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雪国)」 (1935-1947)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자살
가와바타는 3살 때 아버지, 4살 때 어머니를 잃고 누나와도 헤어져 할아버지 댁에서 자라게 됩니다. 또 7살 때 할머니, 10살 때 누나도 죽습니다. 그리고 15살 때 할아버지도 돌아가셔서 고아가 됩니다. 그의 문학이 고아문학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1926년 「伊豆の踊り子」로 등단합니다.
가와바타는 대부분의 문학자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아쿠타가와도 그렇지만 그에게는 문학이 유일한 구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고아의식이 가와바타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의 문학의 이곳저곳에 이러한 고아의식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광수가 고아의식이 있지요.
가와바타는 책 사느라고 빚을 졌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은 것이 작가 가와바타를 탄생시킨 것이죠. 많이 읽어야 깊이 생각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하는 것에서 좋은 생각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써야 그중에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구요....
「雪国」은 1947년에 그동안 발표한 단편 11편을 모아서 일단 완성됩니다. 단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녁경치의 거울(夕景色の鏡)」(1935.1),
2 「하얀 아침의 거울(白い朝の鏡)」(1935.1),
3 「이야기(物語)」(1935.11),
4 「헛수고(徒勞)」(1935.12),
5 「갈대 꽃(萱の花)」(1936.8),
6 「불 배개(火の枕)」(1936.10),
7 「공치기노래(手毬歌)」(1937.5).
8 「설중화재(雪中火事)」(1940.12),
9 「은하수(天の河)」(1941.8),
10 「설국초(雪国抄)」(1946.5),
11 「속설국(続雪国)」(1947.10)
이렇게 「雪国」은 12년에 걸쳐서 일단 완성하였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 대폭적인 가필과 개정작업이 있었습니다.
1948 後記 「完結版」단편을 포함하여
1949 전집
1960 전집
1971 「定本 雪国」 결정판
대폭적인 가필과 정정으로 초출(初出)과 정본은 전혀 다른 세계가 그려집니다.
「雪国」은 무척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일본근대문학 최고의 작품입니다. 계절 묘사, 여자 모습 묘사, 청각, 시각 등 감각적인 묘사가 뛰어납니다.
거울에 비친 요코의 모습을 묘사하는 도입부분의 문장도 명문이지만, 터널을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를 나누는 경계로 생각한 것은 감탄할 따름입니다. 비현실세계에서는 이 세상에 없는 상징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순간순간 덧없이 타오르는 여자의 아름다운 정열이 있습니다. 이렇게 설국에는 이 세상에 없는 슬픈 몽환적인 세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은 군마(群馬)현과 니이가타(新潟)현과의 터널입니다. 군마현에서 니이가타 현으로 빠져나가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미즈(清水)터널로 1922년 8월에 착공하여 1931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길이 9702미터로 개통 당시 일본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습니다. 미즈카미쵸(水上町)에서 이 터널을 빠져나가면 유자와쵸(湯沢町)에 들어갑니다. 겨울에는 설경이 장관입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유자와 온천입니다. 그가 설국을 쓴 온천의 작업실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와바타는 완공 후 3년 뒤인 1934년에 방문하여 이 작품의 토대를 씁니다.
비현실은 작품 첫 문장에서부터 나옵니다. 거울 묘사, 터널을 통과하면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로 변합니다. 공상과 몽환의 세계에 마법의 기차가 데려다 줍니다. 「千とちひるの神隠し」에 나오는 터널이 이것입니다.
가와바타가 「雪国」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쓰지 않은 이유는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작가 및 독자의 자유를 묶는 것으로 생각하여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아닌 세계에 우리들을 이끌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순수한 연애가 가능한 무대가 됩니다. ‘헛수고(虚しい徒労)’로 보이는 고마코(駒子)와 요코(葉子)의 삶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헛수고’이기 때문에 그녀의 순수함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무위도식’ 생활을 하고 있는 시마무라 자신도, 자신의 행위를 ‘헛수고의 표본과 같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마코, 요코, 시마무라의 생활양식에 공통되는 ‘헛수고’가 의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시마무라에게는 고마코가 일기장을 쓰는 것, 요코가 한 사람만을 간병하는 것이 모두 헛수고로 보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헛수고’라고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관철하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인간의 순수함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마코와 요코의 삶에서 ‘허무한 가운데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통하여 순수한 생명의 상징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슬픈 아름다움(悲しい美)’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의 전통적인 미(美)인 ‘もののあわれ’ 입니다.
「雪国」은 고마코(駒子)의 이야기입니다.
고마코의 사랑은 그려져 있지만 시마무라의 사랑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마코는 실제 모델이 있습니다만 작품의 인물과 닮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그녀의 오른편에 시마무라(島村)가 있고 왼쪽에 요코(葉子)가 있다고 이해받고 싶다고 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피로한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순수한 애정과 정열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는 자신이 결코 생명력(生命力)이 충만한 고마코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공허가 오히려 그를 압박하기도 하지요. 이 세계의 사람과 저 세계의 사람이라는 차이도 있지만.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헤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작가는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불이 났을 때, 낙하(落下)하는 요코를 고마코가 달려가서 안지만, 시마무라는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단지 서 있을 뿐이었다.
라고 그 두 사람간의 간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마코를 누에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예리한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작품에서 고마코의 변화과정이 누에의 변화과정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즉 누에의 애벌레 단계 → 번데기 단계→ 나방단계→ 알→ 애벌레
이렇게 순환한다는 것이지요.
고마코의 애벌레 단계는 처음 고마코가 시마무라를 만났을 때처럼, 깨끗한 모습을 의미하고 (이때 게이샤 아니었음),
번데기 단계는 고마코가 두 번째 시마무라를 만났을 때, 게이샤가 되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방단계는 고마코가 온천의 여러 남자손님과 지분덕거리는 모습을 말하며
알 단계는 마지막에 누에고치 창고에 불이 나는 장면에서 그곳에 알이 된 누에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에가 불이 타는 것에 의하여 고마코가 누에의식에서 해방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가와바타는 고마코의 변화 과정과 누에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삶의 되풀이되는 과정(윤회사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이것은 사람인 게이샤의 일생(요코→ 고마코→ 菊勇きくゆう언니→ 유키오 모친)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고, 자연인 계절의 순환(신록→ 겨울→ 가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마무라에게 쏟아지는 은하수도 고마코라고 합니다...
또 고마코를 본체로, 요코를 분신으로 보는 연구가 있습니다.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기억하고 있는 손가락과 요코의 한쪽 눈이 마지막에 고마코가 요오코를 안는 장면에서 둘이는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본체와 분신이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스키는 구한말 선교사들이 포교활동과 함께 들어왔는데 1929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원산 근교 신풍리에 한국최초의 스키장이 개설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1902년에 전해졌습니다.
가와바타와 관련하여
노벨 문학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권위로써 존재되는 한, 어느 정도의 정치성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문학에서 국제 규격을 표방하고, 혹은 그러한 심사기준을 지향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커다란 모순을 함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터키의 오르만 파묵 수상과 같이 문학상이 다원적인 가치관을 표방하고 제 3세계의 ‘전통문화’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지향하는 것에서는 유럽 중심주의로부터 탈각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의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와바타는 1948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펜클럽회장의 직에 있었고, 1957년에는 국제 펜클럽집행위원회에 출석하기 위하여 유럽에 가서, 같은 해 9월에는 제29회 국제 펜클럽 부회장에 선출된 것도 포함하여, ‘유럽 미국 이외의 언어권에도 노벨문학상을’이라는 조류 안에서 가와바타의 이러한 활동 경력이 커다란 추진력이 되었다는 측면은 부인하기 어렵겠지요.
제가 이 작품의 번역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하였지만
일본어에 능통했던 컬럼비아 대학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 교수는 일본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혼자서 「雪国」을 포함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들을 번역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타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학생들의 감상의견에
<설국>이 불륜이어서 읽기가 싫었다. 시마무라는 도쿄에 가족이 있는데 한심하다 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만, 문학은 도덕책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의 많은 문학고전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학은 문학으로 읽어주세요.
올해 벌써 첫눈이 내렸다고 합니다.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고다쓰에 들어가 군고구마를 먹으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유민이 나오는 <신설국>을 보고
그리고
나카야마 미호의 <러브레터>를 보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