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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慶邑 溫泉地區의 龍培公園(將軍의 戰鬪地域인 白華山 平天地를 注視하고 있다)
龍培公園 標識石 將軍의 胸像 主 戰鬪地域인 聖主峰과 平天地
代表 題目 金龍培 准將
●作成者 : 戰爭記念館 ●監修者 : 戰爭記念館
●發行日 : 2004/10/18 ●更新日 : 2004/08/04
要約 情報
● 漢文 : 金龍培 ● 生沒年代 : 1921. 4. 17. - 1951. 7. 2.
● 出身地域 : 慶北 聞慶 ● 最終階級 : 陸軍 准將 ● 賞勳內容 : 太極武功勳章
●參考文獻:太極武功勳章에 빛나는 6.25英雄, 自由民에게 傳해다오 1집, 歲月의 이끼에가려진 寶石
詳細 說明 (※ 略歷)
*1921. 4 慶北 聞慶 戶西南面 出生 *1934. 4 戶西南普通學校 卒業(제5회)
*1948. 4 國防警備士官學校 卒業 및 陸軍參尉(小尉) 任官
*1949 第 8聯隊 作戰將校 *1949. 7 第 6師團 7聯隊 1大隊長
*1950. 7 陸軍中領으로 特進 *1951 第 6師團 제 19聯隊 副 聯隊長
*1951 第 6師團 7聯隊 副聯隊長 *1951 第 7師團 5聯隊長
*1951. 7.2 戰死(楊口地區) *1951. 10. 陸軍 准將(追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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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生涯
1921年 4月 17日 聞慶郡 戶西南面 興德里에서 出生한 金龍培 將軍은 戶西南普通學校를 卒業하고 15歲가 되던 1935年, 故鄕 農業을 發展시키겠다는 一念으로 日本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 (縣立)農業學校에 入學하였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家庭 形便으로 인해 學費를 調達하지 못한 그는 卒業을 1年 앞두고 學業을 포기한 채 歸國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歸國 後 故鄕에서 家事를 돌보던 1938年 12月, 日帝에 의해 志願兵으로 日本軍에 끌려가 羅南에 駐屯하고 있던 步兵 제26聯隊에서 3년 6個月間 服務하고 歸鄕하였다. 그러나 敗色이 짙어진 日帝의 最後 發惡適인 祭物로 1945년 6월 日本 關東軍에 再召集되어 服務하던 중 日帝의 敗亡으로 故鄕으로 다시 돌아왔다.
解放을 맞이한 그는 解放 祖國의 간성이 되겠다는 信念으로 國防警備士官學校 第5期生으로 入校하여 6個月間의 敎育을 받은 後 1948年 4月 軍番 10828의 陸軍 參尉(少尉)로 任官하였다. 그는 步兵 제8聯隊에 配屬되어 作戰將校로서 山岳戰 硏究에 沒頭하던 중 1949年 8月 15日 陸軍 少領으로 進級되어 第6師團 7聯隊 1大隊長으로 赴任하였다. 第7聯隊 1大隊長으로 그는 五臺山 地域으로 浸透하는 北漢軍 遊擊隊를 소탕하는 共匪討罰作戰에 參與하여 많은 戰功을 세웠으며, 第7聯隊의 豫備로 春川에 駐屯하고 있던 중 6.25戰爭을 맞게 되었다. 1950年 7月 4日 忠淸北道 陰城郡 同樂里에서 제7聯隊는 北漢軍 제15師團 例下의 48聯隊를 奇襲하여 完全 殲滅하는 大戰果를 거두었는데, 이는 開戰 以後 國軍의 가장 痛快한 勝利로서 北漢軍의 陰城進出을 1週日間 遲延시킨 戰鬪였다. 7月 7日 제7聯隊는 이 戰鬪의 功績으로 開戰 以後 最初로 大統領部隊表彰을 授賞하는가 하면 聯隊 全 將兵이 1階級 特進하였으며, 따라서 金龍倍 少領도 陸軍 中領으로 昇進하였다. 1951年 1月 20日 제6師團 19聯隊 副聯隊長으로 補職이 變更된 그는 3月 10日 第7聯隊 副聯隊長으로 轉補되었으며, 6月 20日에는 陸軍 大嶺으로 進級과 함께 第7師團 5聯隊長으로 榮轉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1年 7月 2日 江原道 楊口郡 北面 土平里地區에서 中共軍 제5軍團 例下의 1개 聯隊와 高地 爭奪戰을 展開하던 중 敵의 砲彈에 의해 現場에서 戰死하였는데, 當時 그의 나이 31歲에 不過했다. 勇敢하고 沈着하면서 大凡한 指揮官으로 높이 評價되고 있는 金龍倍 將軍은 6.25戰爭 期間 內內 最前線에서 뛰어난 指揮 統率力으로 部隊를 指揮하여 敵을 섬멸하였으며, 政府는 그의 殺身報國 精神과 不屈의 鬪魂을 기리기 위해 陸軍 大嶺에서 陸軍 准將으로 1階級 特進과 함께 1951年 9月 10日 太極武功勳章을 受與하였다. 그의 遺骸는 現在 서울 銅雀洞 國立顯忠院 將軍墓域 1-52에 安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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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功績
金龍倍 陸軍 准將은 1950年 7月 5日부터 10日까지 제6師團 7聯隊 1大隊長으로 陰城戰鬪에 參加하여 拔群의 戰功을 樹立하였다. 同樂里戰鬪로 불려지는 이 戰鬪는 漢江防禦線의 崩壞로 西部戰線의 國軍 部隊들이 平澤과 安城으로 集結하고 있을 때, 原州에서 忠州로 南下한 第6師團 7聯隊가 利川-長湖院-忠州로 이어지는 3番 道路 軸線을 따라 南進中인 北漢軍 第15師團을 底止하기 위해 長湖院 方面으로 進出하던 중 陰城 北方의 同樂里에서 敵의 先頭部隊인 第48聯隊를 奇襲, 擊退하고 南侵을 지연시킨 攻勢的 防禦戰鬪이다. 제1大隊는 이 戰鬪에서 普賢山을 夜間에 占領한 後 背後攻擊을 가하여 敗走하는 敵 270名을 射殺하고 6名을 포로로 하였으며, 45㎜ 對戰車砲 등 各種 武器를 虜獲하는 大戰果를 거두었다. 또한 1951年 7月 12日 第7師團 5聯隊長으로 楊口 土平里地區에서 中共軍 제5軍團 例下의 1개 聯隊와 治熱한 高地爭奪戰을 展開하면서 作戰을 指示하던 中 至近距離에서 炸裂한 敵의 砲彈에 의해 戰死, 타의 귀감이 됨으로써 1951年 9月 10日 太極武功勳章(勳記番號 第15号)을 受與받았다. 北漢軍이 서울을 占領하고 繼續的으로 南侵을 强行하자 國軍은 車嶺山脈을 연한 線에서 이들을 저지하기로 計劃하였다.
1950年 7月 4日부터 10日 사이에 제6師團 7聯隊와 제1師團이 北漢軍 제15師團과 一戰을 벌인 陰城地區는 京畿道와 忠淸北道의 道界를 이루는 車嶺山脈이 中央部에 形成된 盆地로서 地理的으로나 交通上의 要衝이었던 까닭에 彼我間에 이곳의 先占이 곧 中部地域 制壓의 關鍵으로 보고 爭奪의 角逐을 벌이게 되었다. 陰城 防禦를 擔當한 國軍 제1師團이 到着하기에 앞서 陰城 前方에서는 金鐘五 大領이 指揮하는 第6師團 7聯隊가 掩護部隊로서 北漢軍 第15師團과 接觸 中이었다.
7月 4日 忠州, 長湖院 方面으로 南進中인 敵 第15師團을 저지하고 長湖院을 確保하라는 任務를 받은 제7聯隊는 이날 밤 第2大隊를 先發隊로 出發시켰다. 第2大隊로부터 同樂里 附近의 遭遇 狀況을 報告 받은 聯隊長 임부택 中領은 敵이 이미 無極里 및 生剋에 進出한 것으로 判斷하였다. 다음날 아침 1개 大隊를 급히 鎭川으로 投入하여 利川 方面에서 撤收하고 있는 제19聯隊를 志願하라는 命令을 받은 聯隊長은 제2大隊를 鎭川으로 轉換토록 하고 제1大隊로 無極里를 그리고 제3大隊로 生剋을 攻擊하도록 命令하였다. 反面에 北漢軍 제15師團은 開戰 初 제2軍團 豫備隊로 있다가 3일 長湖院으로 投入되어 無極里에 제49聯隊, 生剋에 제48聯隊를 展開하고 제50聯隊를 豫備로 確保하여 陰城 突破를 企圖하였다. 그러나 北漢軍 제15師團은 10,000餘 名의 兵力과 裝甲車 20여 대 등 많은 兵力과 各種 裝備에도 不久하고 訓練 程度가 낮고 戰鬪經驗이 없는 部隊였다.
7월5일 雙方은 기름고개와 動樂里에서 遭遇하였다.“無極里로 進出하여 南下하는 敵을 沮止하라”는 임부택 聯隊長의 命令을 받은 제1大隊長 金龍培 少領은 06시에 部隊를 集結地에서 出發시켰다.
第3中隊 3小隊長 이상우 中尉가 指揮하는 偵察隊가 陰城 西北쪽 3㎞에 位置한 소여리를 지나 一名 기름고개라 불리는 油峴으로 접어들 때, 고개를 넘는 一團의 무리를 發見하였다. 偵察隊長 李 中尉는 停止信號와 함께 車輛을 右側 숲속에 隱閉시키고 隊員들을 道路를 監製할 수 있는 언덕 위로 配置하여 接近하고 있는 무리의 動態를 살피게 하였다. 무리의 先頭에는 自轉車를 탄 軍人과 私服차림을 한 몇 명의 사람이 앞장서고 1개 中隊 兵力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偵察隊가 彼我 確認을 위해 망설이는 동안 무리는 100m 거리로 接近하였고, 배낭을 메고 帽子를 쓴 모습으로 보아 北漢軍이 틀림없었다. 500m 後方에 있는 第3中隊 本隊에 報告하기에는 時間的인 餘裕가 없다고 判斷한 李 中尉가 射擊命令을 내리자 隊員들의 射擊이 敵에게 集中되었다. 奇襲을 당한 敵은 退却을 始睹하였으나 제3中隊가 發射한 60㎜ 迫擊砲彈으로 인해 오도가도 못하는 狀況이 되었다. 이어 本隊가 加勢할 즈음에 敵은 40여 구의 屍體만을 남기고 逃走하였다. 以後 약 3時間이 經過하여 제1大隊의 主力이 기름고개의 頂上 附近에 이르자 敗走한 敵의 本隊로 보이는 1個 大隊 規模의 敵이 기름고개 서쪽의 507高地인 普賢山 동쪽의 험한 地形을 利用하여 砲擊을 加하면서 제1大隊의 前進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로 인해 제1大隊는 聯隊에 支援을 要請하는 한편 기름고개 동쪽의 385高地 一帶에 布陣하여 그들과 對置하였다. 18시경에는 陰城 북쪽 4㎞ 地點에 位置한 龍山里로 前進한 제2大隊와 연계하여 敵의 夜間 浸透에 對備하였다.
7月 6日 날이 밝아오자 交着된 기름고개의 東과 西에서 銃擊이 한층 加熱되었다. 聯隊長은 04時를 기해 第1大隊와 第2大隊의 公格을 再開시키고 無極里의 確保를 命하였다. 各 大帶는 지난 밤 사이 敵이 알지 못하도록 間歇的인 射擊을 繼續하는 가운데 第1大隊가 普賢山 北端部의 376高地를, 第2大隊는 385高地를 各各 確保하고 公格에 對備하고 있었다. 04時 約定된 信號에 따라 제1大隊와 第2大隊 그리고 第2砲兵 中隊는 各種 火器의 火力을 普賢山으로 集中하였다. 이에 敵도 385高地를 向해 各種 火器를 集中하였지만, 我軍의 背後射擊으로 退却하기 始作하였다. 機會를 잡은 第1大隊長 金龍培 少領은 81㎜와 60㎜ 迫擊砲로 繫束 制壓토록 하고 觀測將校로 하여금 105㎜의 砲擊을 346高地 北向으로 연신시킨 다음 제1中隊를 右一線에, 제2中隊를 左一線으로 하여 普賢山을 目標로 反擊토록 하였다. 그러나 敵은 이 高地를 포기하고 346高地 方向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1大隊는 攻擊을 開始한지 1時間도 못되어 普賢山을 占領하고 제2大隊와 제2砲兵中隊의 支援을 받으면서 敗走하는 敵을 椎擊하여 12시경 無極里를 占領하였다. 그러나 제1大隊는 敵 聯隊 規模의 反擊을 받고 無極里 南東쪽에 位置한 백야리의 351高地에 陣地를 急便하고 防禦態勢에 突入하였다. 제1大隊는 이 戰鬪에서 敵 270名을 射殺하고 6名을 捕獲하였으며, 45㎜ 對戰車砲 等 各種 武器를 노획하는 戰果를 거두었다.
第3大隊도 遭遇戰에서 敵의 壓力이 强해지자 撤收하여 다음날 가엽산 남쪽 290高地를 占領하였다. 聯隊長 임부택 中領은 中央地域의 防禦力 强化를 위해 豫備隊인 제2大隊를 同樂里 남쪽 芙蓉山 一帶에 投入하고, 第1大隊에는 第19聯隊 2大隊를 支援.配置하여 백야리에서 敵을 저지토록 하였다.
한편 同樂里에 進入한 敵 第48聯隊는 第3大隊가 撤收한 것으로 判斷, 6일 밤부터 移動隊形을 취하지 않고 警戒對策을 소홀히 하였다. 偵察隊로부터 이러한 狀況을 報告받은 第3大隊長은 部隊를 卽刻 310高地, 용원리 附近으로 移動시켜 攻擊態勢를 갖추었다. 날이 밝을 무렵 偵察活動에 나섰던 제3大隊 9中臺가 용원리 附近에서 敵의 先頭를 攻擊하자 敵은 小規模의 國軍이 抵抗하는 것으로 判斷, 尖兵中隊만을 攻擊에 投入하고 主力은 車輛에 搭乘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機會를 잡은 제3大隊 主力은 敵을 側方에서 攻擊하였다.
이 무렵 同樂里 一帶에서도 제2大隊가 敵을 奇襲攻擊하고 있었다. 芙蓉山 一帶에서 鏡戒를 强化하고 있던 제2大隊는 同樂里 앞 道路에 兵力을 輸送하고 있는 敵 車輛을 觀測하고, 一齊 躍進으로 攻擊을 開始하였다. 放心하고 있던 적은 제2大隊와 제3大隊의 奇襲攻擊을 받고 車輛과 裝備를 유기한 채 分散.逃走하였고, 그들 중 相當數가 我軍의 追擊을 받고 射殺되거나 生捕되었다. 同樂里戰鬪에서 제7聯隊는 敵 제48聯隊를 奇襲攻擊하여 軍需參謀를 비롯한 敵 132名을 捕獲하고 各種 包 54문과 車輛 75대 등 수많은 裝備를 虜獲하였을 뿐 아니라 劣勢한 兵力과 裝備로도 敵을 殲滅할 수 있다는 自信感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7聯隊의 戰勝報告를 받은 李承晩 大統領은 “이 戰果는 表彰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戰史의 龜鑑으로 記憶되야 한다”고 戰勝에 意味를 附與하였다.
제6師團 7聯隊가 展開한 同樂里戰鬪는 開戰이래 敗北感에 젖어있던 國軍에게 自信感을 안겨 준 가장 痛快한 戰鬪였으며, 北漢軍의 陰城 進出을 1週日이나 지연시킴으로써 國軍이 鎭川-陰城-忠州로 이어지는 沮止線을 形成, 戰列을 再整備할 수 있는 時間的인 餘裕를 가져다 준 意味있는 戰鬪였다. 제7聯隊는 이 功勞로 大統領 部隊表彰과 聯隊 全 將兵 1階級 特進의 紀錄을 세웠으며, 金龍培 少領도 中領으로 進級하였다. 그 後 第6師團 7聯隊 1大隊는 逐次的인 遲延戰을 展開하면서 陰城 附近에서 敵의 南下를 10日間 저지하였고, 용기동과 軍威-義興, 新寧地區 등에서 敵의 攻勢를 막아냄으로써 總反擊의 발판을 마련한 후 조림산지역에서 敵을 擊退하고 丹陽-忠州線을 따라 進擊에 나섰다.
10월 6일 38線을 突破한 제1大隊長 金龍培 中領은 華川-金化 軸線으로 進擊, 元山을 占領하고 계속하여 成川-順川-開川-熙川으로 北進하였다. 제1大隊는 楚山 남쪽 6㎞ 地点에서 抵抗하던 聯隊 規模의 北漢軍 混成兵力을 2時間에 걸친 交戰끝에 擊退하고 楚山에 突入하여 10월 25일 14시 15분에 鴨綠江邊에 太極旗를 꽂았다. 이리하여 그의 部隊는 洛東江戰線에서 反擊을 開始한지 41일만에 韓滿國境線에 가장 먼저 到達한 最先鋒部隊의 名譽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中共軍의 介入으로 撤收命令을 받은 제1大隊는 大部分의 裝備를 유기한 채 劇的으로 脫出, 開川에서 師團 主力과 合流하였다. 1951년 6월 제7師團 5聯隊長에 任命된 金龍培 大領은 1951년 7월 2일 楊口 北面 土平里地區에서 中共軍 제5軍團 예하의 1개 聯隊와 治熱한 高地爭奪戰을 앞두고 最前線 例下部隊를 訪問하여 現場指導 中 至近距離에서 炸裂한 敵의 砲彈에 의해 戰死하였다.
1. 經科報告 2. 金龍培 將軍 略曆 3. 追慕碑文 4. 金龍培 將軍 回顧談 5. 建立記
2000.1. 21 : 6.25戰爭 50周年 記念事業으로 鄕土出身 護國人物, 參戰勇士 等 名譽 宣揚事業 決議
2001. 1. 20 : 將軍의 逝去 50周期인 7월 2일에 맞춰 胸像 建立키로 決議,
'金龍培將軍 追慕事業 推進委員會'構成
2002. 2. 26 : 實務委員會 1次會議 開催, 資料收集 및 關係機關 協助要請
2001. 3. 05 : 全國 銅像 現場 踏査에 着手
2001.4. 03 : 聞慶市廳에서 各級 機關團體와 報勳團體, 市民이 參與한 宴席會議. 建立場所 等 論議
2001. 4. 09 : 建立場所, 胸像規模, 追慕碑文 等을 確定하고 本格的으로 事業에 着手
2001.4.16:胸像彫刻 依賴(嚴泰丁 敎授), 追慕碑文 依賴(金安齊 博士), 글씨依賴(書藝家 조용철先生)
2001. 7. 02 : 聞慶市 聞慶邑 下里 溫泉地區 內에 胸像 및 追慕碑文 建立
出生 : 1921年 4月 18日 慶北 聞慶郡 戶西南面 興德洞
學歷 : 戶西南 普通學校, 日本山口懸立農業學校
軍 經歷
- 1948. 4 陸軍士官學校 제5기 卒業(軍番 10828)
- 1950. 6. 25 當時 少領, 6師團 7聯隊 1大隊長
- 1950. 7. 07 中領 特進(陰城 無極里 戰鬪功勞, 全將兵 特進)
- 1951. 6. 08 7師團 5聯隊長 赴任
- 1951. 6. 12 大領 進級
- 1951. 7. 02 戰死(楊口北方 群嶺縣 土平里 戰鬪)
墓地 : 國立顯忠院 將軍墓域 1-52 (山陽面 盤谷里에서 移葬)
戰鬪經歷
- 1950. 6. 25~7. 4 6師團 7聯隊 1大隊長, 春川-洪川-新林
- 7. 4 ~ 7. 10 陰城 無極 動樂里 戰鬪에서 開戰以來 最大 戰果로 聯隊 全將兵 1階級 特進(中領 特進)
- 7. 13 ~ 7. 16 聞慶 白華山, 盆地里, 玉女峯, 黃鶴山, 聖住山, 平田峙
- 7. 19 ~ 7. 28 店村-幽谷-可恩 雷霆山, 玉女峯, 鳥峰, 佛井山, 水晶峯에서 激戰
- 8. 02 ~ 8. 12 義城(용기동)
- 8. 13 ~ 8. 29 軍威, 義興(불노동)
- 8. 30 ~ 9. 15 新寧(조림산, 華山)
- 9. 15 ~10. 6 新寧, 原州, 春川(조림산-忠州-原州-華川)
- 10. 12 ~10.22 金華, 元山, 寧邊(金華-元山-양덕-成川-開川-寧邊)
- 10. 23 ~10.26 楚山(鴨綠江 제1착 先鋒部隊)
- 1951.1. 4 ~3.22 1.4後退 撤收作戰(廣州-龍仁-烏山-長湖院-堤川-三陟)
- 3. 22 ~ 4. 06 春川 西北方
- 6. 07 ~ 6. 12 7師團 5聯隊長 軍糧縣(마석봉 757高地) kansas선(6.8 聯隊長, 6.12 大領進級)
- 7. 02. 13:00 戰死 (楊口北方 7㎞ 土平里에서 戰鬪指揮中 敵包의 直擊彈으로 戰死)
追慕하고 있는 將軍의 後背인 戶西南初等學校 學生과 母校 嚴00 校長
敍勳紀錄
- 1950. 12. 30 花郞武功勳章, 忠武武功勳章, 乙支武功勳章
- 1951. 10. 15 太極武功勳章
金龍培將軍은 1921年 辛酉 4月 18日 聞慶市 戶西南面 興德洞 665番地에서 金福鎭과 慶州孫氏의 次男으로 出生하시니 始祖 金寧 金公 時興의 29世孫이시다. 將軍은 1934년 戶西南普通學校를 卒業하고 日本 山口懸立農業學校로 遊學하셨으며 1941年에는 丹陽 禹氏 元分과 結婚하여 膝下에 昌厚 松朝의 1男1女를 두시다. 解放을 맞은 祖國은 온 國民과 기쁨과 希望이 컸으나 社會는 매우 混亂하였던 바 將軍은 張次 祖國의 간성이 되어 獻身코자 軍門에 投身할 것을 決心하고 陸軍士官學校 第5期로 入校하여 軍番 10828番을 附與받고 1948年 卒業과 同時에 陸軍小尉로 任官되시다.
1949年 8月에는 少領으로 昇進되어 제6師團 7聯隊 1大隊長으로 補任되어 江原道 五臺山 地域에서 作戰을 修行하시다 1950年 6.25 動亂이 勃發하자 最前方 大隊長으로서 初戰을 奮鬪하고 春川, 洪川, 原州, 新林, 陰城 等地의 戰鬪에서 連日 連戰苦鬪 하였으며 특히 1950年 7月의 陰城戰鬪에서는 同 部隊가 最大 戰果를 올리게 되어 開戰 以來 最初로 部隊長兵 全員이 1階級 特進하는 史上初有의 記錄을 남기게 되었고, 將軍도 中領으로 特進하시다. 將軍의 故鄕인 聞慶地域 戰鬪에서는 主力部隊長으로서 梨花嶺을 지나 白華山, 盆地里, 玉女峯, 黃鶴山, 聖住山, 平田峙 等과 雷霆山, 玉女峯, 鳥峰, 佛井山, 水晶峯 等地를 연하는 線에서 15日間이란 긴 其間에 걸친 類例가 드문 激戰中 勇戰奮鬪 끝에 北漢軍의 進擊을 底止 遲延시켜 國軍의 洛東江 最後 防禦線 構築에 決定的인 寄與를 하시다.
때는 바로 寸刻이 黃金과도 같은터이라 그 功勳의 혁혁함은 말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將軍의 故鄕守護에 대한 絶對的인 愛鄕心 發露의 一面이라고 보아진다. 이어 南下하면서 永川 新寧 等地의 最後의 激戰을 거쳐 尙州, 聞慶, 丹陽, 忠州線과 華川 金華線을 거쳐 繫束 北進하여 元山을 奪還하고, 1950年 5月 25日 午後 2時 15分에는 最北端 楚山에 最先鋒으로 進出하여 鴨綠江에 太極旗를 揭揚한 큰 功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동안의 功勳으로 花郞.忠武.乙支武功勳章을 받았으며, 1951년에는 제6師團 19聯隊 및 7聯隊 副聯隊長을 歷任하고 同年 6월 12일에는 大領으로 昇進하여 全軍에서 가장 傳統이 빛나고 明聖이 높은 제7師團 5聯隊長으로 赴任하시다.
때마침 北進中이던 同聯隊를 指揮하여 連日 連戰連勝하면서 春川 北方까지 進擊하여 江原道 楊口郡 군량리에서 中共軍 第5軍團 1個聯隊와 交戰하게 된 土平里 戰鬪에서 陣頭指揮中 跡의 直擊彈에 의하여 壯熱히 戰死하시니 때는 1951年 辛卯 7月 2日 午後 1時 40分이었고, 將軍의 나이 芳年 31歲이셨다. 國家는 同年 10月 5日 將軍의 높은 功을 기려 陸軍 准將으로 追敍하고 이 나라 最上의 太極武功勳章을 受與하였으며, 제7師團에서는 北漢江에 建立한 橋梁을 龍培橋라고 命名하다.
將軍의 遺骸는 잠시 梁山 通度寺에 安置하였다가 後日 聞慶郡民葬으로 先山인 山陽面 盤谷里로 移葬하였으며, 1972년 서울 銅雀洞 國立墓地로 移葬하여 永眠케 하다.
將軍은 寡默沈着한 性品에 勇猛과 智略이 뛰어났으며 卓越한 戰鬪指揮力을 갖춤으로서 上下同僚로부터 두터운 信賴와 尊敬을 받은 名實공히 勇智를 겸한 德將으로서 祖國과 故鄕을 사랑하고 守護한 참된 軍人이요 愛國者이시다.
將軍은 動亂勃發 以後 戰死하실 때까지 13個月間을 하루도 빠짐없이 陣中에서 오로지 戰鬪指揮만을 하셨으며, 6.25動亂中 一線 聯隊長인 大領으로서는 唯一한 戰死者이기도 하며 그가 세운 戰鬪功績과 護國愛族의 崇高한 精神을 높이 評價하여 國家는 護國의 人物로 指定하여 온 國民과 함께 追慕토록 하였으며, 이는 6.25動亂 其間을 網羅하여 護國의 人物로 指定된 6명중 한 분이시기도 하다.
將軍의 崇高한 愛國心과 護國의 獻身은 靑史에 蒼然히 빛날 것이며, 聞慶市民을 爲始한 우리 國民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져 오래도록 우리가 나아갈 바 참된 등불이 되시고 民族精氣를 바로 세우는 師表가 될 지어다. 우리의 오늘의 榮光과 安寧이 將軍과 같은 護國의 守護神 陰德임을 回想하면서 百尺竿頭의 祖國과 故鄕을 守護하고자 하는 一念으로 强力한 敵에 맞서 身名을 바친 激戰場인 이곳 鳥嶺山河 고향땅에 모든 機關과 市民의 뜻과 精誠을 모아 將軍을 기리는 像과 追慕의 碑를 세우고 삼가 우리 모두 옷깃을 여며 將軍의 靈前에 머리숙여 冥福을 비나이다. 바라건데 이 곳 主屹山 아래 우뚝서시어 生前에 사랑하던 故鄕 聞慶과 祖國 大韓民國의 安寧과 繁榮이 이루어지도록 길이길이 보살피고 지켜주시는 靈驗한 守護神이 되소서.
西紀 2001年 7月 2日
將軍 逝去 50周期에 즈음하여
李大鎔(陸軍士官學校 總 同窓會長) 著書 中에서
이 글은 越南이 敗亡할 當時 駐越 公使로 계시다가 共産 베트남 政權에 의해 不法抑留 돼 5年餘間 갖은 苦楚를 이겨내고 劇的으로 送還되신 李大鎔 將軍(現,陸軍士官學校 總同窓會長)이 그의 著書에서 6.25戰爭 勃發 以後 金龍培 將軍께서 散華하실 때까지 가장 가까이서(當時 中隊長) 補筆하면서 將軍의 透徹한 使命感과 愛國忠正, 不屈의 意志를, 그리고 참 軍人의 表象이요, 戰爭英雄으로서의 삶과 人間的인 面까지 將軍의 眞面目을 眞率하게 담고 있어 이를 그대로 옮겨 실어 읽는 이들의 理解를 돕고자 했다.
어느 軍人의 半額 人生
戰爭記念館 앞에서
서울시 龍山區 三角地에 있는 戰爭記念館 正面의 出入門을 들어서면 第一 먼저 護國追慕室이 나온다. 朝鮮時代부터 오늘날까지 이 나라의 獨立과 自由守護를 위하여 목숨바쳐 勇戰奮鬪하신 先烈 中에서 뽑은 스무 분의 生前 모습을 담은 上半身 銅像이 양쪽에 列을 지어 安置되어 있다. 그 중 오른쪽 줄의 네 번째 銅像에는 다음과 같은 說明文이 새겨져 있다.
金龍培 准將(1921.4.17~1951.7.2)
慶北 聞慶 出生, 陸士 第5期로 任官. 1950年 6月 第6師團 第7聯隊 大隊長으로서 春川戰鬪 및 陰城戰鬪에서 敵의 攻擊을 저지하여 지연작전(遲延作戰)을 成功시켰으며, 1951年 第7師團 聯隊長으로서 軍糧里戰鬪時 戰死, 1階級 特進과 太極武功勳章이 受與됨.
나는 위의 글이 그 분을 알리기에는 매우 未洽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분은 6.25 韓國戰爭이 일어나는 날 第7聯隊 第1大隊長으로서 大隊를 이끌고 北漢 共産軍을 맞아 싸움을 始作하여, 1951年 1月 6日까지 繼續 第1大隊長으로서 하루도 最前方 大隊長 자리를 뜨는 일이 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敵彈에 負傷을 입은 일이 있지만, 後方病院으로 後送되는 것을 拒否하고 붕대를 친친 감은 채 繼續 戰鬪를 指揮했다. 그 분이 혁혁한 功勳을 세운 戰鬪는 수도 없이 많으며, 그 중 治熱한 激戰을 벌인 戰鬪는 春川戰鬪, 陰城戰鬪뿐 아니라 이에 못지 않는, 아니 이 戰鬪들보다도 더 激烈했던 洛東江戰鬪· 新寧華山戰鬪· 지촌리전투· 복계전투· 양덕전투· 구장전투· 楚山戰鬪 그리고 中共軍과의 풍장전투· 가창지구전투 등이 있고, 이 외의 小規模 戰鬪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분은 昭陽江에서 洛東江까지, 그리고 이어서 洛東江에서 鴨綠江까지, 그리고 다시 鴨綠江에서 南漢江까지, 그 후는 南漢江에서 昭陽江 북쪽 楊口까지를 질구하면서 敵軍과 싸우다가 戰死했다.
내가 그분과 처음 因緣을 맺은 것은 1948年 5月 15日이었다. 陸軍士官學校에 入校와 同時에 原州에 있는 第8聯隊로 派遣되어, 陸士生 敎育隊에 들어가서 基礎敎育을 받을 때, 金龍培 小尉는 球隊長 兼 敎官이었다. 그 當時는 陸士生들이 泰陵에 있는 本校에서 敎育받기 前, 各 聯隊에 25名씩 派遣되어 委託敎育을 3個月間 받게 했다. 各 聯隊는 그 聯隊에서 가장 優秀한 尉官級 將校를 先發해서 陸士生 敎育을 擔當케 했다. 따라서 金龍培 小尉의 優秀性은 이때 이미 立證된 셈이다.
1948秊 11月 11日, 내가 陸軍士官學校를 마치고 小尉로 任官되어 赴任한 곳이 공교롭게도 내가 基礎委託敎育을 받던 第8聯隊였다. 그래서 그분을 다시 만났다. 1949年에는 그분이 拔擢되어 第8聯隊 作戰主任이 되고, 나는 그분 밑의 作戰補佐官이 되어 함께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이 또 拔擢이 되어 第7聯隊 第1大隊長으로 간 후, 나를 轉入要請해서 나는 그분 밑의 第1中隊長이 되었다.
그분이 陸軍 小尉 때의 逸話가 하나 있다. 그분이 週番士官 勤務를 하고 있는 어느 날 밤, 심심해 하던 황필주 中尉가 週番士官室에 놀러갔다. 週番士官室에 들어서자마자 장난기가 發動한 黃 中尉는 週番士官室에 놓여 있는 칼빈 小銃을 재빨리 들어, 萬一 共匪가 이렇게 銃을 얼굴에 겨누면서, “손들엇!”하면 어떻게 對抗하겠냐면서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實彈이 장전돼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꽝”하는 銃소리와 함께 방아쇠를 당긴 黃 中尉는 悲鳴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銃彈은 鬼神이 재주를 부리듯 金龍培 小尉의 눈 옆 살점을 뚝 뜯어가면서 뼈를 살짝 건드리며 지나갔다. 銃에 맞은 週番士官 金龍培 小尉는 손 바닥으로 傷處를 꽉 눌러 止血을 하면서 “어허!”하며 서 있었다. 現場에 달려간 將兵들은 金龍培 小尉의 大膽性과 沈着性에 모두 혀를 찼다.
이러한 그분의 勇敢性과 沈着性, 그리고 뛰어난 智慧와 誠實性은 싸움터에서도 늘 돋보여, 師團長 金鐘五 准將, 聯隊長 임부택 大領으로부터 無限한 信任을 받았으며, 빠른 昇進을 거듭하여 1950년 7월 9일에는 陸軍 中領으로 進級을 했다. 이때 그분의 陸軍士官學校 同期生들 大部分은 陸軍 大尉였다. 金龍培 大隊長은 맑은 물, 흙탕물을 모두 包容하는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大隊長 밑에 있는 將兵들은 勇將 밑에 弱卒이 없다는 말과 같이 모두 勇敢하게 잘 싸웠으나, 例外的으로 겁많은 第2中隊長 吳 大尉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吳 大尉는 戰術的 知識도 있고 平常時에는 中隊員 敎育訓鍊을 잘 시키고 모든 일을 熱心히 하여 6.25가 일어나기 前까지는 제7聯隊에서 가장 有能한 中隊長으로 손꼽히고 있었으며, 聯隊長과 隊長의 두터운 信任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戰爭이 일어나서 敵軍과 戰鬪를 하게 되자 그는 恒常 꽁무니를 빼며 後退를 임삼았다. 金龍培 中領은 吳 大尉의 膽力을 길러주고 戰鬪에 쓸 수 있는 指揮官으로 키워 보려고 애를 써서 꽤 成果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타고난 天性을 完全히 바꿔 놓지는 못했다. 1950年 8月 30日, 戰鬪가 治熱해지자 吳 大尉는 바위에서 넘어져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連絡兵에게 남기고, 無斷離脫하여 後方으로 도망을 가 버렸다. 그래도 自己를 따뜻하게 印度해 준 金 中領을 生角하며 養心의 呵責을 느꼈는지, 다른 못된 將校들처럼 馬山이나 釜山에 있는 陸軍病院에 가서 肺結核 患者로 僞裝해 入院하거나, 멀쩡한 盲腸手術을 받거나 하는 따위의 要領을 피우지 않고, 最前方 一線에서 약 12km 後方에 있는 聯隊本部에 나타나서 대죄(待罪)하며 謹愼하였다. 제1大帶 將校들 大部分은 吳 大尉를 제1大隊에 불러다가 銃殺이라도 시키는 것이 軍氣確立上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金 中領은 그를 잘 타이르고 容恕하여 一線 後方에 있는 聯隊本部 作戰補佐官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吳 大尉는 狀況圖도 잘 그리고 作戰命令도 잘 作成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1950년 9월 16일, 金 中領은 大隊兵力을 이끌고 慶尙北道 軍威郡 고로면 麟角寺 동쪽 稜線으로 올라가서 敵軍과 戰鬪하고 있었다. 산에 올라 오느라 땀이 비오듯 흘러서 잠시 鐵帽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는 瞬間, 奇想天外한 일이 일어났다. 敵彈이 金龍培 大隊長의 머리 윗부분을 때리며 지나갔다. 正面에서 날아온 小銃彈이 이마 위 머리 中央을 7~8cm의 긴 자국을 남기며 머리가죽을 벗기면서 流星같이 지나간 것이다. 만일 1cm만 아래에 맞았다면 머리가 두 갈래로 터졌을 것이다. 머리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大隊長님, 속히 病院으로 가시지요. 피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傷處가 꽤 큰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나, 金允煥 大尉, 그리고 周圍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권했으나, “아냐, 괜찮아. 만져 보니까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 하며 衛生兵으로 하여금 약을 듬뿍 바르게 하고 붕대를 두둑히 감게 한 후, 鐵帽는 못 쓴 채 산 위에서 戰鬪를 繼續 指揮하였다. 이 消息을 전해들은 部下 將兵들은 저렇게 훌륭한 大隊長을 따르며, 언제든지 나라 위해 이 한 목숨 깨끗이 바치겠다는 生角을 더욱 굳게 했다.
이와는 對照的인 不美스러운 일이 6.25 初期에 西部戰線에서 일어났다. 陸軍士官學校 제8期生들의 回顧錄으로 1988년 發刊된 “老兵들의 證言” 중에 안태갑(安泰甲) 將軍(6.25 初期 제8聯隊 中隊長)이 證言하고, 또 그 證言을 더욱 具體化하는 그의 後日談에 의하면, 首都地區防衛 任務를 맡고 있던 제×聯隊長 s中領은 戰鬪가 治熱해지자 몸의 急所가 아닌 部分을 쏴서 自害를 하고, 마치 敵彈에 負傷당한 양 속임수를 써서 後方病院으로 後送되어 巧妙하게 싸움터를 離脫했다고 했다. 聯隊長의 卑屈한 行爲가 전해지자 聯隊 將兵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混亂이 일어나 分散되어 聯隊의 機能을 喪失했다. 聯隊 總兵力은 겨우 1개 大隊를 編成할 수 있을 程度로 줄어들었다. 上部命令에 의해 大隊長 鄭承華 少領은 이 兵力을 이끌고 제18聯隊로 가서 제3大隊로 編入됐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共匪討伐作戰에서 勇猛을 떨친 제×聯隊는 이렇게 虛無하게 解散되었다. 問題는 s中領은 제3共和國 時節, 陸軍大將으로까지 進級하여 軍의 要職을 두루 거쳤다고 안태갑 將軍은 證言하고 있다. 매우 잘못된 人事管理였다.
追慕하고 있는 戶西南初等學校 學生과 將軍의 後背인 母校 嚴00 校長
逆戰의 名手
1950년 10월 5일 이른 새벽,제7聯隊 제1大隊는 春川을 出發하여 38선 북쪽에 있는 말고개에 가서 제2聯隊 1개 大隊를 超越하여 華川을 目標로 北進하라는 命令을 받았다. 말고개에는 이미 제2聯隊 兵力이 進出해 있으며, 春川에서 그곳까지는 北漢 共産軍이 한 명도 없다는 通報를 제2聯隊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제7聯隊 제1大隊 將兵들은 마음놓고 말고개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7聯隊 제1大隊長 金龍培 中領은 附大隊長 조현묵 少領에게 指示하여 大隊 將兵들이 새벽 食事를 끝내는 대로 약 1時間 後에 大隊 兵力을 이끌고 말고개로 徒步行軍으로 前進해 오라고 하고, 大隊 作戰官·大隊 情報官·大隊 通信將校·例下 4개 中隊의 中隊長들·4개 中隊의 無電兵들 및 中隊長 連絡兵들, 合計 30餘名을 引率하고 牛耳洞을 出發하여 어둠 속에서 春川-화도 街道를 北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實際로 제2聯隊 1개 大隊는 말고개를 占領하고 있지 않았다. 北漢江 서쪽에서 말고개를 占領하기 위하여 夜間 進擊을 한 제2聯隊 1개 大隊의 大隊長은, 軍需系統에서만 勤務해 戰鬪經驗이 없는 昔 少領이었다. 陸士 5期生인 昔 少領은 地圖를 잘못 判讀하여 말고개에서 西南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엉뚱한 高地를 占領하고, 그 高地가 말고개인 줄 알고 上部에 報告를 한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제7聯隊 제1大隊長 金龍培 大隊長 一行은 말고개 南方 약 4km 地点까지 太平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地点에서 넓은 道路는 커브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북으로 구부러진 후 북으로 뻗고 있었다. 어둠은 점차 걷혀가고 날은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大隊長 一行이 커브길에 다다랐을 때, 一行들은 “앗!”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날려 그 곳을 피하는 突發行動을 취했다. 北漢 共産軍 機關銃이 3~4m 앞에서 銃口를 우리에게 向하고 있었다. 機關銃에는 實彈이 장전되어 있는 것까지 보였다. 北漢 共産軍 機關銃 射手와 副射手 그리고 彈藥手들이 그 機關銃 호 속에서 上體 一部를 露出시키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機關銃 방아쇠를 당기면서 銃口를 左右로 흔들면 우리는 삽시간에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 突發的인 狀況에 몸을 緊急히 피해 살아남으려 하는 것은 普通사람으로서는 當然한 일이었다. 나도 M2 칼빈 小銃을 어깨에 멘 채 北漢軍 機關銃口를 피해 몸을 날렸다. 이때 “손들엇!”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나는 그때서야 어깨에 멘 칼빈 小銃을 내리면서 北漢 共産軍 機關銃口 쪽을 돌아봤다. 金龍培 大隊長은 敵의 機關銃口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우선 손들라고 소리쳐서 소리로 기선을 制壓하고, 겁에 질린 北漢 軍人들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날 때 허리에서 拳銃을 뽑아든 것이다.
金龍培 大隊長의 손이 허리의 拳銃을 뽑으러 가면서 同時에 “손들엇!”한 것이다. 瞬間的인 일이었지만 이것을 嚴格히 순서로 따지자면 大隊長의 “손들엇!”소리, 이 소리에 겁에 질려 北漢 共産軍들은 일어서면서 두 손을 번쩍 들고, 그 다음에야 大隊長이 허리에서 拳銃을 빼서 北漢 共産軍人들 쪽으로 향한 것이다. 그 大膽한 勇敢性과 智慧로운 순발력. 나는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저히 저 분을 따라갈 수는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機關銃 陣地에 있던 北漢 公算軍人들을 모조리 捕虜로 하고 그들을 審問해 보니, 그 一帶에는 北漢 共産軍 1개 中隊가 配置되어 있었다. 金龍培 中領은 제1大隊 主力이 到着하기를 기다려 말고개로 前進했다. 말고개를 占領한 제1大隊는 신포리 北方에 있는 高地를 攻擊했다.
北漢 共産軍이 占領하고 있는 地域은 마치 닭이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주둥이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는 形狀을 하고 있었다. 그 닭의 배 部分과 목 部分과 주둥이 밑부분을 스치며 흐르는 냇물이 사창리에서 흘러내리는 지촌천이다. 지촌천은 닭주둥이 끝부분에서 北漢江과 合流한다. 이 닭 주둥이 끝부분을 제3中隊가 이날 午後 늦게 占領했다. 제2中隊는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포리 서쪽에 있는 高地를 占領하고 側方으로부터 我軍의 後方으로 北漢 共産軍이 逆襲해 올 것을 對備했다. 北漢 共産軍 포로의 陳述에 의하면, 이 一帶를 防禦하고 있는 北漢 共産軍은 1개 旅團 兵力이며, 닭의 목부분 高地에 北漢 共産軍 旅團長이 나와서 陣頭指揮하고 있다고 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어두운 새벽, 金龍培 大隊長은 大隊本部·重火器 中隊·제1中隊를 이끌고 닭주둥이 끝부분을 占領하고 있는 제3中隊 陣地로 갔다. 그러나 不幸히도 金龍培 大隊長의 到着과 때를 같이하여 北漢 共産軍의 逆襲에 밀려 제3中隊는 닭주둥이 밑으로 뚝 떨어져 버렸다. 산 밑은 넓은 開豁地이며 몸을 依支할 만한 掩蔽物이 아무것도 없었다. 北漢 共産軍이 여기에 機關銃 集中射擊을 가하던가 野砲와 迫擊砲 砲擊을 퍼부으면 우리 약 500名은 風飛雹散이 될 것이다. 大隊 參謀들과 中隊長들은 말고개로 卽時 後退해서 戰列을 가다듬과 다시 攻擊하는 것이 上策이며 繼續 여기 머물다가는 全滅당한다고 大隊長에게 建議했다. 그러나 金龍培 大隊長은 머리를 저으면서, 拳銃을 빼들고 제3中隊 앞에 나서면서 北漢 共産軍을 向하여 拳銃을 繼續 쏘고 있었다.
제3中隊 將兵들은 大隊長을 앞질러 突擊해 들어가 단숨에 잃었던 陣地를 再奪還하는 데 成功했다. 때를 같이하여 大隊長 金龍培 中領은 나를 불러 제1中隊는 卽時 이곳을 出發하여 지촌천을 上流方向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약 3km 地点에서 方向을 오른쪽으로 90도 각도 꺾어 北漢 共産軍이 있는 복고개를 占領하고, 거기서 方向을 다시 오른쪽으로 90도 돌려 稜線을 타고 올라가서 第一 높은 高地를 占領하라고 命令했다. 바로 北漢 共産軍 旅團長이 있다는 高地를 奇襲 占領하라는 것이다. 不過 1개 中隊兵力을 가지고, 敵軍 旅團兵力이 配置되어 있는 心臟部를 奇襲하여 찌르고 이를 占領하라니 그 분의 大膽性에 나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北漢 共産軍 陣地 앞을 지촌천이 흐르는 그 앞은 넓게 트인 벌판이다. 지촌천을 건너서 서쪽 벌판에는 北漢 共産軍 陣地로부터 약 150m 떨어져서, 北漢軍 防禦線과 平行線을 그으며 오솔길이 나 있다. 이 오솔길을 걸어서 약 3km 사창리 方向으로 가면 복고개 앞에 다다른다. 거기서 方向을 오른쪽으로 돌려 敵의 陣地를 奇襲하는 것이다.
普通 指揮官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다. 그러나 金龍培 大隊長의 형안(炯眼)은 5~ 10m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짙은 안개를 利用하면 敵軍 防禦線의 약 150m 앞을 我軍 제1中隊가 약 3km나 가로질러 가도 發見되지 않을 것이며, 복고개의 敵軍을 奇襲하고 敵軍 旅團長이 있는 高地도 奇襲으로 占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이처럼 視界 제로의 狀態에서 奇襲當하는 쪽은 奇襲해 오는 쪽의 兵力을 實際보다 10배 以上으로 誤判하는 것이 上例이다. 제1中隊는 金龍培 大隊長의 意圖대로 빠른 걸음으로 복고개 앞에 가서 方向을 오른쪽으로 돌려 지촌천을 건너 全速力으로 복고개에 올라가서 北漢 共産軍을 포로로 잡기도 하고 북쪽으로 쫓아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卽時 北漢 共産軍 旅團長이 있는 오른쪽 高地로 방향을 꺾어 허리에 총 激鬪射擊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그 高地를 瞬息間에 占領했다. 北漢 共産軍 제26旅團長은 遑急히 달아나고, 北漢 共産軍 防禦陣地의 北漢 共産軍은 눈사태 現像을 일으키며 華川方向으로 달아났다. 金龍培 大隊長이 아니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類例를 보기 힘든 奇襲作戰이며, 멋진 大成功을 거둔 역전(逆戰) 드라마였다. 나는 北漢 共産軍 旅團長 호 속에서 고등어 통조림을 여러 개 虜獲했다. 元山에서 製造된 것이며 品質이 괜찮았다. 北漢에서 그 當時 生鮮 통조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事實은 그때의 食品工業이 南韓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事實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질고 嚴格한 隊長
金龍培 大隊長은 勇敢하고 智慧로울 뿐 아니라 어진 軍人이었다. 6.25가 일어난지 9일 후, 제7聯隊 제1大隊가 陰城 戰鬪를 앞두고 忠州에서 잠시 休息을 취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허름한 짐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지친 避難民의 洪水가 忠州邑을 지나고 있었다. 이 隊列을 바라보며 서 있던 金龍培 大隊長은 “軍人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聯隊 s-3에 勤務하는 女子 打字手 崔孃이 조금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春川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더군. 避難民 모두 불쌍해 볼 수가 없더둔. 다 우리 軍人들의 잘못 때문이므로 얼굴을 國民 앞에 들 수가 없어.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하고 長歎息을 하면서 軍人의 國家에 대한 責任, 國民에 대한 責任을 通減하고 있었다. 그분은 北漢 共産軍 포로에 대해서도 따뜻한 同胞愛를 베풀어 주었다. 部下들에 대해서는 溫情을 베풀고 아껴 주었으나, 軍氣를 지키고 任務를 修行함에 있어서는 嚴格했다. 나도 그 분으로부터 단단히 꾸중 들은 일이 한 번 있었다. 그 때 일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1월 20일은 바로 나이 스물다섯 번째 生日이었으나, 나는 戰鬪를 하느라 잊어버렸을 程度로 狀況은 急迫하게 展開되고 있었다. 이런 중에서 우리는 夜間行軍으로 孟山 北倉 方面에서 맹산-순천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撤收中에 있었다. 제1大隊의 第一 後尾에서 行軍하던 제1中隊가 미럭고개에 到着한 것은 밤 11시 30분경이며, 제1大隊는 여기서 防禦任務를 修行하게 되어 있었다. 金龍培 大隊長은 각 中隊長을 集合시키고 고개 마루터기에서 防禦命令을 下達했다. 大隊長은 제1中隊로 오솔길을 遮斷하고 제3中隊는 제1中隊 왼쪽에서 新作路를 차단 配置하도록 命令하고, 제2中隊는 고개 稜線을 따라 豫備隊로 配置하였다.
나는 五部稜線(고개중턱)에 제1中隊 兵力을 配置하였다. 고개 중턱은 밭으로 되어 있었으며 傾斜는 완만하였다. 地圖上으로 볼 때 大隊나 中隊의 配置는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不安을 느꼈다. 個人 散兵壕와 共用火器壕를 파야 하는데, 野戰삽을 가지고 있는 士兵은 古兵들뿐이며, 이 숫자는 中隊員 總數의 5분의 1程度에 不過했다. 만일 지금 當場 敵이 攻擊해 온다면 제1中臺는 약25도 傾斜진 밭 가운데 거꾸로 엎드려 散兵壕 하나 없이 敵을 向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이렇게 되면 抵抗다운 抵抗은 도저히 不可能한 일이다. 大隊長의 말에 의하면 來日 아침에는 훌륭하게 裝備된 美 陸軍 제1기병사단이 이 미럭고개에 와서 우리와 交代한다는 것이다. 我軍 偵察機의 報告에 의하면 오늘 해질 무렵 中共軍 先頭部隊는 미럭고개에서 약 25km 前方에 進出해 있었다고 한다.
제발 中共軍이 내일 해뜰 때까지 이 곳에 오지 않기를 나는 바라며 우선 散兵壕를 파라고 指示했다. 1개 分隊에 두 개 程度밖에 없는 삽이 쨍그렁거리며 얼어붙은 땅을 파고 있었다. 60mm 迫擊砲는 밭 가운데 있는 무덤 뒤의 좀 움푹한 곳에 차려포를 하였다. 밭 기슭의 나무가 있는 곳에 機關銃을 거치해 놓고 그 옆에서는 班長 監督下에 機關銃 壕의 構築作業이 始作되었다. 삽이 없는 新兵들은 여기저기 配置되어 前方에 敵軍이 나타나는지를 監視하고 있었다. 엄체(掩體)하나 없이 앉아 있는 新兵들은 추위에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추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中共軍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더욱 떨었던 것이다. 누구나 戰爭에 나와 敵軍과 처음 싸울 때는 벌벌 떠는 법이다. 戰爭 배짱이 생기려면 적어도 열 번쯤의 激戰을 겪어야 한다. 綜合學校 제1期生들이 새로 小隊長으로 赴任했으나, 이들 亦是 戰鬪經驗이 없는 初級將校들이다. 믿을 수가 없어 各 小隊 背馳事項을 돌아보고 있는데, 오솔길 옆에 오막살이 草家집이 한 채 있었다. 홍인곤 下士가 들어갔다 나오더니 집 主人이 方今 避難을 간 듯 불을 때놓아 방바닥이 뜨끈뜨끈 하다며 언 몸을 잠시 녹여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草家三間에 들어가서 방 아랫목에 누우니 등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풀리며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어느 틈에 나도 모르게 사르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이 들자마자 나는 가위에 눌렸다.
사람의 세 배쯤 되어 보이는 검은 곰이 타고 앉아 나의 가슴을 조이기 始作했다. 나는 숨이 막히는 듯 괴로워서 곰과 싸우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흔들어 움직여 본 후, 다시 누워 있다가 또 잠이 들었다. 疲困한 몸은 눕기만 하면 곧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똑같은 큰 곰이 나타나서 나의 가슴을 눌렀다. 나는 곰을 물리치려고 애쓰다가 다시 겨우 깨어나서 洪 下士에게 불을 켜게 한 후, 곰이 나타나 가위 눌린 이야기를 하고 참 별일이 다 있다고 웃고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런데 참으로 怪狀했다. 나는 軍人으로서 死線은 벌써 여러번 넘었으며, 또 더구나 拳銃과 칼빈 小銃과 手榴彈으로 武裝하고 있기 때문에 도깨비도 鬼神 따위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하물며 곰이나 호랑이 따위의 動物은 問題도 되지 않았는데, 왜 하필이면 곰이 生時도 아닌 꿈에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理解할 수가 없었다. 또 잠이 들자, 세 번째도 다시 그 곰이 나타나서 가위에 눌렸다. 진땀을 흘리다가 겨우 눈을 뜬 후, 이상한 豫感이 들어서 나는 그 집을 나와서 3분 距離에 있는 제1中隊 오피(OP)로 올라갔다.
中隊 全體를 通해서, 아직 호(壕)는 하나도 完成되지 않았다. 단단히 얼어붙은 땅의 表面을 겨우 벗겨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덤 가장자리에 드러누었다. 夜光時計는 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前方에 내보낸 局地 警戒兵이 있는 곳, 내 앞 약 500m 地点에서 딱꽁, 딱꽁 하는 小銃소리가 들려왔다. 銃소리에 익숙한 내 고막은 卽刻的으로 我軍을 向하여 쏘고 있는 敵軍의 小銃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10여 발의 機關銃 소리가 나더니 푸른 曳光彈이 내 왼쪽 어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뿔사, 中共軍의 攻擊인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機關銃의 應射를 命令했다. 小銃소리와 機關銃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흙가죽만 벗겨놓은 깊이 5cm쯤 되는 未完成 散兵壕에 들어가 엎드려 보았으나 散兵壕로서의 價値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밭고랑이 나을 것 같아서 기어가서 밭고랑에 엎드려 보았으나 그것도 危險하기는 마찬가지였다. 身長 1m 70cm, 體重 62km의 몸은 敵彈의 被射體로서 完全히 露出될 뿐이었다.
막 일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무덤 쪽으로 몸을 옮기려 할 때였다. 뽕뽕뽕 하면서 아주 작은 포 發射 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오더니 무엇인가 直射彈도 보다 약간 굽은 抛物線을 그으면서 쉬쉬 소리를 내면서 날아왔다. 나는 그대로 밭고랑에 번개같이 엎드렸다. 내 뒤에서 爆發하는 砲彈의 威力은 我軍 세 열 手榴彈 程度의 낮은 威力을 가진 爆發物이었으나 破片과 흙, 돌들이 四方으로 날아가며 그 중 一部가 나의 鐵帽와 軍 戰鬪服 위에 후루루 딱딱 떨어진다.
掩蔽物이나 遮蔽物 하나 없이 敵의 小銃 및 直射彈에 몸을 完全히 露出시키고 있는 것은 死刑臺에 올라가서 敵軍에게 몸을 맡기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개죽음이다’ 하는 生角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매에게 쫓기는 참새처럼 新兵들은 와르르 逃亡치기 시작했다. 후다닥 일어나서 무덤 뒤로 몸을 피하였다. 무덤 뒤에는 迫擊砲 班長과 中隊 無電兵들이 엎드려 있었다. 제3小隊長 代理 박상호 上士가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여기서는 抵抗이 不可能하며, 산마루에 올라가서 稜線에 몸을 숨기고 머리와 銃만을 敵軍 方向에 내놓고 抵抗해야 한다고 말했다.
“꽝!”
敵의 手榴彈이 눈앞에서 터졌다. 新兵들은 모두 달아나고 古兵들 20餘 名만 남아 있었다. “稜線으로 後退!” 나는 소리쳤다. 헐떡거리며 고개 마루터기에 올라가니 金龍培 大隊長이 怒氣를 띠며 나를 나무랐다. “야, 이놈아, 李 大尉, 너 여기까지 後退해 오면 어떻게 할 作定이냐? 이대로 나가다간 우리뿐만 아니라 20리 後方에 宿營하고 있는 미 제1기병 師團까지도 全滅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날이 샐 때까지는 이 고개를 지켜야 한다. 여기 1中隊 도망쳐 온 놈들을 잡아 놓았다. 이것들을 끌고 빨리 다시 되돌아가라. 金龍培 大隊長은 나에게 여지껏 한 번도 이 놈이라든지, 이 子息이라든지 하는 말을 한 일이 없었다. 또 어떠한 急한 狀況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분이었는데, 오늘은 저렇게 怒氣를 띠고 야단을 하시니, 그 분의 가슴에는 오늘 밤의 任務修行이 얼마나 重要하며, 어떠한 犧牲을 무릅쓰고라도 이 任務를 完遂하려는 決心인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辨明도 없이 듣고만 있다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大隊長이 붙들어 놓은 新兵들과 나와 함께 올라간 古兵들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가려 하였다. ‘여기가 나의 무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죽음은 100% 豫見되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값비싸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온 신경이 한 가지 생각에 集中되었다.
“자, 1中隊員들은 다시 元陣地로 내려간다. 나를 따르라.” 내가 先頭에 서고 그 뒤에 中隊傳令·無電兵·通信下士들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各 小隊員들이 따르기로 되었다. 先頭에 선 내가 고갯마루에서 12,3보쯤 내려갔을까? 고갯마루에서 10餘 步 내려가면 酒幕집이 하나 있었다. 이 집은 오고가는 길손들이 땀을 씻으며 막걸리나, 혹은 冷水를 청하여 한잔씩 하고 가는 路上 休憩所이리라.
나는 그 草家집 앞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서 4,5m만 더 내려가면 自動車 新作路인 큰 길과 구길인 오솔길이 갈라지는 分岐點이다. 구길은 直線을 그으며 골짜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고 新作路는 구길의 왼쪽을 거의 直線코스로 약 4,50m 내려가다가 急커브를 그리며 左側으로 구부러진다. 바로 그 급커브 地点에는 제4中隊(重火器中隊)의 水冷式 機關銃 1정이 配置되어 있었다. 이 機關銃은 제1中隊를 突破하고 올라오는 오솔길의 敵軍을 射擊하기 위한 종심 같은 後方의 機關銃이었다. 그런데 이 機關銃이 돌연 銃聲을 내면서 불을 뿜기 始作했다. 무슨 일일까? 나는 酒幕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ㄱ자로 急커브를 그린 地点의 桑黃을 응시하였다. 큰길인 自動車道路를 따라 올라오던 먹구름 같은 軍人行列의 集團은 機關銃口의 不過 2,3m 앞에서 정강이를 맞고 悲鳴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뒤에 따라오던 軍人集團의 一部는 機關銃 射手와 副射手 彈藥手들을 小銃으로 쏘고 있었다. 서로 손을 내밀면 붙들 程度의 近距離에서 죽이고 죽는 판이다.
中共軍의 包圍網
나는 큰 自動車道路를 따라 올라오는 軍人의 集團을 我軍의 제3中隊로 생각하였다. 分明히 自動車道路는 고개 中間 地点에서 제3中隊가 遮斷 配置하고 있었다. 그 제3中隊가 敵軍에게 밀려서 올라오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我軍 제4中臺 機關銃 射手와 副射手 및 彈藥手와 我軍 제3中隊의 小銃兵들과의 싸움인 것 같았다.
야간에는 아군끼리 서로 모르고 싸우는 일이 간혹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만 같이 보였다. 나는 “야, 我軍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냐? 서로 確認해 봐라” 하고 소리쳤다. 이때 누군가, “手榴彈, 手榴彈!” 하면서 죽어갈 것처럼 외쳤다. 마침 그때, 고개를 올라오는 軍人 한 명이 내 앞을 지나쳤다. 나는 그의 왼팔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야 , 너 3中隊員이냐? 저기서 싸우는 것은 我軍끼리 싸우는 거지? 3中隊와 4中隊가 싸우는 거지?” 그 軍人은, “응, 我軍끼리 싸우는 거야” 하고 對答했다.
新兵인지 對答이 우물쭈물 시원치 않았으나 我軍끼리 싸운다는 것만은 確認된 셈이었다. 그가 나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고 반말 비슷이 하는 것이 좀 못마땅하기는 하였으나, 어두운 밤에 階級章이 보이지 않아서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疑心을 갖지 않았다. 그 軍人은 防寒 戰鬪 作業帽를 쓰고 긴 軍用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 當時 我軍은 鐵帽를 쓰고 野戰점퍼를 입었으므로 이 軍人이 我軍이 아닌 것만은 어린애들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野戰을 달리는 力戰의 中隊長인 내가 그것을 識別 못했을 줄은 想像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常識 以下의 失手가 여기에 일어났으니 나는 中共軍의 길을 案內하는 北漢 共産軍 士兵을 我軍으로 誤認한 것이다. 그 當時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價値있게 마감할 것이냐 하는 一念과, 눈앞에서 我軍끼리 싸우는 것을 時急히 말려야 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極度로 緊張된 머리는 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餘裕가 없었다.
나는 北漢 共産軍 士兵의 팔을 놓고 機關銃이 있는 데로 달려갔다. 軍人 隊列의 先頭는 停止된 채 있었으나, 그 뒤에 따라오는 軍人의 물결은 뭉게뭉게 쌘비구름같이 몰려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大都市의 길 한복판에서 큰 交通事故가 난 直後에 몰려드는 人波와도 같았다. 그들에게 接近한 나는 코를 맞대고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너희들 3中隊냐? 조심해라 我軍끼리 싸운다.” 그런데 뜻밖에도 相對方의 대답은 韓國말이 아니었다. “솰라 솰라, 닐라 닐라…” 아뿔싸! 그들은 中共軍이었다. 너무도 匣作스러운 상황에 무엇을 생각할 餘裕도 없이 瞬間적으로 “악!”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 후 無意識中에 되돌아서서 疾風과 같이 고개 마루터기로 달아났다. 이미 그 곳에 我軍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 마루터기까지는 약 50m, 이 길을 단숨에 달려 마루터기까지 약 5m 남겼을 瞬間, 따르르… 하는 中共軍 機關短銃의 銃聲과 함께 銃彈이 빗발같이 날아왔다. ‘아앗, 이것이 죽는 瞬間인가’ 하고 나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참, 영문도 모를 일이 일어났다. 벌집같이 銃口멍이 난 送葬이 되었어야 할 내 몸은 고개를 넘어 가파르게 直線으로 내려간 오솔길로 굴러 떨어진 후, 中共軍에 붙들릴소냐 하고 나무 밑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몸을 움칫움칫 움직여 보았으나 銃에 맞아 부러진 뼈는 없는 것 같았다. 곧이어 中共軍이 따라왔다. 고개 마루터기를 占領한 中共軍은 고개 마루터기에서 가창(假倉) 方面을 向하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自動車道路를 따라 무슨 말인가 떠들썩 지껄이면서 줄줄이 걸어나가고 있었다. 中共軍이 다 지나가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나는 미럭고개 西南쪽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몸을 點檢해 보았다. 敵彈에 맞은 자국은 허리 왼쪽에 메달린 水筒피에 하나가 있을 뿐, 몸은 完全하였다. 다만 콧잔등이 땅에 摩擦되어 벗겨져 피가 흘렀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와 여기 저기 凝結된 핏자국이 있을 뿐이었다.
M2칼빈 自動小銃은 自動스프링이 빠져 달아나고 銃에 끼웠던 彈倉은 없어지고 멜빵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약실과 銃口와 노리쇠 部分에 흙이 잔뜩 메워져서 큰 손질 없이는 射擊이 不可能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蘇聯製 떼떼 拳銃은 拳銃집이 새 것이고 가죽 케이스가 拳銃을 完璧하게 둘러싸고 있어 이상없이 좋은 狀態여서 敵軍과 正統으로 마주치면 이 拳銃으로 對抗하기로 했다.
지난 번 國境地帶에서 中共軍 중 包圍網 속에서의 經驗을 비추어 볼 때, 이까짓 엷은 包圍網을 뚫는다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돌이켜보니, 지난 1950년 10월 29일부터 始作된 楚山郡 一帶에서 제7聯隊가 實行한 中共軍 중 包圍網 突破 作戰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撤收作戰이었다.
鴨綠江邊 신도장에 配置되어 있던 우리 제7聯隊 제1中隊長인 나는 이미 10월 26일에 鴨綠江 뱃사공 영감으로부터 中共軍 數萬 名이 10월 17일부터 3日間, 夜陰을 利用하여 中國쪽에서 鴨綠江 뗏목다리를 건너 滿浦鎭으로 들어왔다는 捷報를 入手한 바 있었다. 즉, 10월 20일 中共軍 다섯 명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길에 잠시 신도장에서 休息을 취하면서, “滿浦鎭에서 昌城으로 連絡次 가는 중이다” 라고 滿浦鎭에 들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北漢 共産軍 포로들 중에서도 뱃사공 영감과 같은 말을 하는 자가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事實이라 할지라도 我軍 精銳部隊인 제8師團인 희천-강계-만포진 쪽으로 北進하고 있고, 그 뒤에 我軍 제7師團이 뒤따르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10월 27일, 제1大隊長 金龍培 中領의 案內를 받으며 鴨綠江 제1中隊 陣地에 到着한 제7聯隊長 임부택 大領은 現在 溫井·北鎭 一帶에서 我軍 제2聯隊와 中共軍이 交戰中인데 狀況이 我軍 제2聯隊에 不利하게 展開되고 있어 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28일 제7聯隊長으로부터 楚山邑에 있는 제1大隊長 金龍培 中領에게 제1大隊는 10월 29일 새벽에 楚山邑에 出發하여 南下, 제7聯隊本部와 제2 및 제3大隊가 있는 고장(古場)에 到着하라는 作戰命令이 下達되었다.
10월 29일 아침부터 제7聯隊는 고장 남쪽 풍장에서 我軍 退路를 遮斷하고 있는 中共軍과 交戰에 들어갔다. 29일 낮 동안은 제7聯隊가 中共軍을 突破하면서 약 30里를 南進했으나, 밤이 되면서 戰勢는 逆戰되었으며, 밤 12시에 中共軍은 夜間 總反擊을 敢行했다. 이로부터 약 3時間 30분간의 治熱한 攻防戰 끝에 우리 제7聯隊는 북으로 북으로 밀리면서 어둠 속에 흩어져서 四分五裂 狀態가 되었다. 제7聯隊의 再編成 機會를 주지 않기 위해서 中共軍은 迅速하고 끈질기게 徹頭徹尾한 追擊을 繼續했다. 再編成을 못하고 繼續 쫓기고 있는 제7聯隊의 指揮繼統이 드디어 痲痺되었다. 無電兵들도 戰死 또는 포로가 됐는지, SCR300 無電機로 大隊長이나 聯隊長을 呼出해도 應答이 없었다. 各 中隊는 中隊長의 獨立指揮下에 中隊別로 뭉쳐서 中共軍 包圍網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狀況에 이르렀다.
삼지사방으로 廣範圍하게 흩어진 제7聯隊 將兵들은 적유령산맥과 江南山脈으로 들어갔다. 이때 제7聯隊는 中共軍 제38군 예하 3改師團과 제40軍 例下 3個師團이 에워싸고 있는 한가운데 完全히 고리되어 있는 形局이었다. 제7聯隊 將兵들이 中共軍의 종심 깊은 이 大規模 包圍網을 突破하고 我軍이 있는 곳까지 나가려면 개천-맹산 線까지 걸어나가야 했다. 그 距離는 空中直線距離로 약 100km이고 道路距離로 따지면 150km쯤 될 것이나, 道路에는 中共軍과 北漢 內務署員들의 往來가 심하여 利用이 不可能했다. 할 수 없이 泰山峻嶺을 넘어 江을 건너야 했다. 또 산속에서도 中共軍을 만나면 交戰하여 이를 뚫던가, 아니면 이를 피해서 멀리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제7聯隊 將兵들이 걸어야 할 行軍거리는 300km가 될 수도 있고 500km가 될 수도 있고 또 그 以上이 될 수도 있었다. 산 속에서는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큰 問題이고, 實彈補給도 끊어진 狀態여서 我軍 戰死者가 생기면 그 屍體에서 實彈을 急히 回收해야 했다. 이러한 危險千萬의 惡條件이 겹쳐서 제7聯隊 將兵들의 犧牲은 엄청났다. 副聯隊長 최영수 中領, 제2大隊長 김종수 中領, 제3大隊長 조한섭 少領은 포로가 되고, 聯隊長 임부택 大領, 제1大隊長 金龍培 中領은 包圍網을 뚫고 겨우 살아나왔다. 包圍網을 뚫고 살아나온 將兵들은 包圍網 속에서 普通 2週日 내지 3週日을 보냈다. 그러나 3個月間이나 敵의 包圍網 속에 갇혀 있다가 살아나온 인성훈 少領 같은 將校도 있었다. 제7聯隊 예하 小銃 및 重火器中隊長 12명 중에서 살아나온 中隊長 數는 半을 若干 넘었으나, 完全武裝을 하고 自己 中隊를 끝까지 指揮하면서 包圍網을 뚫고 살아나온 中隊長은, 12名의 中隊長 중에서 오직 한사람인 제1中隊長뿐이었다. 나머지 살아서 나온 中隊長들은 包圍網속에서 허덕이다가 中隊의 指揮權을 포기하고 各自 個別 獨子行動을 취했으며, 이들 중 두 명은 軍服을 입고 銃을 둘러맨 채 살아나왔고, 나머지는 모두 軍服을 民間人 服裝으로 갈아입고 銃을 버리고 民間 避難民 行勢를 하면서 살아나왔다.
이렇듯 中共軍이 첩첩이 에워싼 包圍網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危險하고 險難한 길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임부택 大領과 金龍培 中領은 確固한 國家觀·死生觀·軍人觀을 가지고 조금도 動搖 없이 軍服을 입고 銃을 허리에 찬 채, 聯隊指揮部 將兵, 大隊指揮部 將兵들을 指揮하고 살아나왔다.
10월 31일에 새로 赴任한 一線 戰鬪經驗이 없는 27歲의 靑年 師團長은 제7聯隊의 洛東江에서부터 北進하여 鴨綠江 楚山進擊作戰, 그리고 楚山에서 개천-맹산 線까지의 撤收作戰의 一等功臣 將兵들에 대한 論功行賞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完全武裝을 하고 中隊長 指揮下에 中共軍 包圍網을 뚫고 나온 唯一한 中隊인 제7聯隊 제1中隊에 대해서는 師團 司令部에 불러들여 軍樂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申告式을 갖고 歡迎式을 해주었다. 그러나 勳狀受與 같은 것은 이때도 없었다.
또 제7聯隊 將兵들은 自己 목숨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戰鬪에 連日 시달리며 沒頭하고 있었기 때문에 勳狀 따위는 꿈속에서조차 生角해 볼 마음의 餘裕가 없었다. 오직 나라를 위하여 忠誠을 다하겠다는 一念뿐이었다. 그래서 聯隊長 임부택 大領, 제1大隊長 金龍培 中領, 제1中隊長을 爲始한 有功將兵들은 勳狀에 대한 無冠의 勇士로서 처여 있게 되었다. 頭腦가 優秀한 靑年軍人인 제6師團長 장도영 准將은 戰鬪經驗을 쌓으면서 크게 成長했다. 그분은 1951년 10월 下旬 어느 날, ‘장도영 師團長 就任 1周年 紀念 및 鴨綠江 進擊 1周年 記念行事’를 大大的으로 開催했으며, 楚山에 進擊했던 제7聯隊 제1大隊 將兵들에 대한 勳狀을 뒤늦게나마 受與했다. 楚山進擊 當時 제3中隊長 김명익 大尉 등 有功將兵에게 美國 殷盛武功勳章, 또는 우리나라 乙支·忠武勳狀 등을 受與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큰 失手가 있어 鴨綠江邊에 進擊하여 鴨綠江邊 신도장에 排置되어 있던, 그리고 中共軍 包圍網 속에서도 제7聯隊에서 唯一하게 끝끝내 中隊를 指揮하여 完全武裝하고 包圍網을 뚫고 나온 제1中隊長이 受勳者 名單에서 漏落되어, 오늘날까지 제1中隊長은 그때 그 作戰의 有功을 國家로부터 認定받지 못하고 버림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理由는 簡單했다.
제1中隊長은 1951년 7월 15일, 제2師團으로부터 大隊長 要員으로 스카웃되어 제6師團을 떠났으며, 장도영 將軍이 初産地區 戰鬪 有功者에게 勳章을 뒤늦게 受與하는 1951년 10월말 경에는 제6師團長 部下가 아닌 제2師團 제32聯隊 제3大隊長으로 今方 南方高地에 있었기 때문에 장도영 제6師團長은 自己 部下가 아니기에 깜빡하고 빼 버린 것이다. 그 當時 우리 國軍의 行政力 水準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多幸스런 것은 金龍培 大領은 戰死하자, 卽時 准將으로 進級되고 제7聯隊 제1大隊長으로서의 혁혁한 戰功을 認定받아 太極武功勳章을 追敍하였다. 임부택 大領도 太極武功勳章을 두 개나 推後에 받게 되어 제7聯隊 戰爭 英雄 두 명은 모두 太極武功勳章을 받음으로써 그 戰功이 國家로부터 正式으로 認定되었다.
中共軍 包圍網 속에서 撤收作戰을 하는 동안 金龍培 大隊長이 겪은 다음과 같은 逸話가 있다. 중공군 包圍網을 뚫으며 나오기 始作한 지 약 2週日이 지난 어느날, 金龍培 大隊長은 大隊作戰官 金允煥 大尉, 大隊情報官 金 小尉 等等, 제1大隊 指揮部將兵 18名을 이끌고 妙香山 높은 봉우리에 다다랐다. 거기서 큰 바위굴을 發見했다. 몸을 숨길 수도 있고 추위도 피할 수 있는 큰 굴이었다. 희천-개천 道路를 내려다보니 유엔군 戰爆機가 中共軍 集結地를 猛爆하고 있었다. 金龍培 大隊長은 이 바위굴에 當分間 머무르면서 狀況을 살려보고 차기 行動을 취하기로 했다.
我軍이 反擊해 들어오는 徵候가 보이면 계속 바위굴에 머무르다가 我軍이 妙香山 밑까지 進擊해 들어왔을 때 산을 내려가서 만나고 中共軍의 氣勢가 꺾이지 않고 繼續 南進하는 徵候가 보일 때에는 산줄기를 타고 繼續 中共軍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多幸히도 먹을 것은 좀 있었다. 전날 밤 火田民에게 강냉이밥을 시켜 먹을 때, 돈을 많이 주고 콩과 강냉이를 가마솥에 볶게 하여 將兵들의 호주머니에 채우고 一部는 자루에 담아서 배낭 속에 집어 넣었었다. 아껴서 하루 한 끼 먹는다면 여러 날을 支撑할 수 있는 食糧이었다. 밤이 되어 步哨 한 명을 굴 入口에 세워놓고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 4시쯤 金龍培 大隊長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金龍培 대대장 앞에 白髮에 긴 수염을 기른 山神靈님이 나타나셨다. 얼굴 모습은 李承晩 大統領을 많이 닮았으나 훨씬 더 威嚴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자네가 金龍培지” 하고 山神靈님이 물으셨다. “예에, 그러하옵니다. 神靈님” 정중히 머리를 숙이면서 金 中領은 대답했다. “苦生이 많네.” 神靈님의 慰勞의 말씀이었다. “황공하옵니다. 神靈님.” 金龍培 대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며 공손히 對答했다. “왜 여기에 머물러 있는가. 안 되네.” 山神靈님은 머리를 무겁게 옆으로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서 일어나서 남쪽으로 떠나게. 오늘 중으로 貴人들을 만나게 될걸세.” 깨고 보니 꿈이었다. 너무도 鮮明한 꿈이었다. 金龍培 大隊長은 大隊作戰官 金允煥 大尉와 大隊情報官 金 小尉를 깨웠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 후 卽時 바위굴을 떠나기로 했다. 19名의 將兵은 굴을 나와 남쪽으로 行軍에 들어갔다. 바위굴을 떠난 지 여섯 時間쯤 되었을 때 유엔군 戰爆機 編隊가 날아와서 金龍培 大隊長 一行 약 6km 앞의 희천-개천 道路를 爆擊 및 機銃掃射를 퍼붓더니 그 남쪽에서 砲聲이 쿵쿵쿵… 들려오기 시작했다.
약 두시간 後 美軍 탱크 搜索隊가 남쪽으로부터 中共軍을 밀면서 進擊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金龍培 大隊長은 18名 將兵을 指揮하여 그곳으로 내려가서 美軍을 만나 中共軍 包圍網을 벗어났다.
軍人의 人生
1951년 1월 7일, 金龍培 中領은 情든 제7聯隊 제1大隊를 떠나 제7聯隊 副聯隊長으로 赴任했다. 같은 날 나는 제1中隊長에서 제1大隊 副大隊長으로 昇進하면서 제1大隊長 代理勤務를 하게 됐다.
6.25 韓國戰爭이 일어나는 날, 金龍培 副聯隊長은 情든 옛집이라고 할 수 있는 제1大隊를 찾아왔다. 나는 京畿道 龍仁郡 白巖警察支署에 있는 大隊本部에서 그분을 맞이했다. 제1大隊 狀況報告를 끝내고 나는 그 분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金龍培 副聯隊長은 지난 1950년 10월 10일, 婦人이 딸을 出産했다는 소식을 最近에 들었으며 이름을 ‘송조(松朝)’ 로 지으라고 連絡해 보냈다고 했다. 소나무같이 志操있고, 아침같이 新鮮하게 살아가라는 뜻과 조(朝)자가 十月十日을 모아 쓴 글자라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했다.
金龍培 副聯隊長은 돈과 權力을 잘못 다루면 聖人이 罪人으로 墜落한다고 했다. 그리고 女子 問題가 複雜하면 남의 指彈을 받으며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 좀 있다가 軍人의 死生觀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李 大尉, 人生七十古來稀 또는 人生 50년이라고들 하지 않나. 歲月따라 가다가 언젠가는 아주 가버리는 것이 人生이야. 軍人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해 戰爭터에서 犧牲되는 愛國烈士를 말하는 거지. 戰時에 戰爭터에서 勇敢한 者는 가고, 後方의 卑怯한 弱者들은 남는 거야. 그러나 그러한 損益計算을 하다가는 軍人의 聖스러운 任務를 修行할 수가 없어. 누가 뭐라해도 一切의 不平不滿 없이 묵묵히 自己 任務를 充實히 修行하며 목숨을 바쳐야 나라가 잘 될 수 있는 거지. 李 忠武公의 精神이 바로 그것이야. 나라를 지키는 中心勢力이 一線 軍人들인데, 이 勢力이 犧牲精神을 잃으면 나라가 끝장이며, 國民들이 여지껏 쌓아올린 공든탑이 하루 아침에 모두 다 무너져 버리고 마는거야. 第1次 世界大戰 때 유럽 交戰國들의 平均 壽命이 23.5歲였다고 들었어. 그것은 軍人의 戰時 平均 壽命이 普通 民間人의 人生 50년의 약 半額을 말해주는 거야. 나나 李 大尉나, 다 軍人의 戰時 平均壽命을 넘고 지금은 덤을 살고 있는 거야. 벽돌같이 네모난 마음가짐으로 請託을 모두 삼킬 수 있는 넓은 도량과, 돈과 生命을 버리는 武具의 精神으로 굵고 짧은 삶을 값있게 살다가 싱싱하고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軍人의 一生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金龍培 中領의 그 굵고 짧은 生涯를 마감하는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1951년 7월 2일, 不過 10일 전에 제7聯隊를 떠나 제7師團 제5聯隊長으로 赴任한 金龍培 大領은 江原道 楊口 軍糧里 戰鬪에서 敵彈을 맞고 戰死했다. 굵고 짧은 半額의 生涯를 마감한 것이다. 이 訃音이 제7聯隊에 온 것은 그 다음 날인 7월 3일이었다.
이 悲報에 접한 제7聯隊에서는 金龍培 大領이 生前에 가장 아끼며 가깝게 지내던 部下이며, 제2師團 제32聯隊 大隊長으로 確定되어 곧 제7聯隊를 떠나야 하는 나를 楊口로 急派하여 殯所에 머무르다가 葬禮式에 參席케 했다.
葬禮委員長은 제7師團長이었다. 나는 두 번째 弔辭를 읽었다. 남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는 野戰의 指揮官, 하지만 나는 弔辭를 읽다가 목이 메어 여러 번 말이 끊기고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葬禮式은 끝나고 遺骸는 앰불런스에 실려 葬禮式場을 떠났다. 멀리서 一線 將兵들의 流血을 强要하는 砲聲이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슬픈 일이로다. 一線의 勇敢하고 誠實한 强者는 가고, 後方에서 不誠實하고 卑怯한 弱者는 남는구나.” 損益計算하면서 後方에서 兵役을 要領 좋게 忌避하는 權謀術數와 邪術에 능한 政治的 僞善者들과 軍隊에 入隊하긴 했으나 소위 백을 써서 一線에 나오는 것을 기피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나는 남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鬱憤을 토해냈다.
에필로그
그로부터 기나긴 歲月이 흘러갔다. 어느 顯忠日 날, 나는 國立墓地에 잠들고 계신 故 金龍培 將軍의 墓所를 또 찾았다. 내가 그 墓所에 到着해 보니, 거친 風波를 겪으며 패인 주름살에서 過去의 고된 삶을 읽을 수 있는 시골 할머니 한 분이 北魚·무침·과일 등 조촐한 祭祀 飮食을 故 金龍培 將軍 墓所 앞에 차려놓는 중이었다.
나는 어디서 오신 할머니냐고 물었다. 慶尙北道 聞慶에서 왔다는 할머니의 對答이었다. 故 金龍培 將軍과의 關係를 물었더니 바로 婦人이라고 했다. 나는 故 金龍培 將軍과 나의 關係를 길게 說明하였다. 할머니는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默念을 올리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故 金龍培 將軍은 生前에 社會生活에서 그리고 家庭生活에서 神이 아닌 人間이었다. 神이 아니었기에 우리 마음속에 더욱 親密하게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나 武人으로서는 남다른 使命感과 他의 追從을 不許하는 大膽한 勇氣와 누구도 따르기 힘든 순발력을 지녔고 狀況을 잘 判斷하는 炯眼과 넓은 度量을 가진 名將이며, 성장(聖將)에 가까운 큰 人物이었다.
내가 戰爭記念館 護國追慕室 金龍培 將軍 銅像 앞에서 메모를 하는 동안 列을 지어 지나가는 團體觀覽의 高等學生들은 說明文은 전혀 눈여겨보지도 않고, “金龍培 准將,” “金龍培 准將” 하고 큰소리를 내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겉돌며 지나쳐 버렸다.
이 碑는 우리고장 聞慶出身으로 6.25의 英雄이며 韓國戰爭史에 길이 빛나는 “護國人物” 金龍培 將軍의 愛國忠正의 높은 뜻을 追慕하고 後世에 길이 전하고자 이고장의 機關 團體와 市民의 精誠을 모아 聞慶市在鄕軍人會가 主管하고 聞慶市의 後援과 國家報勳處의 協贊으로 建立하였으며 胸像과 彫刻은 이 고장 山北出身 서울 大學校 嚴泰丁敎授가 맡았으며 碑文은 興德出身 서울대학교 金安濟 敎授가 짓고 글씨는 加恩 出身 書藝家 롱곡 조용철선생이 쓰고 石村 이창호사장이 施工하여 將軍의 護國意志가 서린 이곳에 將軍 逝去 50周期를 맞아 胸像과 追慕碑를 세우다.
2001년 7월 2일
聞慶市在鄕軍人會
첫댓글 산사랑님의 숨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리고 고맙습니다. 김용배장군의 호국정신이 오늘에 다시 살아납니다.
2021.03.26.22:57
김용배장군의 추모일에 호서남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참배하는 두 장의 사진과 수 많은 자료들을 제시하여 김용배장군의 짧은 생애를 오직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훌륭한 자취를 남기고, 동기생인 채명신장군의 노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전쟁기념관의 護國追慕室에 朝鮮時代부터 오늘날까지 獨立과 自由守護를 위하여 목숨바쳐 勇戰奮鬪하신 先烈 中에서 뽑은 스무 분의 生前 모습을 담은 上半身 銅像이 安置되어 있고, 그 중 오른쪽 줄의 네 번째 銅像이 김용배장군이라고 안내해주어, 전쟁기념관을 찾으면 꼭 김용배장군을 찾아뵈어야겠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