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행 9:36-43)
* 지난 주 설교 말미에 우리 교회 내부의 변화와 평신도 리더십의 적극적 참여 문제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운영위원장님이 예배 후 임시 총회가 이어지니 설교를 조금 짧게 해달라고 부탁하셔서 오늘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차분하고 상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설교 역시 우리 교회의 부족한 점을 살펴보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 예수는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고 계속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죄를 알고 있었지만 계속 용서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했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죄도 용서했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다시 찾아가서, 그들을 용서했고,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사역을 맡겼다. 이런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이자 본분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한 여러 인물들 중 한 명이 윌리엄 캠블이다.
* 윌리엄 캠블은 미시시피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군복무 중 하워드 파스트가 쓴 자유의 길을 읽고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와 남부 백인들의 억압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남부의 비극이 나의 남은 생애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예일 신학대를 졸업한 후 남부로 돌아가 “남부 연방을 위한 선교사, 흑백을 잇는 다리, 타락한 남부지방의 야만스러운 정치를 폭로하고 도전하는 반항자”로 자칭하며 캠퍼스 목회에 전념했다.
* 그리고 1950~60년대 초반 KKK단의 본거지에서 민권운동과 NCC 활동에 헌신한 결과 미시시피대 캠퍼스 목회자직에서 해고되었고 KKK단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마틴 루터 킹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탁월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젊은 시절 인종 평등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훗날 KKK단원들 중 가난하고 무지한 백인들을 돌보는 목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캠벨은 기독교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지 않느냐는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아마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백인들의 인종차별 못지않게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도덕적 위선과 미묘한 계급의식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혹독했던 가난과 인종 차별의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이중적 확신을 심어주었다.
* 그의 전기 작가의 표현을 빌면 그 확신은 “우리는 모두 개자식(bastard)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의 유명한 신조와 연결된다. 원문에 사용된 ‘bastard’라는 단어는 사생아, 서자 등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 안팎과 사회적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즉 KKK단원만이 아니라 하버드 출신 변호사들과 세련된 대학 행정가들에게도 똑같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반영한다. 착한 척하지만 결국 모두 모두 개자식(bastard)들이라는 것이다.
* 죄에 대해서는 원죄론을 비롯해 여러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교회가 물려받은 죄의 교리를 개혁하기 위해 제임스 맥클랜돈의 정의-“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반대되거나, 미치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죄라고 고백해야만 한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기독교는 이런 정의에 기반해 새로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정의를 통해 금기나 공포,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보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칼 바르트는 1914년 10월 4일자 조간신문을 읽다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신학교수 몇 명이 전쟁을 지지하는 선언문에 서명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1차대전 중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을 보면서 그 전쟁을 지지한 신학자들의 행동에 환멸을 느꼈고, 그들이 가르쳤던 내용이나 주장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20세기 최고 신학자 중 한 명인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 탄생한 배경 역시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통찰 덕분이었다.
* 빅토리아 바넷은 <홀로코스트 중 방관자들의 양심과 순응>이라는 책에서 “나찌즘이 강력했던 것은 열심당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백만의 독일인(기독교인)들이 서로 정보를 제공하며 (잘못된)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는 동안 수동적 자세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유대인 학살 당시 악의 일상성에 대한 지적은 그토록 많은 기독교인이 악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중요한 이유를 제시한다.
* 그 이유는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예언자적 교육)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르샹봉 휴그노 공동체의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행동이다. 이들은 2차대전 당시 약 3천여 명의 유대인 피난민을 구해줬는데, 이 이야기를 기록한 책-필립 할리의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하여>-에 따르면, 매주 들었던 목사의 설교 외에는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다른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 1942년 당시 비시 정부의 지침에 따라 프랑스 경찰이 유대인을 강제로 실어가 위해 왔을 때, 트로크메 목사가 유대인들을 어디에 숨겼는지 대라는 경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지역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오직 한 명의 유대인만을 찾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목사의 아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을 태운 버스를 둘러싼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그에게 비싼 초콜릿을 쥐어 주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그의 행동에 동조했다.
* 당시 그들은 식량이 모자라 모두 굶주리던 상황이었지만 체포당한 유대인에게 작은 선물(먹거리)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체포해가는 경찰들도 적대시하지 않았고 이웃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 역시 그들이 평소 배운 성경의 가르침-특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덕분이었다. 이 비유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자세를 뛰어 넘어 적극적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 교회에서 이런 예수의 가르침을 계속 전하고 그것을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성도들이 태어나고, 그들로 인해 선행이 이뤄지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런 법칙에 의해 세워졌고 성장했으며 발전했다.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출현>이라는 책에서 교회는 첫 수 세기 동안 세상에 대한 가시적, 구체적 대안임을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그 책에 소개된 키프리아누스라는 기독교인은 카르타고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행위 말고는 더 훌륭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진정으로 새 세상에 대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큰 일, 즉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처럼 자비와 친절을 실천해야 한다. 단지 믿음의 동지들만이 아니라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이 책은 첫 수세기 동안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여성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초대교회가 급성장한 것은 로마제국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는 여성들을 교회 리더십에 영입함으로써 로마인이나 유대인과 다른 규범을 보였다. 그리고 인종과 성별, 계급의 차별을 없애고 당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의 모습을 제시하고 실제로 그대로 살며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 오늘 본문에 소개된 이야기는 바울이 회심한 직후 욥바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다비다(도르가)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여제자’로 불린 인물이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하다 병이 들어 죽었는데 근처 마을에 있던 베드로에 의해 되살아난다. 그녀의 주요 사역은 과부를 돌보는 것이었다. 즉 교회에서 가장 어렵고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 베드로가 왔을 때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그녀가 살아있을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는 기록은 그녀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보여준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사람들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겉옷만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할 속옷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부들이 정말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은밀하게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그리고 과부들을 돌보던 그녀의 사역은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 않았다. “다비다, 일어나시오!”라는 베드로의 말에 그녀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다비다가 육체적으로 살아났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녀의 사역이 끊이지 않고 지속될 것임을 극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 첫 3세기 동안 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복음의 증거였는데, 그 증거 는 말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비다와 같은 제자들의 구제, 자선 사업을 통해서 이뤄졌다. 초강대국 로마에서는 영아 유기와 유산, 남색이 비일비재했고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을 내다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핍박의 대상이었던 기독교인들은 공동체는 물론 자신들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런 다름이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 “우리는 모두 개자식(bastard)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캠벨의 말처럼, 기독교인들도 사실은 다른 사람들처럼 ‘현실적’이며 ‘세속적’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과 다른 것은 무엇인 참된 현실인지 세상이 규정하는 상투적인 설명에 대해 기본적인 이의를 제기(말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출발이 그랬고 기독교의 본질을 유지한 사람들을 통해 보여진 모습이 그랬다.
*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넘어서는 내일에 대한 비전이다. 그리고 그 비전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려는 개인적, 집단적 노력을 통해 구체화, 가시화된다. 아마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4:15)라고 권면한다.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다. 바울의 말처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이다.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 그것이 교회다.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대신 세상의 수단을 통해 교회를 통합시키고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때로 성공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본질과 무관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면에서 자라날 때 비로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까지 이를 수 있다. 결국 교회의 본질적 가치는 이런 것이다.
* 오늘은 예배 후 임시총회가 이어 진행되는 날이니 이정도만 말씀드리고 내가 좋아하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