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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강해 (3)
하나님은 주도권을 놓지 않으신다
대상 13:1~10
I. 서론
오늘 본문은 역대기서를 알고 있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역대기 전체 흐름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역대기를 기록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보니 성전과 성벽이 모두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에스라가 역대기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다윗과 솔로몬에게 집중했고, 그들의 삶 중에서도 부정적인 모습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에 대해서는 밧세바와의 간음, 임기 말년에 일어난 반란들을 기록하지 않았고, 솔로몬에 대해서는 우상 숭배 허용과 통치 말년의 혼란에 대해서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좋은 면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잘못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던 도중, 웃사가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는 시도도 3개월이나 중단되어야 했습니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고민하고 연구했을 것입니다. 만약 에스라가 오늘 본문의 사건을 역대기서 전체 흐름과 맞추려고 했다면, 단순히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왔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통하여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II. 본론
1. 첫째, 하나님께서 올바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세네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There is no right way to do the wrong thing.” (잘못된 일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예는 아니지만,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영화에 많은 소재가 되고 있는 “은행을 터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은행을 터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이 잘못된 일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대낮에 강도가 되어 털든지, 한밤중에 도둑이 되어 털든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There are wrong ways to do the right thing.” (올바른 일을 잘못된 방법으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1~4절,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다윗은 사울 왕에 의해서 무너진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올바르게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고 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몇 가지 사항을 알 수 있습니다.
1) 우선, 다윗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사울 때에는 하나님의 궤(즉, 하나님께)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통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2) 또한, 다윗은 모든 백성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4절,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다윗의 제안에 뭇 백성이 동의했다고 말합니다. 뭇 백성이란 “the whole assembly”라고 영어에서 표현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3) 이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7~8절,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였다.” 다윗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선한 의도, 온 국민의 지지, 진심 어린 소원.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9~10절,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소가 몰던 수레에 하나님의 궤를 실어서 운반하던 도중, 소가 날뛰어 궤가 떨어질 것 같은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그 순간, 웃사는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궤를 붙들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게 된 것입니다. 웃사 역시, 선한 의도로, 하나님의 궤를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궤를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것은 3개월 후에 다윗이 다시 하나님의 궤를 이동하면서 고백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상 15:2,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이 말씀은 민수기 4장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민 4:15,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고핫은 레위의 둘째 아들입니다. 즉, 레위 자손이 하나님의 궤를 메고 운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문제는 분명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선한 의도도 있었고, 온 백성의 지지도 있었고, 진심 어린 소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건으로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들에게 맡기신 직분을 존중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레위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도록 하지 않고, 수레에 실어서 운반했을까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다윗이 블레셋의 영향을 받아서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왜 이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이 역대기 최초의 독자와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였다가 황폐해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한 의도, 동료들의 지지, 진심 어린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다윗처럼 자신들이 살았던 바벨론의 방식으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2. 둘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궤를 이동시키셨다는 것입니다.
6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에스라는 기럇여아림을 소개하면서 유다에 속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궤가 만들어진 이후, 어떻게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먼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를 시내 광야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궤에는 율법의 핵심이었던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맛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2)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이동하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했습니다.
3)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궤가 실로에 보관되었습니다.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속한 지파였습니다.
4)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사사 시대가 시작됩니다.
오랜 기간 동안,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궤가 사사 시대 말기에 에벤에셀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에벧에셀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투를 했는데, 첫 전투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5)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블레셋 땅, 아스돗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 아스돗에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나라간의 전쟁은 그 나라가 섬기던 신들의 전쟁으로 여겨졌고, 패한 나라의 신의 성물은 전리품으로 다른 나라의 신전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도 다곤 신전에 전리품으로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한 줄로 알았던 여호와께서는 다곤 신전에서 다곤 우상을 박살내 버립니다.
삼상 5:1~4,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첫 날에는 다곤의 얼굴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땅에 엎어져 있었는데, 둘째 날에는 다곤의 얼굴이 땅에 엎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머리와 손목이 잘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전쟁에서 여호와께서 다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하나님은 패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궤가 “언약궤”로 불린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약궤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을 담은 궤라는 의미입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기 19:5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조건부 언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떠나고 말았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면, 하나님의 힘을 자동적으로 소유할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임용섭 교수의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의 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언약궤 자체가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배교와 관계없이 언약궤라는 도구에 매여 다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언약궤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우리는 흔히 언약궤(성전)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언약궤 상자나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상 28:2,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율법학자 에스라는 역대기서를 기록하면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고, 하나님의 발이 지상에 있는 언약궤에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약궤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언약궤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2)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궤가 실로에서 아스돗으로 옮겨진 것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이스라엘의 지도권을 옮기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좋아합니다.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두 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항상 일인자였고, 언제나 전번에 등장해서 주목을 받으면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반면 갈렙은 충성스럽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여호수아의 그늘에 항상 가려졌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때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의 자손에게 언약궤가 옮겨옴으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 가문의 지파였고,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파였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땅도 가장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기록을 보면, 에브라임 지파는 온 민족이 힘을 모아서 전쟁을 하려 할 때, 항상 뒷짐을 지고 있었고, 다른 지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나면 뒤늦게 나타나서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트림만 잡았던 지파였습니다. 이런 지파가 초기에는 여호수아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유다 지파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에브라임을 떠나고 유다로 이동한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참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에스라가 유다 지파에 속한 기럇여아림에서 유다 지파 출신 다윗이 통치하는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가 이동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에스라가 역대기를 기록할 때 역대기의 최초의 독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궤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BC 586년에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을 파괴할 때에 하나님의 궤가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1) 하나님의 궤가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 자체에 어떤 초인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궤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 또한 황폐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처럼 꼭 필요할 때 뒷짐지고 있다가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에 나타나서 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언약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의 궤에 대한 것입니다. 이 궤는 언약궤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 궤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가지 언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언약은 진정한 역사의 구분점이 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당시 나라마다 사용하던 다양한 달력을 통합시켜 만든 것입니다. 디오니시우스가 만들어 낸 연도 계산법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초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로마력 753년으로 보고, 그 해를 AD 1년으로 정했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실수를 발생하여 예수님의 실제 탄생 년도는 BC 6세기에서 4년 사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어째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여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우리 주님의 해)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밥 조지(Bob George) 목사님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류가 옛 언약 아래 있든지, 새 언약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이 구분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래서 BC 와 AD는 예수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무엇이고, 새 언약은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옛 언약이 조건부 언약인 반면에 새 언약은 무조건부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우리의 행위가 있어야만 언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역에 기초를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을 역대상 17장에서 다윗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대상 17: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옛 언약 아래에서는 성립될 수 없었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빼앗지 않는 영원한 약속”이 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새 언약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주도권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1)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지 않자, 한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그에게 교훈을 주셨습니다. 왕이 전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 왕이 된 초기부터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실로에서 유다 지파에 속한 기럇여아림으로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셨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인해 우연히 옮겨진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새 언약이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인생과 미래에 주도권을 쥐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