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늦었지만
- 4·3 평화공원에서
왕태삼
한라산은 이 땅의 뿌리를 알고 있다
백록담 물맛이 백두산 천지연 물맛과 같다는 것을
오늘은 남구름이 한 바가지 물 길어가고
내일은 북구름도 물 길어와
서로의 가문 물동이를 연년이 채워주며 산다는 것을
우리는 한 뿌리야 제주는 믿고 살았지
보릿고개야 천년만년을 넘었어도
해방 후 분단고개야 차마 눈감을 줄 몰랐어라
우뚝 한라산 깃발 아래 용암처럼 통일을 외쳤어라
육지보다 붉은 피가 돌아
광장에서 검은 총구 끝에서 수십만 동백꽃은 피어올랐다
이념에 쫓겨 산간으로 활화산으로 사슴의 무리도 쫓겨
죽어서도 껴안은 동굴 속 흰 늑골들 피멍든 손톱갈퀴들
그날부터 백록담은 하늘샘 비우고 눈물샘 된 거란다
골짝골짝 흰 넋을 길어 산까마귀 울음까지 길어
한라산 구름은 성자처럼 지금도 백록담을 오르는 거란다
아방 하르방 사라져 마을도 사라져 올레올레 젖은 수국꽃
구르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올레올레 찾아올까
파란 여승처럼 살다 노을빛 색시로 지는 올레올레 수국꽃
제주도에 늦었지만 오길 잘했다
한여름 불볕에도 서릿발 내리는 4·3 평화공원
소리 없는 저승의 함성조차 방탄 유리함에 갇힌 평화공원
치 떨리는 꽃잎의 역사 앞에서
나는 하얀 손 없어 분향 없이 고개만 떨군다
나는 바다 건너 불구경꾼 관광객이었음을 고백한다
보트피플처럼 빠져나오신 옛 제주도 장인님이 떠올랐다
작은 돌고래 같던 몽글몽글 돌멩이 같던
내 장인의 청춘이 유기견처럼 떠돌고 있을 조천 마을
내 아내가 한 송이 섬색시였구나 탐라수국꽃이었구나
내 자식들도 동백꽃 피가 돌겠구나 오직 나만 없는…
별안간 한 조각 구름이
내 눈물샘을 훔치고 한라산 백록담으로 총총 사라진다
제주도에 늦었지만 한 방울 죄가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