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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화는 온몸을 던지는 엄청난 고행(苦行) |
주간조선에 1년2개월 동안 55회를 연재한 ‘김영택의 펜화로 보는 한국’이 지난 주로 아쉬운 막을 내렸다. 아름다운 우리의 고건축물과 풍경을 매회 생생한 펜화와 빼어난 글담으로 되살려낸 김영택(61) 화백은 그림으로는 ‘시사주간지 사상 최장수 연재’라는 기록을 낳았다. 지난 11월 8일 인사동의 화실에서 만난 김 화백은 “2주일 이상의 제작기간이 필요한 펜화를 1주일에 완성하는 강행군을 거듭하다 오른쪽 팔과 어깨에 무리가 왔다”며 “1년 이상의 휴식기간을 가진 후 새 작품으로 주간조선 독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펜화가 김영택씨는 재가승(在家僧)을 자처하는 독실한 불교인이다. 법명은 ‘늘샘’. 그는 환생을 굳게 믿는다. “2002년에 통도사에서 그림을 그릴 때 한 스님이 나를 보고 그래요. 전생에 영산전팔상탱화를 그린 유성(有誠)스님이었다고.” 승려 유성은 1775년에 보물 1041호인 통도사 영산전의 팔상도(八相圖:석가모니의 생애를 8장으로 나눠 그린 불화)를 그린 우리나라 불화의 거장이다. “유성스님은 신기(神技)에도 불구하고 여덟 점의 불화만 남겼어요. 못다 그린 그 업장을 내가 이어받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김씨가 그린 펜화는 모두 180여점.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사실적 묘사로 담아낸 그의 그림을 두고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펜이라는 경질(硬質)의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온몸을 소진시켜 그려내고 있는 그의 그림 안에는 기록적인 충실함과 펜화의 매력적인 경지, 한국적인 대상의 아름다움이 서식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김영택씨의 펜화는 건물의 비례에서부터 계단의 돌조각 수에 이르기까지 실제 건물과 한치도 다름이 없다. 김씨는 “언제 소실될지 모르는 유적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므로 임의로 왜곡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의 그림이 단순한 건물 외양의 스케치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도목수들은 펜화를 보고 “대들보, 도리, 서까래의 맞물림 같은 건물의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그린 그림”이라며 놀라워한다. 홍익대 공예과를 졸업한 김씨는 실제로 고미술과 고건축에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유물에서는 닳아 없어진 돌의 음영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빛바랜 단청문양을 화려하게 복원해낸다. 펜화에서 가장 힘든 기법은 0.07㎜ 펜선의 농담(濃淡)만 가지고 원근을 표시하는 것이다. “가는 선의 원경을 그릴 때는 한 획의 실수가 그림을 망칩니다. 선을 쭉쭉 긋는 것은 쉽지만 긋다가 짧게 멈추는 것은 근육에 굉장한 무리를 줍니다. 제 팔이 망가진 것도 그 때문이지요.” 온통 까만 블랙스페이스도 굵은 펜촉으로 처리하면 쉽지만 가는 펜으로 수백 번 덧그어서 완성해야 질감이 제대로 살아난다고 하니, 그의 그림은 티베트의 승려들이 오색 돌가루를 부어가며 그리는 만다라에 버금가는 고된 신행(身行)이 아닐 수 없다.
펜화가가 되기 전 김영택씨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디자이너였다. 미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제일기획, 나라기획을 거쳐 1977년에 홍인디자인그룹을 설립한 김씨는 1993년 국제상표센터(ITC)가 세계 최정상의 산업디자이너 57명에게 헌사한 ‘디자인 대사(Design Ambassador)’에 선정됐다. 57명 중에는 그래픽디자인계의 태두라 불리는 미국의 밀턴 글레이저를 비롯해 CI(Corporate Identity:기업이미지 통합디자인)계의 거장인 폴 랜드, 소울 바스 등이 포함돼 있다. 한국인으로는 김씨가 유일했다. 김씨는 고구려 벽화의 청룡, 봉황 등 한국적 심벌을 응용해 세계 디자인시장에서 인정받았다. 당시 그가 만든 해표 식용유, 삼천리그룹, 동서가구 등의 심벌마크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디자이너였지만 유능한 사업가는 못됐다. 700만원에 주문받은 CI를 1200만원의 제작비를 들여서 만들기도 했고, 호황이라고 직원 보너스를 1년에 9번씩 지급하기도 했다. “방만한 경영이었죠. 디자이너로 명성 좀 얻었다고 기술력만 믿고 있다가 결국 단 한번의 자금압박으로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1994년 그는 출판사에 무리한 투자를 했다가 연쇄부도를 막지 못해 파산하고 말았다. “관악산에 올라가 자살할 생각까지도 했다”는 그를 붙잡아준 것은 가족과 신앙이었다. 육식과 술·담배를 끊고 무욕(無欲)의 삶을 살리라 부처 앞에 다짐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죄악을 저지를 순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인연이 펜화였다. 김영택씨가 펜화를 만난 것은 회사가 부도나기 1년 전 디자인 대사의 자격으로 프랑스에 갔을 때다. 루부르박물관 기념품 가게에 빼곡히 진열된 펜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거다 싶더군요. 같은 모노톤이라도 연필화에선 느끼지 못한 금속 펜의 강렬한 터치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회화보다 실용적인 디자인을 좋아한 그에게 펜화의 사실성은 딱 맞아떨어졌다.
나이 오십에 그는 펜화가로 새출발했다. 디자인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틈틈이 스케치북을 들고 산사(山寺)를 찾아나섰다. 집보다 산이 편했고 펜을 쥐면 행복했다. 그리고 12년, 그는 마침내 펜화의 불모지인 한국에 새로운 미술 장르를 뿌리내렸다. “내 그림의 매력이요? 쉽다는 거겠죠. 옛날 이발소 그림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언제까지나 서민이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김씨의 펜화에는 반아이크나 렘브란트의 펜화와 다른 동양적 서정미가 있다. 펜 터치엔 붓의 자국이, 잉크엔 먹의 여운이 배어 있다. 산과 바위와 소나무 사이로 졸졸졸 시냇물 소리, 사락사락 바람 소리가 들린다. 주간조선의 연재를 거치는 동안 펜화가 김영택씨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그림값도 껑충 뛰어올라서 한 점 팔면 한두 달은 먹고 살게 됐다. 앞으로 출간될 화보집 인세와 작품의 저작권료만으로도 노후 걱정은 잊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다. 디자인 대사로 명성을 날릴 때도 이른바 주류 디자이너인 대학교수들은 그를 질시했다. 펜화가로 입지를 굳혔어도 화단(畵壇), 평단(評壇)과는 교분이 없다. 김영택씨는 말한다.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어요. 미술이든, 음악이든, 종교든, 한국적인 것이 국내에서는 푸대접받지만 세계시장에서는 오직 그것만이 통한다는 것을.” 인맥,학연과 지나친 폐쇄성으로 닫혀진 국내화단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꼬집기도 한 대목이다. 김영택씨의 꿈은 죽기 전까지 500점의 우리 문화재를 펜화로 완성하는 것, 그리고 사라진 유적을 펜화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기록마저 희미해진 신라의 황룡사9층 목탑, 일부 사진만 남아있는 서대문, 영흥문 등의 유적을 그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료를 모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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