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fe.daum.net/1107/Y4PX/1936
이지끼을 님, 참 독해하기 힘든 소논문 급, 긴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애쓰셨습니다.
독해해 보려고 애쓰며 읽어내려갔는데,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 세 문단은 지나쳐서는 안 되는 천박한 역사관을 드러낸 주장, 역사 왜곡을 하신 주장이라서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일단 다음 링크 글을 참고해 마지막 세 문단이 왜 ‘천박한 역사관’을 드러낸 주장, ‘역사 왜곡’을 하신 주장인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1107/Y4PR/85
칼빈 선생님보다 두 살 어린, 1511년에 스페인 빌라누에바(Villanueva)에서 태어난 세르베투스는 1528년에 툴루즈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신본주의 계시 의존 사색이 아닌 인본주의 이성의 시작을 뜻했습니다.
그는 1531년에 {삼위일체 오류에 관해}를 썼습니다. 정교일치 시대인 당시 로마교 교회법에 따르면, 삼위일체 부정은 “가장 흉악한 이단”으로 분류돼 속전속결 화형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부정하며 삼위일체를 “머리 셋 달린 괴물”로 조롱했습니다. 이 조롱에서 보는바 이 책은 로마교와 기독교(개신교) 모두에게 충격을 준 책이었습니다. 로마교와 기독교 문명 전체를 향한 반역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책이었습니다. 이 조롱은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로마교 사회와 기독교사회 존립 기반을 흔드는 체제 전복의 선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롱이었습니다. 그는 1532년에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를 출판해,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는 척하며 더욱 교묘하게 이단 사설을 전파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성경} 다음으로 널리 읽힌 {기독교 강요} 초판은 칼빈 선생님이 불과 만 26세이셨을 때인 1536년 3월에 스위스 바젤(Basel)에서 라틴어로 출판됐습니다. ‘유아 세례를 반대한 현대 침례교’와 ‘칼빈 신학을 반대하며 펠라기우스와 아르미우스 신학을 찬양하신 웨슬리 목사님’, 웨슬리 계열 교단들은 칼빈 선생님을 두고 “제네바의 독재자, 제네바의 학살자”로 음해합니다. 그러나 정작 1536년 칼빈 선생님은 자신의 모국 프랑스, ‘박해받는 프랑스 기독교도들’을 변호하려고 목숨을 걸고 펜을 든 사랑의 사람이셨습니다. 로마교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시는 무명의 망명객인 처지에서도 모국과 형제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1531년에 {삼위일체 오류에 관해}와 1532년에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를 펴낸 세르베투스는 프랑스 비엔(Vienne)에서 가명 ‘미셸 드 빌뇌브’로 의사 생활을 하며 20 년 동안 모범스러운 로마교 추종자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교 비엔 대주교 유력한 친구였습니다. 그가 “교황은 모든 짐승 가운데 가장 천한 짐승이며 창녀 가운데 가장 뻔뻔한 자”라고 말했던 사람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536년이었습니다. 로마교에 쫓겨 다니시던 무명의 청년 칼빈 선생님께 세르베투스는 토론을 제안했습니다. 칼빈 선생님께서 그를 안타깝게 여기셔서 그의 이단 사상을 교정해 바른 복음으로 인도하시려고, 그를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얻으시려고 약속 장소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지성과 함께하는 뜨거운 감성! 차가운 지성을 가지셨지만, 이와 함께 한 영혼을 향해 목숨도 내거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셨던 칼빈 선생님께서는 훗날 이 사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걸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약속 장소에 갔다.”
1541년은 제네바 의회 간곡한 요청으로 가족들과 함께 제네바로 귀환해 목회를 시작하신 해입니다.
세르베투스가 35세가 되던 1546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그는 칼빈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1541년에 모국 프랑스를 위해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초판을 펴내신 칼빈 선생님께서는 그에게 정중한 답장을 보내셨습니다. 또한 {기독교 강요}를 한 권 보내셨습니다. 그 책은 그 책 여기저기 갈겨쓴 모욕의 비평과 함께 칼빈 선생님께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긴 편지를 30 통이나 칼빈 선생님께 보냈습니다. 또한 곧 출판될 {복원} 원고 한 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두 얼굴의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책을 내느라 분주했습니다. 칼빈 선생님께서 종교개혁을 완결지으신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를 “강요, Institutes”로 부르셨다면, 그는 ‘기독교 진리를 가장 순전한 형태로 복원한다.’는 뜻으로 그 책을 “복원, Restitutes”로 불렀습니다. 그가 {기독교 복원, Christianismi Restitutio}을 익명으로 출판한 때는 1553년 1월이었습니다. 이 책은 삼위일체론을 조롱하며 유아 세례를 “사탄의 발명품”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기독교 정통 교리 삼위일체 교리와 유아 세례 교리는 모두 틀렸으니, 기독교를 내가 다시 세우겠다.’ 하는 오만한 내용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그 오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복원} 지은이임이 밝혀진 그가 로마교에 전격 체포 당한 것입니다. 1553년 4월 4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체포된 지 불과 사흘 만인 4월 7일 새벽에 간수를 속이는, 감옥의 허술한 감시를 틈타 담을 넘어 탈옥에 성공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전 유럽이 뒤쫓는 화형 확정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로마교 종교재판소는 1553년 6월 17일에 그가 없는 궐석재판을 열어 화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그의 짚 인형과 그가 지은 책 다섯 꾸러미를 불태우는 화형을 집행합니다. 즉, 그는 칼빈 선생님께서 목회하시는 제네바에 오기 전 이미 로마교에 의해 죽은 목숨과 한가지였습니다.
칼빈 선생님께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선생이 되신 뒤, 칼빈 선생님께서는 “세르베투스가 만약 제네바에 온다면, 내 권위가 허용하는 한 산 채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파수꾼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께 제네바 정치 실권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세르베투스는 칼빈 선생님께서 집전하시는 예배에 당당히 나타났습니다. 1553년 8월 13일이었습니다.
이 등장은, 제네바 다수파인 자유방임파(Libertines)에게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칼빈 선생님을 곤경에 빠뜨려, 칼빈 선생님 종교개혁 사역을 멈추게 함으로써 제네바를 영적 무정부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방문이었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칼빈 선생님을 지지하는 파와 칼빈 선생님 엄격한 신앙을 못마땅해하며 칼빈 선생님을 몰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던 자유방임파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제네바 소의회 재판 과정에서 방종주의자들은 신이 나서 이 새로 나타난 칼빈 선생님의 적을 편들었습니다. 피고인이 세르베투스가 아닌 칼빈 선생님인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르베투스는 ‘무죄 판결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 선생님께서는 제네바를 향한 고별 강설을 준비하셨습니다. 성경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인사를 건네는 사도행전 20장 17절~38절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를 풀어주려는 제네바 소의회는 세르베투스 판결을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대함을 바라며 ‘유럽 네 개 도시의 교회와 의회 자문’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서 온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방종주의자들에는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관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세르베투스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더 해악을 끼치기 전 그의 신성 모독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는 답변이었습니다. 베른은 “베른에서라면 세르베투스가 받을 형벌은 화형이다.”는 내용을 담은 답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1553년 10월 27일에 제네바 샹펠(Champel) 언덕에서 화형당했습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 정치 실권이 없는 칼빈 선생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인물이지만, {기독교 강요}에 휘갈긴 비평으로 자신을 조롱 모욕한 원수이지만, 영혼을 귀히 여기셨던 칼빈 선생님께서는 재판 과정에서나 화형 선고 뒤에도 그를 구원하시려고 감옥에 갇힌 그를 수차례 방문해 눈물로 호소하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신 칼빈 선생님 가슴은 이토록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제네바 소의회에 세르베투스를 잔인한 화형 대신 고통이 적은 참수형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도시 공통 답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칼빈 선생님 신학적 권위는 마지못해 인정한 듯하면서도 칼빈 선생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제네바 소의회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화형을 고수했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기독교 심장 삼위일체론’을 부정함으로써 죽임을 당한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을 두고 “그 당시 칼빈은 제네바 정치 실권자, 우두머리, 독재자였다.”, “칼빈은 잔인한 학살자였다.”며 역사를 왜곡해가면서까지 칼빈 선생님을 매도하는, 천박한 역사관을 가진 현대 교회들이 있습니다. 유아 세례를 부정하는 침례교입니다.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 웨슬리안 계열 교단들입니다.
침례교가 칼빈 선생님을 “제네바의 학살자”로 매도하는 것은, 그 당시 법체계와 시대 배경을 무시한 시대착오의 왜곡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 유아 세례는 오늘날 출생신고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유아 세례를 부정하며 인간의 결단을 앞세우는 그들이 세르베투스를 옹호하는 것은, 하나님만의 절대 대권에 따른 중생보다 인간 의지를 높이는 그들 신학적 뿌리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며 결단을 촉구하고, 유아 세례’를 부정했던 무정부주의자 세르베투스의 ‘인간이 주도권을 갖는 신인 협력주의 신학’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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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1: ‘테아 반 할세마 {이 사람, 존 칼빈} (서울: 성약출판사, 2007)’에서 읽은 내용을 기억해 쓴 글이었는데, 보충하면서 제 기억의 한계에 따른 오류를 덜고자 {이 사람, 존 칼빈}을 펼쳐 세르베투스와 관련한 부분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제미나이 도움도 받았습니다.
덧말 2: 교회사 한 부분을 적은 글이지만, 오해하실 수 있어서 글 남깁니다. 제가 ‘칼빈 선생님 유아 세례론과 얽혀 있는 침례교’와 ‘도르트 총회와 얽혀 있는 웨슬리 신학을 받드는 감리교와 성결교’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결코 아닙니다. 방언 은사를 가지신 유관순 열사께서 감리교 교인이셨는데, {페북}에서 토론 과정에서 저와 개혁 교회 형제들을 차단한 성결교 장기영 교수 같은 극단 웨슬리안이 아니면,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 교인들을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여깁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한 형제를 향한 정죄를 일삼는 정이철 목사 같은 극단 칼빈주의자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기독론 뼈대인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부정한 정이철 목사와 그를 추종자하는 무리를 이단으로 여깁니다.
첫댓글 이단이나 칼빈 오해자들이 흔히 하는 레퍼토리가 칼빈 학살자 어쩌고저쩌고 소리이죠.
누가 칼빈을 학살자라고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칼빈을 후원하던 관료에 의해 죽은 사람이 세르베투스 뿐이었습니까?
종교개혁가들을 후원하던 모든 관료들에 의해 죽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수만명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관료들은 신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라는 것을 원했습니다.
유아세례을 받는 아이들이 같은 날 시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시민이 되면 어떤 이득이 그들에게 있었을까요?
종교개혁가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명분을 제공한 것이고
이들을 후원하던 관료들은 이를 근거로 재세례파를 핍박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글 내용은 안 보고 제목만 보시는가요? 아니면, 제 글 논지 파악을 못하시는 걸 보니, 독해력이 부족하신 건가요?
윗글은 아랫글과 연관 있는 글입니다. 재세례파 뮌스터 반란에 관해 서술한 아랫글은 읽지 않으셨습니까?
https://cafe.daum.net/1107/Y4PR/86
<쇠귀에 경 읽기>
“누가 칼빈을 학살자라고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칼빈을 후원하던 관료”, “종교개혁가들을 후원하던 모든 관료들에 의해 죽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수만 명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시민이 되면 어떤 이득이 그들에게 있었을까요?”, “종교개혁가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명분을 제공한 것이고, 이들을 후원하던 관료들은 이를 근거로 재세례파를 핍박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 재세례파가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재세례파 뮌스터 반란’에 관해 자세히 적어드렸음에도, 읽으면 읽을수록 괘씸한 글, 음모론의 글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을 후원하던 모든 관료들에 의해 죽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수만 명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이지끼을 님,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四季 朴埰同
사계님은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관료 후원적 종교개혁" 이라고 또는 영어로 "Magisterial Reformation"이라고 검색해 보시면
많이 있습니다. 찾아 보세요.
@이지끼을 ‘Magisterial Reformatio’라는 용어를 내세워 논점 일탈 오류 범하지 마시고, “종교개혁가들을 후원하던 모든 관료들에 의해 죽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수만 명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하셨으니, 누구한테 들으셨는지, 밝히십시오.
@이지끼을 <Magisterial Reformation 뜻>
종교개혁 시대 때 루터, 칼빈 선생님께서는 국가가 무정부 상태(재세례파의 광기)로 치닫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은 ‘Magisterial Reformation’, 이 용어를 ‘관료들 눈치나 보며 비위를 맞춘 종교개혁’으로 오해하시나 봅니다. 그렇다면, 그 오해는 역사 진실과 정반대입니다. 이 용어는 ‘종교개혁의 교회는 국가 질서를 전복하려는 광신도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종교개혁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국가 권위(Magistrate)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종교개혁을 공고히 하셨다.’는 종교개혁의 질서, 정통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긴밀한 협력”이라고 했지만, 칼빈 선생님 경우, 관료들 눈치나 보며 관료들 바람에 협조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관료들 그릇된 신앙이나 신학을 교정해 제네바를 하나님 통치 아래 두려고 하신 그분께서 관료들에게 아부나 한 분이셨습니까? 제네바에서 그들에게 추방당하시면서까지 그들에게, 그들 그릇된 신앙이나 신학에 굴복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四季 朴埰同
지금 찾아 보니 숫자는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것 과는 다르네요,
It is estimated that between 1,500 and 5,000 Anabaptists were executed during the 16th and
17th-century reformation, primarily by Catholic and Protestant authorities who viewed them
as dangerous heretics.
They were frequently killed by drowning, burning at the stake, or decapitation for their belief in adult baptism.
이글에 authorities 라고 있는데 관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숫자는 제가 더 찾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