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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사모(부산) 원문보기 글쓴이: 신영식(창조도시기획과)
(춘천시서면)신웅,신유님의 선대 어른이신)신숭겸장군 : 고려태사 개국공신이며, 평산신씨의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 동상
위사진은 신숭겸 장군의 묘역에서 내려다 보이는 춘천시내 전경
신웅님,태능이쁜이님,작은거인님,오리님도 가셨는데 오리님은 다친 다리 때문에 절을 못드렸습니다,참고로 태능이쁜이님도 신웅님&작은거인님과 같은 평산신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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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神道碑 : 춘천 시조 묘역 경내에 있다)
고려 벽상 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 공신 광익효절 헌양 시 장절 신공 신도비명(高麗 壁上 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 砥節底定 功臣 匡翊效節 獻襄 諡 壯節 申公 神道碑銘)병서(幷序)
외예(外裔) 원임(原任) 대제학(大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영부사겸(領敦寧府事兼) 지경연실록사규장각검교제학(知經筵實錄事奎章閣檢校提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안동(安東) 김조순(金祖淳)은 삼가 짓고,
후손(後孫) 승의랑(承議郞) 수홍문관부교리(守弘文館副校理) 지제교겸(知製敎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실록기주관(實錄記注官) 동학교수(東學敎授) 문신겸(文臣兼) 선전관(宣傳官) 위(緯)는 삼가 쓰고,
외예(外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겸(議政府左議政兼) 영경연사(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달성(達城) 서매수(徐邁修)는 삼가 전(篆)하다.
춘천부(春川府)의 북쪽에 소양강(昭陽江)이 있고 소양강의 북쪽 6~7리 쯤에 비방동(悲方洞)이 있으니 곧 고려(高麗)의 대사 공신(代死功臣:임금을 대신하여 죽은 공신)인 태사(太師:고려 때 삼사<三師>의 하나이며 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 신공(申公)의 체백(體魄)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높다랗게 솟은 봉분 셋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태사가 전사(戰死)한 때에 그의 머리를 잃은지라 고려태조(高麗太祖)가 태사의 얼굴을 금으로 불리어 만들고 시체에 합쳐서 장사 지내면서 혹시 몰래 이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봉분을 셋으로 하여 잘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라고도 하나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文獻)을 상고할 수 없으므로 매양 제향할 적에는 한가운데 봉분에 나아가 성배하고 행사(行事)하니 이는 그저 소중함을 헤아릴 뿐이요 혹은 왼쪽인지 바른쪽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公)의 휘(諱:돌아가신 조상이나 존귀한 이의 이름)는 숭겸(崇謙)이요 처음 휘는 능산(能山)이라 하였으며, 그 선대는 백제(百濟) 욕내군(欲乃郡)에서 비롯하였는데 사서(史書)에는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라 하였다. 욕내군은 곧 지금 곡성현(谷城縣)이요 광해주는 바로 춘천부(春川府)이니 아마도 곡성에서 춘천으로 옮겼던 것이리라.
신라(新羅)의 정치가 쇠잔해질 무렵,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도읍하여 태봉(泰封)이라 불리었는데, 공(公)은 맨 처음 궁예에게 종사하여 기장(騎將)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궁예가 흉포 무도(凶暴無道)하여 사람 죽이기를 날로 일삼게 되자 그의 처 강씨(康氏)가 이를 말리다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두 아들에까지 미치니 백성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그 해독을 참을 수 없었더니, 고려태조 신성왕(神聖王)이 송악(松嶽)에서 일어나자 너그럽고 어진 도량으로 난세(亂世)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에 뜻을 두고서 자주 큰 공을 세워 시중(侍中), 백선장군(百船將軍)이 됨에 따라 그의 위엄과 덕망(德望)이 날로 높아지고 인심도 흡연(洽然)히 기울게 되었다.
이에 공(公)이 천명(天命)의 소재(所在)를 살피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그를 임금으로 추대(推戴)할 것을 은밀히 도모하니 이들 三인 또한 모두 기장들이었다. 이들이 야반에 태조의 집에 찾아 가서 고하기를 『삼한(三韓)이 분열됨으로부터 지금 임금이 크게 분발하고 활동하여 초야(草野)의 도둑을 쓸어 없애고 한반도(韓半島)를 삼분하여 그 태반을 가졌으되 마침내 유종의 미(美)를 거두지 못하고 음란하고 포학한 일을 함부로 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하들을 업신여겨 멸망시키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그를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니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같은 포악한 자도 어찌 이 보다 더 했겠습니까. 어리석은 임금을 몰아내고 어진 임금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이니 청컨대 공(公)은 은나라의 탕왕(湯王)이나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처럼 의(義)로운 일을 행하소서』하였다.
태조가 얼굴을 붉히면서 굳이 거절하자 이들이 또 말하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거두어 들이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인데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기어 백성들에게 배반당한 필부(匹夫)의 손에서 죽겠습니까』하였다.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가 장막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오면서 태조에게 말하기를 『의로움을 일으키고 사나움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인데 지금 여러 장수들의 말을 듣건대 여자의 마음이라도 오히려 분발되거든, 항차 대장부이리요』하면서 금으로 장식한 갑옷을 손수 들어 태조에게 입히었다.
이에 공(公)이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태조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새벽녘에 노적가리(積穀) 위에 앉힌 다음, 모두 늘어서서 일제히 절하며 만세를 외치고 기병(騎兵)들을 시켜 달리면서 외치게 하기를, 『왕공(王公)이 거의(擧義)하였다』하니 백성들의 따르는 자가 곧 수만명(數萬名)이나 되었다. 궁예는 놀래어 바위골짜기 사이로 도망쳤다가 평강 고을 백성(斧壤民)에게 살해한 바 되니 이는 실로 후량(後梁) 정명 4년(西紀918) 여름 6월의 일이었다.
태조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뒤이어 추대(推戴)한 공을 기록한 때에 공(公)과 홍유 배현경 복지겸으로 모두 일등공신(一等功臣)을 삼고 조서(詔書)를 내리어 포상하면서 금은기(金銀器)를 하사하고 금수기피욕(錦繡綺被褥)을 폐물(幣物)로 보냈으며 이로부터는 매양 정벌(征伐)할 적마다 오로지 공(公)을 의지하였다.
공(公)은 몸이 장대(長大)하고 기민한 지략(智略)이 있었으며 궁술(弓術)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태조를 따라 평산(平山)에 갔을 적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 지나가자 태조가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하였다.
공(公)이 곧 여쭈어 말하기를 『청컨대 신(臣)이 쏘리다. 몇째 기러기를 쏘아 맞히리까』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셋째의 왼쪽 날개를 맞히라』하거늘 시위가 당기어지자 기러기가 떨어지는데 과연 어김이 없었다.
태조가 탄복하여 말지 아니하고 드디어 세 마리의 기러기가 지나가던 땅을 둘레로 하여 하사하고 이어 평산(平山)으로써 공(公)의 관향(貫鄕:본<本> 또는 본관과 같음)을 삼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지켜오고 있으며 그 땅을 이름하여 궁위전(弓位田)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 10년(西紀927) 가을 9月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고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신라는 동맹국이므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군사 1만명으로 달려가게 하였으나 미처 당도하지 못했는데 견훤이 갑자기 경주(慶州)에 침입하여 드디어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金傅)를 새 임금으로 세우는 한편, 병졸들을 풀어 놓아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 지내게 한 다음, 친히 정예 기병(精騎) 5천을 거느리고 공(公)과 김락(金樂)으로 대장을 삼아 공산(公山) 동수(桐藪: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여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된 태조가 몹시 위급하게 되었다.
본시 그 얼굴이 태조와 흡사했던 공(公)은 벌써 형세가 궁박하여 벗어날 수 없음을 살피고 몸소 태조를 대신하여 죽기를 자청하는 동시에 태조를 애수에 숨게 하고 드디어 임금의 수레에 타고서 김락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죽으니 견훤의 군사가 공(公)을 태조로 여기고 그의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돌아가자 포위가 마침내 풀리었다.
태조가 겨우 죽음을 모면한 다음, 다시 싸우던 곳으로 돌아와서 공(公)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이를 분간할 수가 없었더니, 공(公)의 왼발 아래에 북두칠성 같이 일곱 사마귀(黑子)가 있었으므로 이로 증험하여 찾아내었으며 이에 목공을 시켜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어 자리에 앉게 하고 심히 통곡하면서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고 제토(祭土) 구천보(九千步)를 하사하고 수묘군(守墓軍) 삼십호(三十戶)를 두었으며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甫藏)으로 함께 원윤(元尹:벼슬이름)을 삼았었다.
그리고 또 동수(桐藪)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서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공(公)의 공훈(功勳)을 아뢰자, 벽상 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과 시(諡) 장절(壯節)을 재가(裁可)하여 중서문하에 어필(御筆)로 대서(大書)하였으며, 치제(致祭)의 전교(傳敎)에는 광익효절헌양(匡翊效節獻襄)을 더하고 뒷날 태조의 묘정(廟庭)에 함께 모시어 고려의 종말까지 이어왔다.
본조(本朝:조선의 조정을 이름)의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때에 미쳐서는 공(公)이 임금을 위하여 대신 돌아간 절의(節義)가 우리 동방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을 일깨웠으므로 세상이 다르더라도 민몰(泯沒:문드러지고 몰락하고)할 수 없다 하여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올려 함께 향사할 것을 명하고 또 유사(有司)에게 신칙(申飭)하여 공(公)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게 하고 비록 지서(支庶)라도 군적(軍籍)에 들거나 잡역(雜役)에 징용되는 일이 없게 하였다.
이로부터 역대의 임금이 잇따라 준행(遵行)하더니 또한 우리 선왕(先王) 정종장효대왕(正宗莊孝大王) 20년 병진(丙辰)에 이르러서는,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에 공(公)과 배현경 복지겸 유검필의 철상(鐵像)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중히 받들며 제사 지낸다는 말을 듣고 임금이 크게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을 도운 자는 장절공(壯節公)과 여러 태사들이다』하여 친히 제문을 짓고 공(公)의 후손으로서 앞서 대장(大將)을 지낸 바 있었던 대현(大顯)에게 명하여 말술(斗酒)과 생체(돼지의 날고기)로써 사당 아래에 나아가 북을 치고 군악을 연주하여 유식(侑食)하게 하였으며 예조(禮曹)에서는 액호(額號)를 의논하되 기공(紀功)이라 하였더니 임금이 사태사사(四太師祠)로 고치게 하였다.
아! 공(公)의 충(忠)과 열(烈)은 천고(千古)를 두루 두루 헤아려도 오직 기신(紀信)이 이같을 뿐이요 그 밖의 예(例)가 있음을 나로서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공(公)은 기신보다도 두 가지 나은 것이 있으니, 기신은 한고조(漢高祖)의 평범한 장수로되 공(公)은 한 나라의 터전을 개창한 원훈(元勳)인지라 이는 살아서 나은 것이요, 남궁(南宮)의 잔치에 한고조가 다만 삼걸(三傑:소하,장량,한신을 가리킴)의 힘만 칭찬하고 기신은 언급하지 않았으되 공(公)은 고려태조가 측은히 여겨 슬퍼함이 저와 같았고 천년 후에도 우리 두 임금의 그윽한 감회를 불러일으키어 융숭하게 보답함이 이와 같은지라 이는 죽어서도 나은 것이다.
하물며 그 훌륭한 명성과 의로운 소문이 밝은 세상 여러 선비들의 우러러 받드는 바 됨으로써 무릇 저 고향 마을로부터 공적을 드러낸 고장과 충용(忠勇)을 떨친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두(俎豆)를 받들어 제향하고 장수(藏修:쉬지 않고 학문에 힘씀)하며 공덕을 칭송(稱頌)하되 세대가 더욱 오랠수록 은택이 더욱 새로우니 이는 또 잠깐의 강개(慷慨)함만으로써 명성을 이루게 되는 사람으로서는 바랄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아! 거룩하고 뚜렷하지 아니한가.
공(公)의 적덕여경(積德餘慶)이 후손들에게 흘러내리어 평산신씨가 해동(海東)에 두루 가득하여 이름나고 두드러진 이들이 수두룩하게 벌이어 있으며 보첩(譜牒) 백여 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대개 언급하지 않겠다.
또 살피건대 공(公)이 돌아간 뒤에 정령(精靈)이 아주 기이하여 해동명신행적(海東名臣行蹟)에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팔관회(八關會)를 베풀 때에 공(公)과 김락의 전사한 일을 측은히 생각한 나머지, 짚을 묶어 가상(假像)을 만들어서 반열(班列) 위에 앉게 하고 주식(酒食)을 내리자 술이 문득 저절로 말라지고 가상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하였으며, 뒷날 예종(睿宗:고려조의 16대왕)이 평양(平壤)에 순행하여 팔관회를 베풀 때에는 두 가상(假像)이 잠(簪:옛날 벼슬아치 의관에 꽂는 비녀)과 홀(笏:임금을 뵐 때 손에 쥐는 물건)을 갖추고 붉은 옷을 입고서 말을 타고 뛰어 달리는지라 임금이 기이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그 연유를 아뢰자 임금이 몹시 감개하면서 김락의 손(孫)과 공(公)의 현손(玄孫) 경(勁)에게 벼슬을 주었다 하였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르기를, 공(公)이 돌아가신 뒤에 곡성(谷城)의 성황신(城隍神)이 되었다 하였고 그의 자손들이 또한 말하기를 묘소를 수호하는 자가 혹시 근신(謹愼)하지 않으면 문득 재앙을 빚어낸다고도 하여 세상 사람들이 혹은 의아함이 없지 않으나 나는 적이 생각하건대 그러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옛날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은(殷)나라의 부열(傅說:은나라 정승임)이 죽어서 열성(列星)이 되었다 하였고 유종원(柳宗元)이 유주(柳州)에 귀양가서 죽으니 그 신령이 고을(州)에 내리는지라 나지(羅池)의 사당에 이를 향사하였는데 이의(李儀)가 술에 취하여 만홀(慢忽)히 하다가 폭사(暴死)하자 한유(韓愈)가 비문에다 이것을 적었으며 그 밖의 오자서(伍子胥)나 관우(關羽) 같은 경우라도 뚜렷한 영이(靈異) 함이 전기(傳記) 가운데 나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대저 사람이 태어나되 대단한 용맹(勇猛)과 뛰어난 기백(氣魄)이 있는 자로서 비명(非命)에 죽게 되면 그 애틋하고 끓어오르듯한 정상(精爽)이 육체를 따라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이따금 황홀히 변화하여 산사람(生人)을 몹시 놀라게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사리에 없을 수는 없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공(公)과 같은 이는 스스로 천지를 뒤덮고 우주(宇宙)를 휩쓸어도 민멸(泯滅)되지 않을 것이니 또 어찌 구구하게 이러한 것을 논하겠는가.
묘소에 본시 신도비가 없었더니 올해 갑자(甲子)에 대현(大顯)이 비로소 그의 종인(宗人)들과 더불어 도모한 다음 외예(外裔)인 나 조순(祖淳)에게 글을 청하였다. 아! 공(公)이 돌아가신 지 이제 천년(千年)이 되었는데, 이것도 혹은 때를 기다림이 있어 그러함인가. 사양하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또한 감히 굳이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신씨(申氏) 세계(世系)의 면면(綿綿)함이여 맨 먼저 곡성(谷城)에서 비롯하였도다
사서(史書)에는 광해주(光海州)로 적혔으니 아마도 뒷날 옮겼으리라
이제는 평산(平山)으로 관향(貫鄕)하여 나라에서 내린 땅도 가졌도다
거룩하신 우리 태사(太師)여 하늘이 고려(高麗) 위해 내셨네
궁시(弓矢)의 위엄이요 간성(干城)의 용자(勇姿)로다
궁예(弓裔)가 음학(淫虐)하여 절로 꺾이자 철원(鐵原)에서 처음 치시었네
태사가 기미(機微)에 밝으시어 바람 일 듯 번개 치듯 하였도다
고려태조를 추대하여 포학을 없애고 바로 잡았도다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과 서로 손잡고
배현경(裵玄慶)과도 덕(德)을 함께 하시었네
계림(鷄林)을 조종하고 압록(鴨綠)을 무찌르며
나라의 터전을 돕고 천명(天命)을 비롯하였네
신라(新羅)는 혁명으로 쓸어져 가고 甄萱은 참람하게 반역하였네
나라의 신기(神器)는 옮겨지고 홀(笏)과 면류관은 바뀌었도다
임금이 태사에게 말씀하시되 맹방(盟邦)이 화액(禍厄)을 당했구나!
내가 곧 싸움에 나가리니 그대는 출사(出師)하여 길(吉)할지어다
날쌘 기병(騎兵) 五千으로 팔공산(八公山)에서 무찔렀도다
천시(天時)가 이롭지 못하여 힘이 빠지고 지략(智略)이 다했었네
봉축보(逢丑父)가 제경공(齊頃公)을 닮았듯이
기신(紀信)이 초패왕(楚覇王) 속이듯 하였도다
머리 잃을 걸 각오한 용맹이요 몸을 던져 버리는 충성이로다
임금이 태사를 측은히 여김이여 죽음이 더욱 으뜸 공을 이뤘었네
선진(先軫)의 얼굴인 듯 산 것만 같고 범려의 주상(鑄像)인양 정교하도다
금으로 머리 새겨 시신(尸身)에 합쳐 후한 예(禮)를 갖추어 장사 지냈네
높다랗게 솟은 세 봉분이어 아! 비방동(悲方洞) 언덕이로다
우리 태사 신하이실 제 씩씩한 무용(武勇) 뛰어났었고
우리 태사 돌아갔건만 그 신령(神靈) 늠름하여라
오자서(伍子胥)가 조수(潮水)를 몰아치고
관운장(關雲長)이 순행(巡幸) 길을 도왔듯이
황홀하고 눈부신 영(靈)이시여 현저히 민생(民生)을 도우시도다
넘쳐흐르는 태사의 여경(餘慶)이여 대대로 후손들이 창성(昌盛)하였네
수없이 떨치고 떨쳐 팔도(八道)에 흩어져 가득찼도다
백성도 되고 선비도 되고 더러는 한 나라의 스승도 되었네
기린(麒麟) 같아라 봉황(鳳凰) 같아라 태평성대(太平聖代)의 빛이로세
빛을 펼치고 덕업(德業)을 적어 큰 글자로 깊이 새겼네
멀고 아득한 이 외손(外孫)은 사책(史策)을 간직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거룩하신 명성(名聲)을 돌이켜 보오매 천년(千年) 옛일이 이제런 듯 하도다
태사의 공적(功績)이 없어지지 않을진대 나의 영광도 다함이 없으리라.
숭정(崇禎) 기원후 삼을축(三乙丑) 10월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