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의 저자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수수께끼의 난도가 높다 하더라도 거기엔 답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격이 있듯 난해 시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시의 자격이 있다. 난해 시가 양산되는 배경에는 전위적 실험을 추구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시인이 언어를 장악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시에서 비문이 더러 비평가들의 상찬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다. 비문의 남발이 시의 덕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시의 효과를 위해 우리는 흔히 ‘시적 허용’이라 하여 일부러 문법을 창조적으로 일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사용해야지 이것이 시 진술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시인의 자질을 알려면 그가 쓴 산문을 읽어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것은 시인의 국어 사용 능력을 불신하기에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이런 내외적 이유로 인해 독자 대중으로부터 시가 멀어졌다고 생각되기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우리의 현실 독자들은 시와 친해지기 위한 지적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시가 어렵게 느껴지면 무조건 시인을 탓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물리학이나 고등수학, 추상미술이나 고전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무지를 탓한다.
그러나 시가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탓하는 대신 시인들을 타매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시도 향수할 수 있으려면 지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우리는 스포츠 관전을 하기 위해서도 스포츠 ‘룰’을 알아야 한다. 룰을 모르면 모른 만큼 관전의 쾌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시 역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시에 대한 최소한의 ‘룰’ 즉 이미지, 어조, 비유, 상징, 신화, 반어, 역설, 패러디 등등 시의 구성요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숙지는 필요하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얼마 전 나는 ‘왜 일반 대중이 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각자의 의견을 달라는 요청을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띄운 적이 있었는데 꽤 많은 호응이 있었다. 중복되는 것을 빼고 나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남았다. 올라온 내용들을 그대로 옮겨본다.
1) 시에는 깊은 성찰과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은 물론 이웃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담겨 있다. 시는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시의 아름다움은 그 시가 지닌 영혼의 깊이와 폭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단어를 단순히 나열한다고 해서 시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시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낯선 것들을 결합시켜 전혀 다른 모습을 새롭게 보여준다.
시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세상과 생의 살아 있는 표정을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여 가장 적절한 형식에 담아낸다. 기발해 보이는 착상도 깊은 사색과 폭넓은 성찰을 통해 얻어진다. 우리는 더욱 풍성한 세상을 만나고자 나아가 더욱 진실하게 세상 사는 법을 배우고자 시를 읽는다. 시를 통해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받고 순수한 인생을 되찾고자 시 감상을 하며 보다 성숙된 인생을 꾸려 나가기 위해 시를 읽는다.
시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 가능하고 신화적 신비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소설 영화 같은 장르보다 정서를 표출하기에 훨씬 좋다. 우리는 시 감상을 통해 심리적으로 대리만족과 대리배설이 가능하며 자기와의 화해 및 세계와의 화해를 이루기 위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시는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세계를 열어둠으로써 상처를 아물게도 한다. 시는 잃어버린 사랑을 목 놓아 울어버리고 그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 시는 슬플 때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새어나오는 흐느낌이다. 시는 그 상처를 새로운 불씨로 삼아 나아갈 곳을 찾는다. 홍역처럼 심하게 앓았던 첫사랑의 상처도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시나 그 아픔을 위로해주는 시들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시는 우리를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이끈다. 사랑의 아픔을 어떻게 안으로 삼키고 키워나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심하게 앓았던 첫사랑의 상처가 한 편의 시로 말미암아 치유될 수 있으며, 첫사랑의 그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빌 수 있게 된다.
2) 마음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
3) 시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4) 시는 무질서한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5) 시를 읽으면 마음이 자란다.
6) 시는 일상이고 끼니와 같은 것이다.
7) 우리는 보통 ‘바라보기’라는 말의 목표를 밖에 두는데 나는 나를 바라보는 데 뜻을 둔다. 시가 그렇다. 시에 있어 모든 세상 바라보기는 일차적으로 따뜻한 시선이어야 한다.
8) 시 속에 사람이 있고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9) 시를 쓰는 시인은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처럼 대체 불가능한 유일의 적정어를 선택하기 위해 거듭 생각에 골몰하고 노력한다. 그렇게 창작된 시가 영혼을 정화하기 때문이다.
10) 언어에 대한 미적 감성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언어의 미적 감성이 길러지면 소통 수단인 언어를 훨씬 더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사람들 간의 이해와 연대에도 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11) 힘겹고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 시를 찾게 된다. 척박한 시대에 시를 함께 나누는 이들과 체온을 나누면서 견디는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12) 시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고백이다. 시문학이 아니라면 그 숱한 고백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차마 하지 못하는 나의 고백을 대신 해주는 것이 시(시인)이고 그 시를 읽으면서 내면을 응시하고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13) 우리의 어린 시절은 시의 형식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시 내용을 생활로 누릴 수 있었다. 멍석 위의 식사며 라디오로 듣던 드라마, 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물고기 잡던 나날들이 바로 시였다.
14)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그른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고 다산 선생이 말씀하셨다. 시인은 그 시대 아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동하는 인간이다. 시인이 죽은 사회는 이성이 묻혀버린 공동묘지일 뿐이다. 국민이 시를 봐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시인을 감시하고 지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시인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조만간 관을 준비해두고 시를 써야 할지 모른다.
음식으로 치면 발효 식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정서를 충분히 숙성시킨 연후에야 시작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경향들은 너무 날것의 생경한 이미지 남발과 과도한 비유의 배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심히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오래전 바다 건너 마을에 살았던 한 유명 시인의 시에 대한 태도에 잠깐 눈과 귀를 기울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