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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총림 백양사
백양사유래
백양사는 1400여년전 백제시대의 고찰로 유구한 역사와 주변의 빼어난 경관으로 이름이 높으며 또한 산내 10여개 암자 중 유서 깊은 운문암은 고려시대 때부터 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다만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들이 그러하듯 백양사 역시 창건과 연혁을 전하는 자료가 충분하게 전하지 않는데다 정토사(淨土寺)· 백암사(白巖寺)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존재했던 사찰이기 때문에 그 역사에 관한 서술은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백양사가 언제 창건되었으며, 그 창건주가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다음의 자료를 검토해 본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이 고려말 1337년(우왕 3)에 지었다는 '백암산정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의 일부 내용을 보면, 오직 이 산은 장성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하였으며 암석이 모두 흰 색깔이라서 그렇게 이름 하였다한다. 석벽은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는 중첩하여 맑고 기이하며 웅장한 모습이 실로 이 지역의 명승지가 될 만하므로 신라 때의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白巖寺)로 하였다.
중국 송나라 경평 연간(423~424)에 이르러 정토선원(淨土禪院)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 문도인 중연선사가 이를 이어 전당과 문무, 방장실, 요사 등 80여 칸을 다시 지었다. 중연선사의 문도가 차례로 전해 오다가 일린(一麟)스님이 그 사찰을 주관하여 처음의 법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실린 '백암산정토산교루기'는 백양사의 창건 내용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 여기서 백양사 창건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창건은 신라 때 이루어졌고 창건주는 법명은 알 수 없지만, '이승'이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상당한 이적행(異蹟行)을 해온 승려일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백양사의 창건 때 이름은 '백암사'였으며, 창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토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또한 창건 이후 중연선사와 일린스님에 의해 백양사의 법맥이 계속 이어져 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정도전이 지은 이 자료의 모든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가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특히 백암사에서 정토선원으로 사찰명이 바뀌는 시기가 중국 남송시대인 5세기 초반이라고 서술한 부분은 시기적으로 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불교 공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이며, 더욱이 그 같은 상태에서 신라 스님이 백제 영토에 들어와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양사의 창건주가 신라 스님이었다는 점 그리고 백암사와 정토선원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다. 극렬한 배불론자였던 정도전의 '백암산정토사교루기'가 백양사 창건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또 이 기록은 이후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오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내용이 좀 더 구체화된다.
백양사의 전각들
일주문
일주문은 경내로 들어감을 알리는 첫 문이다. 기둥이 한줄로 되어있다고 해서 일주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백양사는 2층 높이의 우람한 크기 때문에 네 귀에 보조기둥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캠핑장
백양사 경내에 있는 캠핑장으로 현재는 국립공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여름에는 일찍 와야 자리가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고, 겨울 주말에도 캠핑객들로 꽉 차 있다.경내에서 유일하게 취사가 가능 한 곳으로, 전기시설, 화장실, 취사시설을 갖추고 있다.
일광정
일주문과 경내 사이, 그리고 풍경소리라는 경내 상점 앞에 위치하고 있다. 1925년에 건립되었으며 주변 호수를 감상하고, 경내로 들어오는 중간 쉬어감을 위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유형문화재 제43호): 신앙의 중심지로 佛法이 살아 숨 쉬는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으로, 건축양식은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2단의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 중앙으로 계단을 두었고,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대웅전 후불탱화(大雄殿 後佛幀畵)
후불탱화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그리고, 6대 보살과 사천왕 그리고 10대 제자가 3단으로 나뉘어 그려진 영상회상도이다. 장지에 채색을 하였는데 가로 320cm, 세로 350cm이다. 향 좌측 하단에 실린 불화기에 의하면 불기(佛紀) 2949년(1922)에 금어(金魚:탱화제작의 우두머리) 봉영(琫榮)과 재명(再明)이 조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불화는 전체적으로 초록색과 빨강색조로, 약간의 옷자락과 먼 하늘 표현에 청록색을 사용하였다. 중앙의 석가모니는 꽃무늬 단이 달린 빨강색 법의를 입고, 대좌 위에 앉은 모습으로 둥근 얼굴이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두 개의 원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두광은 진한 초록색을 칠하여 부처의 정상 계주에서 발산하는 빛이 잘 드러나도록 하였다. 신광은 중앙 하단에서 부챗살 모양의 파상선을 긋고 선 안쪽에 빨강, 파랑, 초록 등 장식적인 색을 칠하였다. 이것은 조선말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주변의 성중들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일 하단이 가장 크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크기로 배치하여 점점 멀어지게 보이도록 하였다. 제일 하단의 양쪽 끝에 위치한 두 천왕은 갑옷을 입고 매우 건장하게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손의 모습 등이 어색한 편이다. 만암스님은 1916년에 쇠락한 백양사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하여 대중창 불사를 계회하였다. 1926년까지 백양사를 증축하였는데, 그 증축때 이 불화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채색과 구름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기 작품의 특성이 보인다.
팔상탱화 3점(八相幀畵)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
대웅전 십육나한상大雄殿 十六羅漢像
십육나한은 현세에서 정법(正法)을 지키는 16명의 아라한(阿羅漢:수행자의 최고 이상 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양사 대웅전의 십육나한상은 1925년 공시찬(孔施贊)이 조성한 것으로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각각의 나한은 하나의 나무에 조각하여 의복과 표정을 모두 다르게 처리하였다. 얼굴의 주름과 목 힘줄, 웃는 표정과 빠진 이까지 세세하게 묘사하였으며, 옷자락에 비단 무늬까지 섬세하게 그려 넣은 좋은 작품이다.
대웅전 신중탱화
대웅전의 향우 측 정면 벽에 걸린 신중탱화는 가로 210cm, 세로 290cm로 비단에 채색된 그림이다. 이 불화는 대웅전 후불탱화와 함께 1922년에 그려진 것으로, 후불탱화보다 초록색의 사용을 줄이고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여 그렸다. 일반적인 신중탱화와는 달리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왕 등이 상단에 흩어져 크게 그려져 있고, 많은 신중들이 대략 4개의 단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앞의 후불탱화와 마찬가지로 화면 하단부터 그 크기가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하게 작아져서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금어는 봉영(奉榮)이다.
대웅전 독성탱화(大雄殿 獨聖幀畵)
가로 130cm, 세로 158cm의 크기로 장지에 채색하여 그렸다. 1926년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그렸던 금어 봉영(奉榮)과 화사(畵師) 춘화(春化)가 제작하였다. 폭포가 흘러내리는 험준한 바위산이 빽빽이 들어찬 언덕에, 두 동자를 거느린 나반존자가 앉아 있다. 나반존자는 붉은 해무리 모양의 두광을 가지고 있고, 턱밑까지 내려오는 긴 눈썹, 구레나룻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나반존자상(那畔尊者像)
각진국사진영(覺眞國師眞影)
백양사 명부전(冥府殿)
백양사 명부전은 정면5칸 측면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명부전은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는데 지장보살과 십왕(十王)을 모시는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원래 부처의 반열에 오른 보살인데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하여 지옥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한 이유로 보살이지만 관을 쓰지 않고 있으며 손에 궤장이나 법륜을 가지고 있는 경우로 표현된다. 백양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 이외에 지옥을 다스리는 십왕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각자의 지옥을 다스리며 사람의 평생의 선악을 심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백양사 명부전 지하에 납골당인 영각당을 지어 200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시왕(十王)및 사자(使者), 판관(判官)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높이 110cm이고, 폭 77cm로 앉아있는 모습이다. 도명과 무독귀왕은 입상으로 높이 144cm이다. 시왕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높이 150cm이고 지옥사자와 판관은 높이 140cm이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은 목조이고, 시왕상은 소조상으로 만암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때 조성한 것이다. 지장 보살은 승려의 머리 형태를 가지고 얼굴 아랫볼이 부풀어 오르고 목이 거의 없는 모습이다. 손에는 아무런 지물을 들지 않고 아미타인 수인을 결하고 있다.
백양사 극락보전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574년(선조 7) 승려 환응이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극락보전이라는 이름처럼 전각 안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불상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2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양식으로 당당함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성된 불상으로 400여년의 세월동안 백양사와 지역민들과 고락을 함께 해 오셨고 후불탱화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불화로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따르면 백양사 극락전불양계서의 문정왕후빈향축열서(文定王后賓香祝列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건물을 짓는 데 문정왕후가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판에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 씌어 있는데, 이 글씨는 동국진체라 여겨진다.
극락보전 신중탱화(極樂寶殿 神衆幀畵)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상(極樂寶殿 阿彌陀如來像)
진영각, 칠성전(眞影閣, 七星殿)
백양사 진영각, 칠성전은 다른 지역의 진영각 및 칠성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진영각과 칠성전은 독자적인 건물을 갖고 있으나 백양사의 경우에는 하나의 건물로 이어져 있다. 진영각, 칠성전을 전체적으로 보면 정면4칸 측면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진영각이 정면3칸, 칠성전이 1칸을 차지하고 있다. 진영각은 사찰의 조사 및 업적이 높은 고승의 진영을 모시는 곳으로 백양사의 진영각에는 개창자인 여환선사를 중심으로 중연선사와 각진국사 및 30여분의 고승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조사진영(祖師眞影)
백양사에는 만암스님 당시에 대중창을 하면서 많은 조사진영을 새롭게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여환조사와 중연선사, 각진국사 등 세분의 개산조와 대중창주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고, 따로 도의영당에는 한국선종의 시조인 도의국사와 그 문손들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칠성전 칠성상(七星殿 七星像)
보리수
범종과 우화루 사이 키 큰 나무가 한그루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석가모니가 그 나무 아래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보리수이다. 피나무과에 속하는 보리수이며, 불교에서는 신성한 나무로 이 나무의 열매는 염주를 만들때도 쓰인다.
석가8층 석탑
백양사 불사리탑은 대웅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형의 하대석위에 연꽃을 장식한 엔타시스형 석주로 중대석을 삼은 8층 석탑이다. 탑은 본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무덤으로, 홀수 층으로 만드는 것이 정석이나 이 탑은 짝수인 8층으로 되어 있어 불교의 8정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탑은 일본의 홍법(弘法)(774~835)대사가 天竺(지금의 인도북부)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백용성(白龍城)(1864~1940)스님이 모시고 있다가 1924년 만암선사가 백양사에 이를 봉안하여 탑을 세웠다. 탑의 모습이 기존의 석탑과 상이하고 중대석과 탑신의 석재의 재질도 달라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탑이다. 본래 석탑은 대웅전 및 금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이 탑은 대웅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는 탑으로 불상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건립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사리탑비
백양사 대웅전 뒤쪽에는 일본의 흥법(弘法)(774~835)대사가 천축(天竺)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8층탑이 서있다. 그 진신사리가 어떤 경로로 백용성(白龍城)(1854~1940)스님이 모시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24년 만암 스님이 이를 이 곳에 모셨다고 한다.
백양사 불사리탑비는 바로 이 불사리탑을 건립한 연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불사리탑 후면 좌측에 있다. 1924년에 세운 이 비석의 비문은 만암스님이 지었고 글씨는 추사의 해서체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76cm, 폭 76cm, 두께 21.5cm이다.
그런데 이 비의 좌측면에 보면 원래의 위치는 불사리탑 앞에 있었고, 또 비면의 소중한 기문과 방명이 풍우로 금이 가고 마모되어 글자가 심히 훼손되어 개탄을 금치 못해 다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좌측면에 보면 1934년에 다시 세웠다고 하여 불과 10년 사이에 훼손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1945년 복원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 사천왕을 모신 건물로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사용한 절충식 건축물이다.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지키면서 불법 수호와 인간 선악의 관찰, 그리고 사부대중의 보호가 그 임무였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청색으로 칼을, 남방 증장(增長)천왕은 붉은색으로 용을, 서방 광목(廣目)천왕은 백색으로 탑을, 북방 다문(多聞)천왕은 흑색으로 비파를 쥐고 있다.
그리고 툭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 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술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손에는 칼·보탑·창 등을 들고, 발에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 때 발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사찰 입구에 이러한 천왕문을 세운 까닭은 사찰을 외호한다는 뜻이 있다.
일제 강점기 어려운 시절에 만암스님이 사천왕 보수공사를 하자 일본 경찰이 와서 “대동아전쟁에 힘을 집중해야 하는데 왠 불사냐?”하자 “일본이 승리하라고 불사를 한다”하셨다고 한다. 일본 경찰이 가고나자 “실은 조선이 해방되라고 사천왕을 하는데….”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스님의 말씀대로 1945년 8월 14일 회향식을 하고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백양사에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0여 년 동안 사천왕제를 지내고 있다.
사천왕
지국천왕 - 동쪽을 지배
증장천왕 - 남쪽을 지배
광목천왕 - 서쪽을 지배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면서 가을을 관장하고 용과 혈육귀로 불리는 비사사 신을 거느리고 서쪽하늘을 다스린다. 얼굴색은 백색이다. 오른손엔 용을 쥐고 있으며, 왼손엔 여의주를 쥐고 있다.
다문천왕 - 북쪽을 지배
소요대사 부도(보물 1346호)
쌍계루
쌍계루(雙溪樓)는 절의 성보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식이며 백양사의 본 가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누각은 1370년에 붕괴된 이후 1377년에 복구되었으며 이 과정에 정도전, 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특히 1381년에 작성된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에 따르면 이 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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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군
우화루
종각
종(種)은 대법요나 대공사가 있을 때 산중대중을 운집하는 신호로 사용한다. 종은 경전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종을 울리면 108번뇌가 사라지고 종소리를 들을 때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지옥중생이 모두 고통을 쉰다고 한다. 그리하여 새벽에는 28천의 욕계, 색계, 무색계, 천상세계를 여는 의미에서 28번의 종을 치고, 저녁에는 28천상 세계와 인간계, 아수라계, 지옥, 아귀, 축생계를 의미하여 33번의 종을 친다.
백양사의 고승
각엄복구(覺儼復丘)(1270~1355)
각엄스님은 백양사(당시 이름 정토사)를 세 번째로 중창한 스님이다. 법명은 복구(復丘)이고 자호는 무언수(無言)이며 시호는 각진국사(覺眞國師)이다. 1270년 명문대가인 固城 李氏 집안에서 충렬왕 때의 명신 이존비(李尊庇)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1277)에 정토사 주지 일린스님을 따라 불가에 입문하여, 10세에 조계산 수선사 제6세 원오국사 천영(天英)스님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계율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원오국사가 입적하고 그 유촉으로 대선사 도영(道英)스님을 따라 배우게 되었다. 10년 만에 불학에 통달하여 총림에서 대중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
21세에 승과 선선(禪選)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으나 명리에 초연 하여 오로지 산수간에 유유하적하며 수도에만 정진하였다. 일찍이 제2의 스승인 자각국사가 자기의 학인들을 스님에게 맡기자 스님은 “자기에게 얻은 것이 있은 뒤에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사양하였다. 그리고는 백암사(정토사)로 가서 동지 몇 명과 더불어 밤낮으로 참선하기를 십여 년 동안이나 하였다. 월남사와 송광사에도 40여 년 간 주석하며 수선사 제13세 조사로서 대중을 지도하였다.
이때 스님은 일린스님의 뜻을 잊지 않고 문도들의 도움을 받아 정토사를 새롭게 중창하였다. 이 당시 정토사는 몹시 퇴락하여 스님은 문도들과 힘을 합쳐 불전을 다시 세우고 범종과 법고, 승방과 객사 등을 다 갖추었다. 특히 제자이며 당시 백암사 주지인 심백(心白)과 지부(智孚) 등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갖춰 오게 하여 1341년 봄 전장법회를 열고 낙성식을 하였다.
스님은 고려 1350년(충정왕 2) 왕사가 되었고, 1352년(공민왕 원년) 다시 왕사가 되었다. 81세 때인 1350년, 스님은 수선사를 떠나 정토사로 돌아왔다. 그 후 왕명에 따라 불갑사에 주석하며 왕실과 나라를 위해 축원하였다. 1355년 다시 정토사로 돌아왔는데 그 해 여름에 병이 들어 임금에게 하직하는 편지를 부친 뒤 선상(禪床)에 앉아 문도들에게 “곧 마음이고 곧 부처인 강서(江西)의 늙은이며,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물외(物外)의 할아비로다. 날다람쥐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열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구나”라고 열반게를 읊고는 의젓하게 입적하였다. 세속 나이 86세, 법랍은 76세였다. 불갑사에 부도가 있다.
스님은 사람됨이 묵묵하고 맑고 순박하며 단아하고 평화로우며 곧고 정성스러웠다. 입으로는 남의 선악을 말하지 않았고 마음으로는 공경함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을 방장으로 지냈으나 단 한 개의 재물도 갖지 않았다. 스님의 문도들이 선원사·백화산·가지산·마곡사에 걸쳐 천여 명이나 되었다.
벽송지엄(1464~1534)
스님은 만암문집 부록에 실려 있는 ‘백양사의 역대 주지 방함기(芳啣記)’에 제21세 주지로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백양사에 주석했는지 여부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운문암에는 주석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양사운문암창수사적(白羊寺雲門庵創修事蹟)에 “벽송선사가 항상 (이곳을) 삼남 제일의 조도처(助道處)로 여기고 자주 주석하며 도를 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지금의 운문암은 벽송스님이 계실 당시에 ‘미타사(彌陀寺)’라 불리었다고 한다. 스님의 행장은 휴정(休靜)의 ‘벽송당대사행적(碧松堂大師行蹟)’ 등에 기록되어 있다.
스님의 법호는 야로(老)이고 당호는 벽송(碧松)이다. 속성은 宋씨이고 전라도 부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글과 칼을 좋아하였다. 1491년(성종 22) 여진족이 변경에 쳐들어오자 성종은 도원수 허종에게 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그도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 그는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마음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싸움터만 쫓아다녔으니 비록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부질없이 헛된 이름만 탐했을 뿐이로구나’하고 탄식하며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들어가 조징(祖澄)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 때 나이가 28세였다.
스님은 연희(衍熙)스님께 능엄경을 배운 뒤, 황악산(黃岳山) 고자동(古紫洞)에 은거 중이던 벽계정심(碧溪正心)스님을 찾아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묻고 선을 배웠다. 1508년,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에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정진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깨쳤다. 그 후 용문산·오대산·백운산·능가산 등을 두루 돌아다니다 1520년, 지리산에 들어가 초암(나중에 碧松寺)에 살며 누더기 한 벌만 입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두문불출하고 정진하였다. 도를 얻은 뒤에는 제자들에게 경론을 가르쳤다.
1534년 겨울, 여러 제자들을 수국암(壽國庵)에 모아 놓고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크게 한 번 탄식하며 “중생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윤회를 달게 받은 지가 오래므로 수고스럽게도 부처님께서 광명으로 동쪽을 비추시고 입이 아프게 중생들을 깨우치시니 모구다 다 중생을 위해 방편을 베푼 것일 뿐 실상법(實相法)이 아니다. 무릇 모든 것이 적멸상(寂滅相)[실상]은 말로 할 수 없다. 오늘 그대들이 부처님께서 한 마디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믿고 곧바로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친다면 곧 보물창고를 열어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노승 또한 그대들을 위해 적멸상을 보이고 가리니 그대들은 밖으로 향해 찾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로 당부한 뒤 세속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부영영관(芙蓉靈觀)이 법을 이었다.
휴정스님은 지엄스님이 “어두운 거리의 한 촛불이요, 진리의 바다에 외로운 배였다”고 찬탄하였다. 승가에 모범이 된 그의 수행은 당대 최고였다. 그러나 세속인 인사에 신경쓰지 않았기에 세상에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불법을 값싸게 팔지 않았다. 영관(靈觀)·원오(圓悟)·일선(一禪) 등 6~70명의 문도들에게 대승 경론을 가르쳤다.
정관일선(1533~1608)
백양사운문암창수사적(白羊寺雲門庵創修事蹟)에 따르면, 스님은 선조의 며느리이자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가 대시주가 되어 운문암에 탱화를 모실 때 일을 주관한 스님[후불탱화 化主]으로서 백양사 운문암에도 주석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님의 행적은 "조선불교통사" 와 "이조불교" 에 실려 있다.
스님은 충청도 연산 사람이고 속성은 郭씨이다. 15세에 출가한 뒤 백하선운(白霞禪雲)스님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청허휴정(淸虛休靜)스님에게서 법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 스님과 더불어 휴정(休靜)스님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스님들이 의승군으로 참전하는 것을 보고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하며 승가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1608년, 나이 76세, 법랍 61세로 덕유산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임성(任性)·태호(太浩) 등이 있고 저서로는 "정관집(靜觀集)"이 있다.
기허영규(驥虛靈圭)(?~ 1592)
임진왜란 때의 조선 의승장으로서 속성은 밀양 朴씨이고 공주 판치 사람이다. 계룡산 갑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고 그 뒤 휴정 스님 문하에 들어가 법을 얻었다. 그 후 갑사 청련암에 주석하며 참선하는 여가에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일본군이 침략하자 500여 명의 의승군을 규합하여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출전, 그 해 8월 청주를 수복하였다. 이어서 금산에 이르러, 권율의 지원군이 미쳐 오기도 전에 무모하게 왜적을 기습하려는 조헌을 말렸으나 조헌이 듣지 않자, 할 수 없이 함께 왜적과 싸웠다. 중과부적으로 조헌이 먼저 전사하자 스님은 큰 소리로 “조 의병장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어찌 홀로 살아남겠느냐?”하고 외치며 종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스님이 이끌던 의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 사후에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모셔졌다. 200년이 지난 뒤 법도 대인(大仁) 등이 진영각을 금산 남쪽 진락산 기슭에 세우고 진영을 모셨고 나라에서 의선(毅禪)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선조는 그의 유해를 계룡산 아래 서산에 매장하고 그 곁에 충절비각을 세우고 스님의 진영을 모신 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백암사정토사사적기에는 선조의 다섯째 며느리이자 훗날 인조의 어머니가 될 인헌왕후 구씨가 일선(一禪)스님과 영규(靈圭)스님에게 금으로 자신의 원불(願佛) 탱화를 그려 운문암에 모시게 하고 해마다 정초에 왕실을 위해 축원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탱화를 그린 화원(畵員)은 영규(靈圭)스님이고 일을 주관한 후불탱화 화주(化主)는 정관일선(靜觀一禪)스님이었다. 이 사실은 백양사운문암창수사적(白羊寺雲門庵創修事蹟)에 나온다.
이것으로써 영규스님이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탱화에도 뛰어난 스님이었고, 일찍이 운문암에 머무르신 적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임란망혼추원록(壬亂亡魂追遠錄)에도 영규스님이 희묵(希?)·인진(印眞)스님 외 92인의 전몰 의병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세 분의 의승장은 통정대부의병대장(通政大夫義兵大將)으로 추앙받았다. 이 의승장들은 의승군을 일으켜 백양사와 내장사 사이에서 활약하였다. 백양사에는 이 의승장들이 사용했던 승병장인(僧兵將印)이 전해져 오고 있다.
진묵일옥(1562~ 1633)
각진국사·소요대사와 더불어 백양사 삼성(三聖)으로 불리우는 스님은 한 때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했다는 전설이 백양사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만암문집에 실린 ‘백양사의 역대주지 방함기’에도 제24세 주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주석했는지 의심스럽다. 운문암에서 부목처사(負木處士) 또는 공양주(供養主) 노릇을 했다느니 사미(沙彌)시절을 보냈다느니 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모두 스님의 도력(道力)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진묵조사유적고(震?祖師遺蹟攷)에 실려 있는 전북지방의 전승과 흡사하다.
진묵조사유적고에 따르면, 스님이 주석했던 절은 출가한 절인 전주 봉서사와 대원사(大元寺)·일출암·변산 월명암·전주 원등암(遠燈庵)·상운암(上雲庵) 등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지방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운문암에서 주석했다고 하는 백양사의 전설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구전이고, 다만 1627년 知白스님이 운문암을 창건할 때 불상의 증사(證師)로 ‘진목대사 일옥’을 모신 기록이 남아있다. 진묵스님의 행적은 ?진묵조사유적고?를 엮을 당시에도 이미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을 정도인데 어떻게 운문암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알 수 없다. 운문암 불상을 함부로 고쳐 칠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1622년 진묵스님이 완주 송광사와 흥산 무량사의 불상 점안식을 증명하셨을 때 하신 말씀과 똑같은 것으로 보아 후세에 사실을 혼동하여 와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소요대사 태능(1562~ 1649)
스님은 이른바 백양사 삼성(三聖) 중의 한 분으로 전해지며 백양사에 부도가 있고, "만암문집"에 실려 있는 ‘백양사의 역대 쥐 방함기’에는 제26세 주지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스님의 행장에서는 출가 이외에 백양사와 직접 관련된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백양사기적비명(白羊寺紀蹟碑銘)" 에 인조때 소요대사가 다시 절을 중건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나온다. 인조때인 1630년에 스님이 천각(天覺)스님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담양 용추사(龍湫寺)를 중창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출가 본사이고 용추사와 가까운 백양사를 중건했을 가능성은 있다. 스님의 속성은 吳씨이고 전라도 담양 사람이다. 13세 때인 1574년에 백양산(백암산)에 놀러 가 경치를 구경하다가 문득 출가할 뜻이 생겨 백양사에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그 후 부휴(浮休)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웠는데 100여 명의 문도들 중에 운곡충징(雲谷沖徵)·송월응상(松月應祥)스님과 더불어 법문 삼걸(法門 三傑)로 일컬어졌다.
그 후 묘향산에 계시는 휴정(休靜)스님을 찾아가 3년 동안 선(禪)을 배웠다. 휴정스님은 한 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법을 전했다. 스님은 휴정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아 가지고 남쪽으로 편력하며 여러 큰 스님들에게 그 뜻을 물었지만 아는 이가 하나도 없자 다시 휴정스님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휴정스님께 물은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깨치고 마음대로 노닐며 대중들을 지도하며 임제종풍(臨濟宗風)을 떨쳤다. 그래서 편양스님과 더불어 휴정스님 문하의 양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
1592년 왜적이 쳐들어와 휴정스님과 유정스님이 의승군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자 스님은 곧 불전에 재를 올려 승리를 기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의 서쪽 성을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 스님은 또 지리산 신흥사와 연곡사를 창건하였다. 1649년(인조 27), 연곡사에서 게송을 쓰신 뒤, 세속 나이 88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드셨다.
도암인정(1805~1883)
스님의 법명은`백암산정토사사적서(白巖山淨土寺事蹟序)`에는 인정(麟淨), `백양사극락전불랑계서`와`백암산도암당대사행략`에는 인정(印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암산도암당대사행략 에 따르면, 스님은 1805년 장성에서 연안 車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1817년 13세의 나이로 정토사(백양사) 심옥(心沃)스님에게 출가하였고, 1827년 인월(印月0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평생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정진하였고,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널리 배웠다. 1840년 소요태능의 8세 법손(法孫)이며 설담자우(雪潭自優)스님의 증손인 화월(華月)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이 시기에 호남의 절들이 몹시 퇴락하였고 정토사도 마찬가지였는데 스님은 10여 년 동안 정진하여 정토사를 중흥하였다. 1864년 큰 비로 정토사가 폐허가 되자 스님은 쌍계루의 서쪽 터에 정토사를 신축하였다. 중건 불사 후 스님은 백학봉 석실(석굴)에서 1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그 후 운문암과 천진암에서 몇 년 동안 수행하다가 1883년, 세속 나이 79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경담서관(鏡潭瑞寬) (1824~1904)
스님은 능엄경을 읽다가 ‘그 본질을 갈라 버리고 그 보조 원인을 없애며 그 업을 피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으러 깊이 자성(自省)하는 마음을 내고 이때부터 목숨을 마칠 때까지 평생 계율을 청정하게 지켰다고 한다.
스님은 선암사 침명(枕溟)스님(1801~1876)을 찾아가 구족계를 수계하고 선을 전수하였다.스님은 함명(涵溟)스님(1824~1902)과 설두스님(1824~1890)과 더불어 조선 말기 불문(佛門)의 3걸로 손꼽혔다. 학인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도 스님은 언제나 귀찮아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대해 주었고,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진해서야 한 제자에게 강석을 물려주었다. 스님은 환응탄영(幻應坦永)에게 법을 전하고 나이 81세 법랍 66세로 입적하였다.
스님은 특히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와중에 응운(應雲)스님과 더불어 운문암을 중창(제5창)하였다.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 따르면, 경담스님은 1920년대 당시 지계(持戒)가 엄정하여 명성을 우레처럼 떨쳤던 스님으로서 50년 동안이나 운문암에 주석하였다고 한다. 또 최남선은 운문암을 중창한 내력을 현장에서 듣고 기록했는데, 그에 따르면 김문현이 자기 아버지가 장성부사였던 때에 한 동안 운문암에 머무르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경담스님이 이 때 운문암을 중창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무엇을 보았던지 이 소년에게 중창 대시주가 되어 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소년 김문현은 협기에 자기가 나중에 전라감사가 되면 꼭 힘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 때 경담스님은 약속의 징표로 수결(手訣)을 한 그의 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1893년) 김문현이 전라감사가 되어 내려오자, 경담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징표를 주고 2천량의 보시와 그 밖의 필요한 편의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전봉준장군이 천진암에 본영(本營)을 두고 있을 때 김문현이 비호하던 곳이라 하여 운문암을 불지른다는 소문이 자자하자, 경담스님은 화주로 내세운 응운스님을 전봉준장군에게 보내 전격적으로 장군의 협조를 얻어 불사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농민군이 패전하자 오히려 전봉준장군의 불사 참여가 화근이 되어 응운스님은 체포되어 옥사하고 장군의 소개로 시주받았던 수천량의 돈을 경담스님이 상환해야만 했다. 이 때 반 조금 넘은 공사는 방치된 채 3년이 지난 뒤에야 용명(龍溟)스님에 의해 겨우 끝났다.
그 후 묘향산에 계시는 휴정(休靜)스님을 찾아가 3년 동안 선(禪)을 배웠다. 휴정스님은 한 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법을 전했다. 스님은 휴정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아 가지고 남쪽으로 편력하며 여러 큰 스님들에게 그 뜻을 물었지만 아는 이가 하나도 없자 다시 휴정스님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휴정스님께 물은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깨치고 마음대로 노닐며 대중들을 지도하며 임제종풍(臨濟宗風)을 떨쳤다. 그래서 편양스님과 더불어 휴정스님 문하의 양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
1592년 왜적이 쳐들어와 휴정스님과 유정스님이 의승군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자 스님은 곧 불전에 재를 올려 승리를 기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의 서쪽 성을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 스님은 또 지리산 신흥사와 연곡사를 창건하였다. 1649년(인조 27), 연곡사에서 게송을 쓰신 뒤, 세속 나이 88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드셨다.
금해환영(錦海환英)(1856~1937)
`만암문집` ‘백양사의 역대 주지 방함록’에 제43·49세 주지를 역임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양사 ?금해다선사비명(錦海大禪師碑銘)?에 따르면, 스님은 1856년 호남 부풍현에서 선산 柳씨 집안에 문절공 미암(眉菴)선생의 11대손으로 태어났다. 11세에 백양사 화담(華潭)스님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해인사에서 호은(虎隱)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여러 곳을 편력하며 삼장을 연구하였다. 환응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화담스님에게 선문염송을 배웠다.
1880년 화담스님에게 법을 전해 받고 금해라는 당호를 받았다. 그 후 운문암과 청류암에 주석하며 1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스승을 위해 청류암에 관음전을 지었다. 그 후 다시 영호남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10여 년 동안 선을 참구하였다.
스님은 계율을 엄정하게 지켜 대흥사와 내장사 계단의 전계화상이 되었고 백양사와 불갑사 선원의 종주가 되었다. 스님은 화주(化主)가 되어 길거리를 몸소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아 1900년, 백양사의 쌍계루를 중건하였다.
용성진종(龍성辰鐘)(1864~1940)
스님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변 죽림리에서 태어나셨으며, 속성은 수원 白씨이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16세에는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전국 각 사암을 찾아다니면서 수도 정진하였으며, 44세에는 중국불교계의 선지식들과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47세에는 귀원정종(歸源正宗)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한 선사는 산중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48세 되던 해에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한 후,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大覺寺)의 간판을 내걸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 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한문으로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922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에 간 독립군들을 돕기 위해 만주 연길 명월촌과 봉녕촌에 대규모의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61세 되던 해에는 평소의 수행력에 의해 치아에서 치사리(齒舍利)가 나왔으며, 62세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여 수행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던 왜색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건백서(建白書)를 2차에 걸쳐서 제출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권세가(勸世歌) 등 창작 국악조의 창작찬불가(創作讚佛歌)를 최초로 작사·작곡하였다. 이는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大覺寺)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같은 해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짖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 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 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세수 77세 법랍 61세의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연암대사 유일
조선 후기의 고승. 성은 천(千)씨. 자는 무이(無二), 법호는 연담(蓮潭). 전라 남도 화순출신.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세에 <통감(通鑑)>, 12세에 <맹자>를 읽었다. 7세 때 아버지가, 13세 때 어머니가 죽은 뒤 숙부의 보살핌을 받았다.<대학>,<중용> 등 유가경전을 공부한 뒤, 18세 때 승 달산 법천사(法泉寺)의 성철(性哲)을 따라 출가하였고, 19세 때 안빈(安賓)으 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보흥사(普興寺)에서 사집(四集)을 배운 뒤 대둔사(大芚寺) 벽하(碧霞)로부터 <능엄경>을, 용암(龍巖) 밑에서 <기신론 (起信論)>과 <금강경>을, 취서사(鷲棲寺) 영곡(靈谷)으로부터 <원각경(圓覺 經)>을 배웠다. 22세 때 해인사의 체정(體淨)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선 리를 터득하였고, 상언(尙彦)에게서 <화엄경>을 배우면서 28세까지 시봉(侍 奉)하였다. 29세 때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조성하고, 체정을 증 명사(證明師)로 모셨다.31세 때 보림사(寶林寺)에서 <반야경>과 <원각경>을, 다음해에 <현담(玄談)>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60세까지 30여년 동안 계속 하였다.
도암선사 인정
조선 후기(1805~1883)의 스님으로 백양사를 중창하였다.호는 도암(道庵), 성은 연안 차(車)씨이고, 아버지는 차대유(車大維), 어머니는 분성 김(金)씨이다.1817년(순조 17) 13세에 백암산 정토사(淨土寺)의 심옥(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순조 27) 인월(印月)에게서 구족계를 받았고, 하루 한 끼만 먹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는 한편, 전국의 유명한 강백을 찾아가 경을 배웠으며, 1840년(헌종 6) 화월(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다. 이때부터 정토사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을 엄중히 지키도록 했므여 이 절을 중창, 백양사라고 하였고, 그 뒤 백학봉(白鶴峯) 아래에 있는 석실로 들어가서 10여 년 동안 정진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천진암(天眞庵)으로 옮겨 수년 동안 머무르다가 1883년(고종 20) 나이 79세,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제자로는 삼일(三日),계환(桂煥),보윤(普潤),우봉(雨峰)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석전문초>등이 있다.
환응율사 탄응
만암종헌(曼庵宗憲)(1876~1956)
조계종 종정과 백양사 제48세, 제50세 주지를 역임한 만암스님은 근현대에 백양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으로서 고불총림(古佛叢林)의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스님의 발자취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세 대종정 대본사 백양사 제5회 중창주 만암대종사 사리탑비명」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스님의 법명은 종헌(宗憲)이며 법호는 만암(曼庵)이다. 스스로 목양산인(牧羊山人)이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여산(礪山) 송씨로 1876년(고종 13년)에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11세에 백양사 취운도진(翠雲道珍)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백양사 전문강원에서 환응 스님에게 사미과와 사집과를 이수한 뒤 16세에 구암사 전문강원에 들어가 영호(映湖) 스님에게 사교과를 수료하였고 20세에 해인사에 들어가 대교과를 마쳤다. 23세에 선암사 강원에 들어가 수의과(隨意科)를 마치고 운문암에서 환응 스님의 강석(講席)을 이어받아 운문암, 청류암에서 강의하다가 32세에 해인사 강백(講伯)으로 추대되었다. 교학뿐만 아니라 참선에도 정진하여 백양사 선원과 운문선원에서 수행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스님은 인재양성을 위해 교육사업에 힘을 기울여 청류암에 근대적인 승려교육기관인 광성의숙(廣成義熟)을 세워, 스님들이 교학과 참선을 율의뿐만 아니라 국어, 국사, 수리학 등 현대학문도 배우게 하였다. 또 쌍계루 옆에 일반인을 위한 보통교육 기관인 ‘심상학교’(약수초등학교의 전신)를 세워 인근의 학동들에게 한글과 국사, 수리와 농학 등을 가르쳤다. 이는 일제가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고 민족혼 말살을 꾀하고 있던 시기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진보적인 민족교육이었다.
1910년 이회광 등 당시 불교 지도자들이 우리 불교종단을 일본의 조동종에 병합 예속시키려 하자, 스님은 1911년 영호 스님, 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세우고 매종행위를 저지하였다.
1914년 백양사 주지로 취임한 뒤 종단행정에 적극 참여하여, 종회의 결의에 따라 교무원을 운영할 것을 주장하는 등 민주적 종단 운영을 역설하였다. 백양사 주지를 봉직하는 동안 백양사를 중창하였다. 당시 극락전과 요사채만 남아 있었던 상황에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1916년에 착수하여 1939년에 낙성하였다.
이 시기에 백양사는 만암스님의 지도 아래 화합하고 단결하여 청규를 엄격히 지키고 참선과 교학에 다 같이 힘써 전국에서 가장 엄격한 승풍(僧風)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5년에는 영호 스님과 함께 재단법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세우고 전국 사찰로부터 출자를 받아 1928년 불교전수학교(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개칭, 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역임하였고 해방후 1946년에는 광주에 정광중학교를 설립하여(본래는 목포에 설립, 1948년에 광산군 송정읍으로 옮김, 1951년에는 정광고 개교)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생산불교를 지향하여 전남여객 버스회사와 전남 베어링공장, 동광유지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어려운 절 살림에도 불구하고 사회구호에도 힘써 인근의 어려운 주민들을 취로사업을 통해 도왔으며 청량원이라는 양로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1947년에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상응하는 식민지불교 청산과 민족정기 함양, 승풍 진작 등 3대 목표 아래 전라도 20여 사암 및 포교당을 동참시켜 호남고불총림(湖南古佛叢林)을 결성하였다.
1950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제2대 교정으로 취임한 뒤 종명을 조계종으로 바꾸고 종풍을 쇄신하였으며, 1952년에는 조계종 제3세 종정으로 추대되어 5년 동안 역임하였다.
일제 강점 이래 오염된 교단의 정화와 해이된 승풍의 진작을 위해 스님은 승려를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구분하여 교단 정화를 추진하였다. 1952년 전국승려 대표자대회와 고승회의를 열고 “모든 사찰은 독신승(비구)에게 맡기고 단 현재 주지를 맡고 있는 교화승(대처승)은 기득권(포교나 종무, 사업체 운영)을 인정하되 상좌를 두지 않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불교정화운동 시기에 스님은 이와 같이 당시 9할에 이르는 대처승의 현실을 고려하여, 불교의 분열을 경계하며 승가의 화합에 바탕을 둔 점진적이고 자주적인 불교정화 노선을 취하였다.(만암, 대한불교 문제, 1956.)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이른바 정화유시를 계기로, 선학원(禪學院)을 중심으로 한 비구측 일각에서 종조(宗祖)를 태고보우(太古普愚 )스님에서 보조지눌(普照知訥) 스님으로 바꾸려 하고 폭력으로 사찰을 강제 접수하는 등 권력에 의지한 급진적인 정화를 추진하자, 스님은 근엄하게 꾸짖으며 종정직을 사임하고 백양사로 돌아와 후학 지도에만 전념하였다. 1956년, 스님은 세속 나이 81세 법랍 71세로 입적하였다. 석호상순(石虎尙純)(서옹(西翁)) 스님이 선법을 이어받았고, 묵담이 율맥을 이어받았다. 만암 스님은 일생 동안 입지가 확고하고 몸가짐이 바르며 일을 빈틈없이 하였다. 구한말부터 종풍이 쇠락하여 모두들 세속화되는 가운데서도 스님은 지조를 굳게 지켜 청정하게 수행 정진하였다. 아무리 일이 고달프고 몸이 아파도 반드시 한밤중에 일어나 새벽까지 좌선 수행하였다. 의식주는 항상 평등하게 함께 나누었고 근검절약을 모범으로 보였다.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상순(西翁商純)(1912~2003)
서옹스님은 1600년 한국불교 선종사의 정통 맥을 잇고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과 고불총림 방장을 지내시며 제방 선원 수행자들의 바른 안목을 깨우치신 이 시대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서옹 대종사께서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2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495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속성은 전주 李씨이고 속명은 상순(商純)이다.
불교를 알기 위해 각황사(覺皇寺: 지금의 조계사)를 찾아 중앙포교사로 계시던 김대은(金大隱)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당시 교무부장이던 송만암(宋曼庵)스님에게 천거해 주었다. 만암 스님을 만나 출가를 맹세하고 1932년 21세의 나이로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에 진학했다. 1932년 7월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석호(石虎)라는 법명을 받아 출가하여 수행과 학업을 겸비하게 되었다.
24세 되던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백양사 강원에서 잠시 동안 영어강사를 하셨다. 그리고 2년 뒤인 1937년 오대산 한암스님(漢岩, 1876~1951)회상에서 본격적인 수선납자의 생활을 시작하셨다. 당시 상원사에서 함께 정진하던 도반들은 후에 모두 한국불교의 기둥이 되셨다. 불교·유교·도교에 통달한 한학자였으며 후에 상원사 조실을 지낸 탄허스님(呑虛, 1913~1983), 자비심이 많고 덕이 높아 크고 너그러운 대도인이며 조계종 3· 4대 종정을 지낸 고암스님(古庵, 1899~1988), 보살처럼 자비심이 많고 일생 수행을 철저히 하신 지월스님(指月, 1911~1973)이 그 분들이다. 후에 한국불교를 짊어질 젊은 인재들이 모두 상원사 방한암 스님 곁에 머물며 서로를 탁마하며 수행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한암스님 회상에서 두 하안거를 성만하신 서옹스님은 선의 실수 못지않게 선 이론의 체계적 연구가 겸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일본 선학의 명문인 교토의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28세인 1939년이었다.서옹스님은 임제대학 재학 중 선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히사마쓰 신이찌 박사(久松眞一, 당시 경도대학 교수)를 만나 마음과 대화를 통하는 도반이 되어 깊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셨다. 2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칠 때에는 ??진실자기(眞實自己)??라는 졸업 논문으로 당시 일본 불교학계를 주름잡던 니시타 기타로·다나베 하지메 등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 일본 불교학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실참(實參)을 겸하여 지성을 갖춘 선지식으로 평가받은 스님의 졸업 논문은 후에 일본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게 되었다.
임제대학 공부와 묘심사 선 수행을 마치시고 고국으로 돌아오니 1944년, 서옹스님 나이 33세가 되었다. 서옹스님께서는 수행납자의 본분사를 지켜 귀국 후에도 더욱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셨다. 백양사에 잠시 머물다 전국 각처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셨다. 1949년 목포 정혜원에 주석하신 것을 비롯,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는 부산 선암사 선원에서 향곡·자운·석암·홍경스님들과 함께 안거에 들어 정진하셨다. 1954년에는 해인사 선원, 1956년에는 백양사 선원에서 안거에 들었고 스승 만암스님께서 서옹스님에게 전법게를 남기어 법을 이으신 후 입적하신 1957년에도 강원도 정암사 선원에서 하안거, 해인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성만하시며 수행 납자로서 경향 각지에 그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제방선원을 찾는 운수행각을 통해 정안(正眼)을 활개한 조사가풍을 진작시킨 서옹스님은 임제의 맥을 잇는 정통 간화선 수행법을 한국불교의 보편적 수행법으로 정착시키어 수많은 후학들의 바른 길잡이가 되셨다. 또한 선풍진작과 선문의 기강을 세우는데 진력하며 자운(慈雲)스님·성철(性徹)스님·향곡(香谷)스님 등과 각별한 도반으로 함께 정진하고 탁마하셨다. 서옹스님은 1964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이 세워지자 초대 조실로 모셔짐으로써 후학들에게 회향하고 나누는 스승의 길로 나서시게 된다.
56세가 되시던 1967년, 백양사에서 정진하고 계시던 서옹스님은 어느 날 점심 무렵 쌍계루 아래 돌다리를 건너며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을 보시다가 문득 확철대오 하시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지으셨으니 오랜 수행이 비로소 결실 맺은 것이었다.
象王嚬伸獅子吼상왕은 위엄을 떨치며 소리치고 사자는 울부짖으니
閃電光中辨邪正번쩍이는 번갯불 가운데서 사와 정을 분별하도다.
淸風凜凜拂乾坤맑은 바람이 늠름하여 하늘과 땅을 떨치는데
倒騎白岳出重關백악산을 거꾸로 타고 겹겹의 관문을 벗어나도다.
서옹 스님은 1974년 효봉(초대), 청담(2대), 고암(3·4대)스님에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1600년 한국불교의 정통을 이은 조계종의 정신과 수행을 대표하는 스승이 되신 것이다.
서옹스님께서는 선풍을 진작하고 흐트러진 선문(禪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종정에 취임한 그 해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867)가 남긴 임제록을 쉽게 풀고 풍부한 보조 자료와 해설을 덧붙인 임제록연의(臨濟錄演義)를 세상에 내놓았다. 또 종정으로 계시던 시절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은 불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겠다. 1979년에는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다시 수좌들의 선수행을 지도하시는 등 수행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셨다.
스님께서는 한국의 조사선 가풍을 재정립하고 수행전통을 사회화하기 위해 1995년 “참사람 결사운동”을 전개하셨다. 이 운동을 세계적인 수행문화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998년 백양사에서 한암 스님 이후 86년 만에 처음으로 무차대법회(無遮大法會)를 열어 세계적 불교 석학과 수행자들에게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써 “참사람주의”를 제창하셨다.
서옹스님께서는 고령에 이르러서도 형형한 안광과 카랑카랑 맑은 사자후로 여전히 대중에게 벽암록을 제창하시고 참사람 결사를 주도하셨다. 또 일찍이 스승이신 만암스님이 백양사에 처음 세우셨던 고불총림을 1996년 당시 주지 지선스님에게 복원케 하시어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셨다.
산내암자
천진암
운문암
운문암은 백양사가 창건될 즈음에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백암산 꼭대기인 상왕봉에 자리한 운문암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선방스님들이 앞 다투어 찾아드는 곳이다. 여름, 겨울 정진 때 선객이라면 한 철 공부하고 싶어하는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양사 산내 암자로 백암산 상황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고승들이 수행한 곳으로 북 마하 남 운문이라고 하여 남한의 최고 수행도량이다.
안거(스님 수행기간) 동안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절대 금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해제(방학기간)때는 미리 요청하면 일반인도 운문암에 들어갈 수 있다.
운문암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면, 맑은 날은 광주 무등산 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청류암
청류암은 절 입구 매표소에서 마을로 가는 왼쪽 길을 따라 가다가 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1890년(고종27)에 작성된 '관음전중건기 (觀音殿重建記)'가 현존하고 있어 그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하는데, 현존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청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근세에 있었던 일로 하루는 주지스님이 잠을 이루는데 수성리(지금은 백양댐 수몰지역)에 가면 부처님이 계시니 그 부처님을 관음전에 모시라는 현몽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가니 과연 부처님이 계시어 그 불상이 있게 된 연유를 물으니 그곳에 가난한 부모와 사는 젊은 처녀가 보리밭에서 김을 매다가 땅속에서 캐어낸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녀는 불상을 잘 모시고 공경해야 하기에 집 뒤 바위 밑에 모시고 조석으로 정안수를 떠올리며 부모님이 건강하고 부자되기를 빌었다고 얘기하였다. 그 때 청류암 스님이 와서 백미 3말을 주고 부처님을 모시고 가겠다하니 쾌히 허락을 했다. 그 부처님이 영험이 신통하여 공양을 올리고 축원을 드리면 소원을 한가지씩을 꼭 이루게 되어 많은 신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청류암이 부찰이 되고 그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을 따로 짓게 되니 그 전각이 바로 청류암 관음전이다. 그 후, 그 처녀는 백미 3말이 없는 셈치고 이자쌀을 계속 불렸는데 그 쌀을 가져가는 사람은 재수가 있고 사업이 성취되어 이자에 원금 이상을 보태어 십년이 채 되지 않아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어 항상 청류암 부처님께 공양예배 드렸다 한다. 현재 그 불상은 6.25때 국묵 스님이 담양으로 난을 피해 옮겨 놓았는데, 분실되어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청류암은 백양사에 소속된 암자로 고려 중정왕2년(1350년) 각엄왕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모든 중생의 마음을 청정한 맑은 물에 비유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선(禪)에 들라 하여 청류암이라 하였다.
건물구조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앞뒤로 마루를 깔았으며 깬돌을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위에 커다란 주춧돌을 놓고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 배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기둥머리에는 끝부분이 새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익공을 얹었다. 이 암자는 백양사 15대 주지 청수선사를 비로하여 25대 환양선사, 26대 소요대사 35대 도암선사, 43대 금해선사, 47대 환웅선사, 50대 만암대종사에 이르기까지 스님들이 수도를 행한 청정도량으로 유명하다.
약사암
약사암은 백양사 뒤 백학봉 아래에 있는데, 그 옆에 영천굴이 있다.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영험하다는 영천이라는 샘이 있으며, 영천굴의 유래로는 옛날에 영천은 수도하는 이가 살았는데 항상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손님이 와서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쌀이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고한다 현재는 석조 관세음 보살상을 모시고 기도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수도하는 별채도 3칸 지어 기도객이 끊이질 않고 있다.
고불총림
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는 스님들이 사는 곳입니다. 승가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합니다. 3시가 되면 한 스님이 목탁을 치며 도량을 돕니다(道場釋). 그 목탁소리를 듣고 모든 스님들이 일어납니다. 도량석이 끝나면 아침 종성과 4물(목어, 운판, 법고, 대종)이 울리고 이어서 대웅보전에서 경건하게 새벽예불을 올립니다. 선원에서 정진중인 스님들은 도량석이 끝나면 선원 큰방에서 죽비로 예불을 드리고 바로 참선 정진에 들어갑니다. 예불이 끝나면 강원 스님들은 큰방에서 간경(看經)을 합니다. 아침 공양은 6시에 있습니다. 스님들은 큰방에 순서대로 빙 둘러앉아 각자 자신의 발우로 공양을 합니다.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一處住)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특히 선찰(禪刹)의 경우 이름으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합니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중(衆, 무리의 뜻)의 뜻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 화합하여 머무는 것을 승가라고 한다.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을 林이라 함과 같으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이므로 총림이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의 선원(禪院), 선림(禪林), 승당(僧堂), 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5대 총림이 있습니다. 고불총림 백양사는 1996년 3월 총림으로 공식 승격되었습니다.
선원
선(禪)을 교육하고 실수(實修)하는 불교의 전문교육기관이다.백양사의 선원은(운문선원, 고불선원, 백암선원(천진암 비구니 선원))이 있다. 통일신라말에 선종(禪宗)이 전래된 이후 설치되어, 승려양성에 중요한 수행기관으로서 큰 구실을 하여 왔으며 사찰 내에서 선당(禪堂), 선방(禪房), 좌선당(坐禪堂) 이라고도 하였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 당시의 비구들이 우기 이외에는 한곳에 살지 않고 탁발을 계속하다가, 우기가 되면 작은 벌레나 초목들을 밟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외출을 금하고 한곳에 머물며 안거(安居)한 것을 연유한다. 당시에는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에는 좌선을 하거나 교리를 연구하게 되어 있다. 그 뒤에 부파 불교 및 중국 불교에는 불교 교단이 일정한 사원과 토지 등을 소지하고 그 재산으로 생활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탁발은 꼭 하지 않아도 되었고, 연중 사원에 상주하며 선(禪)과 경론(經論) 등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한 차례 더 동안거(冬安居)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안거의 전통을 선종에서 이어받아 선원은 중요한 수행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말에 선종이 생겨남과 동시에 전국에 수많은 선원이 세워졌고, 여름과 겨울의 안거를 인정하여 실시하되 하안거(夏安居)를 정법이라 하여 승려의 나이를 뜻하는 법랍(法臘)은 이로써만 인정하는 것을 원칙을 삼았다. 불교의 진리를 좌선을 통해서 내관(內觀)하고 스스로 살펴 자기의 심성을 철견(徹見)함으로써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며 중생제도를 하는데 있다. 따라서 일정한 교육기간이 정해져 있는 강원(講院)과는 달리 선원은 평생교육기관으로서의 의의가 더 컸다. 더욱이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를 세우고 정혜쌍수(定慧雙修)의 학설을 주장한 이래,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강원은 선원의 예비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어 강원 수료자가 선원에 들어가 평생수행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선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강원의 사교과(四敎科)와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여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20세 이상이 된 자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하안거는 4월 15일에 시작하여 7월 15일에 끝내고, 동안거는 10월 15일에 시작하여 1월 15일에 끝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결제안거(結制安居) 90일로써 법랍1세로 하고, 법랍은 하안거의 수에 의하여 계산하도록 하되, 다만 본사(本寺)의 허락을 얻으면 동안거도 법랍에 가산 할 수가 있었다. 강원의 조직과 거의 같다. 선원은 방장(方丈) 또는 조실(祖室)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는데, 그 아래 책임자로서 선주(禪主)를 둔다. 이 선주는 선덕(禪德) 또는 수좌(首座)라고도 하며, 방장이 겸하는 경우도 있다. 선주 밑에는 내호법반(內護法班), 외호법반(外護法班), 특수조직을 둔다. 이들 중 중요한 직책의 임무를 간추려보면 선주는 정법을 거양(擧揚)하며 선원의 모든 일을 지휘한다. 수좌는 선주를 보좌하며 참선과 염불을 지도하며 선주가 출타할 때에는 이를 대리한다. 선원에서의 하루 수행시간은 8시간 이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수행방법은 ‘자선자수(自禪自修),자력자식(自力自食)’을 기본으로 하며, 안거는 좌선을 위주로 하되 선리를 연구하고 대소승률(大小乘律)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선원수행의 습독서로서는 <금강경>,<능엄경>,<선요>,<절요>,<도서>,<서장>,<치문>,<자경문>,<초심>,<염송> 등이 채택되었고, 권장 경전으로서는 <화엄경>,<원각경>,<법화경>,<기신론> 등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조실의 설법 중에는 일체의 질문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의심이 있을 때는 설법이 끝난 뒤 방장실에 들어가 질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선원의 청규(淸規)는 엄하여 파계(破戒),사행(邪行) 등 모든 폐습이 일체 엄금된다. 안거기간 중에는 일체 동구(洞口)에 나갈 수 없으며, 오직 부모나 스승의 중병이나 사망시, 그 밖의 부득이한 일이 있을 때만 조실의 허락을 얻어 외출 할 수 있다. 만약 선원 자체에서 정한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3차례 권유하고 이에 불응하면 퇴방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결제의 시작 7일, 해제 직전의 7일, 결제와 해제의 중간인 반산림(半山林) 때의 7일 동안은 전혀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을 하며, 매월 1일과 15일에는 조실이 상당(上堂)하여 설법을 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재에도 거의 그대로 준수되고 있으나, 옛날처럼 강원의 대교과를 마친 뒤 선원에 들어가는 전통은 현재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강원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선원에 들어가서 20하안거를 수행하고 법랍이 20년 이상 되어야만 얻을 수 있던 대선사(大禪師),대교사(大敎師)의 당호(堂號)나 10년의 법랍이 있어야만 될 수 있는 주지의 자격은 현재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통은 공부하는 수행승에 의하여 이어지고 있으며 그 정진의 기강이나 노력, 시간 등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참다운 불교수행처가 되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의 선원이기도 하다.
율원
불교의 율사(律師)를 양성하는 전문교육기관이다. 율주(律主)이며, 보통 강원의 대교과를 마친 비구승 중에서 특별히 계율의 연구에 뜻을 지닌 자들이 입학하게 된다. 율장을 강의하고 대중 생활의 율행에 대해 자문에 응한다. 율원생들은 강원을 졸업했거나, 선원에서 오래 정진한 고참 납자 가운데 율문(律文)을 해독할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특별한 교재에 대한 강의 말고는 거의 다 자습과 토론에 의해 교육된다. 때문에 무엇보다 그 자격에 엄격한 제한을 둔다. 신라시대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승려들의 기강의 세우고 올바른 율법에 의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하기 위하여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설립함으로써 개설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율원변천 등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재 조선 중기 이후로부터 이어지는 율맥이 해인사,백양사,범어사,통도사 등을 중심으로 전하여지고 있어 이들 사찰에 율원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율원에서 공부하였던 주요한 교과목은 <사미율의요로(沙彌律儀要露)>,<범망경(梵網經)>,<사분율(四分律)> 등이다.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이어서 양심에 잘못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자성의 계다."하였으니, 마음에 미안함이 없도록 하면 부처님의 뜻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실이라."하고, "승(僧)이 중(重)하면 법도 중하고, 승이 경망(輕妄)하면 부처님도 경하다." 하였으니 선과 교와 율이 없다면, 승가는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하며, 그러기에 계율(戒律)은 수명(壽命)임을 강조한 것이다. 없는 곳에는 승가도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율원은 부처님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행(行), 곧 계율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며,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以戒爲師)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혜명(慧命)을 이어가는 곳이다.
강원
불교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경학연구의 전문교육기관이다. 사찰내에 강당을 짓고 경학을 강설한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때는 조선중기 이후처럼 일정한 조직과 교과목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교육기관의 성격보다는 강경의식(講經儀式) 쪽으로 기울었고, 그 대상도 승려만이 아닌 재가신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정기적인 강경회(講經會)를 개최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나라에 있었던 신라 사찰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의 행사로, 여름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겨울에는 <법화경>을 강설했으며, 대개 250여명의 승속(僧俗)이 함께 모여 각각 2개월씩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는 신라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으므로, 신라 때에 그러한 교육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이후에는 각 종파별로 강원을 두고 그들의 소의경전(所儀經典)을 중심으로 경전을 연구하였으며, 이름있는 고승들의 교육방침에 따라 강원의 교육은 크게 좌우되었다. 체제가 완비된 것은 조선 인조에서 숙종 사이로 잡고 있다. 근대 강원의 설치동기는 조선 초기의 고승 정심(定心) 이래로 선교겸수(禪敎兼修)를 취해왔고, 1566년에 승과가 폐지되어 선교양종(禪敎兩宗)이 분명하게 되지 않게 되었으며, 휴정(休靜) 이후 도총섭제도(都摠攝制度)가 생겨 선교양종의 일을 총섭하게 됨으로써, 선교겸학(禪敎兼學)의 새로운 강원체제가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의 4단계 과정으로 되어 있으며, 이밖에 수의과(隨意科)가 설정되어 있다. 이 중 사미과는 초등학교, 사집과는 중학교, 사교과는 고등학교, 대교과는 대학과정에 해당하며, 수의과는 대학원에 해당한다. 내호법반(內護法班)과 외호법반(外護法班)으로 나뉘어 강원의 학승들을 위한 책임을 다한다. 내호법반 중 강주(講主)는 모든 학사를 총괄하고 강경을 담당하며, 입승(立繩)은 강중을 관리하며, 강사는 강경을 맡고, 중강사는 강주와 강사의 강경내용을 다시 강의하는 일을 한다.
외호법반은 강원의 운영을 위해 모든 사무를 관장하며 음식을 마련하고 시주를 얻어오며, 재정과 문서를 관리하는 등의 일을 맡아서한다. 수면 6시간을 제외한 새벽 3시부터 밤 9시의 취침 때까지 18시간을 계획된 일정에 따라 진행하며, 수업시간은 8시간 이상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일정은 여름과 겨울 및 사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교육과정 중 상강례(上講禮)는 교재의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도량교주를 선창하는 것으로, 대교주인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석가모니불,아미타불,미륵불에 귀의하는 의식이다. 월 2회 삭망일에는 학인 전체가 수업을 폐지하는 강원 공휴일로서, 이날은 강사들이 모두 모여 상강식(上講式),본식(本式)을 개최하는 날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교과과목 외에 외전(外典) 과목으로 불교통사,영어,수학,종교학 등 강원의 특성에 따라 새로운 과목을 추가하여 시대에 맞는 인재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수업연한은 6년으로 줄었다가 현재 4년으로 되었다.
주변둘러보기
내장산 국립공원
내장산은 전라북도 정읍시, 순창군 그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남원의 지리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부안의 변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내장산은 원래 영은산이라고 불렸으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도 계곡 속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아 마치 양의 내장 속에 숨어 들어간 것 같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 안에 무궁무진한 것이 숨겨져 있다 하여 내장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국 8경의 하나로 50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단풍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곳은 가을 단풍철이면 국내 최대의 관광객들로 붐빈다. 백양사, 도덕암 등의 사찰과 금선계곡, 원적계곡, 도덕폭포, 용굴암지 등 수많은 관광 명소가 산 곳곳에 흩어져 있다. 총면적이 76,032㎢에 달하며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암산
높이는 741m로 내장산, 입암산(1,107m)과 함께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한 산이다. 백학봉· 사자봉 등의 봉우리는 기암괴석으로, 산세가 험준하나 웅장하다. 이곳에 비자나무숲· 굴거리나무숲이 각각 천연기념물 제153호와 91호로 지정되어 있어 유명하다. 산기슭에는 대한불교조계종 18교구 본사인 백양사가 있다. 예로부터 봄에는 백양, 가을에는 내장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백양사의 비자나무숲과 벚꽃나무를 두고 생긴 말이다. 산행은 산세에 비해 등산로가 순탄한 편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고, 거리도 짧아 당일에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산행은 백암산을 등산하는 코스와 내장산 자락의 내장사까지 횡단하는 코스가 있다. 백암산에 오르는 코스는 백양사와 청류암에서 각각 시작할 수 있다. 백양사의 단풍이 전체 산과 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면 현란하지 않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연중 많은 등산객들을 맞는 백암산이지만 특히 가을 산행은 주로 낙엽 활엽수의 오색단풍으로 물든 자연을 만끽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제 1코스:주차장-백양사-약사암-영천굴-학바위- 백학봉-도집봉-상왕봉-운문암-백양사 (총 9.3㎞, 약 4시간 30분 소요)
제 2코스 주차장-백양사-운문암-능선갈림길-사자봉-청류암-홍련암-주차장
(총 8㎞, 약 4시간 30분 소요)
제 3코스 (백양사-내장산 연결)백양사-영천굴-백학봉-구암사-대가마을-내장산-신선봉-금선계곡-내장사 (약 9시간 소요)
제 4코스 (백양사-남창골 연결)백양사-운문암-능선갈림길-몽계폭포-남창골 → 전남대 수련원 → 주차장 (총 7.2㎞ 약3시간 30분 소요)
내장사
남창계곡과 몽계폭포
광주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입암산 기슭에 위치한 남창계곡은 산성골, 운선동 계곡, 반석동계곡, 하곡동계곡, 자하동계곡, 내인골 등 여섯갈래로 이루어져 있어 그 깊이가 십여리에 이른다. 계곡 곳곳마다 크고 작은 폭포와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마치 선계에 들어선 듯한 절정과 함께 온갖 새소리가 그침이 없는 울창한 수목 산천어의 작은 놀림까지 들여다 보이는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과 계곡을 따라 지루하지 않게 이어지는 오솔길은 남창계곡이 자랑하는 가장 빼어난 멋이다. 또, 남창계곡이 시작되는 입구인 전남대학교 임업수련원에서 잠시 이마의 땀을 훔치며 1시간 정도 올라 삼한시대때 축성한 입암산성을 둘러보며 골골마다 스며있는 우국지사의 기재와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것도 또 다른 관광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전남·북을 잇는 고속도로·철도·국도가 모두 산 서쪽 갈재협곡을 통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입암산 주위에 축성한 이 입암산성은 총연장 5천2백8미터의 석성이다.남쪽을 제외한 3면이 급경사를 이룬 천혜의 요새지로 고려때는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하고, 정유재란때는 윤진 장군이 왜장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 밖에 산성의 서쪽 정상에 있는 갓바위와 마당바위, 베틀방위, 상여바위, 족두리바위, 쥐똥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한번쯤 해발 6백8십여 미터의 정상에 올라 국립공원 백양사 지구로 지정된 빼어난 주변경관을 굽어 볼만 하다.
찿아 오시는 길
자동차
1)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고창방면 15번 국가지원지방도 - 석정온천 갈림길에서 좌회전 - 북하면 소재지에서 891번 지방도로를 따라 복흥쪽으로 조금 가면 왼편에 백양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유소 맞은편 길을 따라 4km 정도 가면 백양사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에서 1번 국도로 진입 - 장성방면(8km) - 북하면 소재지에서 891번 지방도로를 따라 복흥쪽으로 조금 가면 왼편에 백양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유소 맞은편 길을 따라 4km 정도 가면 백양사(길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있어 찾기 쉽다)
2) 내장사 버스터미널 옆으로 나있는 삼거리 - 추령고개 - 복흥 3거리 - 백양관광호텔 우회전 - 백양사 (12.5km)
3) 장성읍에서 1번국도를 따라 정읍쪽으로19.6km가도 역시 북하면 소재지 (이후는 위의 호남고속도로 이용시 방법과 같음)
백양사 주련
大雄殿(대웅전)
佛放光明徧世間(불방광명변세간)
照耀十方諸國土(조요시방제국토)
演不思議廣大法(연불사의광대법)
永破衆生痴惑暗(영파중생치옥암)
佛身普遍諸大會(불신보변제대회)
充滿法界無窮盡(충만법계무궁진)
寂滅世間不可取(적멸세간불가취)
爲求世間而出現(위구세간이출현)
其中衆生不可量(기중중생불가량)
現大神通悉調伏(현대신통실조복)
부처님께서 광명을 세간에 두루 놓으사
시방의 모든 국토를 비추시고,
생각할 수 없는 넓고 큰 법을 연설하셔서
영원히 중생의 어리석고 미혹한 어둠을 없애주시네
부처님의 몸은 널리 모든 회중에 두루 하시어
온법계에 충만하고도 다함이 없어라.
적멸에 드셔선 세간에서 취할 것이 없으시건만
세간을 구하시려고 출현하셨네
그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큰 신통을 나투어 모두 조복 받으셨네..
極樂寶殿(극락보전)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아미타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실까?
마음속에 아미타불 명호를 간직하여
절대로 잊지 않는다면
생각이 다하여 생각 없는 곳에 이르러
온몸에서 항상 자색광명이 나오리라.
冥府殿(명부전)
地藏大聖誓願力(지장대성서원력)
恒沙衆生出苦海(항사중생출고해)
敎化厭苦思安樂(교화염고사안락)
故現閻羅天子形(고현염라천자형)
悲增普化示威靈(비증보화시위령)
六道輪廻不暫停(육도윤회불잠정)
지장보살님의 맹세하신 큰 원력으로
수많은 중생이 고통의 바다에서 나오네.
교화하여 고통을 싫어하고 안락함을 생각케 하시려고,
염라대왕의 형상을 나투시고
자비를 더하여 널리 교화코자 위엄있고 신령스러움을 보이셔서 육도윤회에서 잠시도 머물지 않게 하시네.
七星閣(칠성각)
北斗藏身金風體露(북두장신금풍체로)
鳥道玄會金針玉線(조도현회금침옥선)
북두칠성에 감춘 몸이 가을바람에 드러나고.
오작교의 오묘한 만남은 금바늘에 옥실같구나.
雨花樓(우화루)
江國春風吹不起(강국춘풍취불기)
鷓鴣啼在深花裏(자고제재심화리)
貳級浪高魚化龍(이급랑고어화룡)
痴人猶戽夜塘水(치인유호야당수)
雨過雲凝曉半開(우과운응효반개)
數峰如畵碧催嵬(수봉여화벽최외)
空生不解宴中坐(공생불해연중좌)
惹得天花動地來(야득천화동지래)
강쪽지방의 봄바람은 불지않는데,
자고새는 깊은 꽃속에서 우는구나.
이급물결을 뛰어 넘은 고기가 변해 용이 되었으나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도 깊은 밤 연못의 물을 퍼내는 구나.
비는 지나가고 구름이 낀 새벽이 반쯤 새니
여러 산봉우리가 그림처럼 높푸르네.
부질없이 사는 이는 편안한 가운데 앉을 줄 모르고
하늘 꽃을 이끌어 땅을 움직이려함이로다.
海雲閣(해운각)
今日巖前坐(금일암전좌)
坐久煙雲收(좌구연운수)
一道淸谿冷(일도청계냉)
千尋碧嶂頭(천심벽장두)
白雲朝影靜(백운조영정)
明月夜光浮(명월야광부)
身上無塵垢(신상무진구)
心中那更憂(심중나갱우)
오늘 바위 앞에 오래 앉아 있으니 구름이 걷히는구나
한 줄기의 맑은 계곡물은 차고,
천길의 푸른 산봉우리 끝에
아침에는 흰구름 그림자가 고요하고
밤에는 밝은 달이 뜨네.
몸에 티끌만한 허물이 없거늘
마음속에 어찌 다시 근심할고?.
眞影閣(진영각)
聞聲梧道(문성오도)
見色明心(견색명심)
全機大用(전기대용)
棒喝交馳(방할교치)
師資唱和(사자창화)
父子一家(부자일가)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
全機大用(선사의 자재무애한 활동)의 방과 할로
서로 전하며 스승과 제자가 唱하고 和答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안이로다.
靑雲堂(청운당)
吾心似秋月(오심사추월)
碧潭淸皎潔(벽담청교결)
無物堪比倫(무물감비륜)
敎我如何說(교아여하설)
斫却月中桂(작각월중계)
淸光轉更多(청광전갱다)
狐狸俱屛迹(호리구병적)
獅子奮金毛(사자분금모)
내마음은 가을 달과,
푸른 연못의 맑고 깨끗함과 비슷하여
세간 물건으로 견줄것이 없건만
나로 하여금 어떻게 설하란 말인가?
달가운데 계수나무를 찍어내니,
맑은 빛이 한층 많아지고
여우 이리 무리가 함께 자취를 감추니,
사자가 금빛터럭을 떨치는 구나
香積殿(향적전)
義天敎海從窮通(의천교해종궁통)
獅子窟中無異獸(사자굴중무이수)
象王行處絶狐蹤(상왕행처절호종)
皎日昇空無翳点(교일승공무예점)
百億須彌列面前(백억수미렬좌전)
峰巒透出揷靑天(봉만투출삽청천)
浮雲薄霧何能到(부운박무사능도)
一拳拳倒黃鶴樓(일권권도황학루)
一踢踢飜鸚鵡洲(일척척번앵무주)
有意氣時添意氣(유의기시첨의기)
不風流處也風流(불풍류처야풍류)
馬駒喝下喪家風(마구할하상가풍)
四海從玆信息通(사해종자신식통)
烈火燄中撈得月(열화염중로득월)
巍巍獨坐大雄峰(외외독좌대웅봉)
義理의 하늘과 가르침의 바다를 마음대로(자유자재로) 통함이여
사자굴안에 다른 짐승이 없고
상왕 가는 곳에 여우의 발자취가 끊어짐이도다.
밝은 해가 허공에 떠서 한 점도 가림이 없으니
백억의 수미산이 얼굴앞에 줄지었네
산봉우리가 뚫고나와 푸른 하늘에 꽂히니
뜬 구름 얇은 안개 어찌 능히 이르겠는가
한 번의 주먹질로 황학루를 넘어뜨리고
한 번의 발길질로 앵무주를 뒤집으니
의기가 있을 때엔 의기를 더해주고
풍류가 없는 곳 또한 풍류로다
망아지 할 소리에 가풍마저 사라지니
사해가 이로부터 진실한 소식이 통해짐이로다
맹렬한 불꽃속에 달을 잡으니
높고 높은 웅대한 봉우리에 홀로 앉아 있구나
四天王門(사천왕문)
靈山會上言雖普(영산회상언수보)
小室峰前句未親(소실봉전구미친)
瑞艸蒙茸含月色(서초몽용함월색)
寒松蓊鬱出雲霄(한송옹울출운소)
부처님은 영산회상에서 말씀을 비록 많이하셨건만
소실봉앞 달마대사는 言句와는 친하지 않았네.
무성한 상서로운 풀이 달빛을 머금으니
울창한 차가운 소나무는 하늘로 솟구쳤네.
華嚴展(보현보살 10대원)
禮敬諸佛願 모든 부처님께 禮敬하길 원하옵니다.
稱讚如來願 부처님을 찬탄하길 원하옵니다.
廣修供養願 널리 공양하길 원하옵니다.
懺悔業障願 업장을 참회하길 원하옵니다.
隨喜功德願 타인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길 원하옵니다.
請佛住世願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무시도록 청하길 원하옵니다.
常隨佛學願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길 원하옵니다.
恒順衆生願 항상 중생을 따르길 원하옵니다.
普皆廻向願 널리 모두 회향하길 원하옵니다.
참사람 교육관
古路分明脚下通 옛길이 분명히 발아래에 통하건만
自迷多劫轉飄蓬 스스로 헤매어 다겁생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이로다
翻身一擲威音外 몸을 돌려 한번 위음왕불이전으로 던지니
折角泥牛走雪中 뿔꺾인 진흙소가 눈가운데 달리는구나
火裏紅蓮落故衣 불속의 홍련이 헌옷을 떨구니
牧頭收拾滿筐歸 목동이 거두어 광주리에 주어 담아 돌아가는구나
古曲無音誰敢和 옛 곡은 소리가 없거늘 누가 감히 화답할고?
溪邊石女笑微微 시냇가 石女가 잔잔히 미소짓는구나
不能動着中心樹 움직일 수 없는 마음속의 나무를
碧眼胡僧幾幾知 푸른 눈의 胡僧인들 몇몇이나 알았겠는가?
把定放行君莫設 把定과 放行을 그대는 설정하지말지니
紅爐烈焰雪花飛 붉은 화로 세찬 불꽃속에 눈꽃이 날림이로다
了俗明眞早脫中 俗을 요달하고 眞을 밝히며 中道도 일찍이 벗어남이여
雙收天地納胸中 하늘과 땅을 둘 다 거두어 가슴속에 넣고
翻身撤手三千外 몸을 돌려 손을 삼천대천세계밖으로 뿌리고나서臥聽溪聲夜月中 달밤에 누어 시내소리를 들음이로다
半夜瑤琴萬壑泉 한밤중 옥으로 된 거문고 소리가 온 계곡에 샘솟는 듯하니
玲瓏淸韻擱禪眠 영롱한 맑은 음이 선객의 잠을 깨우네
竹風松月爲心友 대나무 사이 부는 바람과 소나무에 걸린 달을 마음의 벗 삼아
闊步竿頭孰敢前 장대 끝에 활보하니 누가 감히 앞서겠는가?
첫댓글 방대한 안내 자료...불교사를 공부할 수 있고...신행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 같습니다...감사합니다...공부하겠습니다..._()_
9월 팔제계 수계법회때 갈것 같아 올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