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중군진산 기운서린 반여 삼어마을
청동기 복합유적 가야고분군 발굴지
삼어(三漁) 마을은 반여1동의 서쪽 수영강 건너편에 강을 인접하고 반여4동(2005. 9. 1, 반여1동에서 분동)의 지역으로, 지금의 반여창신아파트 주변일대로 반여동에서 가장 오래전에 형성된 자연마을이다. 1937년 간행된 동래군지(東萊郡誌)에는 중군진산(中軍陣山)은 “군의 동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조 권2(1455년 세조 1)의 계미조에 경상도 군익도편성표의 동래진(東萊鎭)을 보면, 우익(右翼)은 울산(蔚山)이고, 중익(中翼)은 동래(東萊)이며, 좌익(左翼)은 기장(機張)으로 되어 있다. 중군진산(中軍陣山)은 당시 중익군의 진지(陣地)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군진산에는 미군부대가 진지를 구축하여 전후·방 교대 시 부대가 주둔하여 중군진산의 면모를 갖추었다.
삼어(三漁)는 마을 세 곳에 돌탑이 서 있었는데 1800년대경 지도에 삼어(三漁)라는 지명이 나온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일제 강점기 때 마을 이름에 천(天)자, 어(御)자를 사용해서는 안되니 고기잡을 어(漁)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는 설에 대해서는 그 당시 동래지방에 어사가 나오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어사가 나오기를 염원하는 어사탑으로 바로잡았으면 한다고 향토사 관계자는 말한다. 돌탑 1기는 강변 도시고속도로 쪽에 있어 탑거리라 하였고, 돌탑 2기는 반여아파트 안에 있었고 돌탑 3기는 대우자동차 출고장 자리에 있었으나 모두 마을 사람들이 담장 등으로 사용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영강을 따라 올라오는 고기들로는 봄철의 황어, 여름철의 은어, 가을철의 연어였다. 봄철에 황어가 오르면 농부는 괭이로 때려잡았고 달빛의 여울물을 치고 오르는 은어 떼가 장관이었으며, 가을철에는 연어가 풍년을 알리기 위해 고향을 찾아 먼바다에서 온 손님이었다. 이 세 종류의 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고기잡을 어(漁)자를 붙여 삼어(三漁)라 했다고도 한다. 또한 세 계절에 고기가 강에서 뛰어 논다는 풍류적인 지리환경적인 면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마을 뒷산인 중군진산 반여창신아파트(반여4동 산 345, 345-1번지) 일대 구릉 언덕에서 청동기시대의 취락상과 가야시대 전기부터 중·후기에 이르기까지 가야고분의 변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굴된 반여동 고분군(盤如洞 古墳群)이 자리 잡고 있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이 고분군은 청동기시대부터 가야·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遺構)가 확인된 복합 유적으로 복천동·연산동 고분군과 아울러 위치적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고분군의 하나이다.
1904년 간행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 안에 의하면, ‘동상면 관내 삼어동이 있다. 당시 삼어동의 호수는 15호이다. 박·문·김 씨 등의 성씨가 살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1980년 반여동이 준공업지구로 선정되자 삼어마을에는 우후죽순처럼 공장이 늘어나 공업지대가 되었다. 삼공피혁(현대아파트 자리), 프리나사료(일동아파트 자리), 우성화학(우신아파트 자리), 범양사(신동아파트 자리), 삼화방직(우방아파트 자리) 등의 공장들이 마을 변두리에 들어서 경제건설의 마을이 되었다. 2000년대부터 공장이 하나 둘 타지로 이전함에 따라 그 부지가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