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8장 24-28절
제목 : 아볼로
일시 : 2018년 2월 17일
1. 나는 내가 아볼로 같다거나, 아볼로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하곤 한다.
말도 잘하고, 학문도 깊고, 성경에도 정통하고!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고 부족하랴.
아볼로와 같았으면...
2.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유대인이다.
오늘 본문과의 관련 속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최고의 학문의 도시이다. 그 유명한 유대철학자인 필로가 그곳에서 활동했고,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어마무시한 도서관이 그곳에 있었다.
아볼로는 그곳에서 학문에 열중했고, 그것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사용했다.
가끔 학문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목회자들을 만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수사이다. 뭘 모르니 두렵고, 공부와 독서를 게을리 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포장일 뿐이다.
사람마다 다 달리 사용되는 것인데, 공부해서 설교와 선교에 사용하는 것 자체는 훌륭하고 아름답다.
3. 맥락으로 보면, 아볼로는 어려서부터 혹은 젊어서부터 기독교를 알았던 것 같다. 25절에 ‘이미’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 그의 명석한 두뇌로, 다른 한편으로 열정을 가지고 성경과 예수를 공부했다.
4. 게다가 골방에 틀어박혀서 책만 주구장창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도하고, 토론하였다.
나는 그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온 종일 책만 보고 글만 쓰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란 그런 것이며, 사역자란 그럴 수 없지 않는가. 그럴 거면 사역자가 되지 말아야 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목회자의 일이 아닌가. 성경을 읽었으면, 성경 대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5. 여기까지는 내가 아볼로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6. 아래의 내용은 내가 아볼로와 다를 바 없다는 부분이다.
7. 요지는, 그가 복음을 정확히 알았으나, 더 정확히 알아야 할, 어떤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더 알고 싶고, 더 읽고 싶고!
8. 그런데 아주 까다로운 구절이 있다. 그것은 이 본문과 다음 19장 1-7절에 나타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열두 명의 사람과 연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요한의 침례”이다.
두 만남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18장 25절에는 아볼로가 요한의 침례 밖에 알지 못하였다고 했고, 19장 3절에는 요한의 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두 사건의 차이도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령이었다. 성령을 경험했느냐의 여부인데,
어찌되었건 공통점은 ‘요한의 침례’이다.
9. 아볼로의 경우, 예수를 정확히 알았으나, 요한의 침례 정도 밖에 몰랐다는 것이다. 아무리 읽고 읽어도 앞뒤가 맞지 않다.
10. 불가피하게 사도행전을 벗어나서 복음서에 나타난 요한과 요한의 침례를 살펴볼 수 밖에 없다.
11. 마태복음을 보면, 요한(3:2)과 예수(4:17)의 설교는 동일하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둘 사이에는 연속성과 차별성이 있다. 연속성은 메시지가 동일하고, 요한에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차별성이 있다. 말은 같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많이 다르다.
12. 요한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곧 올테니, 마음 단단히 먹고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 준비란 다름 아닌 회개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 친히 하나님 나라인 분이므로, 요한과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으니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증언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실체이고,
한 사람은 미래를 말한 것이라면, 다른 한 사람은 현재를 말하였다.
13. 이것을 아볼로에 적용하면 어떨까?
아볼로는 예수를 요한의 방식으로 읽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처럼,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고 실천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14. ‘더 정확히’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알기는 알았지만, 약한 희뿌연 했던 것 같고, 머리로는 알아도 그의 삶과 몸으로는 경험이 약했다.
15. 딱 내 이야기이다. 글쎄, 내 나름으로 성경을 정확히 알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삶과 교회 가운데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걸까? 살아내고 있는 걸까?
나는 알아도 정확히 모르고, 정확히 알아도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할 성경교사이다.
그러니 아볼로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내가 영락없는 아볼로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아, 내게 누가 있어 성경을 더 정확하게 알게 해 줄까?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일까?
1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내가 만나고픈 교인 부부이다. 천막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생계와 생존에 힘쓰고, 바울의 선교 사역에 열심히 후원하고, 그러면서도 아볼로를 능가하는 성경 지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 부부는 인격적인 사람들이다.
F. F. 브루스가 말한 것을 존 스토트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읽었는데, 이들은 아볼로의 부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아마도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식사를 대접하고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 예배에 참여하게 하고, 교회 식구들과 교제하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바, 요한의 침례만 알던 아볼로에게 예수의 침례로 말미암아 하나된 교회, 오리라 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실제를 경험하게 했을 것이다.
17. 실제로 나는 우리 교회의 성경 공부 시간에 성도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많이 배운다.
사도행전 9장을 공부할 때 일이다.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난 대목인데, 늘 하던 대로 각자 요약하고,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토론을 했다. 그리고 각자 느낀 것, 은혜 받은 것을 나누자고 했다.
사실, 그날 설교의 마무리가 어려웠다. 아볼로처럼 본문은 잘 설명한 것 같은데, 적용이랄까, 그래서 어쩌라고 부분이 약했다.
한 학생이 본문 속에서 깨달은 것을 말했다.
“적대자요 핍박자인 바울을 품고 제자와 동지로 삼는 예수님”
너무 감동 받아서 그날 설교의 마무리로 사용했다.
18. 아볼로 같은 목사 없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부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