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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추억따라 반세기
-구마계곡 방문기-
筆花 黃 晋 燮(수필가, 시인, 번역가)
익숙한 길이지만 오늘의 중앙선 열차 여행은 무척 설레는 길이다.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산야를 바라보면서 내륙으로 달려보고 싶었다.
열차여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KTX가 있고 새마을호도 있지만 즐겨 타는 것이 무궁화호다.
열차가 서는 곳마다, 가슴 벅찬 지난날의 역정(歷程)과 사연이 담기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양평, 역동적으로 활동하던 그 시절, 정부 새마을운동 주무부가 지정한 「새마을 연수원」을 책임지고 운영했던 곳이다. 한적한 한강변에 세워진 연수원이었는데 일 년에 3만 명의 각 분야 직능지도자와 새마을 지도자를 교육시키는 사회교육기관이었다. 법인을 설립하고 활성화시킨 보람도 있었지만, 연수원 운영을 둘러싸고, 반(反) 새마을적인 비리와 불의에 탐닉하던 일부 사이비 종교인 집단 모리배들과의 싸움에 스릴도 있었다.
원주, 군대생활의 한때를 보낸 곳이다. 비록 사병이었지만 장교들의 신임을 받아 담당업무를 수행하는데 폭넓은 재량을 인정받았던 것이 보람스러웠다. 그때 나를 신뢰해 주고 소신껏 일하게 해주신 직속 장교님은 당시 소령이었는데, 후일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신 덕장 오 자복 장군이셨다. 그 부대는 대적선전대였다.
제천, 20대 말기였다. 지방에 사는 다섯 살 연하 K양은 나의 펜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사회교육 강의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나의 강의를 듣고 펜팔을 요청해와 많은 편지가 오고가는 사이에 사진도 서로 주고받았다. 내가 살고 있었던 서울과 K양의 고장 사이에 중간 지점쯤 되는 제천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시간이 새벽1시, 각기 일을 끝내고 밤차를 타면 상행과 하행이 교행(交行)되는 제천역의 그 시간이 새벽 1시였다. 통행금지가 있던 그 때에 우리는 여관에 들어 탁자 위에 촛불을 밝히고 동이 틀 무렵까지 필담(筆談)으로 앵두 같은 연정을 나눈 곳이다. 꽃을 꺾지 않는 연정을 Platonic L... 라고 한다던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곳이다.
단양, 내가 참 좋아하는 곳이다. 억센 몸부림으로 구비치는 소백산맥이 있고, 충주호 뱃길도 있어 울적할 때 자주 찾는 곳이다. 오래전 어느날 혼자 여기 와서 눈 쌓인 산길을 걸었었다. 생애의 한 장을 넘기는 그날 많은 생각을 하며 걸었던 그 산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죽령터널을 지나 어느덧 영주다.
나의 태생지는 아니지만 초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철이 든 곳이니 고향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찾으면 농촌에서 만년(晩年)에 든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6.25 사변 직후에 내손으로 각본을 쓰고 소인극(素人劇)을 꾸며, 암울한 시대에 선무공작활동으로 읍면 순회공연을 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때가 중2때였다. 방학 때는 농촌 계몽(啓蒙)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으니 나의 평생 강의활동의 요람이 아니었던가 싶다. 맑은 꿈을 파란 구름위에 얹어놓고 마음껏 희망의 나래를 펼쳐가든 그 시절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고장이다.
영주역에서 내려 영동선으로 갈아탄다. 오늘 내가 가는 곳은 경북 봉화군에서도 가장 오지인 소천면 구마(九馬) 계곡이다. 벌써 2년 동안이나 이곳에 가보고 싶어 기회를 보아 왔는데 이번에는 모든 것을 손 놓고 그냥 떠난 것이다.
1961년 하반기, 전국에 재건국민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본부에는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고 있던 유진오박사에 이어 星泉 유달영 박사께서 본부장을 맡고 계셨다. 유달영 선생은 덴마크중흥의 원조(元祖)인 그룬트비히와, 부흥운동가 엔리코 달가스의 개척정신을 우리나라에 전파하셨으며 사회개혁운동에도 앞장 스셨을 뿐 아니라 무궁화 개량과 보급에도 힘을 기울이셨다.
그룬트 비히(Nikolai Fredric Severin Grundt'vig/1783-1872)는 역사가, 목사, 시인, 정치가로서 민중고등학교 운동의 주창자였고 그 실현을 본, 덴마크 중흥의 정신적인 지주(支柱)였다.
엔리코 달가스(Enrco Mylius Dalgas/1828.6.16-1894.4.16)는 덴마크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여 실의에 찬 국민들에게, “밖에서 잃은 땅 안에서 찾자”라고 외치며 용기를 불어넣었고,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푸른 국토를 가꾸었다. 이로써 덴마크 부흥을 실현한 선구자다.
그때의 재건국민운동은, 70년대에 도시와 농촌에서 꽃피운 새마을 운동의 선행운동으로서, 덴마크 개척사를 우리나라 재건의 표상으로 삼고 있었다. 지표는 자조, 자립, 협동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지표는 근면, 자조, 협동이 아니던가.
60년대의 재건국민운동 교육원과, 70년대와 80년대 중반기까지 활성화 되었던 새마을 연수원이 덴막의 민중고들학교를 본으로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경상북도는 전국적으로 이 운동에 앞서나간 지역이었다.
20대의 청년남녀 210명을 선발하여 4기로 나누어 철저한 합숙교육을 시켜, 국민운동 지도요원으로 위촉하였다. 투철한 역사의식과 사명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은 국민 교육과 향토개발에 선구자가 되겠다는 다짐과 꿈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해 12월부터 도내 도시와 농촌 전 지역에 “하면 된다.”는 의식과 “우리도 잘살아 보자”는 정신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나는 이 대열에 선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 사업은 당시 박 경원 도지사가 직접 주도한 사업이었으며, 실시간으로 그 실적을 확인하고 있었다. 박 지사는 그때 지역개발과 국민교육에 남다른 조예와 경륜을 지니신 분이었다. 도지사는 재건국민운동 도 지부장을 당연직으로 겸하고 있었다. 도지부의 배치계획에 따라, 그해 12월 한 달 동안 k동지와 한조가 되어 봉화군 소천면에서, 오지와 오지로 연결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소천면의 면적은 고령군과 맞먹는 광면(廣面)이고, 면내에 5개소의 기차역이 있다..
그 해 겨울의 한파는 엄혹했다. 속초 앞바다가 얼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봉화군청 소재지 까지 버스로 5시간이 걸렸다. 도로는 거의 비포장이었으며 길은 험하고 좁았다. 봉화에서 일박하고 이튿날 소천면으로 갔다.
면장과 촉진회 간사로부터 면내현황을 설명 듣고 오후에 고선리(古善里)로 향했다. 구마동(九馬洞)은 옛 부터의 명칭이고 행정 동명으로 고선리다. 어릴 때 삼척 구마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본래는 강원도 삼척군에 속했던 손꼽히는 오지였다.
1961년 12월 초, 실로 54년 전이었다.
12km를 걸어서 계곡을 들어가는데 길이 전혀 없었다. 계곡에 깔린 돌과 바위를 타고 넘어 들어가는 곡예였다. 중간 중간에 개울 저만치 산 밑에 집이 한 두체씩 보였으나 거기에 정신 팔릴 겨를 없이 서둘러 들어갔는데도 대 여섯 시간이나 걸린 것 같았다. 우리가 가는 곳은 깊은 골짜기 막장에 있는 새 터 마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늘은 손바닥만 했고 울울 창창 적송나무는 원시림을 방불케 했다.
험한 길에서는, 일행인 k동지와 서로 손을 잡고 의지했다. 이러한 스킨십을 통해 동지의식과 결속력이 깊어져 갔다.
산골의 겨울 저녁 어둠은 빨리 내린다. 이장네에 당도하였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이 험한 길을 안내자 없이 두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대 여섯 집이 모여 사는 새 터 마을 이장네 사랑방에는 석유 등잔을 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은 초가집이고 벽은 흙벽돌에 신문지 한 장도 바르지 않았으며 바닥에는 멍석을 깔았다. 흔한 장작으로 군불을 계속 떼고 있어 방이 후끈후끈하여 금방 추위가 놓였다.
이장은 40대의 장년으로 우리를 ‘도에서 온 손님’이라고 극진히 맞아 주었다. 저녁상이 나왔다. 잡곡밥에 배추 우거지 국과 된장찌개, 경상도식 짠지에 귀한 반찬 한가지로 구운 고등어 두 토막이 작은 접시에 담겨 나왔다. 힘든 먼 길에 시장 끼가 들어 맛있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상을 물릴 무렵부터 사람들이 모여왔다. 한 동리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뛰엄뛰엄 독가 촌으로 떨어져 살고 있어, 서로 나누는 인사에 반가운 정이 담긴다. 열두 사람이 모였다. 처음으로 이렇게 많이 모였다고 한다. k동지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우리가 온 동기를 말하고, 나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사실 할 말이 궁했다. 여기 두멧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될까? 역사의식, 경제개발, 협동정신, 이런 것들은 이 사람들에게 해당 되지 않을 듯 했다. 다만 이 빈곤과 역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좀 더 잘사는 방법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강의를 시작하고 한 15분쯤 지났을까. 지각생 한사람이 들어온다. 서른 살 쯤 되어 보이는 비교적 젊은 청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0대 중반, 나와 갑장이었다. 모두들 이 청년을 보고 먼 길 오느라고 고생 많았다고 추스른다. 얼굴이 거멓게 얼었으나 그래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발에는 까만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양말이 아니었다. 발에 새까맣고 두껍게 때가 낀 것이었다. 발목까지 눈이 쌓인 길을 맨발로 집신을 신고 ‘도에서 온 손님’ 강의를 듣기 위해 20리를 걸어 내려왔다고 한다. 가슴이 멍멍해 졌다.
이런 오지에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조국이라는 것을 느낄 때 새로운 분발심이 치솟았다.
다시 말을 시작하여 잘사는 나라의 이야기를 했다. 주로 덴마크와 일본, 그리고 독일 이야기였다. 이 나라들이 전부 패전국에서 부흥하여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는 말로 끝맺음을 했다.
시각은 겨울밤이 이슥한 9시경이었다. 모처럼 ‘도청 손님들’도 왔고 이렇게 많이 모였으니 손님 환영연을 연다는 것이다. 술상이 나왔다. 큼직한 양푼에 가득히 담긴 노란 술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옥수수 술이었다. 안주는 저녁상에서 먹은 배추 짠지와 감자 붙임이 나왔다. 나는 이번 길에서 내가 그들에게 어쭙잖은 감화를 주기 보다는 도리어 많은 것을 듣고 느끼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모처럼 들은 외국이야기가 신기했으며, 우리도 잘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마셔보는 옥수수 술은 달큰해서 마시기는 좋으나 주기가 대단했다. 한 순배 술잔이 돌고 얼큰하게 화재가 무르익을 무렵 밤이 깊어갔다. 돌아가는 시간이 있음으로 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늦게 온 맨발 청년을 방에 잠간 기다리게 하고 밖으로 나가 뜰 앞에 내려서서, 용기를 잃지 말자고 하면서 일일이 손을 잡았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와 가방에서 정말로 까맣고 도툼한 양말 한 켤레를 꺼내 청년에게 신겼다. 둥그렇게 뜬 큰 눈에 물기가 어렸다. 화전민이라고 하는 그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길이 먼데 빨리 올라가라고 등을 밀었다. 청년은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설광(雪光)을 어림으로 이십리 토끼 길을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모임이 파하고 잠자리가 펴진다. 얇은 요 한 장을 가로로 깔아 두 사람이 어깨만 걸치도록 하고, 이불은 여름에 덮는 삼 배 홑이불이다. 그래도 춥지는 않다. 군불아궁이에는 밤새도록 장작불이 타고 있다. 우리는 피곤하기도 하고 술기운도 있어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군불솥에서 데워진 더운 물로 세수를 하고 아침상을 받았다. 이장 댁은 ‘도에서 온 손님’들 밥상 때문에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어제 저녁과 같은 메뉴였다. 우리는 맛있게 밥과 반찬을 비웠다. 그것이 이장 댁 아주머니에 대한 예의가 될 듯싶었다. 아침 식후, 서둘러 그 동리를 철수했다. 하얗게 눈 쌓인 설경이 신비로웠고, 길 없는 그 길을 다시 내려오느라고 힘들었다는 기억이 남을 뿐이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소천면 오지마을을 거의 다 돌고, 연말에 안동에서 개최된 단합대회로 집결했다. 유달영 본부장께서 직접 참석하셨고 도지사를 비롯한 시장 군수와 210명 요원들이 모인 단합대회였다. 나는 여기에서 구마동 골짜기를 다녀온 이야기를 담아 시범 발표를 하였는데 본부장으로부터 뜨거운 격려를 받았다. 봉화군에 대한 과업은 무사히 마친 것이다.
우리 동지들의 순회 일정은 지역을 갈아가면서 3개월간 도내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우리들의 과업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도지사는 크게 만족하면서 이듬해 봄 성대한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들을 격려해 주셨다.
벅찬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반백년도 넘는 긴 세월이 흘러갔다. 나라는 근대화되고 번영의 시대에 살게 되었다. 보리 고개가 없어진지 오래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마음껏 뽐내면서 절제심을 상실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때때로 구마동은 어떻게 변했을까. 화전민이었던 맨발 청년의 살림살이는 좀 낳아졌을까.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은 트였을까. 우리를 극진히 마지해준 이장은 아직 살아있을까. 무척 궁금하여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그곳을 오늘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주에서 다시 산과 계곡을 타고 영동선 열차가 달려간다. 약 1시간 만에 현동역에 닿았다. 소천면소재지와 가까운 역이다. 시간은 아직 오후 2시를 조금 지난 한낮이다.
열차에서 내려 역 대합실로 나와 사무실을 노크했으나 역무원이 없다. 무인역인듯 했다. 대여섯 층계를 밟고 역아래 행길로 내려섰으나 다니는 사람을 한사람도 볼 수 없다. 길 아래 흐르는 낙동강 상류 하천이 고운 모래 위를 흐르고 있다. 건너편 산은 이제 막 녹색을 벗어나 푸르러 가고 있다. 열차가 떠난 역 주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위에 정적이 흐른다. 매혹적인 적막의 시간과 풍정(風情)을 경험한다. 적막의 소리가 마치 이명(耳鳴)처럼 귓속에 울려온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무턱대고 열차진행 방향을 따라 200m쯤 걸어갔다. 울타리 넘어 역구내 하치장에서 하역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면 소재지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오던 길을 되돌아 약 2km를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길은 시간의 제약이 없는 길이라 천천히 산간의 정취를 즐기면서 걷는 것도 싫지 않았다. 약 1.5km를 나오니 울진으로 가는 상 하행 대로에 자동차들이 연락부절로 달리고 있다. 바른 쪽으로 꺾어 100m 도로터널 을 벗어나니 바로 마을이었고, 마을 앞 대로변 나무 그늘에 놓인 들마루에 대여섯 사람이 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한가로운 시골에 낯선 길손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어디를 가느냐고 친절히 묻는다. 이번 길을 가는 내력을 소상히 말했더니 여간 고마워하지 않는다. 50여년이 지났는데, 다시 이 고장을 찾아주는 것이 그렇게도 고맙다는 것이다. 이 동리는 현동 4리, 비교적 마을의 중견이 되는 장년들이다. 조금 후, 마을의 한 아주머니가 낯선 사람이 동리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먼빛으로 보고 커피를 끓여서 마호 병에 담아 들고 나왔다.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나왔다는 것이다. 나에게 먼저 권하고 모두 나누어 마시면서 구마동 계곡에 대해 알려준다. 길이 뚫려 1차선 시멘트 포장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아직 버스가 다니지는 않고 승용차만 다닐 수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과 헤어져 300m쯤 걸어 면소재지 택시 대기소를 찾아갔다. 마을 에서 들은대로 B기사의 차를 타고 구마동으로 향했다. B기사는 친절과 성실성이 몸에 배어 보였다. 구마동과 소천면 뿐 아니라 봉화군 전 지역 관광을 비롯한 지방사정에 두루 밝다. 그는 오늘 운전기사에 그치지 않고 반세기만에 찾아온 나그네의 안내와 관광해설까지 맡아 주었다.
태백시, 춘양면, 현동으로 나누어지는 세 갈레 갈림길을 조금 지나, 좌회전해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정표가 가지런하게 서 있다. 여기서부터 고선교 다리를 지나면 구마동 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입구에 뛰엄뛰엄 집들이 서 있어 옛날과는 다른 모습이다. 1차선 시멘트 포장으로 승용차 1대가 다닐만한 길이 나있다. 왼쪽 낭떠러지 밑에는 깊고 얕은 물 깊이에 따라, 푸르고 희게 끝없이 물이 흐르고 있다. 흐르다가 여울을 만나면 물소리가 온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54년 전 그 겨울날, 여섯 시간이나 걸려 걸어 들어간 그때를 생각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B기사는 골짜기의 변천사를 설명하면서 천천히 운전했다.
1962년 봄부터 이 계곡에 고선국민학교가 문을 열었다가 1992년 3월 1일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는 설명이다. 1961년 12월 우리가 여기를 다녀간 이듬해 봄에 학교가 들어서 30년 동안 골짜기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14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 깊은 계곡에 학교 다닐 아이들이 없어졌으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폐교되기 하루 전 마지막 수업을 마친, 그 여교사와 졸업생 아이들의 마음에 얼마나 진한 눈물이 고였을까를 상상해봤다. 저만치 바라보이는 폐교의 낡은 문주(門柱)를 뒤로 하고, 노루목, 북말, 큰 터를 지나 새 터까지 올라갔다. 여 일곱 집이 모여 있다. 그때 내가 왔던 그 동리다. 좌담회를 하고 하룻밤 묵었던 그 집이 그 자리에 그 방향대로 있었으나 흙벽돌은 시멘트 블록으로, 지붕은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그때의 이장이 아니라고 한다. 산천은 옛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많이 갈렸다고 한다. 여기가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비포장 산판 길과 토끼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면 간기를 거쳐 마지막 동리인 도화동에 이른다고 한다. 이 길이 그날 밤 맨발 청년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그 길이다. 그 마을들은 겨우 한집이나 두 집이 살고 있는 독가 촌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도화동에는 양지바른 산 밑에 복사꽃이 만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구마 계곡은 도화동에서 다시 20km를 더 올라가 태백산 골짜기에서 시작되어 40km를 흐른다고 한다. 도화동 그 뒷산부터는 멧돼지와 노루, 산양 등 산짐승들과 지저기는 산새들, 그리고 수목들이 엉켜 살아가는 신비경이라고 하여 호기심을 돋군다. 더 이상 찻길이 없으므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B기사는 약 4km를 되돌아 가, 올라가는 길에 지나온 큰 터 도로변 민박집 앞마당에 차를 세웠다. 집 앞에 세워진 간판이 「큰 터 민박」이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k기사가 “어쩌면 그때 좌담회에 참석하신 분일지도 모릅니다”하는 귀띔과 함께 이집 주인에 관한 설명을 짧게 한다. 연령은 90세, 평생을 이 골짜기에 사셨다는 것이다
민박집 한집이 외롭게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뒷산 숲속에 또 한집이 보인다.
기사에게 차비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제시한다. 그는 돈보다는 사람들끼리의 정이 훨씬 소중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안세기 노인 내외분이 길손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B기사와는 익히 아는 사이였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기로 하고 차는 돌아갔다.
노인은 연령보다는 훨씬 젊어보였다. 다리가 약간 불편하나 인지능력은 손상이 없었다.
50여 년 전 그 겨울에 새 터에서 좌담회를 하고 갔다는 말을 하자 아스라이 기억을 더듬어 “아! ‘도청 손님들’이 다녀갔지요.” 하면서 반색한다. 그날 밤 그 모임에 참석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다시 찾아주어 고맙다는 말을 거듭 거듭한다. 멀리 도시에 나가있던 둘째 아들이 부모를 모시겠다고 돌아와 이장 직을 맡아서 아랫동네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안어른도 다리가 불편하여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옛날 집을 개조하여 기와를 얹었고, 손님방 몇 개를 꾸몄으며, 귀틀마루였을 것으로 상상되는 마루를 널찍한 거실로 만들었다.
계곡에는 벌써 해가 기울고 있다. 안팎 노인들은 근력이 부쳐,오는 손님들에게 식사 서비스는 못하지만 50년 만에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온 ‘도청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한다.
우선 물소리 가까이에 가고 싶어 뜰 앞으로 내려섰다. 도로에 면한 울타리에 재래종 하얀 목련이 만개 하였고, 그 아래 장독대엔 크고 작은 20여개의 항아리가 반질반질 윤이 난다. 물가로 가는 길 아래 내려서니 계곡에 석축을 쌓아 널찍하게 닦아놓은 ‘큰 터’에 이제야 벚 꽃이 지고 있어 불어오는 산바람에 눈송이와도 같이 흩날리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는 벚꽃축제가 벌써 2주 전에 끝났는데.....
개울 건너 깎아지른 듯한 산에는 하늘을 찌르는 적송나무가 울창하고 드문드문 산 벚꽃이 화사하다. 개울로 내려서니 여울을 흐르는 물소리가 꿈결 같다. 맑은 물에 손을 씻고 비스듬히 빗겨 보이는 ‘큰 터 민박’집을 바라봤다. 지붕위로 솟은 굴뚝으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계곡에는 벌써 어둠살이 끼이는데 높은 산에는 아직 햇살이 있다. 해질 녘에는 어둠이 아래에서 차차 산위로 올라가고, 해 뜰 녘에는 햇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이런 곳에 살았으면 날마다 새로운 시상(詩想)이 떠오를 것 같다.
저녁 식탁에 함께 앉았다. 잡곡밥에 청국장 국, 산나물 무침, 묵은 짠지..... 소탈한 식단이다. 옛날에 집집마다 썼든 둥근상 위에 옥수수 술이 담긴 알루미늄 주전자도 같이 놓여있다. 노인장과 서로 권하며 딱 1잔씩을 하였다. 여기 왔던 그날 밤 옥수수 술을 마시고는 그 후에 다시 마실 기회가 없었으니 실로 반세기만에 다시 맛보는 옥수수 술이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날 밤의 좌담회 이야기를 나누었다. 54년 전 겨울, 계절도 깊었고, 밤도 깊었던 그날의 이야기를...... 저녁상을 물리고 늦게 까지 노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안세기 노인은 가히 구마동 계곡의 역사이고 전설이었다.
13살 때 아버지가 정감록 십 승지를 찾아 이 골짜기에 들어오신 이후 지금껏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이다.(정감록에 춘양(春陽)과 그 언저리를 십 승지로 꼽고 있다)
고령임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맑은 물, 맑은 공기 덕분이라고 했다. 공기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고, 물은 계곡에 흐르는 물만 해도 1급수 인데 이집 물은 더 깊은 계곡 지류에서 호스로 끌어오는 인입수(引入水)이기 때문에 특급수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 때 구마동에는 금광이 있었고 목재 채취와 반출을 위해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골짜기가 상당히 번창했고 군데군데 주막이 있어 하루에 막걸리 소모량만 해도 10말은 되었다는 것. 해방 후 빨치산 1,2명이 출몰한 사례가 있어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와서 토벌한 일이 있었다고도 했다.
6.25사변 이후에는 주로 북한으로부터 월남해 온 사람들이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으며 당시에는 그 숫자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었다고 한다. 옥수수 술은 그때 북에서 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퍼뜨렸다고 한다. 50년대와 60년대 중반기까지는 어려운 시기였었다. 70년대에 들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때부터 골짜기에 활기가 돌았다고 한다. 화전민 약 50세대를 파악하여 가구당 50만원씩을 보조하여 도시로 나가게 했다는 것.(그 때 돈 50만원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 화전민 후손들이 잊지 않고 이 계곡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안태 고향을 찾아오는 것이다. 5월, 어버이날에 노인 회관을 찾아 큰 절을 하고 되지 1마리씩을 기증하는 일도 자주 있다고 하면서 기특하다고 칭찬 하였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길도 나고 생활개선과 소득증대가 이루어져 살판이 났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젊은 시절 새마을 운동에 열정을 쏟았던 나로서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지금 이 골짜기에는 약 70여세대가 살고 있으며 이주민이 90%, 원주민이 10%라고 한다. 노인회원이 40명이라니 노령화 율이 높은 셈이다. 생업은 민박, 농업, 채집을 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전기와 전화가 들어온 지는 오래 되었으며, 집집마다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는 필수품이고 농기계가 들어와 농사일이 별로 힘들지 않는다고 한다.
도시자본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들이 펜션이나 민박집을 호화롭게 지었다고 한다.
바캉스 계절에 골짜기는 피서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어 민박이 성업을 이룬다는 것이다.
농업은 비탈진 밭에 감자, 옥수수, 고랭지 채소, 약초제배 등이며, 무공해 식품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채집은 산나물, 송이, 두릅 등등으로 소득이 작지 않다는 것.
집집마다 거의 차가 있고, 화물차와 승용차를 각각 한 대씩을 가진 집도 여러 집이라고 한다. 50년 전, 새 터에 살던 이장은 그 후 아들이 사는 원주로 갔는데, 이제는 90이 훨씬 지났을 것이며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도화동 화전민은 50만원 보조를 받아 도시로 나갔다고한다. 나와 동갑인 그가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잘 살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개인택시기사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B기사는 면내에 익히 알려진 이웃돕기 실천자이며 특히 경노운동에 남다른 수범을 보이고 있다는 것. 해마다 마을을 갈아가며 노인정에 잔치를 주도하고 있어 칭송이 자자하다고 귀띔해 준다. 짧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구마동의 반세기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는 듯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뜰 앞에 나섰다. 초승달은 좁은 하늘을 지나 간지 오래다. 계곡물은 더욱 부풀어 오른 듯 물소리는 한층 청아하다. 칠흑 같은 계곡과는 달리 밤하늘에 별들이 향연을 이루었고 반짝이는 별빛이 가슴을 파고든다.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두멧골 밤이 깊어간다.
이튿날, 아침상을 물리고 곧 떠날 준비를 했다. 숙박비를 물었더니 대실료만 받겠다는 것. 식비를 보태어 넉넉히 사례를 하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받지 않는다. 식사는 ‘도청 손님’ 대접이라는 것이다. 햇살이 마당 앞 울타리까지 내려올 무렵 B기사가 왔다. 안팎 노인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노인에게 B기사 이야기를 잘 들었다고 했더니, 고향땅에서 먹고살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다시 고향사람들에게 되돌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한다. 내려오다가 어느 작은 마을에 들려 중년부부를 손님으로 태웠다.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영주까지 결혼식에 간다는 손님들이다. 여기에서 영주까지 택시비가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구마동 골짜기의 생활수준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 아닐까 싶었다. 박 기사는 영주까지 나를 태워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하고 춘양에서 내렸다. 대절하여 영주로 가는 손님에 대한 예의도 되고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아서였다. 어제보다 조금 많은 액수를 차비로 건넸다. 이걸 받아도 되겠느냐고 하면서 사양하나, 주머니에 찔러 넣고 기사와 작별했다.
B기사는 10월 초, 청량산 산사음악회(山寺音樂會) 때 다시 모시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춘양에서 버스 편으로 봉화를 경유하여 영주로 나왔다. 중앙선 열차, 무궁화호를 타고 귀경길에 오른다. 귀로는 길을 바꾸어 제천에서 충북선으로 환승하여 조치원 경유 경부선을 탔다. 바다가 없는 유일한 내륙도(內陸道) 충북의 산하를 달리면서 드문드문 흩어져있는 농촌정경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여정이 된다.
그렇게 가보고 싶던 구마동은 반세기에 많이 발전했으며 이제는 빈곤을 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 여정에서 뚜렷이 남는 그 고장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순기(純氣)의 고장이다. 구마동의 공기는 잡티가 전혀 없다.
둘째, 순수(純水)의 고장이다. 1급수, 특급수면 순수한 물이라 할 것이다.
셋째, 순정(純情)의 고장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순박을 극(極)한 사람들이었다. 현동4리 사람들, 구마동 노인들, 개인택시 B기사, 추호도 거짓이나 꾸밈이 없고 인정 바른 사람들, 이들이야 말로 참 인간, 순정의 사람들이다. 가을에 청량산 산사 음악회 때 또 가보고 싶은 고장이다.
(2 01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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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골 오지에서 오직 자연과 벗하며 사는 사람들의 얘기....잘 읽었습니다. 여행을 다니시면서 옛날의 추억을 다시 꺼내 보시고, 지금은 다른 나라로 수출되는 '새마을 운동'의 깃발로 새 나라로 발전이 된 이면에서, 열정을 다하셨던 젊은 날 만났던 분들을 다시 만나 보시는 모습이 닮고 싶습니다.
초창기, 새마을 운동보다 더 치열하게 들불처럼 타올랐던 재건국민운동은 권력자들에 의해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자취마저 남지 않아 후인들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리 역사상 국민자각과 향토개발 운동으로서는 가장 뜨거운 효시가 될 것입니다. 흘러간 역사를 더듬는 마음으로 그때 그곳을 다시 찾았고 이렇게나마 기록을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운동이 되어 그뒤 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동지들이 '건우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 그때의 보람을 나누고 있습니다. 관심을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