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9일 밤. 光州시내는 심한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날씨 때문인지 평소 인파로 북적대던 충장로와 황금동 일대도 초저녁부터 인적이 드물었다. 이날밤 10시께 光州시 東구 黃金동 光州 美문화원의 기와지붕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어 둠에 잠긴 光州시가에서 한동안 타올랐다.
美문화원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는 시간, 이로부터 약 1㎞ 떨어진 光州공원의 어둠속에 5 명의 청장년이 숨을 헐떡이며 모여들었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美문화원의 불타는 모습 과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에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이들이 美문화원에 불을 지른 뒤 1차집결지점인 光州공원으로 숨어든 방화범들(?)이었다.
가톨릭 농민회(일명·가농) 회원 丁淳喆(당시 25세), 金동혁 (당시44세·前가농 全南연합회장), 尹종혁(당시 26세), 朴시영씨(당시22세) 농민 4명과 당시 全南大 경영학과 2학년인 林鍾洙씨(당 시 21세)등 5명. 20대에서 40대의 장년의 농민과 대학생이 어울린 이상한 방화범들은 잠시후 자리 를 옮겨 거사성공의 축배를 들었다.
이틀뒤인 11일 오전, 林씨는 全南大구내에서 光州 서부서 정보과형사에 의해 방화사건과는 무 관한 혐의로 전격연행된다. 경찰에서의 신문내용은 그전에 계획했던 가두시위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경찰의 태도가 돌변했다. 「美문화원 방화사건에 全南大생 1명이 가담했다」 는 첩보와 함께 경쟁관계인 光州지구 보안대에서 林씨를 인도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美문 화원사건을 대라』며 무수한 몽둥이질과 발길질이 시작됐다. 『보안대에 가면 없는 죄도 나온다. 경찰에서 학생신분을 참작받을 때 대라』는 것이었다. 이틀을 버틴 林씨는 결국 사건전모를 실토 하고 말았다.
최근 기자와 만난 林씨는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이 사건을 공론화할수 있는 재판을 통해 우리가 美문화원에 불을 지른 의도를 알리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 다. 林씨가 고문속에서도 이틀을 버텼지만 순진한 시골농부였던 나머지는 丁淳喆씨를 제외하고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5·18전까지만 해도 全南大내 비운동권서클인 KUSA(유네스코 학생회)에서 연극활동을 해온 평범한 학생이었던 林씨는 5·18이라는 피의 광란을 목격한 뒤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자책에 시 달린 끝에 가톨릭에 귀의하게된다. 그러다 가농회원들과 운명의 조우를 하게된다. 林씨와 당시 가 농회원이었던 丁씨의 회고를 통해 美문화원 방화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재구성한다.
가농은 12월5일 호남동 천주교회에서 열릴 예정인 「光州·全南 농민대회」를 이용해 농민들과 全南大·朝鮮大·光州교대생 등 대학생 가두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5·18이후 최초의 가두시위 계획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실패하고 말았다.
12월10일 제2차시위가 계획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성공을 장담할수 없었다. 결국 최소인원 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타켓이 무엇인가라는 논의에 들어갔다. 光州 美문화원 방화 사건은 이렇게 태동됐다. D데이는 9일로 정해졌다. 방화 다음날인 10일은 美國의 브라운 국무 장관의 來韓일이었다.
8일 밤 사전답사가 이뤄졌다. 다행히 美문화원과 담장하나를 사이로 붙어있던 2층건물인 오성여 관이 개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밤에는 비어있는 이 건물을 이용하면 美문화원으로의 침투가 가능 했다. 당시만해도 美國공관에 대한 위해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의 경비도 없었다.
D데이인 9시께 丁씨등은 美문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丁씨와 林씨가 실행행위를, 나머지 3 명은 인근에 흩어져 망을 보았다. 丁씨는 오성여관 2층 창문을 통해 美문화원 담장의 철조망을 자르고 침투해 문화원 지붕위로 올라갔다. 지붕 두어장을 뜯어내고 골판지를 면도칼로 찢어냈다. 그리고 휘발유와 석유 한말을 들이부었다. 도화선으로는 길고 가늘게 만 시멘트 부대가 이용됐다. 불을 붙인뒤 丁씨와 林씨는 오성여관을 통해 빠져나와 집결지인 光州공원 쪽으로 달아났다.
수사당국은 방화사건을 광주사태의 책임자타도와 진상규명, 군부파쇼 집단을 지원·지지하는 미국의 퇴진요구라는 목적과 동기보다는 불평불만이 많은 부랑아들의 영웅심리에 의한 불순행동 으로 몰아붙였다. 2심까지 가는 동안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林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5·18에 적극 가담한 혐의까지 받은 丁淳喆씨는 1년 반동안의 도주생활끝 에 체포돼 징역 5년6월을 선고받았다.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의 의의는 林씨의 항소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본 방화사건은 5· 18광주사태의 역사적 의의에 연유하지 않고는 별도분리해서 파악할 수 없다. …美문화원 방화동 기는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전세계 양심인들에 대한 메시지로서, 일련의 국내 인권유린책에 대한 고발과 광주사태의 숭고한 이념을 만천하에 표방하는 수단이었다. …저의 방화동기를 바로 인식한다면 미국내의 양심적인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2백년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환기하여 韓美간의 종속체제를 대등한 주권국가 관계로 개선하도록 노력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 다』
林씨는 『당시 너무도 평범한 학생인 내가 왜 이런일을 해야만 하는가, 이런 고뇌 속에서도 내 가 이 순간 이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는 이런 결단과 선택을 통해 이루어져 간다는 생각이었다. 우리의 행동은 역사에 하나의 씨앗을 뿌 린 것에 불과하다. 마치 산 정상에서 굴린 돌멩이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엄청난 눈덩이가 되는 것 과 같다. 우리의 행동은 바로 이 작은 돌멩이의 역할이었다』고 자평했다.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丁씨는 여천에서 식당을 운영하고있으며, 林씨는 대학에 복 학, 졸업한 뒤 光州시청 공보실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金동혁씨 등도 지금은 평범한 생활을 하 고있다.
美문화원 방화사건은 당시 통제된 언론에 의해 사실여부조차 보도되지 않았다. 방화사건 다음날 신문은 「전기누전」으로 화인을 추정하는 1단짜리 기사로 이 사건을 취급했다. 재판과정에 대한 보도는 아예 취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 진상은 5共이 끝날 때까지 철저히 은폐되어 왔었다.
그러나 소문으로 떠돌던 光州 美문화원 방화는 82년 3월 金鉉@, 文富軾등에 의한 釜山 美문화 원 방화사건으로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5·18당시 美國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 함께 한국 사회운동의 혁명적인 변화인 反美운동의 시발로 작용했다. 5·18이라는 피의 학살이 光州를 휩쓴 살벌한 시절에 일어난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은 5共의 칠흑같은 어둠을 깨뜨린 反美의 총성이었다.
첫댓글 언재쯤 미국의 손아귀애서 벗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