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땅 혀로 핥으며 어둠을 더듬는다
세상을 떠돈다는 건 뿔 하나 세우는 일
나선형 등짐을 지고
천리 먼 길 나선다
- 김덕남 「명주달팽이」전문, 《좋은시조》 2016. 겨울호.
삶이란 과연 어디에 이르는 일인가, 아니면 끝내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 채 자기 몸의 무게를 지고 움직이는 일인가. 김덕남의 「명주달팽이」는 이 오래된 물음을 작은 달팽이의 형상 속에 조용히 밀어 넣는다. 인간은 흔히 삶을 전진, 성취, 도달의 언어로 이해하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생은 그런 밝은 목적론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 살아 간다는 것은 "젖은 땅"을 "혀로 핥으며" 가까스로 세계를 확인하는 길이고, 어둠 속에서도 "뿔 하나"를 세워 감각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일이며, 끝내 "나선형 등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먼 길을 나서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조의 중심에는 '연약한 존재의 지속'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강한 자가 세계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어떻게 세계를 견디며 통과하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달팽이는 세상을 밀고 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더듬어 가는 존재다. 그러나 바로 그 더듬음 속에서 생의 품위가 생긴다. 자기보다 큰 어둠 속에서 감각을 접지 않고, 느린 몸으로라도 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이 작품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존재가 자기 삶을 감당하는 가장 낮고도 오래된 방식을 보여준다.
초장 "젖은 땅 혀로 핥으며 어둠을 더듬는다"는 감각의 밀도가 좋다. 달팽이는 눈부신 대낮의 존재가 아니라 습기와 어둠, 낮은 지면의 존재다. "젖은 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고, "혀로 핥으며"라는 구절은 몸 전체로 세계를 확인하는 원초적 감각을 불러낸다. 여기서 시인은 달팽이를 멀리서 설명하지 않고, 그 생명의 감각 안쪽으로 바짝 들어간다. 다만 그 감정은 과장되지 않는다. 이것을 객관화라고 할 수 있다. 객관화란 주관적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지 않고 사물의 형상과 장면 속에 감정을 거리 두어 담아내는 방식이다. 이 작품의 슬픔이 눅눅하지만 끈적이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장 "세상을 떠돈다는 건 뿔 하나 세우는 일"은 이 작품의 중심축이다. 밑줄이 그으진 이 구절은 매우 인상론적인 존재론적 은유를 이룬다. 여기서 "뿔"은 공격의 도구가 아니다. 달팽이에게 뿔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다. 그러므로 "뿔 하나 세우는 일"은 세상과 맞서 싸우는 자세라기보다, 세상에 다치지 않으면서도 끝내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떠돈다는 것은 정처 없음이고 불안이며, 동시에 살아있음의 방식이다. 시인은 유랑의 비애을 "뿔 하나"라는 작고 선명한 이미지로 압축한다. 크고 장엄한 결의가 아니라, 겨우 하나의 뿔을 세우는 행위, 그 미세한 긴장이 이 시조의 정서적 힘을 견인한다.
종장 "나선형 등짐을 지고 / 천리 먼 길 나선다"에서는 달팽이의 껍질이 삶의 상징으로 바뀐다. "나선형 등짐"은 집이면서 짐이고, 보호막이면서 운명이다. 누구나 제 몸에 붙은 과거, 기억, 가족, 상처, 책임 같은 것을 등에 지고 간다. 달팽이의 껍질이 아름다운 나선형 형태를 띠지만, 시인은 그것을 장식으로 보지 않는다. "등짐"이라고 부름으로써 생의 무게를 부각한다. 이때 "나선형"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삶은 곧장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돌고, 감기고, 되돌아오는 듯하면서도 조금씩 바깥으로 확장된다. 달팽이의 길은 직선의 승리가 아니라 곡선의 지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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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나선형 등짐을 지고 어둠 속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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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미덕은 작은 것을 작게 주지 않는데 있다. 달팽이는 미물로 머물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감각을 세우는 존재, 제 집을 짐처럼 지고도 먼 길을 나서는 존재로 고양된다. 관조의 태도도 돋보인다. 관조란 세상을 성급히 판단하거나 감상으로 덮지 않고, 그 본질을 고요히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시조는 달팽이를 불쌍하다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젖은 땅, 뿔, 나선형 등짐, 천리 길이라는 시어를 차례로 놓아 독자가 스스로 생의 무게에 가닿게 한다.
다만 "천리 길"은 다소 익숙한 관용적 표현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앞의 "혀로 핥으며", "뿔 하나 세우는 일", "나선형 등짐"이 워낙 구체적이고 신선하기 때문에, 조금은 상투적 울림을 남긴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달팽이의 느린 걸음과 대비되면서 역설적 장대함을 만든다. 달팽이에게는 몇 평의 땅도 천리일 수 있으니, 이 상투성은 어느 정도 작품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결국「명주달팽이」는 느린 존재의 품격을 노래한 시조다. 크고 빠른 것들이 세상을 차지하는 듯 보이는 시대에, 이 작품은 낮은 곳을 혀로 더듬고 작은 뿔 하나를 세우며 등짐을 지고 나아가는 생명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처연하지만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오래 바라볼수록,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나선형 등짐을 지고 어둠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이 작은 달팽이는 그렇게 우리의 삶의 가장 느린 자화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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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조사랑님의 네이버 블로그 <시조앤시 리뷰>에서 가져왔습니다.
등짐 진 미물의 존재론과 느린 생의 품격 / .. : 네이버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