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다음 목적지는 당진군
합덕읍에 위치한 합덕성당이다. 솔뫼성지에서 잇수로 치면 10 여리 떨어진 곳에 있어, 걸어가면 40 여분 거리라 하여 일부 걷는 사람과 나처럼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봉사자 스테파노 형제님께서 전라도 지방의 여느 성당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아름다운 곳이라고 극찬을 하시니,
자못 기대가 된다.
드디어 합덕성당 도착.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붉은 벽돌 건물에 우뚝 솟아 있는 쌍탑이다. 용도는 종탑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이다. 반가움에 전면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똑딱이 카메라로 역광을 처리하기는 역부족이다. 이럴 때마다 좋은 카메라에 대한 구매욕구가 발동한다.
ㅠㅠ
붉은 국화로 장식된 계단이
입구에서 건물 정면까지 쭉 뻗어 있다. 성당 건물은 3개의 출입구와 창들이 모두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다. 창 아래와 종탑의 각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형의 장식을 하였다. 문득 전주 전동성당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유서 깊은 성당들의 모습은 나름의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든다. 초가 정자
아래 동상이 보인다. 표석에 '가정을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성가정을 형상화 해 놓은 것 같다.
뒤뜰로 들어서니, 온통 국화분
천지다. 무슨 행사가 있었나 보다. 국화꽃에 새겨진 글씨는 '125'라는 숫자다. 알고 보니, 올해가 합덕성당 설립 125주년이 되는 해란다.
합덕성당은 다음과 같은 내력을 갖고 있다.
1890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 양촌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1899년에
당시 초대본당주임이었던 퀴를리에(Curlier, J. J. L.) 신부가 현 위치의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물을 건축하고 성당을 옮겨오면서
합덕성당으로 개칭되었다.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 성당이 생기게 되어 구 합덕성당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1997년 다시 합덕성당으로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현재 존재하는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125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에는 순교의 장소가 되기도 한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합덕성당은 성소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사제 30명, 수녀 54명 수사5명(수사 수녀는 1990년 통계)을 배출하였다고 하니, 이곳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국화꽃 향기 속에서 원색의 향연을 카메라에 담으며 거니노라니ㅣ, 걸어서 출발한 팀도
도착한다. 상기된 그들의 얼굴에서 활기가 넘친다.
건물의 뒷면으로 이동하니,
분위기가 훨씬 좋다. 폭신한 잔디에 낙엽이 뒹굴고, 느티나뭇잎들도 가을을 타고 있다. 이곳 역시 여기저기 국화분으로 장식되었다. '합덕성당 본당
설립 125주년 기념 성체거동' 행사가 있었나 보다.
'성체거동'?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성체거동이란, 성체행렬이라 불리는 것으로 성체를 모시고 성당의 밖으로 행렬하는 것을 말한다. 병들고 아픈 자들처럼
성당을 찾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가 위로와 기도를 드리는 의식으로 그 전통과 역사는 아주 오래다. 합덕성당의 성체거동은 종교적 의미의 행사를
뛰어넘어 지금은 지역의 축제가 되었다고 한다. 합덕성당의 성체거동 행사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거행한 것으로 성체신심을 키우고, 지역주민들을
화합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공세리 성당과 함께 번갈아 진행하였으나 한동안 사라졌다가 2007년 이냐시오 신부님과 임마뉴엘 신부님에 의해 복원된
행사라고 한다.
성당의 여기저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즐겼을 축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은 넓은 평야지대다. 마을의 규모가 저렇게 큰 것으로 미루어,
지금처럼 농촌이 버림 받은 땅이 아니었을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 같다. 이 마을은 천주교가 박해를 받았을 당시에도 마을 사람들 80%
이상이 신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마땅히 성당은 마을 공동체의 구심체 역할을 했을 법하다. 합덕성당이 성소의 못자리가 된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
뒷뜰에는 성직자 묘지가 있다. 이곳도 역시 국화분으로 아름답게 장식 되어 있다. 성당을 이렇게
꾸미는 데는 국화분 30만 개가 들어갔다고 하니, 엄청나다.
첫번째 묘지는 이
매스트르(1808-1857) 신부 묘이고, 두번째 무덤은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묘,. 세번째 무덤은 백문필(패랭,
1885-1950)신부인데 1921년 부터 1950년 피납되기까지 계셨으며, 현 성당 건물을 지은분이란다. 그래서 그분을 특별히 내세워서 비석도
크게 세워두고 국화분으로 예쁘게 장식을 했나 보다. 그는 1950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 축일 준비를 위해 고해성사를 집전하다가 납치되었는데
시신은 현재 대전 사정공원 애국지사 묘에 묻혀 있다. 네번째 무덤은 심재덕(마르코, 1908-1945) 신부인데 1942-1945년까지 백문필
신부 보좌로 있다 병사하였다고 한다.
마침 용머리성당 이금재 신부님을 만났다. 가을 단풍빛이 우리 신부님께도 내려왔나보다. 발그레 물든 신부님과 함께 인증 샷 한 장!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으니 고맙습니다.' 하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의 내
심정을 대변한다.
성당의 내력만큼이나 늙은 느티나무가 잘 익어 아름다운 성당의 건물과 뜰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느티나무 옆 기와집은 백문필 신부 님께서 기거 하시던
사제관이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국화분재 전시가 있었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자연이 주는 자연스런 아름다움, 그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성당 건물을 빙 돌아 둘러보고
내부로 들어가 본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정갈한 멋이 있다.
이제 내려가는 길. 성모
마리아님 주변도 온통 붉은색 국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소나무 가지와 어우러진 붉은 벽돌 건물과 쌍탑이 있는 풍경은 사뭇
이국적이다.
따갑던 태양도 살짝 풀이 죽은
듯 돌아갈 시간이다. 용머리 식구들 한 자리에 모였다. 신부님의 강복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고 차에 오른다.
돌아가는 길, 오늘을 정리해
본다. 아직은 일요일만 발바닥으로 다니는 미숙한 신자지만, 성서통독을 하면서 친숙해진 형제자매님도 생기고,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해가 갈수록 조금씩 늘어간다. 성서를 읽으며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음미해 보고,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마음 속에 새겨보기도 한다. 이렇게 한 걸음씩 이슬에
옷 젖듯이 내 마음속에서도 하느님 사랑이 커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