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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기 추모제, 벽제 승화원·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열려
동생 황남산 참석, 동지·활동가들 “석암투쟁 이어가자”
“정용이 형이 별칭을 ‘큰손’이라고 정하겠다고 하셔서 이유를 물었더니 탈시설계의 큰손이 되고 싶다는 거에요. 근데 사실 체구도, 손도 작으셨어요. 같이 대만으로 워크숍을 가자고 했는데 정용이 형이 몸이 안 좋아서 같이 못 가고 상근자들만 갔는데 마지막날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귀국해서 바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정용이 형님과 함께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늘에서도 소주랑 막걸리 드시면서 행복하게 지내시겠지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조은별 사무국장은 추모발언을 하며 생전에 고인과의 인연을 기억하다 눈시울을 붉혔다.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고 황정용 열사를 포함한 탈시설자립생활운동가, ‘마로니에 8인’이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설립의 주역이라며 장애인 자립과 권리를 위해 계속해서 싸워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열린 탈시설자립생활운동가 고 황정용 열사 5주기 추모제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 김진이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7월 11일 오전 11시 벽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추모식을 개최했다. 추모식에는 활동가와 고인을 기리는 이들과 동생 황남산씨가 참석해 추모의 발언을 하고 헌화를 했다. 황남산씨는 “오빠가 애썼던 장애인 자립을 위한 싸움을 이어가고, 오빠를 기억해주는 동지들이 여전히 이렇게 많다는 것에 너무 감사한다”고 말했다.
오후 2시부터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강당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김포장애인야학 김동림 교감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제에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과 장애인 운동가, 활동가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송현미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자립옹호팀장은 “서울시의 탈시설지원조례가 폐지되고, 서울과 경기도에서 퇴행적인 행정, 조치가 이어지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장애인 탈시설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는 등 어려운 여건이지만 탈시설은 선택이 아니라 누구나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라며 “황정용 동지가 생전에 염원하며 활동하셨던 그 뜻을 활동가들이 이어받아 장애인들이 지역과 사회로 나와 같이 잘 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김동림 교감은 “정용이가 당시 ‘내가 나가서 투쟁하고, 내 한몸 보태주면 탈시설 좀 더 빨리하지 않을까요’하며 나가자고 했다”며 “그렇게 장애인 권익옹호활동을 하며 현장을 누비고, 마로니에 8인 투쟁을 하며 탈시설 권리가 구체적인 정책과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근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저는 남양주의 개인운영시설에서 23년을 살다가 나왔습니다. 저는 집에 가고 싶다고 밥을 안 먹었고 엄마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했는데 해주지 않았어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예배시간은 혼나는 시간이었어요.”
김포야학 학생인 김희선 씨는 본인이 시설에서 당했던 부당한 대우를 털어놓으며 탈시설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박현 조직실장의 추모발언에 이어 김종환씨가 ‘봄날’, ‘당부’ 등 고인이 좋아했던 노래로 추모 공연을 진행했다. 이경희 활동가의 닫는 발언에 이어 참석자들이 헌화를 하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추모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김진이
고 황정용 열사는 1959년 강화 교동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장애인이었고, 6남매의 장남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도장을 파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2006년경 화상으로 욕창이 생기자 동생이 2007년 당시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보내게 됐다. 2009년 6월 요양원 거주인들과 함께 인권침해, 시설비리를 고발하고, 탈시설자립생활정책을 요구하며 62일간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석암재단생활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을 전개했고, 다큐멘터리 ‘시설장애인의 역습’(2009, 감독 박종필)에 출연했다.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설립했고, ‘탈시설 당사자’로서 탈시설, 장애인 권리를 위한 투쟁 현장에 활발히 참여하다가 2019년 7월 13일 새벽 자택에서 삶을 마쳤다. 당시 고인의 나이 6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