
남문 주차장 인근에 위치한.,산성 내 사찰.,개원사.
개원사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198-5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며,
장경사, 망월사와 더불어 국가문화재 사적 57호로 지정.
인조 때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는 사찰.
이때 인조는 선종 지도자 벽암 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임명.
남한산성은 승군에 의해 보수되고, 방어 역시 승군에게 주어졌다.
이를 계기로 1624년에 개원사가 만들어지게 되고
이후 남한산성 안에 승군 주둔 사찰을 7개 더 창건.
산성 내 모든 승군 본영사찰로 개원사가 활용되었다.
이로써 개원사는 한양을 지키는 호국사찰의 중심.
폐사되기 이전까지 조선불교의 중심 역할을.,수행.
1894년 승번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
1907년에 들어와 일제가 남한산성 안에 위치한 사찰들이
화약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찰들을 파괴.
1909년에 개원사의 루를 산성 내 장경사로 이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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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城南)은 북으로는 수도 서울과 접경을 이루고
동남으로 광주· 용인, 서쪽은 과천· 의왕와 접하여 있다.
성남시 가운데로 탄천이 흐르며, 양 기슭엔 범람원이 발달.
청계산, 남한산, 청량산이 주변 시·군과 경계를 이루는.,성남.
광주산맥에 둘러싸여 탄천을 따라
남북으로 긴 협곡 분지 지형인 성남.
1989년 성남시 남부에 분당신도시 및 2000년대 판교신도시.
성남 구시가지와 그린벨트로 단절되어 시가지와 생활권이 양분.
성남은 서울의 위성도시로 서울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26Km 거리.
박정희 정권 때, 청계천 판자촌 철거로 당시 주민들을
성남시로 강제 이주시켜 많은 사람들이 성남시에 터전.
현재, 경기도와 함께 각종 IT산업 및 첨단산업 유치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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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북문 밖으로 바라보이는., 송파구 삼전도.
병자호란때 인조는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
송파구는 남한산성과 더불어 한성백제의 문화 유적지.
송파구 석촌호수는 가족나들이 벚꽃놀이 명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의 역사 탐방길.
한성백제 유적길.,몽촌토성길 & 토성산성어울림길.
한성백제 오백년 도읍 서울에는 풍남토성을 시작으로
다양한 송파시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올림픽 공원을 지나
방이동 백제고분군,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등 유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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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출구 밖.
그곳에서 시작되는.,토성산성어울림길.
..............‘토성산성어울길(19.6km) ’.............
몽촌토성역~올림픽공원~백제박물관~몽촌토성
~성내천~방이습지~마천시장~마천역~남한산성.
남한산성 탐방객 전통먹거리 가득한 마천전통시장.
역사ㆍ문화자원으로는 한성백제 고대유산
몽촌토성과 토성 위에 자리잡은 몽촌역사관,
한성백제박물관,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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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역~(1.0km)만남의광장~(0.8km)남한산성등산로입구
~(0.5km)남한천약수터~(1.9km)남한산성암문(수어장대)
~(0.5km)서문~(0.6km)북문~(1.0km)동장대터~(0.8km)벌봉
~(1.6km)장경사신지옹성~(1.2km)좌익문(동문)~(1.3km)남옹성
~(0.9km)지화문(남문)~(0.9km)남한산성행궁.,남한산성길(총13km)
남한산성 청량산 고지에 웅장하게 지어진.,수어장대.
남한산성 성벽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문화유적들.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진수를 둘러볼 수 있는.,남한산성길.
남한산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
능선의 흐름에 맞춰 산성의 모양도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산성 좌우에 울창한 수림들은 검은색 벽돌 여장과 조화롭다.
코스 중간 중간 접할 수 있는 수어장대, 행궁, 4대문, 숭열전,
역사관 등의 역사 깊은 문화재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남한산성 가는 길............
1.수도권지하철 5호선 마천역 2번출구
2. 수도권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시내버스 9, 52번 탑승후 종점(남한산성)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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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
1971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이 찾는 장소.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47일간 항전한 곳.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인조14) 음12월 9일 청군이
또 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처들어왔다.
무려, 12만 8천 청군이 조선을 침공한지
불과, 5일만에 질풍 같이 한양을 점령한 것.
청태종이 병자호란 발발 10개월 전
병자년 초 조선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귀국이 산성을 많이 쌓고 있으나
우리는 큰 길로 갈 것이오." - 청태종-
조선에서는 청군이 일년 중 가장 날씨가 추운 한겨울에
꽁꽁 언 강물 위로 말을 달려 침략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것.
인조가 강화도 피난을 준비할때 청군이 도성에 들이닥친 것.
인조는 가까스로 수구문을 통해 한양을 탈출.
겨우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날은.,음력 12월 15일.
눈길이 미끄러워 말에서 내려 걷느라고.,발에 동상.
1636년 12월 30일 청태종이 2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먼저 들어온 청군과 합류해 산성을 포위.
1637년 1월 1일 청태종은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
1637년 1월 3일.,이천 쌍령전투에서 참패한.,조선군
청군은 기마병 300명뿐이었고, 조선 근왕병은 4만 군사.
1637년 1월 17일.,성안에 인조에게 살고 싶으면
귀순하라고 최후통첩을 하면서 더욱 압박하였다.
남한산성 조선군 병력은 1만 4천이고, 청군은 14만.
그로부터 이듬해 음력 1월 30일까지., 47일간.
청군에게 포위된 채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1637년(인조15) 1월 30일에 삼전도에서 항복한다.
당시 청 인구., 300만명
명나라 인구.,1억5천만명
그당시 조선 인구.,약 1천만.
1644년 청에 의해 명나라 멸망.
1936년 청군 홍이포 부대는 남한산성을 공략.
당시 청군 홍이포 부대 유호사거리는 십리(4km)
천자포로 무장한 조선군에게는 큰 충격과 박탈감.
병자호란 청군은 홍이포로 강화도를 한나절 만에 함락.
남한산성 성채를 공격한 홍이포로 인해 전세는 결정된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청군 홍이포 때문에 북벌을 포기.
남한산성 홍이포
병자호란 당시에
청은 명을 치기 위한
군사력 보강을 목적으로.,
조선인 50/60만명을 데려간다.
아무 죄목도 없이 조선인 포로들은
20명씩 굴비처럼 엮어서 끌려간 것.
청군은 귀국하는 길에 닥치는대로 부녀자를 유린했고
청나라 장수들은 양반가 규수들을 몇명씩 첩으로 삼았다.
포로가 탈출해도 조선은 청과 사전 약정에 따라 돌려보냈다.
그래서, 압록강변에는 고향을 지척에 두고
청군에게 붙잡혀와 죽어간 시신들이 즐비했다.
탈출을 시도한 포로들은 아킬레스 건이 끊긴 탓.
남한산성에서의 저항 기록을 담은 <산성일기>에는 60만 명
훗날에 정약용은 《비어고》에 60만 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병자호란 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청나라에 잡혀갔을까?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가 항복 후, 궁궐을 향해 가자.,백성 포로들이 절규.
그당시 조선인 포로 중 여자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역사 상, 이렇게 많은 여인이 포로로 끌려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문서에
포로 수가 얼마인지는 공식적으로 기록하지 못해서 알 수 없다.
청 측이 조선의 병자호란 피해 실태를
일절 조사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포로들의 종착지는 청나라 수도 심양.
한양에서 1660리 먼길을 한겨울에 끌려다니면서
언살에 말채찍으로 맞아 살이 벗겨지고 피나기 일쑤.
가는 길에 추위와 기아로 주검이 수두룩하게 쌓였고
청나라 병사가 활쏘기 연습할 때 과녁으로도 쓰여졌다.
청군은 모자란 만큼 포로를 다시 잡아들이면서 행진했다.
조선인 포로 숫자가 워낙 많아 하루 30리 정도씩 행군
심양까지 60일이나 걸려 그들의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청나라는 조선인 포로를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피로인은 포로와는 개념이 다른 민간인 인질을 뜻한다.
조선 여인들이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청군 병영에서 시중들며 군사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다.
이에 항거하면 죽임을 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오랑캐’에게 붙잡혀 수모를 격었으니 그 수치심은 더욱 컸다.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 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 - 장약용 著《비어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포로가 된 것 자체가 치욕스러웠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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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해 남자들은 명 전쟁터에 징병.
철을 다룰 줄 아는 기술자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을 받았다.
재색이 뛰어난 여인들은 궁중에 그밖에 남자들은 농장 머슴.
그외 여자들은 첩 또는 창부로 노예시장에서 매매.
특히, 첩이 된 조선 여자 문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거리.
만주족 본처들이 조선인 첩을 질투하여 끓는 물을 부으며 폭행.
청태종은 그런 본처들은 순장을 시키겠다고 엄포.
심양에서 탈출하여 압록강을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청나라는 이들을 ‘주회인’이라고 불렀고 조약에 따라 조선은
이들을 청나라로 되돌려보내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당했다.
1644년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베이징으로 수도 이전, 심양은 제2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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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3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 9년 만에 귀국.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 피로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청은 포로를 전리품으로 보고 속전을 받고 풀어주었다.
그당시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냥 내지 30냥이었지만,
통상 150~250냥, 신분에 따라 1,500냥에 이르기도 했다.
그때부터 조선은 청나라에 공물을 바치는 한편
포로 속환을 위해 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어야 했다.
사대부가 환향녀에 대한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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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임진왜란 상흔에서 겨우 벗어날 조짐을 보였던
조선의 정치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먹고 살기 힘드니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가족도 반갑지 않았다.
호로자식이니 화냥년이니 하는 막말도 바로 그시대의 산물이었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10년 동안 조선에 환속한 여인은
2만 5000명에서 5만 명으로 추정되며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 피로인 여성 중 2/3 이상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은.,3만5천명.
그 여인들 중에서 1만 명 이상이 꿈에 그립던 고향에 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날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환향녀 대부분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정에서 쫓겨나고
가문에서 소외되어 갈곳 조차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그 누구도 일거리조차 주지 않기에.,몸을 파는 "화냥년" 신세.
굶어죽지 않으려고 몸을 팔면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거나.,자살.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그 여인들은 냉대 속에 목을 매거나 절벽에서 투신했고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는 경우 기생이 되거나, 심지어는
그 지옥과 같은 청나라로 다시 되돌아가는 비운을 겪었다.
<병자호란> 전설의 고향.,북한산 '사모바위'
한 청년이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로 끌려갔다는 슬픈 소식을 접한다.
그 여인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많은 여인들이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 환향녀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홍제천에서 몸을 씻었다.
청년은 홍제천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여인을 찾을 수 없었다.
청년은 북한산에 올라가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끝내 그 여인이 돌아오지 않자 청년은 그 자리에서 바위로 변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그곳 큰바위를 '사모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1649년(인조 27)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인조가 의식을 잃었다.
세자가 달려와 약지를 깨물어 입에 피를 흘려넣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옹색한 55세 평생을 상기한다면 누구도 깨어나지 않길 바랐을 것.
인조( 1595-1649, 재위 1623~1649 ).
광해군( 1575-1641, 재위1608∼1623 ).
인조는 삼촌 광해군보다 8년 더 살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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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2016.11. 9. 관리기관 경기문화재단이 경기도지사로 변경.
남한산성은 백제 문화유산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문화재.
BC 18년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
한산 부아악에 올라.,처음 도읍지를 정한 곳은
'우이동~마들평야 중량천~ 강북 미아 4거리'일대.
한산 부아악 (서울 인수봉)
그로부터,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 두 거점을 확보.
몽촌토성, 풍납토성, 아차산성 등 영역을 넓혀나간듯.
하남위례성 위치는 아직도 사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
'백제 초부터 475년까지
수도였다는.,하남위례성.'
.......................하남 위례성....................
위례는 '한성시대 백제도성' 위례성을 의미한다.
그 명칭의 유래는 한강을 가리키는 아리수(阿利水)·
욱리하(郁利河)의 ‘아리’·‘욱리’에서 기원하였다는 설.
‘아리’·‘욱리’는., 모두 크다 '大'.,대성(大城)의 뜻.
그리고,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어라하(於羅瑕)’
‘어라’는 왕성(王城)., ‘우리’는 울타리(성곽)에서 기원.
백제의 위례성은 한강을 기준으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
두 도성은 별개 도성이 아닌 하나의 도성(都城).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부여계(夫餘系)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건국.
백제 건국 근거지가 위례성이라고 하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하남 북쪽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
"이들은 건국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므로.,이들이 처음 정착한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었을 것.
하북위례성에서 다시 한강 남쪽으로 천도한 곳이.,하남위례성.
고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천도 시기는 BC 6년(온조왕 13)
실제는 그보다 후대의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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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숭렬전(崇烈殿)
남한산성 온조 사당.,숭렬전(경기 유형문화재 제2호).
1625년(인조 3)에 왕명으로 지은.,조선 후기 사당(祠堂).
백제 시조인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던 건물,
'남한산성 건립 감독관' 이서(李曙)도 뒷날 함께 배향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군 폭격으로 소실.
1638년(인조 16) 왕명으로 숭렬전이 복원 완공되었다.
1795년(정조19) 명에 따라 해마다 음 9월 5일 숭렬전 제향.
.......................정조19년(1795).,조선 실록.....................
"역대 임금을 제사 지내는 곳에는 모두 전호(殿號)가 있으니,
기자.,숭인전(崇仁殿). 단군,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
신라시조 숭덕전(崇德殿), 고려시조의 숭의전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런데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까지도 전호가 없으니,
이는 흠이 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공적이거나 사적인 문서에서
이름을 임시로 부르니 이보다 더 무례한 일이 없다. 깨닫고 난 뒤에는
즉시, 바로잡아야 하니, 숭렬전으로 칭호하고, 《문헌비고(文獻備考)》,
《대전통편(大典通編)》, 《오례의(五禮儀)》 등의 책을 즉시 수정 보완하라.
마침 연석에 나온 일로 인하여 하교하였으니,
숭렬전의 편액은 이 판중추부사가 쓰고, 편액을 거는 날에
수신을 보내 치제하게 하라. 제문(祭文)은 친히 짓겠다 - 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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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숭렬전 제향(매년 음 9월 5일).
1798년(정조22)에 행궁 정문 한남루(漢南樓) 신축.
1909년 한남루는 이미 완전하게 붕괴된 상태였는데
1890년대 프랑스 외교관 프랑뎅이 찍은.,한남루 사진.
남한산성., 행궁 & 한남루.
남한산성은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문화재이며.
'세계문화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역사, 학문적으로 세계적 가치가 있는.,인류 문화유산.
우리나라 역사의 관점에만 국한되지 않는 문화재이며
인류 문화유산 관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문화재.
그러므로, 세계사 관점에서도 남한산성을 인식해야 한다.
남한산성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시기는 백제시대
백제 토기 파편과 신라시대 거대한 건물 터가 발견된 것.
남한산성의 축성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이곳 옹성(甕城)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문보호를 위해
또 한겹 성벽을 더 둘러쌓아 이중 성곽을 만든.,군사 시설.
반월형 ㄷ형으로 쌓아 중국에서는 월성(月城)이라고 부른다.
옹성(雍城)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수도였고,
현재, 중국 산시성 바오지 시 펑샹현에 위치한다.
BC 677년~ BC 383 수도였다가., 악양(櫟陽) 천도.
만리장성.,월성(月城)
만리장성.,산해관(월성)
월성(月城)은 진나라(秦 : BC 221년 ~ BC 206년)에서 유래.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에 통일한 중국 최초 통일국가.,진(秦).
산시성 진 백작국이며, 국호는 초기 중심지 진(秦) 땅에서 비롯.
BC 3세기 진나라는 주나라 및 전국 칠웅을 멸망시키고 통일.
진나라는 무역 증진, 농업발전, 치안강화로 중앙집권정치 강화.
이는 만리장성과 같은 대형 공사들을 할 수 있게 된 토대가 되었다.
만리장성(길이 2,700㎞)은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까지 합치면 약 5,000~6000㎞에 이르는.,장성.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10년간 모두 쌓은 것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중국의 여러 제후의 나라들에서
자주 국방을 위해 국경선에 쌓은 장성들을 모두 이은 것.
진시황이 국력을 기울여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사서에는 실크로드 상에서 유목민들이
사냥 목축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남의 것을 강탈해
백정 같이 극악무도하고 사악한 놈들이라 하여.,흉노.
실크로드가 열린 전한(前漢 : BC 206~AD 25)
흉노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빈번히 중국을 침입했고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이 훗날 만리장성.
제나라 장성은 산동반도 낭야산에서 태산 방향으로
초나라 장성은 여수(汝水)에서 한수에 걸쳐 쌓았던 것.
특히, 진 조 연 3국은 북쪽 흉노 침입을 막으려 각각 축성.
황하 중류의 이른바 중원에 가까운 위나라도 장성을 쌓았다.
천하가 통일되자 이같은 장성은 오히려 교통을 방해할 뿐.
오히려, 불필요한 곳에 장성들은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
그러나, 천하통일 시황제도 흉노 때문에 장성들을 철거할 수 없었다.
.........................흉노(匈奴)..................
진나라 말에 흉노족은 몽골 전지역을 지배하고,
동투르키스탄 일대 오아시스 국가들을 모두 다 지배.
오늘날에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고대 유목국가' 흉노.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
한나라가 흉노를 위협했지만
오히려, 군비 과다 지출로 피폐.
흉노 경제기반은 양, 말, 소, 등 방목형 목축업이었고,
국가체제는 부족연합체로서, 1년에 3번 선우 지휘 아래
모든 부족장이 모여 국사를 논했으며 아버지나 형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 형 처첩들과 결혼.
BC 318년 흉노는 중국 전국시대의 제후국인
한(韓)·위(魏)·조(趙)와 함께 진을 공격하였으며,
그뒤 진나라를 빈번히 침입해 만리장성을 쌓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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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재위 32년에 장수 몽염(蒙恬)을 불러
군사 30만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한다.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약 1만리 대공사.
이 공사를 위해 군사들은 노숙을 해야 했고
몽염은 10년간 상군(上郡)에서 나오지 못했다.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은 후, 4년 만에 멸망했다.
진 시황제(秦始皇帝 : BC 259년 1.~ BC 210. 음 7.22)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
BC 246년 ~BC 210년 재위하는 동안에
BC 246년 ~BC 241년 여불위가 섭정했고
BC 241년 ~BC 210년 죽을 때까지 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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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는 짧은 존속 시간에도 불구하고,
중국(中國) 역사 전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진(秦)' 영문화 과정에서 유래된 국명.,"China".
9세기 무렵에는 당나라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온 이슬람 상인들.
흉노를 대신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고,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홍해~카이로~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발전.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무역이 활발해지자
'육상 실크로드' 상 주변 국가들은 점점 쇠퇴했다.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패권다툼이 치열했던.,삼국시대.
황하강과 양자강 하구는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일년에도 몇차례 하구가 바뀔 만큼., 홍수 침수 다발지역.
동아시아에서 안정된 해상무역 항구가 많은 곳은 한반도 뿐.
그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3국은 경쟁적으로.,남진 정책을 전개.
중국 육상 실크로드가 쇄퇴해 간 때문.
우리나라 삼국시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던.,백제.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로서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소서노 집단에 의해, 현재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
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8월 29일)는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인 백제국으로 시작해,
4세기 중엽에는 근초고왕 때 마한 전체를 통일했다.
4세기 중반 전성기에는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가 영역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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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한눈에 보이는.,강북 & 강남.
남한산성에서 한강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보이고
강남으로는.,송파(삼전도) 롯데 123층 빌딩의 불빛.
'오늘날, "강남" "강북"은 언제부터 유래된걸까?'
'병자호란 삼전도'.,석촌호수.
백제 유적지., 몽촌토성.
백제 유적지.,풍납토성
백제 유적지.,아차산성.
..........아차산성(아단성 : 사적 제234호)............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삼국시대.,아차산성.
아차산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문지, 수구터 만 있고.,장한성, 광장성으로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침략에 대비
백제가 축조한 '아단성'으로 볼 수 있다.
한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이용해
한강 선박 움직임을 포착해 왕성으로 연락하는 진성.
475년 고구려군에게 백제 개로왕이 붙잡혀 죽은 곳이다.
그리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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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강 수로를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
조선시대 한강의 나루터마다 군사요충지.
오늘날, 한강다리가 놓인 곳마다.,옛 나루터.
두물머리(양수리).,황포돗대.
한강 수로는 내륙 깊숙히 들어갈 수도 있고
강화도를 거쳐 인천앞바다로 나갈 수도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이.,양수리.
양수리에서 바라본.,검단산.
검단산(657m)은 하남시 동쪽 한경변에 솟아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예봉산(禮峰山 : 679m)과 마주한다.
백제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은거한데서 유래된 지명 검단산.
또한,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이
이곳에서 검사받고 단속하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성남시 청량산 남한산성 남쪽 검단산 정상부에 옹성 하나.
남한산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통과해야 만 하고,
성문 밖으로 나와 있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시설물.
'북한강 & 남한강'이 한눈에 보이는.,검단산 정상.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검단산(657m).
청량산(479.9m)과 함께 광주산맥 지맥으로 남한산성과 연결.
검단산~ 용마산~ 남한산성 벌봉으로., 연계한 산행이 가능하다.
천호역 6번출구에서 30-3 버스에 승차 후 검단산입구에서 하차
애니매이션 고교 우측 도로를 따라 200m 직진하면 주차장이 두개.
두번째 노상주차장을 지나, 좌측 유길준묘로 오르는., 검단산 등산로.
벌봉(512.2m) 정상은 남한산성 안 수어장대보다 높아
남한산성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청군이 산성 안 동태를 훤히 살피며.,화포.공격.
청군이 남한산성 성곽 일부를 무너뜨린.,공격 루트.
1636년 12월에 발생한 병자호란 이듬해.,음력 1월 23일.
화포공격 일주일 후인.,음력 1월 30일에 인조는 항복한다.
남한산성 암문 밖에서 바라보면,
벌 같이 생긴.,바위 봉우리가 벌봉.
벌봉.,옹성.
남한산성.,암문,
남한산성에는 5개 옹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남쪽으로 3 동쪽과 북쪽으로 각각 1씩 옹성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설치.
남한산성 남쪽 사면.,옹성 3개소.
남쪽의 경우는 다른 사면에 비하여 경사가 완만하고
검복리와 불당리 계곡을 통한 공격이나 검단산(534.7m)을
통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3개소에 걸쳐 옹성이 축조되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남한산성은 한강변 강북 아차산 일대와
더 북쪽 불암산, 인왕산까지도 조망이 가능.
남한산 서북쪽은 백제 중심지.
풍납동, 방이동. 몽촌토성 일대.
동북쪽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6세기 이후 한산주 광주 읍치가 있었던
이성산성이 있는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다.
이들 역사 유적들은 남한산성으로부터
직선거리 5~6 km로., 징검다리식 위치.
(최근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 성벽과 건물터 등.)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 청량산(497.9m) 중심으로)
(북쪽 연주봉(467.6m), 동쪽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확장하여 성벽을 축성.)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
(3개 외성과 5개 옹성도 함께 연결해 견고한 방어망 구축.)
(일장산(日長山)은 서울과 하남에 걸친 산.)
(남한산성이 위치한 청량산(淸凉山)의 옛 이름. )
(조선시대 남한산성 행궁과 수어장대 등이 있다.)
수어장대.
1624년 인조가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에 공사를 마쳤는데 4문과 16암문, 성가퀴 1,897개, 옹성,
성랑, 우물, 샘 등 시설공사는 승려 각성이 8도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
7 절을 지었는데 장경사 만 남아 있고,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남한산성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며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
현재 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 돈대·보 등
방어시설과 비밀통로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 시설 등.
1963년 사적 제57호 지정,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다음 백과에서., 발췌...............................
오늘날, 남한산성을 재정비하여 복원된 형태는
조선시대 인조와 숙종때 있었던 시설을 중심으로
병자호란에 주로 촛점을 두고 남한산성을 재현한 것.
'2001년~2002년' 토지박물관에서 남한산성 행궁터를 발굴조사.
백제 유적으로 보이는 수혈과 화덕자리 그리고 토기조각들이 출토.
주민이 살았음을 알 수 있으나 도읍이라 단정지을 수 없으며, 연구 중.
아직도 산성 안에 묻혀있는 백제 유물들.
산성 안 땅속에 파묻힌채 잠든 역사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수정되고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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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수어청이 수도 외곽인 남한산성 담당.
승군은 남한산성 내 9개 사찰에서 주재하며 산성 내 수비 담당.
사찰에는 무기 탄약을 보관하는 병기고와 화약고가 설치되었다.
산성 수축후 산성 수어청 운영재원은 하삼도 조세 일부를 비축.
한강수로 조세미는 창모루와 둔지나루터에 하역후 마차 등짐으로
사창리를 통해 운반 비축했고 산성내 토지 대동미는 산성 안에 비축.
정조 때 수어청의 병졸은 2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
화기 또한 중앙의 여러 군부 가운데 가장 많았다.
산성 내 군량미 또한 5만에서 8만 석에 이르렀다.
남한산성 운영에는 승군의 역할 또한 지대하였다.
6도 사찰에서 차출되어., 매년 2개월씩 수성 의무.
이들은 성안의 9개 사찰에 머물며 비상시에는 전투.
한편, 군량미의 수송, 성곽 축조와 보수, 둔전의 개간,
무기의 제작, 시신의 수습과 같은 중대한 임무를 수행.
종교의식 수행, 서책의 인쇄와 같은 기타 잡역에도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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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내., 면적 : 528,460㎡
북한산성 내., 면적 : 54만 3795㎡
두 곳 산성은 역사적인 공통점이 많다.
................................북한산성.....................................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도성으로 삼았을 때.,도성 북쪽의 방어성.
132년(개루왕 5) 고구려·신라 사이 접경지여서 삼국이 번갈아 점유.
백제는 이곳에 주력군을 머물게 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는데,
특히 근초고왕(346∼375) 때는 북정군(北征軍)의 중심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에 북한산성을 포위.
함락시킨 뒤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도성을 빼앗았다.
그후, 백제는 공주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와 힘을 합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그뒤 신라는 553년(진흥왕 14)
백제 영토인 한성 일대를 점령.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다.
하지만, 고구려는 603년(영양왕 14) 8월에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포위.
신라 진평왕은 친히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
661년(무열왕 8) 5월에도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인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북한산성을 20일간 포위.
이때 성주 동타천(冬陀川)은 2,800 군민과 필사적으로 방어.
당시 신라는 백제부흥군의 연이은 공격을 받았으므로,
고구려에게 북한산성을 빼앗기면 한강 주도권을 잃을 위기.
신라 무열왕은 승전에 대한 보상으로., 성주 동타천의 관등을
제12관등 대사(大舍)에서 제10관등 대나마(大奈麻)로 승급시킨다.
고려시대에도 북한산성은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곧 고려 현종 때 거란 말갈족이 고려를 침입하자, 현종은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건물을 증축.
1232년(고종 19)에 고려군은 이곳에서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
1387년(우왕 13) 산성을 고쳐 쌓았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이 연이어 일어나자
북한산성을 도성 외곽산성으로 쌓자는 의논이 빈번.
1659년(효종 10)에는 왕이 송시열에게 명하여 고쳐 쌓았다.
1711년(숙종 37) 대대적 축성공사로 둘레 7,620보 성벽 완성
1712년 130칸 규모의 행궁(行宮)과 140칸 군창(軍倉)도 건립.
성 안에는 승군이 머물도록 136칸 중흥사(重興寺)를 비롯
사찰 12곳을 두었고, 99곳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산성에는 삼국시대 흙으로 된 성벽이 약간 남아 있다.
하지만, 조선 숙종 때 쌓은 성벽 대부분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이 무너진채
잘 남아 있고, 대서문과 함께 행궁터·장대터·우물터·
건물터로 추정되는 시설들 일부가 확인 복원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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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을축년 대홍수 전.,북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내는 암릉 지대가 많아
가용 면적은 남한산성이 더 넓은 편이다.
두 산성을 둘러보면, 규모는 비슷한듯 보인다.
남한산성 성곽 내 둘레길은 걷기 편한 편이고
북한산성 12성문 내 둘레길은 험란한 곳이 많아
남한산성 등산로는 겨울에도 누구나 즐겨 찾는다.
남한산성 등산로는.,1코스(3.2km)가 약 1시간 20분 도보거리.
산성로타리~북문~서문~ 수어장대~영춘천~남문~산성로타리.
가장 긴 5코스(7.7km)가 남한산성 내 둘레길.,약 3시간 20분 소요.
2코스 2.9km 1시간 : 산성로타리 ~수어장대~ 산성로타리
3코스 5.7km 2시간 : 산성로타리 ~ 동문~ 북문~산성로타리.
4코스3.8 km 1시간 20분 : 산성로타리 ~남문~ 동문~산성로타리.
남한산성 로타리 주차장
1일 주차요금.,1천원(선불).
남한 산성 내부는 높이 400m 정도의 고위평탄면으로,
일시적인 방어 요새로만 기능하는 다른 산성과는 달리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광주군청이 설치된 지역 중심지.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토기 파편과 신라 건물 터로 볼 때,
적어도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일시적 농성전용 요새로 사용.
남한산에 본격적으로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시대 산성 축성때, 성내로 촌락을 이전하면서부터였다.
세계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문화재를 말한다.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뛰어난 보편 세계적 가치를 갖고 있는
인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지정.
한국에는 2015년 7월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포함하여
총 12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세계유산 등재기준 10가지 중 ‘특정기간 문화권 내
건축, 기술 발전, 도시계획, 인류의 중요한 교류 증거’,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증거에 충족해야 한다.
백제역사유적지구.,익산 미륵사지, 부여 정림사지,
공주 공산성,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나성, 익산 왕궁리 유적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우리나라는
종묘(1995), 불국사와 석굴암(1995), 해인사장경판전(1995),
수원화성(1997), 창덕궁(1997), 519년 간 조선왕릉 40기 (2009),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지역고인돌 유적(2000),
안동 하회마을(2010), 남한산성(2014)., 총 12건 세계문화유산 등재국.
필자 견해로는., 남한산성은 백제 초.,하남위례성.
고구려 후기에 고조선 도읍에 축성한 도성이.,평양성.
주몽과 소서노 세력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은 졸본성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최초의 수도인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것은 서기 3년(유리왕 22).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다.
한때 국내성이 어느 곳인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길림성 집안현 통구성(通溝城)으로 보는 것이 통설.
성은 압록강 우안(右岸) 통구 분지 서쪽 끝에 있는데
성문은 남북에 각각 하나, 동서에 각각 둘, 합계 여섯 곳.
성문에는 모두 옹문이 있고, 동·북 두 면에 성지(城池)가 있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角樓)터가 있고,
40m 거리를 두고 치(雉)가 설치되어 있으며
석축성이 축조되기 전에 토성(土城)이 존재했다.
서기 3년 고구려는 국내성 천도부터
427년(장수왕 15) 평양 천도(平壤遷都).
국내성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평양· 한성(북한산)과 더불어 고구려 삼경.
645년(보장왕 4) 당군에게 포위당한 요동성을 구원하는데
신성(新城)과 국내성 군사 4만 명이 동원되었던 점으로 보아,
여전히 국내성은 고구려 정치·군사적 중심지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 최고 귀족의 분묘로 여겨지는 벽화고분이
평양과 국내성 일대에 집중분포되어 국내성 비중을 짐작케한다.
그러므로,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 일대는 모두 고구려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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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는 고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국경이 바뀌고, 정권교체 때마다.,승자의 기록.
오늘날, 졸본성은.,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졸본성은 중국 랴오닝성 동북쪽 환인현(桓仁縣)에 위치.
현재, 환인현의 면적은 3,547 km², 인구는 약 30만 명이다.
주몽이 고구려 건국 후 첫도읍' 졸본성(卒本城)이., 환인현.
'현재, 환인현이 중국에 있다.'고 하여
고구려 졸본성이 중국의 역사는 아니다.
고구려는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주몽에 의해 건국된 나라.
무예를 숭상한 나라로,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다.
2004년 무용총을 비롯항 고구려 고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고분 내부의 오른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 벽에는 검정색 말을 탄 사람과 무용하는 사람들.
무용 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이 고분은 무용총이라 명명.
중국 길림성 '고구려 무용총' 벽화 속에.,오봉도.
조선시대 519년간 역대 왕의 상징.,일월오봉도.
'조선왕조 국가 브랜드'.,일월오봉도.
길림성., 고구려 고분군.
평양성은 북한 국보 제1호이며.,고구려 도성.
평양 중구역과 모란봉 구역에 걸쳐져 있으며
6세기 중엽에 완성된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성.
내성(內城), 북성(北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등
현재, 4개의 성과 문지(門址)·건물 터 등이 남아 있다.
...................................평양성.........................
평양성은 대동문, 보통문, 을밀대, 부벽루, 연광정 등
평양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427년(장수왕 15) 남진정책에 따라 도성을 평양성으로 이전.
이때 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성(安鶴宮城)을 가리킨다.
고구려는 586년까지 이용했으며 대성산성은 평양 중심지에서
동북쪽 12㎞ 을지봉을 비롯 6개 봉우리를 연결한.,포곡식 산성.
성벽의 둘레는 9.2㎞로서 동서가 긴 타원형의 대규모 성곽이다.
성벽 구조는 바깥에 돌을 쌓고 안에 흙을 채워 축조.
성벽의 요소마다 치(雉)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주작봉 성벽 하부에는 가공석을 사용,
상부로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했다.
성에는 정문인 남문을 비롯하여 성벽을 따라 문터가 19개소.
1978년 복원된 남문과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
중층 누각 형태로 성안에 두곳 큰계곡이 있으며 170여 개소 연못.
국왕이 상주하는 궁성으로 발굴결과 52개소의 건물.
즉 안학궁은 대성산 기슭에 위치한 궁궐로
남북 및 동서 길이가 약 620m의 네모난 평면.
이곳에 궁성을 쌓고 그 안에 남북 방향의 3개 축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했는데 즉 산성인 대성산성과
평지성인 안학궁성이 평양성의 한 단위로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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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평양성도 바로 이곳이라 여겨지며,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패할 때까지 지키던 도성.
586년(평원왕 28) 고구려 도읍을 장안성으로 이전.
성의 구성은 대동문(大同門)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고개를 지나 만수대(萬壽臺) 끝까지는 내성이고,
그 북쪽으로 가장 높은 모란봉(牡丹峰)을 중심으로 북성.
내성 남쪽으로 '대동교(大同橋) ~안산(按山)'까지 중성,
평지로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인 외성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석축인데, 기초 부분과 성벽 부분 사이를 점토와 자갈.
형식 상으로 보아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것으로,
평지인 나성 부분은 일정한 구획을 갖춘 시가지 형성.
대동강과 보통강은 성의 바깥에 있는 자연적 방어선으로,
이러한 유리한 지형에 쌓은 것으로 보아., 고조선 이래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성곽 특징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만수대 부근에서 고구려시대의 건물터가,
보통강 부근에서 고구려시대 성문이 발견되었다.
또한, 문의 신방석[信枋石 : 버팀목을 받친 돌]과 문턱돌.
문턱돌에는 수레바퀴가 다니던 홈이 패어 있어 주목되며,
성벽에서는 축성 때 새긴 석각명(石刻銘)이 몇개 알려졌다.
또, 북성 영명사(永明寺) 옛터에서는
돌계단· 돌사자 조각 및 고구려시대
주춧돌과 기와가 출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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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았을 때
132년(개루왕 5)이 북쪽 방어성으로 쌓은.,북한산성.
북한산성은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위치한.,접경지.
삼국시대 3국이 여러차례 서로 바꾸어가며 점유했고
조선 숙종(1711년)때 고려 중흥산성을 바탕으로 재축성.
오늘날,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불리우는 지명은
조선 숙종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47일간 항전하던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만 4300석, 소금90석 등 50일분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채 남한산성 밑 탄천 부근에 포진했다.
이에 전국 8도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산성 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한 논쟁.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그곳 피신 왕자와 군신들 처자 200여 명이 포로.
고려 때 몽골군 침입에도 40년 동안 버틴 강화도가
한나절 만에 함락되고, 왕자와 빈궁들이 사로잡히자
남한산성에 항전하던 인조도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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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고 청군은 화포를 쏘아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1월 26일 조선 사신이 협상차 청군의 진영에 도착하자
청군은 강화도에서 이미 포로가 된 왕자들을 대면시켰다.
1월 22일 강화도가 한나절 만에 함락된 사실을 그때야 안 것.
이에 조선은 더 이상 성안에서 버틸 힘을 상실.
1월 30일 인조가 47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성밖으로 나가 삼전도에 가서 항복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태종은 높은 단상에 앉아 예를 받았다.
남한산성 서문
1637.1.30. 인조는 삼전도 항복 조인식을 치루기 위해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옷을 입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왔다.
조선왕 인조가 수의를 입고 나오지 않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상으로
성 안에서 끝까지 항전한 패전국의 왕이
목숨을 부지한채 성밖으로 나온 적은.,없는 법.'
인조는 항전 끝에 죽음보다는
치욕적인 '굴욕의 길'을 택한다.
엄동설한에 맨발로 성을 나온 것.
'꽃들의 전쟁' 드라마 속.,인조.
원래, 청나라 장수들 측에서는 반합을 요구.
항복을 하는 의식의 일종인데 죽은 사람 처럼
입에 구슬을 물고 두손을 묶인 채로 빈 관을 끌며
청태종이 있는 삼전도까지 청군에게 압송되길 요구.
그 대신에 항복 조인식은
삼전도 단상 계단을 오르며
한 계단마다.,'삼배고구두례'.
즉, 삼배를 하고 아홉번 계단에 이마를 쥐어박는 .,의식.
다시는 청을 무시하지 않고, 상국으로 모시겠다는.,의식.
병자호란에 패한 인조는 청태종에 감히 대항한.,죄인의 몸.
삼전도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청태종의 귀에까지
인조가 계단에 이마를 쥐어박는 "쿵"소리가 들려야 하는
'삼배고구두례' 항복 의식은 죽음 못지 않은.,굴욕이었다.
남한산성에서부터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맨발로 나와
이마에서는 피가 터졌고 가슴에 피눈물이 절절 흘렀다.
인조는 오직 살기 위해 청태종의 권좌 아래 무릎을 꿇었다.
원래, 서문(西門)은.,죽어 마땅할 죄인 또는 시신 출입문.
인조가 청 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의식이., 삼배고구두례.
원래, 수의를 입고 빈관을 등에 메고나와 항복하는 의식이 반합.'
여진족들에게는 전쟁에서 진 패자가
겪어야만 하는., 전통적인 항복 의식.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
청 맹장 용골대는 반합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청 태종이 한발 뒤로 물러나준 것만도.,천만다행.
인조는 오직 목숨 보존을 위해
청태종의 무리한 요구까지 수용.
곧이어 청나라 맹장 용골대가 청태종이 하사한 선물이라며
짐승 가죽 방한복을 가지고 와서 인조 일행에게 나눠 주었다.
인조는 그것을 입고 청태종 앞에 나가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고,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조정의 고위관료의 아들 혹은 조카들이 청나라로 향하게 하였다.
인조는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조선 제 16대 왕위에.,등극하기는 했지만
청태종이 "광해군을 다시 보위에 앉히겠다."
겁박에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주어야만 했다.
조선의 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봉림대군은 청에 기거하며 지도 제작과 서양 군사기술을 습득.
훗날, 귀국 후 죽은 세자를 대신해 즉위하며.,그가 곧 효종이다.
삼전도비.,굴욕과 수난.
1897년 독립문이 건립된 후.,영은문(迎恩門) 흔적.
구한 말.,영흥문.
병자호란은 조선시대 2대 전란에 속한다.
임진왜란 때는 약 7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루었다.
병자호란은 47일 동안이지만 임진왜란과 맞먹는 피해.
임진왜란 때에는 항복한 일이 없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군신의 맹약을 맺는 치욕이 있었는데 이 호란을 겪으면서
이를 수습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을 주화파라 부른다.
1636년 12월 13일 마침내 병자호란이 터졌다.
조정은 강화도 피란을 준비했지만 호위병들이
다 달아나고, 다음날 적이 양철평(녹번동)까지
처들어오자 최명길이 인조 앞에 나가서 간했다.
“신이 홀로 적장을 마중해 그들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겠습니다.
저들의 뜻이 만약 좋게 하자는 데가 없고 그 사나움을 피할 수 없으면
신은 그 칼 아래 죽으려니와 만약에 신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주객으로 상대하게 되면 오고 가고 실랑이하며 주저하는 사이에
틈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니, 한양 도성에서 가장 가깝고 견고한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시어 형편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소서.”
“그대 홀로 목숨을 걸고 범의 입으로 들어가
임금의 급함을 구하려 하니 가상하다.”- 인조 -
최명길은 청 진영에 가서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물었다.
청군 적장은 화친을 할지 싸울지 빨리 결정하라고 했다.
최명길이 중언부언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해가 저물었고
그사이 인조는 남한산성에 도착하자 화난 청군은 최명길을
죽이려 했지만 사신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여 살아 돌아왔다.
청에서는 사신을 보내 첫 화친을 요구했으나 인조는 거절.
날이 추워가고 성이 고립되자 인조는 청에 국서를 쓰게 했다.
조선은 정묘화약 이후 10년 동안 우의를 지켜왔고, 청에 대해
화살을 겨눈 적이 없으며, 전년에 있었던 몇몇 잘못은 소통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니 용서해 주면 화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청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최명길은 다시 국서를 썼다.
“임진왜란때 명 황제가 군사를 파병해 조선을 구원.
지금 만약 군사를 거두어 나라를 보존토록 해 준다면
그 은혜가 (그때와) 다름이 없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최명길이 한참 국서를 교정하고 있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밖에서 들어와
최명길이 쓴 글을 보고 통곡하며 찢어 버렸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예부터 군사가 성 밑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가 없습니다!”
인조와 대신들이 김상헌의 말에 숙연한 가운데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조용히 주워서 붙였다.
“국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국서를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인조는 끝내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고구두례 치욕을 당했다.
그로 인해 인조는 왕권을 보존했지만, 그 댓가는 너무 컸다.
'화정' 드라마에서.,삼전도의 굴욕.
당시, 청에 전쟁배상금 인질로 끌려간.,약 50만 조선인
1인당.,양반 100냥, 선비 50냥. 백성 5냥으로 약정했다.
그들 중 속전을 물고 돌아온 여인들이 3만5천명이었다.
1636년 병자년(인조 14) 환향녀(還鄕女)는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었다하여 '화냥년' 취급.
환향녀 퍼포먼스
이것이 유교관 조선사회에서 문제가 되자 인조는
이들 환향녀들을 홍제천에서 집단 목욕을 시킨 후
"환향녀의 정절을 거론하면 엄벌에 처하겠다." 어명.
환향녀들이 홍제천에 몸과 마음을 씻게 하고,
더 이상 과거를 묻지 말고 모두 받아들이라는 교지.
그리고, 몸을 씻는 회절강(回節江)을 전국에 지정했다.
그당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
환향녀들이 겪어야했던.,수난사.
홍제천 & 홍지문.
'홍지문'과 성문 옆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사이로 흘러갔을 홍제천.
현재, 홍지문(弘智門)은 숙종 45년 (1719년)에 만든., 탕춘대성 출입문.
환향녀는 한성으로 입성 전에 인조의 명에 따라 홍제천에서 몸을 씻었다.
환향녀.
'홍제천변.,'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은
당시, 환향녀의 비통함을 보았으리라.'
홍제천변.,옥천암 마애보살좌상.
그당시, 속전(贖錢)은 죄를 면하려고 내는 돈.
병자호란의 죄인이 용서를 구하면서 바쳤던.,벌금.
1636년12월부터 이듬해 1월30일까지 항전처.,남한산성.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1903-1950)
.
남한산성 건축물 지수당(池水堂)으로 들어가기 전에
2곳 연못이 있는데 서쪽 연못 정자 '관어정(觀魚亭)'은
제갈량이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살피며 계책을 마련하여
위나라 10만 군사를 물리쳤다는 군사적 의미를 품고 있다.
관어정(觀魚亭)
^.,지수당.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약 8㎞.
자연석 큰돌은 아래로, 작은돌은 위로.,쌓았다.
동서남북 4문과 문루 그리고 장대 & 16암문(暗門).
16암문은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
남한산성.,서문.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
유사시 왕이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총 227칸.
80개 우물, 45개 샘을 만들고 광주읍(광주) 행정처(治所)
산성 축조 이후,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1만 2,700명이었다.
남한산성은 1300여 년에 달하는 긴 역사 속에서
한번도 외세에 함락당한 적이 없는 난공불락 요새.
전세계 인류 역사 상 전무후무한 천연적인 방어 요새.
서울 외곽을 지키는 4대 요새관문 중 하나.
북쪽 개성, 남쪽 수원, 서쪽 강화, 동쪽 광주.
광주 남한산성은 서울 동쪽을 지키는 요새 관문.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태종에게 항복한,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으로 생각하기 쉽다.
인조가 항복한 것은 남한산성이 함락 당해서가 아니다.
남한산성 내에 식량이 떨어졌고
구원병력이 이미 모두 궤멸되었고,
강화도에 피신한 왕자들이 붙잡혀서
이미 포로가 되어 인질이 되었기 때문.
.
산세가 험준해 막강한 청군 공세에도
한달 이상을 성 안에서 버텼던.,조선군.
40여일간 공방전에서 청군은 수차례 대규모 공세.
그러나, 남한산성을 돌파하는데는 끝내 실패했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935 - 6번지.,남한산성.
통일신라가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문무왕 672년 건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비상시 임시수도의 기능.
비록, 산성이지만 조선의 행궁 가운데
종묘와 사직을 둔 유일한 곳.,남한산성
이곳이, 지리적 요충지 임을 대변해준다.
남한산성은 17세기에 극동지역에서 발달한
방어적 군사공학 기술 총체를 구현하고 있다.
서구로부터 유입된 첨단화기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과학적인 설계가 곳곳에 숨어있는 전술 전략적 요충지.
여장은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에 총구를 뚫은 것이 여장(女牆).
남한산성에 설치된 여장은 총 1940타로
1타의 길이는 3~4.5m, 높이는 70~135㎝.
여장 1타에는 3개의 총안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운데 근총안을., 양쪽에 원총안을., 하나씩 설치.
근총안은 근접한 적을 쏘기 위해 아래로 기울인 총구멍
원총안은 먼 곳의 적을 쏘기 위한.,총구멍이다.
남한산성은 성벽 외곽 경사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
근총안은 경사도가 38도, 원총안은 22도 정도를 유지.
이는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수성 효과를 발휘한다
성안에서 적을 공격하고 싶을 때에만 공격할 수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적의 총탄이나 화살을 피할 수 있다.
남한산성을 출입하는 정식 성문은 4개이지만,
이와 별도로 16개 암문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성의 구석진 곳에
설치해 놓은 작은 성문으로서 일종의 비밀 통로.
성안에 필요한 병기와 식량 등 항쟁물자 운반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몰래 구원요청을 하거나
원병을 비밀리에 성내로 받아들여 역습하는 통로.
암문은 많으면 많을수록 방어가 그만큼 어려우므로
최소한 암문만 설치하는데,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 중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하며 암문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동쪽에 위치한 너비 286㎝, 높이 307㎝ 11암문(시구문)이다.
남한산성.,동암문(시구문).
'제11암문' 동암문은 남한산성 암문 중 가장 크다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 남한산성 제11암문이라는 '동암문'이 있다.
원래 이곳 암문은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한 암문이며 적군이 모르게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군의 배후를 공격해 적을 섬멸하기 위한 산성의 전술적 요충지.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 위에 축조.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 보내던 문이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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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수어장대 남서쪽 6 암문은 너비 77㎝, 높이 155㎝.
성인이 서서 지나기도 어려울 만큼 협소해 적의 칩입은 어려우나
성안에서 밖으로 척후병이 나가는 용도에는 가장 알맞은 형태이다.
남한산성에는 5개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다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 성벽이다.
옹성.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설물이다.
남한산성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
남쪽에 옹성이 몰려 있는 것은 북쪽이나 동쪽,
서쪽에 비해 남쪽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
5개 옹성에는 20여 포루를 설치해 화포 공격이 가능.
남한산성은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는 살아 있는 유산.
각종시설이 잘 정비되어 국내 산성 중 시설이 잘 된 곳.
남한산성이 그 많은 전쟁과 풍상을 겪고도
오랜 세월간 성곽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밀은
성벽에 바른 오동나무 기름 때문이라고 밝혀졌다.
미복원 지역의 벽돌을 연구 분석한 결과,
오동나무의 기름인 동유가 검출된 것인데
동유는 습기를 막아주는 방수제 역할을 하고
벽돌에 동유를 첨가하면 성곽이 오래 보존된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설계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며,
산성 건설에 지속적 영향을 미쳤다는 자랑스러운 평가.
삼국시대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남한산성.
그당시 백제의 하북위례성은 오늘날, 북한산성에 해당.
오늘날, "강남"과 "강북"을 수호하는 삼국시대.,백제 토성.
북한산성 동쪽에는
백제 토성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남한산성에도
백제의 토성 흔적이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남한산성., 주장성 유적지
현재, 남한산성에는
통일신라 문무왕 재위 당시
축성한듯한 주장성 유적들이 많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고 주장성은 곧 현재.,남한산성.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주장성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음도 밝혀졌다.
이는 남한산성이 삼국시대에는
전술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대변한다.
삼국시대부터 이곳은 치열한 격전장이었던듯.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이나
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해 항전했다는 것 등.
산성 안에서 발견된 고려 건물터로 보아,
고려 광주성은 곧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도 신라 때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 같다.
그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고쳐 쌓았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1580∼1637)에게 산성 축성을 명령.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남한산성 안으로 옮겼다.
남한산성은 약 1300여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루었으며
묻혀진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일까?
승전국의 역사 속에 가리워진
패전국들의 잃어버린.,역사들.
오늘날, 역사는 대부분 승전국의 일방적인 기록이다.
패자는 승자의 기록 속에서 소멸되는 것이 역사의 흐름.
승자의 기록 속 역사가.,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삼국시대.,대륙백제 설.
"'백제 조상' 동이(東夷)에 삼한(三韓))이 있었으니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
그중 큰나라는 만호, 작은 나라는 수천호.,모두10만호.
백제란 그중 하나였는데 점점 강성해져 모든 나라를 병합.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양서] <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남방 월주에 닿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은 왜국에 이른다.
백제는 동(한반도),서(중국대륙) 두 곳에 서울을 두고있다."
"백제가 망한 후 그땅(한반도,대륙백제)은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해 나눠어졌다."
-[구당서] <백제전>
-[신당서] <백제전>
소서노는 대대로 동북아 해상무역상 가문에서 성장.
그녀 역시 압록강 수계를 오가면서 낙랑 옥계와 무역.
낙랑군과 마한의 절충지대 황해도 남단에 터전을 마련.
그곳을 근거로 서해연안과 내륙 수로를 오가며
한반도 중남부 지역까지 해상무역 범위를 확대.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미추홀에 비류백제를 창건.
남편 주몽이 동명왕으로 등극 후 前부인 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자
48세 나이에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창업
그 이후 소서노는 왜(현재:일본)까지 3국을 창업했다는 야사도 전해온다.
"서로는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 건너 고구려에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 건너 왜(일본)에 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