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 =과학 기술 및 근대 시설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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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8.18. 22:10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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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 =과학 기술 및 근대 시설의 수용
1. 교과서 속 주개념
1)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
조선 말에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하여 북학파 실학자들의 관심이 높았고 개항 전후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 대두되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도 서양 무기 제조술에 관심이 많아서 개항 이후 외국과의 교류 속에서 유학생을 파견하고 외국 기술자 초빙 등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과 근대 문물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특히 갑오개혁 이후 서양 근대 문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각종 기술 학교가 설립되었다.
2) 근대 시설의 수용
근대 시설은 민중들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열강의 이권 침탈, 침략 목적과 밀접한 관련(통신, 철도 ↔ 철도 파괴, 공사장 습격)을 맺고 있었다. 또한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 의존하여 독자적인 기술을 갖지 못하였다.
대표적 근대 시설인 전신 시설은 일본~부산(1884, 일본), 서울~인천과 서울~의주(1885, 청)에 가설되었으며 전보 총국(전신 업무 관리)이 만들어졌고 청과 일본의 침략 목적과 관련이 깊었다. 전화는 경운궁(1898, 미국인)에 처음 가설되었고 이후 서울 시내 민가에도 가설되었다. 우편 사무를 위하여 우정국을 설치(1884)하였으나 갑신정변 때 폐지하였다가 을미개혁 때 다시 운영하였다. 전차는 한성 전기 회사(발전소, 전등 가설)가 서대문에서 청량리(1899)까지 가설하여 운행하였다. 철도는 경인선(1899), 경부선, 경의선(1905) 등이 건설되었고 일본의 러·일 전쟁 수행 등 침략 목적과 연관이 깊다.
3) 언론 기관
한성순보는 순 한문, 최초의 신문으로 정부 관료를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주로 정부의 개화 정책의 취지를 설명하고, 국내외 정세를 소개하였다.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일간지였다. 시민층을 대상으로 국민 계몽(자주 의식, 근대적 민권 의식 고취)의식을 고취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주로 지식층과 유생이 대상이었다. 일제의 침략 정책과 매국노를 규탄하였으며 보안회를 지원하여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에 대한 항일 논설인 시일야방성대곡을 싣기도 하였다. 또한 제국 신문은 순 한글 신문으로 일반 서민층, 부녀자를 대상으로 민중 계몽과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대한 매일 신보는 순한글, 국한문, 영문판으로 다양하게 발행되었으며 최다 독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에 이어서 을사조약 이후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의병 운동에 대해 호의적인 보도를 많이 하였다. 그 밖에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황성 신문, 제국 신문)
2. 확장 개념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선 대한 매일 신보
독립을 이룸에 실력이 일부 큰 요소라 함은 맞는 말일지언정 부강한 후에야 독립을 이룬다 함은 불가한 바라.··· 부강이 독립의 전제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독립이 부강의 전제 조건이 된다. [대한매일신보, 1909. 6. 18.]
3. 관련 지식
1) 신문지법(1907)
일제가 애국적인 언론 기관을 통제하기 위해 제정하였다.
(제10조) 신문지는 매회 발행에 앞서 먼저 내부 및 그 관할관청에 각 2부를 납부해야 한다.
(제11조)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거나 국헌을 문란 혹은 국제교의를 저해하는 사항을 기재할 수 없다.
(제21조) 내부 대신은 신문지로서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케 한다고 인정될 때는 그 발매, 배포를 금지하고 이를 압수하며 그 발행을 정지 혹은 금지할 수 있다.(→ 언론 자유 박탈)
(제36조) 본 법의 규정은 정기 발행의 잡지류에도 준용한다.
2) 우정국
1882년(고종 19) 12월 행정직제의 개편을 통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내에 우정사(郵政司)가 설치됨으로써 근대적인 우편 제도가 시작되었다. 초대 협판에는 홍영식(洪英植)이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홍영식이 보빙부사(報聘副使)로 미국을 방문, 미국의 우편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4년 3월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 안에 우정 총국이 설치되었다.
한성부 중부 견평방(堅平坊) 전의감(典醫監) 자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번지)에 우정총국 청사를 두고, 우정총관 홍영식(洪英植)이 일련의 법령을 준비하는 등 개국 준비를 한 끝에 그해 10월 1일부터 우편 업무를 시작했다. 편제를 보면 책임자인 총판 1명, 방판 1명, 그 아래에 관리업무를 담당한 규획과(規劃課), 우체국 사무를 담당한 발착과(發着課), 경리사무를 담당한 계산과를 두었으며, 인천에 분국을 설치했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국의 개업을 알리기 위한 축하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폐지되고 말았다.
3) 경인선
서울 영등포 - 인천 간 총연장 39㎞의 복선 철도이다. 1896년 미국인 J. R. 모스가 부설권을 획득해 1897년 공사에 착공했으나 자금 사정으로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에 양도했다. 그 뒤 공사를 급속도로 진행해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을 연결하는 33.2㎞를 개통했다. 1900년에는 한강철교를 준공하면서 서울역까지 3㎞를 더 연장해 경인선 전구간에서 직통 운전을 개시했다. 경인선 개통은 근대 교통기관을 도입하고 우리 나라 최초로 운전 규정을 제정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전 구간이 대체로 평탄한 지형이므로 터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교통량의 증가로 1960년대부터 복선화 공사를 했고, 1971년부터 전철 공사에 들어가 1974년 8월 15일에는 수도권 전철을 개통했다. 1960년대부터 경제 개발 계획에 따라 서울 - 인천 일대에 경인 공업 지대를 조성하면서 인구와 물류의 이동이 증가함에 따라 경인국도·경인고속도로와 함께 이 일대를 관통하는 수도권 운송 체계의 중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부천이 시로, 인천이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로 승격하는데 큰 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