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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同知)인 자허(子虛)
정문부(鄭文孚)가 함경도 평사(評事)를 지낼 때,
왜란을 만났다.
두 왕자가 포로로 잡히고,
크고 작은 읍의 관리와 사족들은 모두 그 고을 백성에게 묶여 왜장에게 바쳐졌다.
그때 정문부도 미복(微服)을 하고 밤길을 가다가 순라도는 왜졸을 만나 손을 뒤로 묶인 채,
왜장에게 바쳐졌다.
지키던 자가 잠시 소홀한 틈을 타 포승줄을 당기고 재빨리 뛰어 달아나니,
왜졸들이 뒤쫓았으나 붙잡지 못했다.
드디어 몸을 숨겨 남의 품팔이가 되어 입에 풀칠을 했다.
어떤 무녀가 그를 사서 종으로 삼아
민가를 다닐 때,
북을 지고 뒤를 따르게 하였다.
밤이면 굿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으면서 남은 술과 떡으로 그를 먹였다.
하루는 무녀가 밤에 그녀의 남편에게 물었다.
영감!
당신 감색 새 옷 입고 싶지 않소?
남편이 되물었다.
무슨 말이오?..
무녀가 말했다.
어떤 집 주인 양반이 감색 새 옷을 입었는데 내가 당장 빼앗아 당신에게 입혀 드리리다.
남편이 말했다.
좋지 좋아!
다음 날,
다시 정문부에게 북을 지게 하고 민가에 갔는데,
주인 영감이 과연 감색 철릭(帖裡)을 입고 있었다.
무녀가 옷소매로 북을 싸고 북채로 북을 두드리자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무녀가 드디어 귀신의 말처럼 꾸며 흉측한 재앙으로 으르며 동요시키니,
주인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옷을 벗어 재앙을 물리치려 하였다.
무녀는 그 옷을 취하여 가지고 와서 자기 남편에게 입혔다.
정문부가 그것을 목도하고는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명을 내려 그에게 방어사(防禦使)를 제수하고 은대(銀帶)와 비의(緋衣)를 더해 주었다.
또 길주 목사(吉州牧使)와
안변 부사(安邊府使)를 제수하였다.
이후로 정문부는 무녀와 박수를 매우 미워하여 괴로은 부역으로 그들을 고달프게 하며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준엄한 형벌로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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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동지사로 조선시대의 종2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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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정6품 외직 무관의 하나인데 본래 병마도사였으나 세조 때, 병마평사로 개칭. *
두 왕자--선조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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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릭--무관 공복의 하나. 당상관은 남빛 당하관은 붉은 색으로 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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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대--종6품에서 정3품 까지의 문무관이 두르는 허리띠.
은으로 새긴 장식을 가장자리에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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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당상관이 입은 붉은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