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83
암표의 역사를 단절할 수 있을까
달콤했던 추석 연휴가 끝났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도 꺾였다. 우주에 시간이 존재하는가의 난해한 물음은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의 고민일 뿐,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머지않아 이용이 부른 시월의 마지막 밤은 잊혀진 계절이 될 것이고 계절의 시침은 낙엽 위에 서릿발을 그려놓을 것이다.
철이 들려면 꽃을 피우기 위해 싹을 내고 열매를 거두면 잎을 떨궈야 한다. 철에 민감한 인간들이 있다. 때만 되면 나타나는 모기 같은 암표상들이다. 그들은 대목을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추석에 많은 이가 고향을 찾을 거라는 걸 알고 열차표를 끌어모았다. 암표 단속 권한을 가진 철도특별사법경찰대는 제 손에 수갑을 채운 듯 눈만 멀뚱거렸다.
암표의 역사는 매음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암표는 문화적, 경제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것이 범죄라는 인식이 희박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검투사 경기장인 콜로세움에 암표상들이 활개 쳤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검투 경기는 매우 인기가 있었고, 좋은 좌석을 미리 확보한 암표상들은 입장권을 비싼 가격에 되팔았다고 한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극장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특히 런던의 웨스트엔드와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가 암표상의 무대였다. 극장표가 매진되면 표를 미리 확보한 암표상들은 이를 몇 배 높은 가격에 되팔았다. 당시에는 암표에 법적 규제가 거의 없어 자유롭게 거래가 이뤄졌으며, 부유층은 가격을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의 스포츠 경기와 대규모 음악 콘서트가 암표상들을 먹여 살렸다. 특히 야구와 미식축구 경기는 암표상들의 밥줄이었다. 뉴욕 양키스와 같은 인기 팀의 경기장 입장티켓은 맨 먼저 암표상에게 돌아갔다. 음악 공연에서도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 같은 슈퍼스타들이 공연할 때면 터무니없는 가격의 암표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오늘날의 암표도 역사적이다. 지난해 3월 걸그룹 블랙핑크의 대만 현지 공연에서는 한화로 37만 원짜리 티켓이 온라인에서 1,700만 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암표가 정가의 40배가 넘는 금액으로 팔렸다면 경악할 일이다. 각국이 암표상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에 속도를 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또한 암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보다 적극적으로 강구할 때가 되었다.
21세기 들어서는 인터넷과 함께 암표 거래가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온라인 거래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암표 판매는 더욱 고도화되었다.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수고는 옛말이다. 미국에서는 스텁허브(StubHub)와 같은 경매 사이트가 암표 거래의 대표플랫폼이라면 한국에서는 당근이나 중고나라가 암표상들에게 위장막을 펼쳐준다. 이처럼 암표 판매가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있다 보니 그것이 개인 간 일반적인 거래인지, 암표인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설사 암표 판매로 적발되더라도 현실에서는 과태료 처분이 고작이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다. 비싸도 사겠다는 사람은 암표상의 폭리를 용인한다. 어쩌면 그들에겐 암표상이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시세보다 높게 거래되는 상품이 어디 암표뿐이겠는가. 필요악이라고 여기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암표 거래는 매우 고약한 경제 질서의 왜곡을 초래한다. 사실 경제학의 열매가 붉어져 이런 문제가 논리적으로 설명되기까지 암표의 역사는 묵인의 편이었다.
경제학 관점에서 볼 때, 티켓을 판매하는 측의 기대 수익을 암표상이 가로채는 부작용은 약과다. 우선 암표는 시장 공급을 차단해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을 야기한다. 이는 전형적인 '시장 실패'의 사례다. 또 다른 문제는 티켓 가격이 암표를 통해 급격히 상승하게 되면 소비자의 후생(welfare)이 감소한다. 소비자들은 티켓을 구매한 가격이 합리적일 때는 공연이나 경기를 관람하는 데서 얻는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암표를 통해 비싼 가격을 지불하게 되면 비용 대비 만족감이 떨어진다.
암표는 우리의 평등권을 저해한다. 불공정한 접근에 기초한 암표는 소득에 따른 차별적 접근을 강화한다. 티켓이 정가로 판매될 때는 대체로 모든 사람이 같은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지만, 암표로 인해 가격이 급등하면 고소득층만 티켓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는 문화적, 사회적 참여기회에 대한 접근을 불공정하게 만든다. 그뿐이 아니다. 암표의 특성상 공급과 소비균형이 순간에 깨지면 멀쩡한 자리가 공석이 되어 편익이 증발한다.
암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안이 나오고 있다. 이는 단순히 법적 처벌에만 기대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경험칙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하지만 가격 차등화 전략이나 동적 가격 책정과 같은 해결수단은 이익을 좇아 불법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효과가 크지 않다. 근본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을 고려하고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불법 거래방식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어야 한다.
암표 문제 해결에 블록체인 기술이 새롭게 떠오른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티켓의 소유권과 거래 이력을 투명하게 기록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비공식적인 거래나 암표 거래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술시스템이다. 또한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계약을 활용해 티켓의 재판매 조건을 미리 설정함으로써, 암표상의 무분별한 가격 상승을 방지할 수도 있다.
암표가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면서 쫓고 쫓기는 게임이 정보기술의 전장에서 벌어질 참이다. 암표상의 끈질긴 생명력은 역사가 말해준다. 쫓는 자도 활 대신 총을 들었다. 누가 승자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고향 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더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라도 쫓는 자가 승리하길 바랄 뿐이다.
열풍의 여름이 갔다. 다른 생명의 피를 빨아 생명을 유지하던 모기도 사라졌다. 분명한 건 죽은 줄 알았던 모기가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노동의 숭고함을 모르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온라인에 떠도는 암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사철을 기막히게 알지만 철들기 틀려버린 모기들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