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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김지은 외 씀 / 교육공동체벗
2025년 9월 24일 발제 : 장호정
* 작가소개
여는 글
소복이 : 만화가
1부 – 어린이라는 사상
장희숙 : <<민들레>>편집장, 입양원 봉사자
공진하 : 작가, 특수교사
서한영교 :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2부 – 우리는 어린이를 품고 산다
배경내 :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현유림 : 초등교사
김윤일 : 변화의월담, 놀이, 교육연구자
3부 – 어린이와 함께 사는 사회
변진경 : <<시사IN>> 기자
김희진 : 변호사
김지은 :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김중미 : 작가, 기찻길옆작은학교
닫는 글
서정흠 : 시인, 산골농부
* 발제
296p. ‘어떻게 살아야만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깨끗하고 고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좋은 상상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 그러니까 오늘부터 좋은 상상부터 해 볼까 해.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까 해.
아무리 어렵더라도 먼저 나를 바로 세워야만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가장 먼저 지난 잘못을 돌아보고 뉘우치면서 조금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그래야만 우리가 꿈꾸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로 발제를 시작할 까 한다. 미성숙한 나도 어른에 속한다면, 이런 어른이 되고 싶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어른이고 싶다.
< 주기만 하는 사랑은 없다 >
7p. 골치 아픈 어른의 인생에 비하면 아이의 울음은 얼마나 낮은 난이도인가. 분주한 답변자들은 대부분 문제를 정성껏 읽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답이 제출될 리 없다. 어린이의 흐느낌은 달콤한 상자 안에 밀봉되곤 한다. 아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겨우 울음을 그친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면 문제 해결로 간주된다.
해결이라고 믿고 내려놓았다가 발등 찍었던 내가 실수한 육아의 순간도 보였다. 찍어 누르기와 무시가 부르는 어른의 행패 같은 느낌이다. 쉽게 생각한 오답에 정답이라는 어른의 착각이 아이의 포기를 만든다면 너무 큰 실패작 아닐까.
인간이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데, ‘너를 사랑해서 그래.’ 라는 합리적 통치 같은 이 말이 무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성을 갖고 책임감에 무게를 가져야함이 필요하다 생각한 부분이다.
39p. 한명이 울기 시작하면 ‘파도를 타듯’아기들 사이에 울음의 물결이 출렁일 때가 있다. 유아심리학에서는 이 행동을 ‘아기들끼리 언어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감으로서의 울음’ 설에는 타인을 모방하는 ‘거울 뉴런’을 작동시켜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료를 어려움에서 구출하기 위한 집단행동이라는 것이다.
나 또한 시설에 모여 있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상상하면 더 진한 애잔함으로 느껴질 부분이었는데 다르게 해석 해볼 부분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용기를 더하고 싶은 부분.
울음이 공감과 구출의 행동이라면, 이 아기들이 커서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를 바란다.
단순한 농담의 웃음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울음보다는 웃음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선조들(어른들)이 남겨준 모습인 해학을 통한 삶의 지혜도 상생일테니, 웃음으로 해소하는 의도적 행위도 공감이고 구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울타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서럽고 어려운 일이라지만, 부모가 없어도 나름 살아갈만한 세상이라고 신뢰를 갖게 하는 것.
자신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을 그들이 실감하고, 스스로 불행할 수 밖에 없다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서 아이의 삶이 시작 된다 >
어린이들은 왜 자꾸 쫓겨날까.
키즈 존, 노 키즈존, 키즈 케어 존에 대해 깊이 생각 해봤다.
81P. 노 키즈 존 : “합리적 이유 없이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차별행위” (국가인권위원회, 2017)
키즈카페 : “가만히 있어라, 조용히 있어라, 돌아다니지 말아라는 잔소리를 안 해도 되는 곳은 여기뿐이다.”
대형 소핑몰 : ‘돈’을 낸 ‘고객님’으로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자본주의의 쾌적함.
혐오에 움츠러들고, 시장으로 쫓겨나고, 고객으로만 대접받는 사회적 신체의 공간.
이렇게 몸을 쪼그리게 하는 감응의 구석에는 어린이들도 함께 있다.
나의 아이가 3살 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발에 바닷물을 닿게 해보고, 해변의 흙으로 모래 놀이를 경험 시키고 싶었던 이유와 더불어 나의 감성에도 1을 더하고 싶었다. 커피를 포장해 갈 생각으로 그곳에서 가장 멋진 카페로 들어갔다. 야외 테라스를 따라 걸어 들어가는데 직원이 밖으로 뛰어 나와 하는 첫 말이, “들어 올 수 없어요.” 였고, 그 때 노 키즈 존 이었음을 알았다.
“아.....포장만 해서 가려구요..”
“그것도 안돼요.”
“주문도 안 된 다고요?”
“네.”
겸연쩍은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했는데, 20대 초반의 여자 직원의 무표정과 단호함이 노 키즈 존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응대법이라고 씁슬히 생각했어야만 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내 불규칙한 심장의 움직임이 전해질까 봐, 여기서 언성을 높이면 아이의 귀로 크고 나쁜 소리를 들을까 봐, 이 아이를 보고 있는 그 시선이 혐오일까 봐, 몇 발자국 들어가지 않은 길을 길게 느끼며 돌아 나왔지만, 앞만 보고 걷던 그 느낌과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처음으로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생각과 타협이 되지 않은 날이었다.
화가 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친절한 거절을 원했고, 아이를 향한 시선에는 미안함이 있기를 바라본 거 같다.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고 한마디 할 껄 그랬다. ^^
149p. 최근에는 ‘케어 키즈 존’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노 키즈 존을 향한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결과물일 것이다. 어린이의 출입을 막는 것은 아니니 괜찮은가 싶다가도 왜 어린이만 콕 집어 케어하라고 하는 걸까? 사람은 나이에 관계 없이 모두가 취약함을 가지고 있고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타인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에서 서로 피해를 주지 않도록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는 명제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면 ‘케어 키즈 존’이 아니라 ‘케어 존’이라고 명시하면 되는 것 아닐까?
왜 어린이에게만 유독 더 그들의 나이를 이유로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을 만드냐는 것이다. 시끄럽게 하면 불쾌한 것은 청소년이나 비청소년이나 똑같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돌봄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 품의 민주주의 > 품 : 禀 여쭈다, 허락받다
품 : 品 물건
입 구 자를 세 개만 놓으면 되는 한자라서 외우기 간단하다. 하지만 물건 품의 해석은 ‘인품’으로 보기에는 곤란한 부분 같아서 좀 더 찾아보니, 일부 학자들이 짐짝을 세 개 쌓아 놓은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결론을 지으려면, 복수 명의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짝수 명이 있으면 의견이 양분화 될 수 있는 데 비하여, 홀수 명의 사람이 있으면, 최소한 마지막 한 사람은 자기 의사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고, 복수명의 사람 중에 최소의 홀수는 셋이라 세 사람의 입을 묘사한 것이 물건 품 자라고 한다. 즉 물건을 평가하여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사람에 대하여 평가를 하여 관위를 정하기도 하니, ‘법’이라는 의미도 나온다고 한다.
새롭게 알게 된 해석이다. 품의 민주주의를 오역해 보았지만 이 의미도 괜찮다는 생각은,
물건이나 사람들을 평가하여서 제 자리에 위치시킨다는 지혜가 드러난 글자로 올바른 품(品)을 가진 어른이고 싶은 마음이 더 와 닿았기 때문이다.
93p. “다르게 사랑하는 법”, 날마다 팔을 벌리며 품는 힘을 키워야 한다. 불안, 두려움, 공포로 쉽게 질려 버리는 몸을 세계로부터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한 아름 꽃을 안고 있으려” 해야 한다. 어린이가 두 팔을 잔뜩 벌린 채 세계를 뛰어다니듯. 겨드랑이를 활짝 열고 인사를 하듯. 학교 가는 길에 앞선 친구를 향해 품을 열고 뛰듯. ‘나 아닌 것’을 향해 나를 벌리는 일을 통해 품을 키워야 한다.
98p. 어린이도, 장애인도, 이주민도, 비인간존재들과도 ‘협응’할 수 있는 조건을 고려하는 민주주의.
오해, 오답을 감수하고서라도 ‘협응이 역량’을 증폭시켜 나갈 수 있는 배치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민주주의.
공포에 압도된 신체를 벗겨 낼 수 있는 가장 신선한 민주주의. 끊임없이 새롭게 놀이를 시작하는 “어린이의 진실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해야만”(칼 마르크스) 하는 민주주의. “새로운 권리를 창안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꾸리는 힘”(고병권)을 발명하는 민주주의.
그러니까, 품의 민주주의는 어린이는 본 책의 별책 부록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작은 책이라는 것을 팔랑거리며, 깡총거리며, 기쁨에 찬 얼굴로, 장난을 걸듯, 선언한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사랑할 만한 세계를 “가슴에 한 아름” 품고서 살아가고자 할 때.
사랑하는 세계가 망하고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어 “풀꽃을 안고 서 있을 꿈”을 꾸고자 할 때.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나의 삶을 바꾸지 않을 변명으로 삼지 않으려 할 때. 오직 이 낱말 하나만 남는다.
이 세계를 열렬히 사랑하는 천 가지 방식으로서, 기쁘게, 놀이하듯, 어린이들과 함께,
“투쟁!”
< 몸과 놀이로 만나는 어린이의 세계 >
부모가 되어 보니,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어린이가 덜 괴롭고 더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자라난다. 자유가 가득한 아이는 행복할까? 모두 이해 받을 수 있을까?
164p. ‘몸소 경험하는 놀이는, 놀이터’를 통해서 원하는 수준의 위험을 감수해 볼 수 있게 한다. 매 순간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 자란 아이는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위험과 마주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도전적인 사람이 되어라”하면서 “위험한 건 하지 말라”고 통제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는 행동, 그네가 높이 올라가는 것을 즐기는 행동, 시설물에서 뛰고 점프하는 행동, 거친 신체 놀이 등 위험 감수놀이 행동들을 부상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놀이로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위험감수놀이를 할 기회를 잃은 아동은 오히려 이와 같은 행동을 보상받고자 더욱 위험한 행동을 추구하여 훨씬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 매번 성인의 감독하에서 놀이를 했던 어린이들은 성인의 감독이 없는 경우, 놀이 기구를 정해진 방식과 다르게 이용하면서 위험을 보상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어릴 때 놀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낄수록 이런 놀이를 실제 교육 현장에 자유롭게 적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교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부상에 책임을 지고 조직에 적응하게 돕는 관리자의 역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 시윤이는 밝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하 생략) ....................
그 아이만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슬프고 어두운 얼굴대신 밝고 따뜻한 얼굴을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나부터 통제와 참견이 가득한 어른이자 부모이다.
‘아이니까, 처음 만나는 세상이 신기하고 아직은 몰라서 그래.’라고 말하기에는 처음이 없었던 어른처럼 이해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 가득한 사람이기도 하다.
286p. 텃밭에서
고구마는 달게 / 땅콩은 고소하게 / 고추는 맵게
오이는 길쭉하게 / 방울토마토는 둥글게 /
감자는 울퉁불퉁하게
똑같은 땅에서 / 똑같은 햇볕 아래 / 똑같이 자랐는데 /
똑같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의 개성은 특별함 보다는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성장하는 사람으로 돕는 것이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빛나는 별을 가슴에 안고 다른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태어났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존중 받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울타리 없는 곳에서 빛나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사실 그 울타리를 내가 또 만들 것 같다. 당분간은 그러지 말아야지.
< 책과 어린이가 만나면 >
229p. ‘어린이 인권 선언’은 우리나라에서 먼저 태동하였으며 1922년 천도교 소년회를 통해서 발표된 <어린이날 선전문>이 그 효시다.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히지 말아주십시오.”라는 조항으로 시작한다. 어린이가 세상의 진실을 알게 하자는 것이 첫 번째 조항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어린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진실이 적힌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품에 안겨 주는 일이
우선이었다.
232p. ‘소리 없는 책’이란 글이 없는 그림책을 말한다. 각국에서 모인 난민 어린이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르며 글자를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다양성을 넘어 책을 통해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람페두사 어린이도서관에 글 없는 그림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최덕규 작가의 <<커다란 손>>을 함께 읽어보자.
< 어린이날에 태어난 산골 할아버지가 어린이들에게 띄우는 편지 >
274p. 할아버지는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산골이 구경거리나 쉼터가 아니라 삶터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이 하루빨리 오면 좋겠어.
286p. 농부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내가 착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저절로 착해진다는 걸 알았지.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좋겠어. 천천히 쉬엄쉬엄 찾아봐도 괜찮아.
농부가 되면 신비롭고 놀라운 일을 날마다 보게 될 거야. 식물은 동물처럼 움직이거나 소리 지르지는 못해도, 동물보다 먼저 사철이 바뀌는 줄 알지. 연둣빛 새순은 언제 틔워야 하는지, 뿌리는 어디까지 뻗어야 하는지, 꽃은 언제 피워야 하는지도 알아. 나비와 벌이 찾아오면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세찬 비바람에 이파리 찢기거나 상처가 나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그리고 씨앗은 언제 퍼뜨려야 하는지도 다 알아.
가장 마지막 농부 할아버지의 편지는 생략하고 책을 덮을까? 생각도 했다.
그랬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가장 마음을 만져준, 삶의 진리가 압축되어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은 순간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는 어린이가 혼자서 살아가는 예도 없으며, 어린이가 혼자 단독으로 성장해 가는 일은 더욱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어린이 곁에는 더 많은 어른이 필요하다.
이 책을 함께 읽고, 존중을 통해 아이를 함께 성장시킬 어른이 여기 있는 거 같아서, 지금 이 자리가 위안과 희망이 되는 것 같아 좋다.
*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1.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293P. 여러분이 바라는 세상 한 가지를 고른다면?
저는 서로 먼지를 털어 주는 세상이 좋았답니다.
위키드 <내가 바라는 세상>이라는 동요를 같이 들어보아요.
2.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는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책 이였습니다. 발제가 길어질 때 마다 지우고 줄이고 하다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아직 어린이 같은 저의 모습이 가득합니다. 미성숙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어른이 되어야 겠어요. 여러분의 가슴에 남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