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했지만 인도 서북부 뭄바이 지역이 인도 나바야나 현대불교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붓다의 평등사상과 거대한 불교유적 등이 근본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진은 엘리펀트 석굴사원의 불교 흔적.
칸헤리 석굴사원에서 나바야나 현대불교까지
오늘날 인도의 불교도는 500여만 명으로 추산
불자의 90%는 마하라슈투라주에 살며, 대부분
나바야나 불교신도다…뭄바이가 중심인 셈이다
거대한 석굴군을 거느린 칸헤리, 불교사원으로
출발했지만, 힌두교에 접수된 엘리펀트석굴 등
오랜 불교의 저력이 근본에 있었기에 현대적
불교운동도 뭄바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국제적 무역항 타나가 있던 살셋섬
인도 서부의 아라비아해에 위치한 봄베이는 1995년 뭄바이로 개명한다. 뭄바이는 살셋(Salsetta Island)섬을 간척하면서 뭍으로 이어진 거대도시가 되었다. 살셋섬에는 뭄바이 도심지와 타네(Thane), 미라-바얀다르(Mira-Bhayandar) 같은 도시가 포진한다. 살셋섬에 존재하던 타나(Tana, 塔納)라 부르던 무역항이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는 타나왕국의 항구도시 타나를 기록에 남겼다. “교역이 활발하여 수많은 선박과 상인이 그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여러 모양의 매우 질이 좋고 아름다운 가죽을 갖고 나온다. 또한 그곳에서는 양질의 부크람이 다량으로 반출되며 목화도 마찬가지다. 상인들은 선박에 여러 가지 물품을 싣고 오는데 금ㆍ은ㆍ동을 비롯하여 왕국에 필요한 물건이다.”
국제적 무역왕국 타나에서 가까운 곳에 거대한 석굴군이 존재한다. 살셋섬의 산제이 간디(Sanjay Gandhi) 국립공원의 숲에는 거대한 바위군을 절단한 불교 석굴이 있다. 뭄바이는 석굴사원이 풍부한 곳이다. 타네에서 몇 마일 떨어진 칸헤리(Kanheri)는 109개의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1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불교 조각과 그림, 비문이 전해온다. 칸헤리는 ‘검은 산’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크리쉬나기리(Krishnagiri)에서 왔다. 국제무역항 타네의 경제력이 이들 석굴사원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칸헤리 석굴사원. 공부하고 명상하기 위한 기도처였다.
마우리아와 쿠산 제국의 불교 중심
높은 언덕 위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낸 계단을 통해 칸헤리 석굴에 오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비교적 평범하고 꾸밈이 없다. 각 동굴에는 침대 역할을 하는 돌 받침대가 있다. 거대한 돌기둥이 있는 회당에는 둥근 사리탑이 있다. 인근 저수지에서 관을 통하여 물을 공급하여 식수원으로 쓰게끔 했다. 동굴이 영구적인 수도원으로 바뀌면서 벽면에는 부처와 보살의 복잡한 부조가 새겨졌다. 석굴은 1세기에 지어졌으며 3세기에 콘칸(Konkan) 해안의 중요한 불교 정착지가 되었다.
석굴 대부분은 생활과 공부, 명상하기 위한 불교 기도처였다. 회중 예배를 위한 홀 역할을 했던 큰 동굴에는 복잡하게 조각된 불교 조각, 부조, 기둥 및 암석 사리탑이 늘어서 있다. 많은 수의 비하라는 불교 승려가 잘 조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석굴 시설은 소파라 같은 국제항구와 연결되었다. 칸헤리는 이 지역이 마우리아와 쿠산 제국의 통치 아래 있을 때 불교대학의 중심지였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처음 만난 동굴은 전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동굴로 거대한 차이트야(Caitya) 동굴이다. 입구에는 서기 170년경의 비문이 있는데, 많이 훼손되어 일부분만 해독된다. 불교의 전성기를 알려주는 비석이다. 이 사원은 본당과 둘레에 34개의 기둥이 있으며 전면을 가로지르는 통로는 커다란 아치형 창 아래의 갤러리로 덮여 있다. 기둥을 유심히 보면 이후 힌두교 사원의 기둥도 이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2016년에는 인도 고고학자들이 칸헤리 석굴 근처에서 또 다른 7개의 석굴을 발견했다. 스님들이 비가 많이 내리는 몬순 절기에 이용했던 수행처로 확인되었다. 칸헤리 유적과 마찬가지로 식수원이 있는 저수지 근역에 위치한다. 2000여 년 전 스님들이 수도하고 은신하던 것으로 보아 살셋섬 주변이 모두 불교의 중심지였음을 알려 준다.
엘리펀트섬 힌두 석굴사원도 출발은 불교
뭄바이의 랜드마크인 인디안 게이트의 자와할랄 네루 항구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엘리펀트섬으로 객선이 오간다. 엘리펀트 석굴은 주로 힌두교 신 시바에게 헌정된 동굴 사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섬은 5개의 힌두 동굴로만 알려졌는데,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몇 개의 불교 사리탑, 두 개의 불교 동굴이 포함된다. 온갖 홍보물에는 오직 힌두교만 강조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불교 사원터였다. 석굴에는 힌두교와 불교 사상 및 도상학의 혼합을 보여주는 암석 조각이 산재한다. 5세기에서 9세기 사이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 전체를 신앙의 거점으로 삼아 불국토의 섬으로 설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섬의 고대 역사는 힌두교나 불교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브라만(Brahman)이 섬에 도착하기 전에 히나야나(Hinayana) 불교도들이 처음 점거하여 큰 사리탑을 세우고 주위에 7개의 작은 사리탑을 세운 것으로 비정된다. 아마도 부처님 적멸 후 300여 년이 흐른 기원전 2세기경일 것이다.
이 동굴 사원은 5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지어졌다. 전문가에 따라서는 사원 축조 연대를 굽타제국시대 예술적 개화기의 연속으로 본다. 엘리펀트 석굴은 고대 및 초기 중세 힌두 문학의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아대륙의 불교, 자이나교 석굴사원의 맥락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많은 빈민들이 모여 사는 뭄바이의 세탁장 풍경.
불가촉천민운동에서 시작된 현대불교
‘발리우드의 도시’ 뭄바이는 인구 1300만명의 고밀도 메트로폴리스로서 마하라슈트라주의 수도다. 고반디, 다라비를 비롯한 엄청나게 많은 도시 빈민촌이 존재하는데 달리드(불가촉천민) 운동이 시작된 거점이기도 하다.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많은 부자들이 사는 곳이자 가장 많은 천민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 극심한 빈부 차별과 카스트의 고장에서 혁신적 불교운동이 태동했다.
암베드카르(Ambedkar)는 인도 식민지시대에 불가촉천민 가정에서 태어나 신분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식민지시대인 1935년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그는 간디에 반발했다. 카스트제도로 옭아매는 힌두교 시스템을 거부하면서 붓다의 평등사상에서 시사점을 얻었다. 그가 창시한 나바야나(Navayana)는 암베드카르가 주도한 불교의 재해석과 신불교운동을 뜻한다. 암베드카르는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네 가지 고귀한 진리와 무아와 같은 핵심 신념과 교리를 결함이 있고 비관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새로운 불교를 ‘나바야나’라고 명명한다.
1956년 10월13일 기자회견을 열고 힌두교뿐만 아니라 대승불교를 거부한다고 발표했다. 많은 불가촉천민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지지자들은 나바야나 불교를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가진 종파가 아니라 불교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운동으로 본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불교운동에서 출발한 나바야나는 불교 전통의 기초로 여기는 상좌부(Theravada), 대승불교(Mahayana)와 다른 새로운 불교 분파로 간주된다. 나바야나라는 용어는 인도에서 설립된 암베드카르 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서구화된 불교 형태를 지칭하기 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늘날 인도의 불교도는 5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불교신자의 90%는 마하라슈투라주에 살며, 대부분 나바야나 불교신도다. 인도 서북부의 대도시 뭄바이가 인도아대륙 현대불교 신앙의 중심인 셈이다. 이들의 불교는 붓다의 평등사상을 강조함으로써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혁파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거대한 석굴군을 거느린 칸헤리, 불교사원으로 출발하였지만, 힌두교에 접수된 엘리펀트 석굴 등 오랜 불교의 저력이 근본에 있었기에 현대적 불교운동도 뭄바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