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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난파와 해체를 넘어 인간 재건과 복원을 열망하는 언어
-백은선론
염선옥
침몰의 과정을 통과한 난파선
난해성 때문에, ‘무의미의 사전’이라고 불리는 백은선의 시집을 가리켜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부를 수 있을까. 백은선의 시집은 범람하는 문장, 슬픔과 불안, 자학과 가학을 실은 난파한 배의 모습과도 같다. 시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확정되거나 하나로 수렴되는 단정적인 관념어는 “밀봉해서 꼭 끌어안아 터뜨려버리고 싶”(「가능세계」)은 ‘거부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관념어의 단절, 이미지 묘사의 나열, 파편화된 시어, 비서사, 방향을 잃은 듯한 화자의 발화 방식 등 ‘비신비’(「비신비」)적인 것들은 데리다의 ‘난파선’을 연상시킨다. 데리다에게 난파선은 침몰이라는 몰락과 파괴의 과정을 통과해 분쇄되고 남아 새롭게 등장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이다. 이 때문에 백은선의 시는 즉흥적이고 자동기술과도 같다. 이는 종종 시인이 시의 화자를 통해 ‘갈겨쓰기’(어려운 일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한 대담에서 한 편의 시에 많게는 열댓 번, 적게는 대여섯 번의 퇴고 과정을 거친다는 고백을 참조해 볼 때 즉흥적으로 시를 완성한다는 것은 오해일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새로운 구성을 위해 데리다 식의 난파선 즉 해체 과정을 대입하는 것이다.
백은선에게 세계는 “말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청혼」)의 모습이다. 이는 전수된 현대시의 전통을 부정하는 역설적 방식이다. 가령 백은선은 ‘풍경’이라는 개념에 가려진 풍경을 보여주고자 풀어낸다. ‘풍경’이라는 개념어가 인스턴트처럼 소비되면 각기 다른 얼굴의 풍경은 사라지고 ‘동일한 풍경’만을 연상시키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시대가 아닌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부여한 것”(「청혼」)을 “말해진 적이 있거나 바람에 대해 말해진 적이 없는 것, 말해진 만큼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것, 빛나는 것들을 전부 생각할 수는 없”음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얼굴이라면. 모두 눈 코 입을
가졌는데 얼굴마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가만히 들
여다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상이 있다면.
네 얼굴은 갈가리 찢겨 있어.
눈과 코와 입이 전부 따로 놀아.
지구 반대편에서 눈 내리는 소리가 귓속을 맴돈다.
「비신비」 일부
시인은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얼굴이라면”이라고 가정을 해본다. “모두 눈 코 입을 가졌는데 얼굴마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상이 각기 다른 것처럼, 각기 다른 것이 시일텐데…… 동어반복적 이름으로 호명되며 생산되는 시적 방향에 회의적이다. “다 지워버릴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는 저 불쌍한 손들을 이미 씌어진 것들을 다시 반복하는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차가운 마디를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그렇지 않니”(「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를 통해 시인이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쓰기에 회의적이구나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일까. ‘현대적인 것’ 하면 꼭 전통의 배반이나 지칠 줄 모르는 자기부정이 떠오르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도 대중문화라는 서구 산업자본주의에 따른 기성품이 되었고 시를 쓴다는 행위가 생산을 위한 생산과정, 공정과정이 존재하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시인을 생산하는 시 아카데미가 생겨나고 학습된 시의 습작 과정이 시란 이런 것이다, 정의를 내리게 했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산에 참여한 시인에게 일정 정도 책임이 있다는 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백은선은 현대적인 것의 추구 속에서 기성품화되어가는 시적 생산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현대적인 것과 결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작의 도래를 희구하는 것은 아닐까. 백은선은 “시가 뭘까”(「언니의 시」) 하고 끊임없이 자문하고 자답한다. “모래 속에서 시작해/빗속에서 시작해/눈보라를 안고 시작해/……”라는 언니의 글을 읽는 시의 화자는 “꿈에 대해서는 쓰지 말”고 “사랑 얘기도 가족 얘기도 나에 대한 것도” 쓰지 말고 “질문으로 시작하라고” 하는 언니에게 “나는 너무 무서워”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돌연하게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유한 모두의 얼굴처럼 인위성을 제거하고 진정성을 향하는 분위기를 구성하는 것이 시라는 주장은, 시의 형식과 내용에 자율성을 부여하되 시의 역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결과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지 말자는 일종의 저항이 된다. 이는 현대시가 탈개인화, 탈사회화, 단절, 혁신, 환상을 적당히 버무린 개념을 기준 삼아 쓰이고 있는 시가 닫힌 미래와 싸우는 시적 지향성과 일치하는지 묻는 셈이다. “갈가리 찢겨 있”는 “눈과 코와 입이 전부 따로” 논다는 것, 그래서 모든 감각이 열려 있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눈 내리는 소리가 귓속을 맴”돌 수 있는 것이 개인과 자연의 감각인데 한 모양과 한 단어로 표현되는 것이 시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그로 하여금 시적 물음을 갖게끔 하는 것이다.
개념 혹은 관념어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소통만능주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시적 풍경이 꼭 ‘소통’되어야만 하는가,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풍경’이라는 관념어는 무수히 말해지지 않은, 말해져야 할 것들이 하나의 주머니 안에 꾸겨져 담긴 것과 같다. 이 구겨져 있는 의미를 펼칠 때 오히려 시가 되지 않겠느냐는 백은선의 말은 지극히 정당하다.
변형된 것은 저고라고 불리는 청각실험기 안에
서 발생합니다. 저고는 사람도 아니고 사물도 아닙
니다. 저고가 생겨난 것은 영혼을 발명하고자 하는
시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저고를 만드는 데 사용
된 것은 만 명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추락하는 물
질의 속도와 지면에 닿은 순간 파손되는 힘, 그 힘이
사라진 후에 남은 조각들입니다. 우리는 관념 속에
서 시작합니다. 관념 속에서 커다란 동그라미와 작
은 동그라미 작은 동그라미 속에 무수한 눈동자가
정반합으로 회전하거나 튀어 오르는 상상입니다.
-「저고」 일부
백은선의 시가 난파선과 같아서 이해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호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에겐 “파손되는 힘”이 “사라진 후에 남는 조각들”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적 실현은 “관념 속에서 시작”하는 우리의 사유를 “다시 겹치거나 해체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그는 ‘남은 조각들’ 속에서 “정반합으로 회전하거나 튀어오르는 상상”을 갈망하며, “우리의 우리라고 우리가 천명한” “소리를” “텅 빈 상태”로 전환하려 한다. 시란 무엇인가는 언제나 시인의 화두이기에 그는 늘 시적 형식과 내용의 제약을 ‘탈학습’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백은선의 시는 이해되기 어렵다, 혹은 소통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의되는데, 백은선이 이해하는 소통되는 시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성된 제품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사회는 이미 구성된 것들이 함의를 가질 때 비로소 이해되고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에 백은선에게 ‘이해’란 정착된(predeterminded) 사유의 소비이기에 ‘이해가 잘 되는 시’란 공통의 감각으로 공유된 무언가이기보다는 인위이고 회의적 현대시의 부산물로 다가온다. 이는 정치적 맥락으로 형성된 정치적 기억의 과정이자 학습의 산물이 되는 셈이다. 백은선에게 이해란 “디귿의 마음으로” 당신이 “나를 함부로 이해하”(「어려운 일들」)는 일이다. 이에 ‘이해’를 도모하는 일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전제된다. ‘우리’라는 문화공동체가 하나의 장 안에서 소통되는 방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소비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국가나 기업 활동과 같아서 권력의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이해’라는 매트리스 커버 아래에는 권력의 질서라는 매트리스가 숨겨져 있는 셈이다. 백은선은 “우리”라는 이름이 “끝장났으면 좋겠다”(「가능세계」)고 말하고 세상의 “굴러가”는 방식은 “이런 문장은 위험하니 쓰지 말라고 충고해줄 선배”가 “없어도 없고 싶은 없는 것”이 되기를 시의 화자는 바라면서 “백년 뒤에 증명”될 ‘명제’에 대해 “끝장이라고 다 끝이라고” 이것이 “가능”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 백은선의 불통의 시는 “’삶을 위한 거짓말’에 대한 공격”(야스퍼스)인 셈이다.
진정 시인이 “담아내고 싶”(「가능세계」)은 세계는 감각의 세계이지 관념어의 세상이 아니다. ‘광경’이라는 개념어로 포장된 것이 아닌 “숲의 창백과 바다의 권태 손목은 병렬 비 내리는 음가 지워질 광경들”을 담아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시인은 ‘광경’이란 개념어로 포장된 것을 “밀봉해서 꼭 끌어안아 터뜨려버리고 싶”은 것이며, 시인은 ‘낭만’, ‘광경’, ‘사랑’ 등으로 개념화된 의미들로 소통을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면 그것에 묶인 의미들을 풀어헤쳐서 나열하는 과정 다시 말해 소통을 비-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백은선에게 궁극적으로 확고하거나 하나로 수렴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시인에게 새로운 시적 구성은 일단 ‘난파’된 것 즉 해체의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알라이다 아스만『기억의 공간』, 482). 돌이 원래 “돌의 무게로 놓여 있”듯(「언니의 시」) 시의 형식과 내용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사유한다. 시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따져 물을 것이 아니다. 그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시인은 그것을”(「도움의 돌」)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이’의 산책자로서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이유는 ‘나’와 ‘너’,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관한 응시 때문이다. 백은선에게 시는 존재와 자연,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의 기록이고 응시와 존재 ‘사이’의 울림이다. 시인의 글을 조망할 수 없음은 두려움이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나 웅덩이에서 발생하듯 응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갈겨쓴 글’의 깊이 때문이다. 백은선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사이’를 사유하는 일이다. 수미일관 ‘사이’를 사유하는 덕분에 백은선의 시를 읽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이 “시쓰기는 근본적으로 낱말로 드러냄(Zum-Wort-Kommen) 이외에 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듯 시짓기는 세계-속에-있음으로서의 실존의 밝혀짐 이외에 사실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시인의 목소리는 ‘갈겨쓴’ 낯선 글 속에 오롯이 담겨있는 셈이다.
백은선에게 ‘사이’는 처음과 끝,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현재에 관한 사유이다. 세계가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파충」)고 “동시에 태어난” 세계일 때 ‘사이’의 사유는 ‘지금’에 관한 사유이자 동시에 무한한 것에 관한 사유인 셈이다. ‘유추’와 ‘비유추’ 사이를 가늠하고 ‘세계’와 ‘비세계’ 사이를 ‘인간’과 ‘자연’ 사이에 무수한 소통되지 않는 목소리를 더듬듯 언어를 탕진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 소진하고 마는(조연정)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이에 관한 사유이다. 이는 화자가 ‘허공’에서 ‘내려다봄’을 지속하는 이유가 된다. 허공에서 ‘내려다봄’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전해 오거나 이전에 이미 공간 속에 만들어진 공유된 공동의 음, 즉 짜 맞춘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바뀌면서 하나의 작용에 대한 시인의 반-작용이 될 수 있다. 시인에겐 언제나 “다른 중력이 작용했”(「도움받는 기분」)을 테니까. 이성이 작동되어 제약과 관습, 관념이 단단히 뿌리 내린 사회에서 ‘상승’을 꾀하는 시인은 자유와 주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시의 화자는 높은 곳으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수직의 시선을 갖는다.
어두운 강의실에 앉아 그런 것을 떠올렸다
천 미터 상공에서 천 장의 종이를 뿌린 다음,
서로 겹쳐진 부분만 남긴다면
색색의 스프레이
분홍이나 파랑 초록 보라 빨강 빨강
포개진 영역만 표시한다면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내려본다면
어떤 무늬일까?
(중략)
천 미터 상공에서 종이가 내려 앉기까지의 시간
분포와 확률에 관한 예감
포개진 것들은 아름답고
-「클리나멘」 일부
백은선의 시적 공간은 ‘사이’이며 사이의 지평은 ‘허공’이 된다. 백은선에게 이 땅은 이미 실패한 세계이다. “실종된 우리”를 “실종되지 않은 우리 안에서”(「저고」) 찾으려는 시인에게 ‘우리’라는 관계는 서로를 상처 주는 존재이다. “실종된 우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닿지 못하는 메아리일 뿐이다. 또한 백은선에게 이 땅은 무수한 ‘관념’어와 상징이 만들어져도 소통이 깨진 세계이고 시적 세계가 구축되었어도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이 시적 형식에 갇혀 말해지지 못하는 그런 실패한 세계이다. 백은선은 ‘사이’를 조망하며 이 땅에서 멀어진다. 화자는 “허공을 가위질하며 지나가는”(「중력의 대화자들」)것을 응시하는 자이다. 「클리나멘」은 수평적 질서가 무너진 이 땅에서 멀어져 모든 것을 리셋(Reset) 하려는 듯 ‘수직’의 시선을 유지한다. 마치 세상을 지배하는 ‘수직적인 질서에 대한 승부처럼’(양경언)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의 ‘사이’에 관한 관조는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열망이다. “천 미터 상공에서 천 장의 종이를 뿌린 다음, 서로 겹쳐진 부분만 남긴다면” 새로운 ‘우리’가 된 종이들... “어떤 무늬일까” 그렇게 “포개진 것들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화자의 고백은 ‘결정된 부력’(「범람하는 집」)이 없는 세계이고 정의되지 않은 세계와 그 관계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고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땅’에서 지시된 많은 것이 사라져야 할 것들이라는 시인의 ‘사이’의 사유는 마침내 ‘끝장나’기를 바라고 파국의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시인은 “불가능과 가능의 묶음처럼”(「미장아빔」) 사이를 사유한다. “0과 0 사이”(「0의 방백」), “혼절과 반복 사이”(「가능세계」)를, “부피와 탈부피 사이(「가능세계」)를, “말하거나 하지 않음” 사이(「청혼」)와, “말과 진짜 생각 사이”(「목격자」)를, “나무와 나무 사이”(「목격자」)와 나와 늙은 여자 사이에서 파생된 “균열에 대한 이미지”(「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를 묘사하고 있다. 사이를 목격한다는 것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목격자」)하는 존재이고 도시의 산책자가 되는 일이다.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본 사람이라면 혹은 도시에서 활동하는 대중 ‘사이’를 산책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목적에 의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중들과 부자연스러운 대조를 보이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벤야민). 이 과정에서 사물과 존재는 은밀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다시 말해 통과되지 못하고 비닐 박판에 걸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어떤 개념어로 가두어도 벗겨져 드러나고 마는 것. 우리가 백은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으로부터의 전환 즉 정동, 정념의 것을 개념 이면에서 느껴야 한다. 바람을 느낄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다. 언어의 한계이자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백은선의 시는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느껴야만 한다. 그 감각은 하나의 무언가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저마다 다른 것이기에 ‘소통’과 ‘이해’를 촉구할 수 없다. 이는 “너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나는 너를 생각”(백은선, 책 맨 뒤)하는 것처럼 다른 것이고 “너는 종을 치고 나는 잊히지 않는 한 단어를 생각”하는 다른 배경 때문이다.
물론 시인도 처음부터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을 쓴 것은 아니다. 백은선도 다른 시인들처럼 하나의 의미가 절대적 의미로 여겨 “특별한 것, 센 것”을 썼다고 고백하고 시어에 매달리고 형식에 매달렸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수간이나 미러볼 혹은 죽음과 사랑을 소재” 삼을 때 “특별한 것 센 것이 근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것 같았”(「도움의 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은선 역시 “실종된 형제에 대해 쓰고 폭력과 근친에 대해 썼다고 고백한다. 수치스럽고 즐거웠다”고(「도움의 돌」). 그러나 시인은 이제 “모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처럼 소소하고 “의미 없는 일이지만 중요”하다. 백은선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일’이 아닌 ‘존재’의 이유가 된 셈이다.
거대한 색을 움켜쥐고 있는 물속의 나무를 생각
한다.
어느 날 눈이 잎사귀 끝을 스치고 가라앉는 장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요요히 떠오르는 하얀 나무.
나무가 온몸을 뒤흔들며 중얼대는 것을, 한 단어
를, 하나씩 꺼내, 조용히 읊조리는 것을.
깊이 잠겨 그것을 엿들을 때. 나는 지워지는 것
같다.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물을 때. 나는 점점 더 의
기소침해진다. 갑자기 아무것도 연주할 수 없게 된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지켜보
는 풍경을. 입술을 뗀 직후 연인의 얼굴을 볼 때. 그
의 눈 코 입 너머로 먼 미래의 이별을 미리 겪는 것.
매번 새롭게 이별하는 것. 그리고 침묵.
나는 바다 앞에 서 있다. 수평선을 절벽이라고 믿
었던 옛날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 된다. 나는 내용
없는 빈 중심이 된다. 하나씩, 접속사들을 꺼내 적
어본다.
나는 눈이 내리는 것을 본다. 하얗게 공중을 흔드
는 눈송이들이 닿는 순간 사라진다. 부지불식간에
천년이 흐르는 것을 본다.
「고백놀이」일부
산책자는 끊임없이 ‘사이’를 인식한다. 시인은 ‘사이’를 인식하며 존재에게 끝없이 일어나는 일들과 그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시인은 “거대한 색을 움켜쥐고 있는 물속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물속의 나무가 “온몸을 뒤흔들며 중얼대는 것”을, “한 단어를, 하나씩 꺼내, 조용히 읊조리는 것을” 엿들으면서 “하나씩 떨어진 눈송이들이 심해에 다다를 때까지 그런 리듬으로” 자신을 성찰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며 “어떤 일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파격으로 일어나며 존재에게 끝없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우리는 그저 “짐작하며 조금씩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안다는 것’과 ‘이해’가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시인은 절망한다. 이해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쏟아내는 무수한 말 가운데 왜곡되거나 이해되지 않음이 다시 생겨나고 그 틈을 메꾸고 이해시키기 위해 더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완전히 채우는 것, 즉 이해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시인은 절망한다. 상징과 관념어를 사용하고 반복과 나열, 무수히 많은 말들을 쏟아내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아는 그 순간 절망의 상태에 갇히기 때문이다. 이해되는 즉시 이해되지 않는 세계가 도래한 것처럼, 절망의 끝에서 다시 절망이 시작되는 것처럼 절망을 마주해야 하는 시인은 이제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어/모든 게 사라지면 좋겠어//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속에서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로 무서운 속도 속에서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로”(「비좁은 원」), 바라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두자”(「조롱」)고 말한다. “우리가 목도한 것은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열리는 동시에 굳게 닫혀 있는//숲/ 그리고 영원”(「1g의 영혼」)이다. 시인은 “나는 모른다네”(「어려운 일들」) 고백한다. 이는 ‘사이’의 관찰을 통한 사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화자는 자연이 읊조리는 무수한 말들, 무수한 표현들에 “의기소침해진다.” 화자는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지켜보는 풍경을.” 산책자는 사이의 풍경에 ‘침묵’할 뿐이다. 침묵은 자연을 배우는 방식이며 감각을 간직하는 것이다. “닿는 순간 사라지는” 눈송이조차 “천년이 흐르는” 유구한 세계의 ‘코어’였던 것이다. ‘사이’의 사유를 통해 시인에게 비로소 시로 쓰지 말아야 할 것은 산책자의 눈에서는 오히려 쓰일 것들이 된다. 시인은 낯선 것을 시로 쓰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낯섦을 발견해 끌고 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이’의 사유를 통해 시인에게 비로소 시로 쓰지 말아야 할 것은 산책자의 눈에서는 오히려 쓰일 것들이 된다. 시인은 낯선 것을 시로 쓰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낯섦을 발견해 끌고 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이’를 견지하다가 “목도한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1g의 영혼」)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시로 쓰여진 것들이 ‘이해’를 위해 약속대로 쓰이고 있지만, 기표가 기의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개념으로만 끝장난 풍경에서 시인이 ‘목도한 세계’를 ‘갈겨’씀으로 현장성을 드러내며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존재의 앎의 한계를 사유한다.
파국의 사회와 언어를 통과하면서
예술가가 영원한 진리를 갈구하면서도 자기 주위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지 못하지만(벤야민,『도시의 산책자』, p51) 산책자는 ‘사이’에 몸을 포개어 감추고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다. 백은선에게 시적 화자는 예술가 자신을 투영시킨 시인 자신이 아니라 세계를 목격하는 산책자이자 목격자이다. 시인은 기표에 하나의 기의가 담아내는 세계가 존재와 자연을 ‘이해’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다. 시인은 과잉의 방식으로 ‘소진’되어 감을 택한다.
언어에 대해 쓰려고 했지
언어라고
언어를 안다고
언어를 언어에게 가져가
무지막지하게 벌어져 있는
이 틈으로
쌓여가는 모래
쌓여가는 모래
모래
살아 있는 것들을 생각하니
유쾌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전부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그런 상태를 선회하는 날개같이 느꼈다
-「네온사인」일부
시인이 “언어를 안다고” “언어에 대해 쓰려고” 할 때 “쌓여가는 모래”처럼 글이 쌓여만 간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할수록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선회하는” 것처럼.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시인은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를 인지했다. 그리고 시인은 소통을 시도하며 무수히 많은 말을 ‘갈겨’ 쓺으로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다. 시인의 절망은 ‘사이’의 주시에서 획득된 것이다. 시인은 ‘사이’를 주시하다가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물의 ‘부지불식간’, ‘순간’, ‘찰라’의 변화가 천년의 결과물인 사실(「고백놀이」)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의 모든 문이 쏟아내는 의미를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데에서 절망을 포착한다. 다음 시인은 ‘우리’라는 사회가 소통과 이해를 위해 만들어 둔 관념어가 오히려 바벨 ‘탑’에 갇힌 소년·소녀들을 만들었고, 자연과 불통하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보는 데에서 유래하는 절망이다. ‘우리’라는 개념 역시 변질되고 왜곡되어 고통을 주는 주체로 전락했다면서 ‘우리’ 이전의 우리로 돌아가기를 촉구한다. 이러한 시인의 절망은 ‘흔적’으로 남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자주 복고(復古) 되는 현상이 되었다.
소통의 새로운 방식으로 시인이 택한 방식은 감각으로 이들의 소리와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다. 백은선은 “바람과 시야를 부옇게 만드는 기후 몇 개의 발자국”을 시적 “준비물”(「목격자」)로 삼는다. 「목격자」에서, 화자는 온 감각을 무대에 초대해 극을 완성한다. “청각으로만 청각을 완성하는” 여름 ‘숲’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의 대본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한 화자는 배경이 되는 ‘숲’을 관찰하고 숲의 끝에 놓인 ‘나무’를 살피고 나아가 “나무와 나무 아닌 것 사이에 있는” 것을 바라본다. 화자는 이제 무대 위에 ‘귀’를 풀어내고 “나의 청각에 대해,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만 생각”하기로 정한다. 이후 화자는 “쫑긋한 귀들을 줄지어” 퇴장시킨 뒤, ‘혀’를 등장시켜 “잎사귀들 떫은맛”을 느끼게 하고 “물속에서 총이 발사”되는 것 같은 몸의 감각을 묘사한다. 산책자는 자신의 감각을 열어두고 보고 들은 바를 받아적는 존재인 셈이다. 자연을 직접 보고 듣지 않고도 자연을 노래하는 시대는 얼마나 비루한가. “우주는 커다란 소리굽쇠”(「가능세계」)인데, 우리는 “좁은 방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고도와 조수간만의 차와 형이상학에 대해 밤새 떠들고 떠들다 지쳐”버리거나 “이런 문장은 위험하니 쓰지 말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시인은 그저 “가만히 누워 가만히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며 터무니없이 낮은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날씨를 보며 “날씨는 어이없구나” 말하면서 “총력을 다해 할 일 없는 하루/하루, 하루, 하루 지나가는 손목들 붙들고 싶다 터무/니없는 것을 시작하고 싶”(「가능세계」)다. “방의 한계”에서 벗어나 시인은 “담아내고 싶”다. “숲의 창백과 바다의 권태 손/목은 병렬 비 내리는 음가 지워질 광경들 광경이라/는 말을 달아주겠다 밀봉해서 꼭 끌어안아 터뜨려버/리고 싶”을 뿐이다.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지
우리는 기다린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
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 해
저 산산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창들을 보렴
이토록 커다란 텅 빔을
끝이 끝과 연쇄하는 꼴을
……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우리라고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일부
많은 장시 가운데 하나인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는 제사(題辭)가 붙어 있는 한 소녀의 일기이다. 소녀는 삼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공동 셀터에 살고 있다. “아홉 살에 반복적인 망상과 발작으로 내원했고” 결국 “열다섯이 되던 해 병동에서 투신했다.” 안과 밖이 모두 폐허인 상황에 ‘나’라는 소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철창’을 바라보는 존재이다. 이상적인 감옥인 판(pan ‘본다’)-옵티콘(제레미 벤담)처럼 ‘비좁은 원’(「비좁은 원」)으로 설계된 ‘철창’ 이 “방 한 가운데 놓여 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잘 지켜볼 수 있도록 잘 보고/서로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누군가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도록” 놓여 있는 그 철창 안에는 사냥꾼이 잡아 온 아이가 제물처럼 갇혀 있다. 크기만 다를 뿐 겹겹이 포개진 축소된 사회와 소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와 ‘너’ 사이에 놓인 것을 지켜보고 침묵했는지 시인은 지적한다. 우리는 철창 속의 “두 아이가 미친 듯이 서로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자는 “철창 안에 철창이 있고 철창 밖에 철창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끝까지 말”할 수 없는 “우리” 사회 모습이다. “사냥꾼이 두 아이를 철창에서 꺼”내 “더 마르기 전에 끝장을 내”려 하는 약육강식의 모습과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을 내게 줘요”라고 부르짖는 잔인성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여자가 점점 크게 눈, 눈, 눈 하고 외쳐댔”고 “너는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고 “나는 귀를 틀어막고 옥상으로 갔”다. “나는 물에 잠긴 어두운 도시를 바라봤”고 “나는 무섭다 나는 나라는 말이 무섭고/네 서툰 다정함이 무섭고/서로를 끌어안고 울던/ 두 아이가 미친 듯이 서로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는 게/ 그걸 적어놓기 위해 일지를 펼치는 나의 두 손이” 무섭다. 화자는 시대의 목격자이다. 일지에 적힌 ‘나’의 내용은 보고 들은 시대의 증언인 셈이다.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어/모든 게 사라지면 좋겠어//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속에서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속에서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 무서운 속도로”(「비좁은 원」), “나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침묵과 함께/끝장나고 싶었다//우리가 목도한 것은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닿여 있는//숲//그리고 영원이지//…//끝나는 소리//세계가 순식간에//무너지는 소리”(「1g의 영혼」)은 절망의 숲(세계)이 “슬픔의 연쇄”를 만들고 “그 무게가” “병들게 하고 눈멀게 했”다고 말한다. 끝없는 절망의 파국 시대를 살면서 ‘나’는 ‘너’와 함께 ‘우리’가 건설한 세계 속에서 파멸됨을 알 수 있다. 파국의 땅에서 시인이 바라는 것은 리셋(Reset)이다.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파충」)기 때문이다. 끝과 맞닿은 처음처럼 “끝장났으면 좋겠”(「가능세계」)다는 시인의 바람은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해체, 재건 가능한 세계
‘가능세계’는 절망 속에서 세계의 형식을 모두 소진하고 마침내 ‘사이’의 사유를 통해 ‘나’와 ‘너’의 관계를 그리고 탕진된 언어를 감각으로 더듬어 나가며 새로운 시작을 꾀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시인은 시의 형식을 깨고 일상어로 시어를 나열함으로써 너무 말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시의 특징일 수도 있는 감각적이고, 난해하며 반복과 나열이 백은선의 시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백은선의 시를 가리켜 자동기술법으로 쓰인 시다, 혹은 즉흥시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 시인은 “문장을 숨기는 방법”(「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많은 말들을 “그냥 두는 거”를 택한 것이다. 어차피 다 알지 못할 바엔 관념어에 숨겨진 무수히 많은 감각을 그냥 풍경이 되도록 하고 이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라리 ‘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시 작가 반열에 있는 백은선의 시는 동시대 시인들과 다소 다른 면을 보인다. 현대시가 탈현실화, 탈개성화에 뿌리를 내리고 난해, 모호, 감각, 환상으로 향한다는 면에서는 백은선도 동류로 볼 수 있지만 어떤 내적 논리의 결여에서 기인한 모호와 난해가 아니라 백은선은 삶의 다면성에 관한 깊은 성찰과 직관이 수반된 모호, 환상, 난해, 내적 사유라는 점에서 결을 달리한다. ‘사이’의 사유나 ‘우리’라는 결속 관계가 부리는 가학성을 살핀 부분, 그리고 현대시라는 네이밍을 획득한 형식과 논리가 타당한가를 고민하면서,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를 사유하기 때문이다. 백은선은 마침내 지시 대상에 관해 말해지지 않은 것을 충분히 말함으로써 소통을 꾀하려 했지만, 개념으로 마비되고 논리적이고 입체적인 사고가 부족한 현대인에게 소통은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개념어, 관념어, 형식과 틀은 소통을 향하거나 시를 시답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시인의 필수적 요청되는 자유로움을 가리는 엄폐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 시인은 ‘해체’를 촉구한다. 대상 하나가 유구한 세월 속에서 같은 대상인 듯 보이지만 수천 개의 모습을 지니고 있듯 다양한 이미지들을 열거하고 다의적 의미를 탐사할 수 있도록 해석자의 손에 맡기는 작업을 하려 한다. 우리는 언어가 소통 ‘가능’한 수단이라고 믿으며 그런 신화 속에서 언어라는 기호를 사용해 우리의 욕망을 텍스트 안에 둔다. 이것은 이후 환원될 수 없는 표시가 되고 마침내 형체를 이루면서 우리를 묻어버리는 ‘무덤’처럼 되고 만다. 이에 우리는 텍스트라는 거미줄 속에서 길을 잃게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 화자의 고백처럼 언제나 “우리는 관념 속에서 시작”하고 그 “관념 속에서” 무수한 것을 정반합으로 회전시키거나 튀어 오르게(「저고」) 한다. 언어가 절대적인 기호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믿으면서. 그러나 이 같은 사고는 언어의 이해 가능성이라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사실 개념의 해체는 어떤 모호함을 파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호성의 해석 차원에 인계된 시인의 강력한 소통의 방식이다. 그저 시인은 ‘일그러진 현실’(황지우)을 직시하려는 태도를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나’와 ‘너’의 부재 가운데 ‘우리’라는 주체의 목소리에 갇힌 사회, 불통의 사회를 인식하고 형식과 개념어에 갇힌 총체적 부조화의 모순을 수용하면서 알레고리적으로 풀어내려는 것이다. 시인에게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있다면, 끝장나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이 태동이 되고 불통은 소통이 될 테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