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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연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장 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 1905년 6월 21일 생~1980년 4월 15일 몰; 향년 76세)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
20세기 후반기 실존주의 소설가
프랑스 실존주의의 아버지
20세기 지식인의 선구자
알베르 카뮈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외손(오촌 외가 친척, 모친과 사촌 친가 친척)
행동하는 지식인
참여 문학파 작가
소설가, 극작가, 문학 비평가, 철학자, 철학 교사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를 위해 투쟁한 실천적 철학인
부 장 밥티스트 사르트르(Jean-Baptiste Sartre, 파리이공과대 출신 프랑스 해군 장교)
모 안 마리 사르트르(Anne-Marie Sartre, 독일어 교사, 슈바이처 가문 출신,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촌, 1904년 결혼)
삼촌 조르주 사르트르(파리이공과대학 출신 조선공학자)
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년 1월 9일 생~1986년 4월 14일 몰; 향년 79세; 계약 결혼, 평생 결혼 반려자)
입양 자녀 아를레트 엘카임(Arlette Elkaïm)
1905년 1세 6월 21일 프랑스 파리 16구 외조부 생가 미냐르로 13번지에서 출생. 해군 장교 장 밥티스트 사르트르와 독일어 교사 안 마리 사르트르 사이의 프랑스 부르주아 가문의 외아들
1906년 2세 9월 부친이 인도차이나 전쟁 후유증인 황열로 사망
1907년~1915년 3세~11세 소르본대 독문과 교수 외조부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 1844년 생~1935년 몰; 노벨평화상 수상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백부)가 학교 입학 전까지 교육
1907년 3세 오른쪽 눈 시력 상실
1915년 11세 파리 명문 리세중고등학교 입학
1917년 13세 모친이 사업가 조제프 망시와 재혼. 라로셸학교(La Rochelle)로 전학
1918년 14세 파리 리세중고등학교 수학
1920년대 10대 시절 철학에 몰입
1921년 17세 리세 앙리 4세로 전학해서 5~6학년 수학. 대학 입학자격고사 합격
1922년 18세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파리고등사범학교(파리대학교) 입학 준비반 과정 수학.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꽁트 2편 창작(동인지 『무제지』(Revue sans titre)에 처녀작 단편 소설 「병자의 천사」 발표)
1923년 19세 파리고등사범학교 불합격
1924년 20세 파리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해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전공. 메를로 퐁티와 교유
1927년 23세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 프랑스어 번역본 교정
1928년 24세 1급 교원 자격 아그레가시옹 철학 시험 낙제
1929년 25세 1급 교원 자격 아그레가시옹 철학 시험 수석 합격. 시몬 드 보부아르가 차석 합격.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계약 결혼을 제의하고 이후 51년간 평생 반려자가 됨. 프랑스 루아브르고등학교 철학 교사
1930년 26세 파리고등사범학교 최우수 졸업. 11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해서 기상관측병으로 18개월 복무
1931년~1945년 27세~41세 군 제대 후, 르 아브르, 라옹, 리세 등지의 여러 학교에서 교편생활(1933년 베를린 연구 유학 시절과 1940년 제2차세계대전 독일군 포로 시절 제외)
1931년 27세 제대 후, 파리와 파리 근교 르아브르고등학교 철학 교사. 『진리의 전설』 집필
1932년 28세 베를린 프랑스문화원 강사 레몽 아롱(Raymond Aron)에게서 후설의 현상학 학습
1933년 29세 프랑스문화원 장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해서 현상학 연구
1935년 31세 의사 친구 라갓슈로부터 상상력 실험으로 메스칼린 주사를 맞고 환각과 우울증을 겪음.
1936년 32세 파리로 복귀해 교편 생활. 단편 소설 「벽」 창작. 철학서 『상상력』(L’Imagination) 저술
1938년 34세 장편 소설 『구토』 출판(공쿠르상 후보작)
1939년 35세 철학서 『감정 이론 개요』(Esquisse d’une théorie des émotions) 저술. 제2차세계대전 프랑스군 징집
1940년 36세 9개월간 독일군 포로 생활. 철학서 『상상적인 것: 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L’Imaginaire: Psychologie phénoménologique de l’imagination) 저술
1941년 37세 4월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위조 신체장애증명서로 수용소 석방. 파리 귀국 후, 대독 저항 운동 레지스탕스 참가. 5월 보부아르와 퐁티 등과 사회주의와 자유 그룹 결성. 10월 교육을 금지 당한 유대인 교사 대신 파리 근교 리세 파스퇴르에서 교편 생활 복귀
1943년 39세 철학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발표(이 책은 총 700페이지 중량 1kg으로 계량기 저울추 대신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군수 물자의 중량을 재는 저울추로 대체해 쓰기 위해 대량 구매해서 이용했다). 『파리떼』 등 여러 편의 실존주의 희곡 발표 및 상연
1944년 40세 실존주의 희곡 『닫힌 방』(Huis-clos) 발표
1945년 41세 레종 도뇌르 거부.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 거부. 8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프랑스 리비에라 방문. 10월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지 창간 및 편집으로 실존주의에 대해 글을 씀. 미국의 초청으로 미국 각지에서 강연. 미국 주재 프랑스인 기자 돌로레스 바네티와 교유. 프랑스인 언론인들과 함께 미국 펜타곤을 방문해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 장군과 면담.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실존주의 사상의 선언문으로 간주됨. 장편 연작 소설 『자유에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의 제1부 「이성의 시대」(L’Âge de raison)와 제2부 「집행유예」(Le Sursis) 완성
1945년~1962년 41세~58세 보나파르트 42번지 아파트에서 거주
1945년~1970년대 말 왕성한 활동기
1946년 42세 철학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발표.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Anti-Semite and Jew) 출간
1947년 43세 문학 연구서 『보들레르』(Baudelaire) 저술
1948년 44세 3월 민주혁명연합준비위원회 결성. 실존주의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발표
1949년 45세 11월 민주혁명연합준비위원회 해산. 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출간. 장편 연작 소설 『자유에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의 제3부 「영혼의 죽음」(La Mort dans l’âme) 완성
1950년대 46세 6•25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하며 북침설 주장하다 후에 남침설로 입장 전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1951년까지 알베르 카뮈와 교유
1951년 47세 실존주의 희곡 『악마와 선신(善神)』(Le Diable et le bon dieu) 발표
1952년 48세 문학 연구서 『성(聖) 주네, 희극배우와 순교자』(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 발표
1954년 50세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연방, 스칸디나비아, 아프리카, 미국, 쿠바 등지 세계 여행
1955년 51세 실존주의 희곡 『네크라소프』(Nekrassov) 발표
1956년 52세 『현대』지에 「스탈린의 환상」(Le Fantôme de Staline)을 게재하고 소련의 헝가리 침공 비난
1958년 54세 처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고록 『얌전한 처녀의 회고담』(Mémoires d’ une jeune fille rangée〉에서 사르트르의 청장년 시절 회고
1959년 55세 실존주의 희곡 『알토나의 유폐자』(Les Séquestrés d’Altona) 발표
1960년 56세 철학서 『변증법적 이성 비판』(La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출판.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1부를 출판하고, “사르트르적 사회주의” 주창. 처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고록 『나이의 힘』(La Force de l'âge)에서 사르트르의 청장년 시절 회고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알제리 독립운동. 학생운동과 반미 운동 참여. 구조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대립한 후, 플로베르 연구에 몰입. 쿠바를 방문해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와 환담
1960년~1971년 문학 연구서 『플로베르』(Flaubert) 집필
1964년 60세 10월 22일 노벨문학상 수상(거리에서 기자들로부터 노벨상 수상 소식을 처음 접하고 즉석에서 수상을 거부하는 인터뷰를 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수상 거부 사유는 동서양의 문화 갈등에 편을 가르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노벨상 거부 후, 처제(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동생) 헬렌 드 보부아르(Hélène de Beauvoir)의 집으로 잠적. 자전적 소설 『말』(Les Mots, 어린 시절~11세 회고) 발표. 자녀 아를레트 엘카임(Arlette Elkaïm) 입양
1966년 62세 일본 교토 인문서원의 『사르트르 전집』 간행 기념으로 28일간 일본을 방문해 3차례 강연
1967년 63세 이태리 베니스 방문. 몬트리올 개최 세계박람회에서 자베스, 카뮈,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프랑스 작가 4인의 1인으로 선정.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러셀법정에서 버트란트 러셀과 공동 의장
1968년 64세 5월 프랑스 5월혁명 참가
1970년대 66세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음. 극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 참여
1971년 67세 문학 연구서 『플로베르』 제2권 완성
1972년 68세 문학 연구서 『플로베르』 제3권 「집안의 천치」(L’Idiot de la famille) 완성
1973년 69세 왼쪽 눈 시력 저하. 저술 중단
1974년 70세 시인 김지하가 민청학련사건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사르트르가 시 「오적」(五賊) 번역본을 읽고 김지하 석방호소문에 서명
1975년 71세 2월 김지하 석방
1977년 73세 몸이 불편해 걷기 힘든 상태에서도 사회 활동 지속
1980년 76세 4월 15일 프랑스 파리 14구 브루세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 향년 76세. 4월 19일 장례식에 추종자 5만여 명 참석
묘역
파리 14구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 20구 에드가키네대로 주 입구 우측에 안장
구 묘비명
“장 폴 사르트르, 1905년~1980년”(Jean-Paul Sartre, 1905-1980)
신 묘비명
“장 폴 사르트르
1905년~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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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
1908년~1986년”
(Jean Paul SARTRE
1905-1980
---
Simone DE BEAUVOIR
1908~1986)
1986년 4월 14일 여성주의자 아내 시몬 보부아르가 폐렴으로 사망. 사르트르 옆에 안장. 향년 79세
2005년 장 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 기념의 해.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의 해”로 지정
2009년 지영래, 「장폴 사르트르의 전기비평에 대한 서사 구조 분석」,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지원 연구 과제 제출 보고서(보고서)
2016년 사르트르 부처 묘역 묘비 교체
2019년 양아람, 「1966년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일본 방문과 일본의 사르트르 수용」, 『대동문화연구』, 108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9년. 451~488(논문)
<작품>
처녀작
단편 소설 「병자의 천사」(1922년)
대표작
장편 소설 『구토』(La Nausée, 1938년)
단편 소설 「벽」(Le Mur, 단편 소설 5편 선집, 1939년)
철학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년)
철학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5년)
문학 연구서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 1948년)
소설
장편 소설 『구토』(La Nausée, 1938년)
단편 소설 「벽」(Le Mur, 단편 소설 5편 선집, 1939년)
장편 연작 소설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 1945년~1949년; 제1부 「철들 나이」(L’Âge de raison), 제2부 「유예」(Le Sursis), 제3부 「영혼 속의 죽음」(La Mort dans l'âme), 제4부 미완성작 「마지막 기회」(The Last Chance))
자서전적 소설 『말』(Les Mots, 1964년)
희곡
『바리오나 또는 천둥의 아들』(Bariona, ou le Fils du tonnerre, 1940년)
『파리떼』(Les Mouches, 1943년)
『닫힌 방』(Huis clos, 1944년)
『발진티푸스』(Typhus, 1944년)
『존경스런 창녀』(La Putain respectueuse, 1946년)
『방문객』(Morts sans sépulture, 1946년)
『그물에서』(In the Mesh, 1948년)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1948년)
『친밀성』(Intimacy, 1949년)
『악마와 선한 주』(Le Diable et le Bon Dieu, 1951년)
『킨』(Kean, 1953년)
『네크라소프』(Nekrassov, 1955년)
『알토나의 유폐자들』(Les Séquestrés d'Altona, 1959년)
『쿠바의 허리케인』(Hurricane over Cuba, 공동작, 1961년)
『트로이의 여인들』(Les Troyennes, 에우리피데스의 원작 각색, 1965년)
『톱니바퀴』(L’Engrenage, 1969년; 1946년 창작, 1948년 수정)
유고작 『프로이드 시나리오』(The Freud Scenario, 1984년)
비평
『상상력』(L’Imagination, 1936년)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ance de l’Ego, 1936년)
『감정 이론 개요』(Esquisse d'une théorie des émotions, 1938년)
『상상력』(L’Imaginaire, 1940년)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년)
『침묵의 공화국』(La République du Silence, 1944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5년)
『보들레르』(Baudelaire, 1947년)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 1948년)
『성자 주네, 배우와 순교자』(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 1952년)
『실존주의와 인간 감정』(Existentialisme et émotions humaines, 1957년)
『방법의 문제』(Questions de méthode, 1957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 1: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I: Théorie des ensembles pratiques, 1960년)
『집안의 천치』(L’Idiot de la famille, 1971년~1972년, 플로베르론)
『상황극』(Un théâtre de situations, 1973년)
유고 철학서 『도덕에 관한 노트』(Cahiers pour une morale, 1983년)
유고 철학서 『변증법적 이성 비판 2: 역사의 가지성』(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II: L'intelligibilité de l'histoire, 1985년)
유고 비평서 『말라르메』(Mallarmé, la lucidité et sa face d'ombre, 1986년)
유고 철학서 『진리와 존재』(Vérité et Existence, 1989년)
* 인간 사르트르: 신장 157cm 단신이자 시력이 나쁜 사시로 유명했다. 무신론자이자 참여 문학파이며, 정치적 폭력 투쟁을 찬동한 인물이었으며, 슈바이처 박사의 5촌 외손이다. 여성 편력이 왕성한 남성이었지만, 『제2의 성』의 저자 시몬 드 보부아르와 계약 결혼으로 서로 집필 작업을 공유하며 끽연을 부부의 공동 취미로 삼아 51년간 평생 반려자로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타계 후 파리의 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사르트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1943년 철학서 『존재와 무』는 총 700페이지 중량 1kg으로 계량기 저울추 대신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군수 물자의 중량을 재는 저울추로 대체해 쓰기 위해 대량 구매해서 이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1945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의 서훈을 거부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을 거부하기도 했다. 1964년 10월 22일 거리에서 기자들로부터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처음 접하고 즉석에서 수상을 거부하는 인터뷰를 했으며, 이러한 사르트르의 태도는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수상 거부 사유는 동서양의 문화 갈등에 편을 가르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사후에, 사르트르는 전 세계 지식인의 모델로서,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이자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기억되었다.
* 철학자 사르트르: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국민은 자유형을 받는다” 등의 명언을 남긴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이다. 사르트르는 소르본느대 독문과 교수인 슈바이처 가문의 외조부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자랐고, 1920년대 10대 시절부터 철학에 몰입했다. 1929년 1급 교원 자격 아그레가시옹 철학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반려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차석으로 합격했다.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계약 결혼을 제의했고, 이후 두 부부는 사르트르가 타계하기까지 51년간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교원 자격 수석 합격으로 사르트르는 프랑스 루아브르고등학교 철학 교사가 되었다. 1931년 『진리의 전설』을 집필했고, 1931년~1945년 사이 여러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문화원 강사 레몽 아롱(Raymond Aron)에게서 후설의 현상학을 접하고, 1933년 프랑스문화원 장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해서 현상학을 연구했다. 1945년 10월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지 창간 및 편집으로 실존주의에 대해 글을 썼다.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을 제의받았지만 거부했다. 그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주의 사상의 선언문으로 간주되고 있다. 1946년 철학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를 발표했다. 1960년 철학서 『변증법적 이성 비판』(La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을 출판했다. 1960년대 구조주의가 나나타 기존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대립한 후, 철학 논쟁에서 밀리는 듯했지만, 실존주의는 다시 부활해 후기구조주의와 프랑스 철학의 양대 산맥을 유지했다. 철학은 사르트르에게는 삶 자체였으며, 그의 뛰어난 연구와 저술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가 되었다.
* 작가 사르트르: 장 폴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카뮈와 함께 실존주의 소설가이기도 하다. 또한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1922년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꽁트 2편을 창작해서 동인지 『무제지』(Revue sans titre)에 단편 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 등을 발표했다. 1936년 파리로 복귀해서 교편 생활을 하면서 단편 소설 「벽」을 창작했다. 1938년에는 장편 소설 『구토』를 출판했고, 1943년에는 『파리떼』 등 여러 편의 실존주의 희곡을 발표 및 상연했다. 1964년 10월 22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동서양의 문화 갈등에 편을 들지 않겠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노벨상 거부 후, 처제이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동생인 헬렌 드 보부아르(Hélène de Beauvoir)의 집으로 은거하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작인 자전적 소설 『말』(Les Mots, 어린 시절~11세 회고)을 발표했다. 1974년 시인 김지하가 민청학련사건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사르트르가 시 「오적」(五賊) 번역본을 읽고 김지하 석방호소문에 서명했고, 1975년 2월 김지하 시인이 석방되기도 했다. 사르트르의 대표작은 장편 소설 『구토』(La Nausée, 1938년)이며, 그 외에 단편 소설 「벽」(Le Mur, 단편 소설 5편 선집, 1939년), 장편 연작 소설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 1945년~1949년; 제1부 「철들 나이」(L’Âge de raison), 제2부 「유예」(Le Sursis), 제3부 「영혼 속의 죽음」(La Mort dans l'âme), 제4부 미완성작 「마지막 기회」(The Last Chance))이 있고,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자서전적 소설 『말』(Les Mots, 1964년)이 있다.
* 사르트르 연구: 1980년 장 폴 사르트르가 향년 76세로 타계할 당시에는 그의 장례식에는 5만여 명의 그와 행동을 같이하거나 활동했던 추종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이름을 남겼으며,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이자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후세에 평가되고 있다. 2005년 장 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 기념의 해에는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의 해”로 지정되었다. 1980년에 타계한 20세기 후반기의 작가로서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사르트르 연구 성과: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 검색된 한국의 사르트르 연구 성과와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노서경, 「특별기획: 2005년 장-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 기념」, 『역사와 문화』 제11권, 문화사학회, 2006년 등 국내학술논문 39편; 서희진, 「장 폴 사르트르와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구조 비교」,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21년(국내석사논문) 등 학위논문 49편; 변광배, 『장 폴 사르트르: 시선과 타자』, 살림 간, 2004년 등 단행본 415권; 김모세, 「모리악과 사르트르―문학 논쟁의 의미와 전망에 대하여」, 한국연구재단(NRF), 2016년 등 연구보고서 44편<http://riss.kr>. <끝> <2023년 12월 3일,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장 폴 사르트르」, 『위키백과』; “Jean-Paul Sartre,” Wikipedia; 김지은 기자, 「사르트르, 글과 행동으로 20세기를 흔든 지성」, 『이대학보』, 2005년 5월 2일; 양아람, 「1966년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일본 방문과 일본의 사르트르 수용」, 『대동문화연구』, 108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9년. 451~488; 「사르트르」, 『다음백과』, 인터넷 자료; 「실존주의 철학의 선언―장 폴 사르트르」,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