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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로
15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16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17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20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21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22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마 22:15-22)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성서일과표가 제시한 오늘의 복음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명한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21절에 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유명한 까닭은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또는 견해’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비슷한 것으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3장 1절에서 말한 것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가 그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말씀과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은 인류역사를 통해 국가권력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1930년대 독일의 히틀러 통치시기에도 그랬고, 195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때도 그랬으며, 1970년대 한국의 유신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이 성서말씀을 근거로 자신들의 통치권을 정당화하고, 반대자들을 억압해 왔습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때부터 ‘두 나라(왕국)설’이 주장되어 왔고, 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는 정치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이 있고, 이 두 영역은 서로 간섭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아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교분리를 지지하고 교회의 정치참여를 반대해 왔는데, 앞의 두 말씀은 그 성서적 근거로 역할 해 왔습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주장일까요? 만약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했다면 옳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두 말씀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조심해야할 것은 “context는 빼고 text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 길게 말했는데, 앞뒤 말은 다 자르고 가운데 한 토막만 인용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고 말의 취지를 왜곡해서 전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text는 반드시 con- text와 함께 보아야 그 뜻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정교분리나 교회의 정치참여 반대는 구호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결코 현실 속에서는 실현 가능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인은 그리스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거 때 투표를 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참여입니다. 따라서 정치에 참여하느냐 참여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느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과거 70-80년대에 우리 기장교단이, 특히 우리 서울제일교회가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을 때, 기독교 우파가 반대했던 것은 사실은 교회의 정치참여가 아니라 교회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였던 것이 아닌 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비판마저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소위 ‘태극기 (모독)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 우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인 정치참여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들은 선거 때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정당까지 만들어 후보자를 출마시키는 적극성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의 정치참여는 이제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느냐 참여하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참여하되 적극적으로 하느냐 소극적으로 하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정치에 참여하되 어떤 입장에 서서 하느냐 입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느냐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느냐, 원전건설에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히틀러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 때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독일의 모든 교회가 침묵하고 있을 때, 반 나치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결국에는 사형까지 당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남기신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큰길로 나간다면 나는 목사라고 해서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한테서 핸들을 뺏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통사고 당한 사람 장례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해 주는 소극적 정치참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한편 사람들은 “미친 운전자에게서 핸들을 뺏는 정치참여”를 하고, 다른 편 사람들은 “미친 사람에게 핸들을 넘겨주는 정치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 뜻에 (더) 일치하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일 것입니다.
교회의 정치참여 문제를 넘어 ‘정교분리’에 대해서도 해야 할 말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면 너무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이쯤에서 중단하겠습니다. 단지 “정교분리”를 “종교의 자유보장”이라는 ‘본질’을 넘어 “국가는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유를 보장하라. 그러면 교회도 국가의 통치 행위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만 지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Text를 Context와 함께 보기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text는 반드시 con- text와 함께 보아야 그 뜻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성서해석의 한 원칙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까를 의논하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 비위를 맞추는 말로 시작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16절). 그런 다음에 그들은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17절)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대단히 ‘민감한’ 것이었습니다. 유대 나라가 주전 63년에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해마다 많은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조공을 직접 거두어들이지 않았습니다. 현지 사람들을 관리로 임명하여, 그들에게 조공을 거두어 바칠 책임을 맡겼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을 예수님에게 보낸 사람들은 바로 그 관리들이었습니다. 조공에는 모든 성인 남자들에게 부과되는 인두세를 비롯하여, 토지와 농산물에 부과되는 세금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게 조공 바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단지 경제적인 부담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조공은 조국의 자치권 상실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자신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외국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리들의 대변인인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은 교묘한 덫을 놓았습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예수님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예수님은 로마에 대한 저항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될 것입니다. 또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예수님은 경제적인 이유와 신앙적인 이유로 로마의 지배와 세금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유대 백성들에게 불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21장에 소개된 지난 번 논쟁에서는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마 21:25)를 물으심으로써 저들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는데, 이번에는 저들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고 물음으로써 예수님을 진퇴양난에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번에도 저들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저들에게 가지고 있는 동전 하나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동전을 하나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데나리온 동전 한 닢을 보시고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20절) 저들은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21절). 이 대답을 통해 저들의 실상이 군중들에게 폭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이 황제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동전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스스로 밝혔기 때문입니다.
1세기 유대 나라에는 두 가지 종류의 동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 한 종류는 사람이나 동물의 상이 전혀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는 상을 새기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따르면 그것은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종류에는, 로마의 동전을 포함하여, 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두 번째 종류의 동전을 소지하거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바로 그 동전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전에는 “황제는 신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선전하는 상투적이고 우상숭배적인 문구와 함께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들이 그 동전을 가지고 있고 또 사용한다는 사실은 저들이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라는, 즉 친로마 부역자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즉, 그 동전을 내보임으로써 저들이 스스로 민족반역자요 식민통치의 하수인임을 인정한 셈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
따라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이 대결에서 이겼습니다. 군중들은 이제 누가 하나님의 편이고 누가 로마 황제의 편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결에 이긴 것에 머무르지 않고, 저들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십니다. 그 대답은 두 개의 병행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둘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첫 번째 대답은 저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지니고 있음이 폭로되자마자 나오기 때문에 “그것은 황제의 동전이다. 그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하는 말썽의 소지가 있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은 대답이었습니다. 그 대답은 로마에 대한 세금 납부나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저들의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들에게 가지고 있는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답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대답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라”는 것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답하지 않은 대답은 단순히 그 쟁점을 회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예수님의 후반부 대답은 주위를 환기시키는 대답이면서 동시에 도전적인 대답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는 질문을 야기합니다. 예수님과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들의 성서가 그렇게 단언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이거나 그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로마제국에 속한 것도 아니고, 로마제국에 협력하는 지역 관리들에게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땅과 백성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 1절은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속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내재된 의미에 따르면 황제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로
이렇듯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황제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면, 과연 대제국의 황제도 아닌 보통사람인 나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서의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입니다.
성서는 이를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선언에 담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1:1)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선언은 창세기의 첫 문장일 뿐만 아니라, 신구약성서 전체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기도 합니다. 사도신경 역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다른 어떤 고백보다, 예를 들면 구원자라는 고백보다 더 우선해야 함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는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최고 근본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고백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신앙고백은 사상누각이 될 위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신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창조신앙과 창조론을 신앙하는 것은 엄격히 다릅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도 다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위임받아 잠시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위임받은 것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타락한 근본 원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려드리고 있습니까? 내 시간, 내 재산, 내 건강, 내 지위, 내 능력, 내 관심을 지금 무엇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황제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는 말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지만, 삶과 행동으로는 황제나 맘몬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국가에 세금은 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ABC요 핵심입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사항입니다. 이것 없는 기독교 신앙은 ‘미신’이요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신앙을 깊이 성찰해 보고, 바로 여기서부터 나와 교회의 개혁을 다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스스로의 삶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라”는 말씀을 살아내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