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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심(菩堤心)의 보리행(菩堤行)---종범스님
보리 행을 닦아 나가는데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어떻게 닦나,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잘 나와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時)에 깊은 반야 바라밀다를 실행할 때에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하고,
도 일체고액(度 一切苦厄)하였나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관자재보살 , 보살도 닦는 보리 행을 닦는 주인공 이지요.
반야 바라밀다를 실행할 때에 무엇을 했느냐.
조견을 했는데요. 밝을 조자, 볼 견자, 밝게 보았다.
조견. 무엇을 밝게 보았느냐.
우리 몸이 오온(五蘊)은 우리 몸입니다. 다 공(空)함을 밝게 보고, 이게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조견입니다. 밝게 보는 것입니다. 또 이 반야바라밀을 관조(觀照)라고 합니다.
본다. 입니다. 볼 관자, 비칠 조자. 보면 되어요. 보는 게 반야(般若)입니다.
이 세상에 보지 못하는 것은 늘 두렵습니다.
중생(衆生)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왜 두렵냐 하면 못 보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환히 보면 안 두렵습니다. 이 생명이 무엇인지 환히 보면 시비가 없습니다.
그러니 못 보는데서 항상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 낮이나 밤이나 똑 같은데 왜 밤이 무섭느냐.
밤은 못 보니깐 요. 훤히 보이는데 겁내라 해도 겁 안냅니다.
그런데 안보이면 무서워하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해도 무서워합니다.
문제는 조견을 하는 것, 밝게 보는 것 이것이 중요 합니다.
이 몸이 다 공함을 밝게 보고 도 일체고액(度一切苦厄) 하였나니라. 일체고액으로 부터 벗어났느니라.
일체고액을 건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몸이 공하다 했는데 공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제법(諸法)의 공상(空相)은 제법은 오온(五蘊)인데
이 몸이 공한 상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증(不垢不淨)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랬어요.
이것이 공(空)입니다.
공(空)이라는 그 의미는 불생불멸이 공이요.
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닌 것이 공이요.
부증불감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 공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몸 그대로가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요.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을 밝게 보았다 이말 입니다.
이렇게 밝게 보고나니까 모든 고통에서 그대로 벗어났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이 몸이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임을 못 본데서 온갖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 이 몸을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니까 공포심(恐怖心)이 생기고, 공포심이 생기니까 악업(惡業)을 짓게 됩니다.
악업을 지으니까 고통(苦痛)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어디를 가다가 바짝 말라서 오래 오래 껍질이 벗겨진 고목나무를 보았는데,
그것을 귀신으로 잘못 보았습니다. 귀신으로 잘 못 보니까 무서워 가지고 도망갑니다.
아! 어두운데 도망가다가 보니까,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래서 깨지고 다치고 합니다.
이것이 중생심(衆生心)입니다.
고목나무를 고목나무로 바로 보면 그것이 반야(般若)인데 귀신으로 잘못 보니까 이것이 망견(妄見)입니다.
정견(正見)을 해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허망(虛妄)하게 잘못 보아요.
이것을 사견(邪見)이요, 망견(妄見)이요, 이것을 번뇌(煩惱)라 그럽니다. 그것이 착각(錯覺)이지요.
착각. 그래서 중생의 허물은 착각, 망견, 사견, 여기에 있습니다.
귀신으로 잘 못 보니까 망견을 가지고 있으니까, 공포심이 생기지요. 그러니 도망가지요. 이것이 업(業)입니다.
이것이 미혹(迷惑)한데서부터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을 지으니까 고통이 생기지요.
천천히 조심조심 해서 가면 어두운 밤이라도 다치지 않을 탠데, 급하게 가니까 넘어지지요.
넘어지니까 다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혹업고(惑業苦)라 합니다.
미혹(迷惑)하고 악업(惡業) 짖고 고통(苦痛) 받고, 잘못 보는데서 끝장납니다.
잘 보면 일이 없어요. 잘못 보니까 일이 생겨요.
옛날에 우리 어머니도 어떤 때 속상하면, 내가 너의 아버지 잘못 만나서 평생 고생했다.
어릴 때에 아버지 편들수도 없고, 어머니 편도 들 수도 없고, 그래서 속으로 내가 생각을 했어요.
왜 아버지를 따라왔느냐 이말 이요.. 안 따라 왔으면 괜찮을 탠데.. 그런 것 아니에요.
내가 누구한테 속았다. 왜 속느냐 이말 입니다. 그것이 망견이요. 허망하게 보는 것이지요.
허망하게 보지 않으면 일이 없어요. 조견(照見), 정견(正見), 진견(眞見)참되게 본다. 이 말씀입니다.
조견하고 정견하고 진견하고 참되게 보면 일이 없는 거에요.
사견 망견 이렇게 보니까 이것이 일이지요.
고목나무를 고목나무로 바로 보면 아무 일이 없는데, 이것을 귀신으로 보니까, 온갖 두려움이 생기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보살(菩薩)이나 부처님이나 그 정견, 반야바라밀, 보리(菩提), 깨달음 그것에 의지해서 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보면 보리살타(菩提薩埵)는 의 반야바라밀다(依般若密多故)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게요. 보살(菩提)이 다른데 의지하는 것 아니에요. 그 지혜(智慧)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등지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요. 지혜로 돌아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세계의 어떤 문제도 지혜로 돌아가면 다 해결 됩니다. 이것을 망견(妄見)과 집착(執着)으로 해결하려니까 안 됩니다.
보리살타가 무엇을 하는 분이냐 하면, 반야 바라밀다를 의지하는 분입니다.
보리살타는 의 반야바라밀다고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심무가애(心無罣碍)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취사(取捨)입니다.
취하고 버리는 것,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이라는 것을 밝게 보니까, 애증취사(愛憎取捨)가 없어요.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 이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량계교(思量計巧)요 번뇌업장(煩惱業障)인데, 중생의 모든 병은 잘못 보는데서 애증(愛憎)과 취사(取捨)에서, 취사가 일어나요, 중생의 모든 병은 애증과 취사가 일어나요. 이것이 병이고 이것이 고통입니다.
이것이 나란히 있는데 이것은 좋아하고 이것은 싫어한다든지 이것은 버리고 취한다든지 이것이 병입니다.
애증취사 이것에 걸리는 것입니다. 일이 없다는 것이에요.
무가애(無罣愛)라는 것은. 애증심(愛憎心), 취사심(取捨心)이 없다.
무가애 무가애고로 그 애증과 취사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되는 거에요.
공포(恐怖)가 없지요. 무유공포(無有恐怖). 이 두려움이란 취사심입니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으면 공포심이 없는 것이지요.
삶을 취하고 죽음을 버리고 이런 것이 없다.
꽃이 왜 두려움이 없느냐 하면 그냥 꽃이 떨어질 뿐이지요.
안 떨어지려고 용을 안 쓰거든요. 그러니 피는 꽃도 꽃이고, 지는 꽃도 꽃이요. 그래서 하나의 봄일 뿐이에요.
그래 태어나는 것도 반야바라밀이요, 죽는 것도 반야바라밀이다. 이것이 해탈(解脫)이거든요.
중생은 그것을 잘 못 보아가지고, 애증심 취사심을 일으키니까,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리니까,
이게 취하는 것이 안취해지면 그냥 두렵거든요. 버리는 것이 안 버려지면 그냥 두려워요. 이것이 다 없어져 버려요.
어떻게 해서 없어지느냐.
밝게 보는데서 없어져요. 무가애가 된다 이 말이지요. 그 무가애 고로 무유공포에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에요.
그 뒤바뀌고 꿈꾸는 세상 같은 그런 생각들이 다 멀리 멀리 달아나 버려요.
그게 무엇이냐.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생각, 이것이 몽상(夢想)이거든요.
꿈꾸면 자기 집에 누워 있는데, 자기 집이 어딘지 모르고, 자기 집 찾는다고 애를 먹거든요.
그것이 몽상 이에요. 그래서 반야바라밀로 보면 일체중생이 다 해탈되어 있는데, 해탈이 다 되어 있는데,
중생이 스스로 그것을 잘 못 보고 해탈을 자꾸 찾으려고 합니다.
반야바라밀로 보면 일체중생이 다 행복한데, 그것을 불행하게 보아놓고 또 행복을 찾아요. 이것이 전도몽상입니다.
봄을 아는 사람에게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전부 봄인데,
봄을 모르는 사람은 꽃은 여기 있는데 봄은 어디 갔나. 꽃 속에서 봄을 찾습니다. 이것이 전도몽상입니다.
이런 것을 다 여위란 말이에요. 또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이 바라밀다고로,
삼세제불은 반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득 아뇩다라삼막삼보리 하나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혜의 완성이 보리(菩提)지요. 보리가 바로 지혜고, 지혜가 보리지요.
이것이 반야바라바라밀이고, 이것이 바로 보리에요.
금강경에서는 삼세제불급(三世諸佛及) 제불(諸佛)아뇩다라삼막삼보리법이 제경차경출(諸經此徑出)이라.
다 이 반야바라바라밀법에서 나왔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이 지혜인데, 이런 지혜를 이루려면 그 지혜를 돕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건강한 것이 최고인데, 건강을 하기 위해서는 밥도 먹어야 되고, 옷도 입어야 되고,
쉬어지기도 해야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그것을 이행(利行)이라 하는데 이로운 행위입니다.
반야바라밀에 이로움을 주는 행위애요. 그것도 조행(助行)이라 할 수도 있어요.
돕는 행위 그것이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이런 것이에요.
보시를 하면 그 반야바라밀을 이롭게 합니다. 이것 저것 보시하는것 대중공양..
이런게 남 돕는게 아니에요. 다 나를 돕는 것이에요.
일반 세속적으로 주고받는 것은 도와준다. 이것이 통하는데,
수행(修行)에 있어서는, 남을 돕는 것은 없어요. 전부가 자리(自利)입니다. 이게 바라밀입니다.
나의 바라밀을 닦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바라밀을 닦는 것이 아니라 이말 입니다.
바라밀은 이 번뇌(煩惱)를 지혜로 바꾸는 것, 중생을 부처로 바꾸는 것,
나중에는 중생도 부처도 없는 자리로 가는 것, 이것이 바라밀이거든요.
처음에는 중생에서 부처로 가고, 그 다음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는 필경 무불급중생으로 갑니다.
병난사람이 처음에는 병원으로 가는데 나중에는 병도 병원도 없는 세계로 가야 되어요. 그것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병은 고쳤는데 아직까지 약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병원에서 퇴원을 하지 못했다면 덜된 것이거든요.
또 성불(成佛)을 하기는 했는데, 아직까지 부처의 틀 속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성불은 아닌 것이에요.
필경 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 이렇게 서원(誓願)을 해요.
마지막에는 불도 중생도 없는 세계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이 서원이 바로 그것이에요.
진짜 건강한 사람은 약도 모릅니다. 몸이 항상 아픈 사람이 약을 그렇게 많이 알더라고요.
어디에는 무어가 좋고 어디엔 무어가 좋고 아주 골치 아픈 사람들이지요. 건강치 못하다는 증거예요.
약(藥)많이 아는 사람은. 약도 몰라야 되어요. 병(病)도 몰라야 되어요. 약도 없는 세계 그것이 진짜 건강한 사람입니다.
부처도 중생도 없는 세계, 필경 무불급중생 그기에 가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인데,
그것을 돕는 게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을 돕는 게 보시바라밀도 반야바라밀을 돕는 것이고 전부 자기를 이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지계(持戒), 계법(戒法)을 지키는 것이 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지요.
계(戒)를 지키면 내가 좋은 것이지, 딴사람이 좋은 것 아니에요.
인욕 참는 것, 참으면 일이 없어요. 모든 일이 안 참는데서 생겼습니다. 참으면 일이 없어요.
참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안 참으면 다 저요. 이것이 인욕바라밀입니다.
한번 참으면 오래 오래 편안합니다. 이것이 진짜 법문이에요.
능음경에서는 참는 것을 아주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어요.
참는 것이 무엇이냐. 비위에 상한 음식이 지금 입에 들어와 있는데,
음식을 확 뱉어도 참는 게 아니고, 급하게 삼켜도 참는 게 아니고, 가만히 딱 물고 있는 것, 그것을 참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불토 불탐이다. 토하지도 않고 삼키지도 않고 삼킬탐자가 있거든요.
그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주 재미있지요. 아주 역한 비위에 아주 역한 음식을 입에 물었어요.
그러면 금방 물마시고 삼킨다든지 그것은 참는 것 아니요. 화닥닥 뱉어내도 참는 것이 아닙니다.
딱 물고 있는 것에요. 한참을 물고 있으면 녹아서 없어 저버립니다. 그러면 이게 뒤탈이 하나도 없습니다.
화닥닥 삼켜도 잘못하면 탈이 나고, 뱉어내도 이것 치우려면 일이 많잖아요.
불토 불탐으로 넉넉잡고 약 삼십 분정도 있으면 그냥 녹아져 버려요.
이것이 인욕이요. 이것이 전부 바라밀입니다.
정진(精進)바라밀 아무리 좋은 선행이라도 오래 오래 끊임없이 해야지 하다말다 그러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선정을 잘 닦아서 안 할일은 멀리하고, 할 일은 집중하고, 원리와 집중 이렇게 멀리 여이고 집중한다.
이것이에요. 안 할일을 멀리 여이지 않으면 삼만 해요.
또 할 일을 집중하지 않으면 능률이 안 올라요.
안할일은 멀리 여위어 버리고 할 일은 집중해서 하면 선정, 선정이 생겨서 "반야바라밀" 이것이 다 돕습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중에서는 선정, 지혜, 정혜가 최고에요. 이것을 화엄경 보살문 명품에서는 육바라밀을 어떻게 설명했는고. 하면,
선정(禪定)과 지혜(知慧) 즉 정혜(定慧)가 왕궁으로 말하면 임금님이라는 것이에요.
왕궁이 있어봐야 소용없지요. 왕이 최고 아닙니까. 그래서 선정 지혜가 왕이라는 것이에요.
인욕 정진이 궁성이고, 성이라 이 말이지요. 보시 지계가 궁울 새우는 기초 터 궁터라는 것이에요.
또 인욕과 정진이 없으면 왕성 도성 성이 없기 때문에 왕궁을 보호할 수가 없잖습니까.
궁터만 있고 임금 없는 도성이 도성인가요. 정혜가 갖추어지면 왕이 왕좌에 있는 겁니다.
왕이 선정을 자꾸 베풀어서 온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겁니다.
열악이라 그래요.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야지요.
반야바라밀 이후에 나타나는 네가지 바라밀 이것이 십바라밀인데 이것이 전부가 보리행입니다.
반야바라밀도 보리행이요, 선정바라밀도 보리행이요,
이게 하나의 깬 마음, 밝은 마음이 일어나면 이렇게 무진장 바라밀행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깨지 못한 마음, 잘못 보는 마음,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면 무진장한 악행 악업이 막 일어나서
중생을 똘똘 뭉쳐서 괴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는 이런 것이에요.
보리심을 닦아 가는 것이 불교이지요. 그 보리심을 닦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그 핵심은 보리심입니다.
선문염송이라고 우리나라 보조스님의 제자 혜심스님이 편집한 것이 있는데 30권입니다.
그 30권중에 제일 첫 번째 제일 첫 번째 나오는 항목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세존이 미리 도솔에 이가왕궁하시고 미출 모태에 도 이이필 하셨도다.
나미 아미타불” 이것이 바로 반야인데요.
선(禪)이 인도선(印度禪)도 있고, 동아시아 선도 있는데, 동아시아 선은 반야선(般若禪)입니다.
반야종이에요. 선종에서 인도선은 선정종이애요.
저 동남아 아시아 쪽에 있는 선은 전부 선정을 중심으로 하는 선입니다.
그런데 달마선 쪽에서는 전부 반야를 중심으로 하는 반야종입니다. 이게 아주 근본이 달라요.
그리고 전통적인 이 달마선 개통에서는 그 근본경이 화엄경이고요,
동남아시아 쪽에서 닦는 그 선의 근본은 아함경입니다. 근본이 다른 것이에요.
반야이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을 반야학자라 하고, 화두학자라 하고, 도학자라 합니다.
선정학자라 하지 않습니다. 반야학, 화두학, 도학 이라 합니다.
화두나 반야나 도가 전부 지혜거든요.
이 지혜의 눈을 뜨고 본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세존이 미리보살에 도솔천에서 옮기기도 아니 했을 적에, 이가왕궁하고, 이미 왕궁에 떡 강림하셨고 이것이 반야에요 ,
미출 모태에 어머니 모태에서 아직 나오지 아니했을 때에 도(度) 이필이라,
사람들을 이미 제도해서 다 마쳤다. 무슨 소리 같아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 참 기가 막히잖아요. 이런 법문이 어디 있어요. 이런 법문을 듣는 것만 하드라도 엄청난 복입니다.
무슨 복으로 이런 법문 와서 듣는지 모르지요. 기가 막히지. 이런 법문 어떻게 들어요.
이런 법문은, 이것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듣지, 모기나 개구리나 이렇게 태어났으면 어떻게 듣습니까. 못 들어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듣고,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절에 와야 듣고, 절에 와서도 법회에 참가해야 듣지, 어떻게 이것 듣습니까.
그리고 절에 와도 너무 바쁘면 법문 못 듣고 그냥 가거든요. 그리고 법문을 들어도 근심걱정이 너무 많으면 안 들려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 들었지요. 이 법문 듣는 사람은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거기다가 복이 더 많은 사람은 몇 일후에 이것을 깨달아요. 이렇게 되는 것에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의 눈이 한번 떠지면 일체의 일이 없는 거예요.
도솔천에서 떠나기 전에 왕궁에 오셨고, 어머니 태에서 나오기 전에 중생제도해서 마쳤다. 이것이 지혜에요.
내가 미혹하고 내가 무지해서 일이 많은 것이지, 실제는 일이 없는 것이에요.
그럼 일이 없으면 무엇을 하느냐, 원력을 새워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일 그게 자비희사입니다.
자비희사. 부처님 사업이에요. 부처님은 지혜하나로 자기문제는 다 해결했고,
그 다음에 할 일은 중생에게 기쁨 주는 일만 남았거든요.
그게 자비희사(慈悲喜捨). 4무량심(4無量心)인데, 그 사랑자자(慈) 자심(慈心)이 무량하고, 비심(悲心)이 무량하고,
희심(喜心) 즐거워하는 마음이 무량하고, 또 어떠한 일을 중생에게 기쁨을 주었어도 다 버려버려요.
남겨놓으면 그것 덜된 것이에요.
그런데 좋은 일을 많이 하드래도 좋은 일을 하는 즉시 그 공덕까지도 다 주어라.
공덕을 내가 붙잡고 있으면, 그것이 다 짐이 되어요. 성인이 아니에요.
가끔 드라마 보면 재미 있는데, 실제 그렇게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들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래요. 키웠으면 그냥 보내버려라. 붙잡고 있지 마라 이것이에요.
시경에 보면 자식은 쑥과 같다.
쑥이 어릴 때는 좋은데 쇄빠지면 못 쓰는 것이에요. 쇈 쑥은 먹으면 쓰기만 해요.
다 고인들의 지혜에요. 자식은 쑥이다 이래요. 자식도 다 키웠으면 보내버려요.
키우기는 키웠는데 보내지를 못해서 병을 얻어 자식 키우고 병들고 그것이 무슨 짓이요.
그러니까 4무량심중에 마지막이 버릴 사(捨)자에요.
자비희(慈悲喜)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마음이 열악(與樂) 이것이 자심이거든요.
중생에게 발고, 고통을 건저주는 마음이 비심이거든요.
희심은 중생의 잘되는 것을 나의 잘되는 것과 똑같이 기뻐하는 마음이 희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이던지 자기가 소유하지 않고, 다 버려버리어요. 그냥 다 버리는 것이요.
하나도 자기가 갖는 것이 없어요.
일체중생에게 기쁨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되, 남겨놓는 마음이 하나도 없어요. 다 주는 것이에요. 다 버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4무량심이에요. 그걸 하는 것이에요.
부처님은 그러니 그런 마음이 건강한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도인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여러 가지 보리행이 필요하다 말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항상 불생불멸을 환히 보고 있어요.
이게 조견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선에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집대성 해 놓은 것이 육조단경이데,
육조단경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면, 그런 말씀이 있어요.
“무사 대열반이 원명상적조로다, 나무아미타불, 겁화소해저하고 풍고산산격이라도 진사적멸락은 열반원상 여시로다,
나무아미타불” 반야바라밀로서 떡 보면, 몸이나 무엇이나 이 세간 온갖 만법이 그대로 무상 대 열반이다 이말이에요.
높고 높은 대열반 세계다. 대열반 그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이요,
지금 우리가 무상 대열반속에 있는 것에요. 그런데 스스로 이것을 잘못 보아서, 만날 죽고 사는 것으로만 본다. 이말 이에요.
열반을 생사로 보는 것이에요. 이것이 법문입니다.
그 육조단경이 조금이라도 중생을 속인일이 있으면 벌써 없어졌지 살아났겠습니까.
그동안 눈 밝은 도인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못살아 남아요. 그걸 알아야 돼요. 이것이 신심이에요.
무상대열반속에서 우리가 잠자고 숨 쉬고 있구나. 이걸 믿는 것이 신심입니다.
그 육조단경이 거짓말 했어봐요, 반야심경이 거짓말 했어봐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아요. 벌써 없어졌습니다.
그리고요, 무상대열반(無常大涅槃)상이에요.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라.
둥글원자, 밝은 명자, 원명 둘글원자는 끝이 없는 것이에요. 명자는 항상 밝은 것이지요.
항상 밝아서 상적조라, 항상 찾아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늘 비추고 있다. 이게 적조(寂照)다. 이것이 마음이에요.
저 요즘에 기가 막히는데, 뇌 과학을 하면 불교 안다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뇌라는 것도 우리 몸이기 때문에 뭐 손이나 발이나 눈이나 같은 것이에요. 물질이라 이란 것이지요.
소도 뇌를 잘 고치면 건강할 수 있고, 소도 뇌가 있고 사람과 똑 같은 것이에요. 반야는 그런 것 아니에요.
반야는 물질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에요. 원이요, 적이요, 둥글 원자 고요할 적자 찾아보면 없어요.
이것을 공공적적이라 합니다.
반야의 첫째특징은 공공적적한 것에요. 두 번째 특징은 소소영영 한다. 이것에요.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워요. 이것을 원명이라 하고 적조라 그래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 물질로 관찰이 되고, 실험으로 관측되는 것은 이것은 몸과 똑 같아요.
몸의 세포나 뇌세포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뇌 과학하면 다 도통하는 줄 알고 아! 이것 웃기지 안 해요.
이것이 미혹망견이요. 부처님이 그것 깨달았은것 같아요.
아! 내 기가 막혀서, 그거 모른단 말이지요.
원명상적조라, 이것이 바로 법문이요. 무상대열반이란 원명상적조라, 둥글고 밝아 가지고 항상 고요하면서 밝게 비춘다.
겁화가 소해저하고 겁화라는 것은 이 지구가 마지막으로 없질 때 일어나는 불인데,
바다 밑을 다 태우고 풍고상상객이라도, 바람이 불어서 산이 서로 부딪치더라도,
진상적멸락은 원명상적조한 무상 대열반에 참되고 항상 하는 적멸낙이라,
생멸 없는 정멸락은 열반상여시라. 열반상은 항상 다름이 없다.
바다 밑이 다 타고, 산과 산이 부딪혀도, 무상대열반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런 것 가르치는 것이 도를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이 도를 배우는 것이에요.
그런데 망상을 가지고 요생각 저생각해서 그것을 불교인줄 알고 그것을 도인줄 알고 어림도 없어요.
그것은 순전히 번뇌업이고 생사업입니다. 번뇌만 자꾸 키우고 생사만 연장할 뿐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되어요.
그럼 정말로 도를 배우려면 번뇌 그런 것을 좍 버려버려야 되어요.
번뇌를 버려라 이말 이에요. 사이 여위여야 되어요. 그리고 도 쪽으로 믿고 행하고 이래야 되지,
번뇌를 버리지 않고 도를 믿지 않고 그 도를 실행하지 않으면, 도를 이룰 수가 있나요.
그래서 중생 업을 버리고, 버린다. 그러니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그런 것 아니어요.
허망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에요. 애증취사심을 버리는 것이에요. 공포심을 버리는 것이에요.
공포심 애증심 취사심 이런 것 다 버리고 오직 도를 믿는다 말이지요.
믿고 실천하면 그것이 보리심이요 그것이 보리행입니다.
서산스님의 법문이 있는데 그 법문 중에 주야는 천개 합이요,
주야 낮과 밤은 하늘이 열렸다 다쳤다 하는거다. 밤과 낮은 하늘이 열고 닫고 하는 거다.
춘추는 지사 생이라, 봄과 가을은 땅이 죽고 나고 하는 것이다. 봄은 땅이 나는 것이고, 가을은 땅이 죽는 거다 이말 이지요.
기게라 자연물이요. 참 상하다. 이 한 물건이여. 반야를 말 하는 것이지요. 상당대광명이라 항상 비추고 있다.
이것이 깨친 분의 법문입니다. 상당 대광명이라. 잠잘 때도 광명을 비추고 있고, 밥을 먹을 때도 광명을 비추고 있고,
갈 때나 올 때나 상당대광명 이것이 바로 가르쳐준 말씀인데요.
여하시 대광명 입니까. 어떤 것이 대광명 입니까? 도인이 말씀하시기를 목전(目前)에 무이초(無異草)다.
눈앞에 다른 풀이 없다. 법문을 듣고 보시를 닦고 지계를 닦고 인욕 선정을 잘 닦는 사람은 바로 깨처요.
바로 손가락으로 바로 가르쳐 준 것이란 말이에요. 가리고 덮고 숨기고 이런 것이 없거든요. 이것이 반야바라밀이에요.
그래 이런 반야바라밀을 잘 닦는 것이 그게 내가 나를 찾는 길이요,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거든요
그러려면 어떻게 하느냐, 여러 가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절을 지극히 해도, 전부 다 그 길이에요.
전부 보리로 가는 길이지 딴 길은 없습니다.
가가문전에 통장안이라. 집집마다 전부 서울로 가는 길이 있다 이말 입니다.
그 경전만 잘 읽어도, 바로 이렇게 보리를 이룰 수가 있고요. 기도만 잘 하셔도 되고요.
하여튼 신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잘 닦으시면 그냥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불교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