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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3:1-3 ; 호 6:1-6) 송수천 목사
(호 3:1-3)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 6:1-6)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는 더욱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는 소선지서로 분류됩니다. 호세아선지자가 작은 선지자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분량이 작아서 소선지서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① 호세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호세아는 '구원자'를 뜻합니다.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헬라어로 예수님과 이름이 같습니다. 여호수아와 호세아는 히브리어이고 예수는 헬라어입니다. 이것은 모두 구원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란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한 선지자는 '호세아, 아모스, 요나, 나훔' 이렇게 네 명이고, 남 왕국 유다를 향해서 예언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하박국, 스바냐, 이사야, 요엘'입니다.
호세아의 사명은 죄에 대한 심판을 자기 가정을 무대로 해서 가시적으로 증거를 했습니다. 호세아의 사명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는 것도 어려운데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는 이 어려운 사명에 앞장서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 가정을 무대로 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누가 자기 가정의 치부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까?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자기 가정의 치부를 다 들어내면서 주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인데 '완전함'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름의 뜻은 좋았지만, 고멜은 결코 완전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학자들은 고멜이 결혼 전부터 음행을 했는지 아니면 결혼 후에 바람이 났는지 이것을 두고 논쟁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멜이라는 여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음행 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멜이라는 한 여자의 타락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영적으로 음행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될 때 우리를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책망도 하시고 그래도 안 돌아오면 사랑의 채찍을 때리셔서 결국 주님 앞에 돌아와 주님이 예비한 풍성한 은혜 가운데 머물게 만들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완악한지 은혜를 받고 또 받고 또 받아도 늘 돌아서서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은 모든 왕들이 또 모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또 경고했지만 저들이 돌아오지를 않고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멜이라는 음탕한 여인을 택하여 음란의 죄를 책망하면서 그 백성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고멜이 남편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자꾸 세상에 나가서 방탕한 삶을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은 또 부인을 데려오고 집 나가면 또 찾아오고 그 마음의 고통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으로 음행을 하고 있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취하여 낳은 자녀는 아들 둘, 딸 하나인데 그들의 이름의 뜻을 보아서도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죄악 속에 살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장남의 이름은 '이스르엘'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르엘은 원래 골짜기 이름입니다. 삿6:33절에 나오는 이스르엘 골짜기는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격파한 곳입니다. 또 예후라는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아합의 70명의 아들과 그의 군대를 쓸어버린 곳입니다.
둘째는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었습니다. 로루하마는 '사랑 받지 못한다.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아들을 낳아 '로암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고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이름을 짓겠습니까? 하지만, 호세아는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 백성은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보호도 해주지 않겠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흩어버리시고 긍휼도 베풀지 아니하시며 자식으로도 삼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호세아서가 심판의 메시지로 끝나버린다면 구원자라는 호세아의 이름은 무색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서는 인간이 아무리 죄로 인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면 소망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호 6:1 본문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② 나라가 살고, 인생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인생이 살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도 타락이 극심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바알신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 그들의 타락상이 호세아 5장에 나옵니다.
1절에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종교적으로 제일 바로 서야 할 제사장이 바로 서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온 이스라엘 족속들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왕들도 다 죄에 빠졌다고 한탄하고 계십니다.
2절에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여기 패역은 인간의 말종들이 짓는 죄입니다. 살륙죄는 살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패륜적인 사건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와 똑같지 않습니까?
4절에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10절에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각종 질병이 임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 받기 원한다면 의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능력, 치료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13절에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치료를 받고 구원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입니까? 15절에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이어서 오늘 본문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 현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미신적인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미신적 신앙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미신적 신앙 현상은 기복신앙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가 복을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신앙 현상입니다. 그래서 '축복성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도 많고 또 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모입니다.
또 다른 미신적 신앙 현상은 예언 제단들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언을 합니다.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지 여부,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지 여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여부 등 교인들의 관심사를 예언합니다.
심지어 예언하며 헌금을 받고 또 아예 가정에서 제단까지 차려놓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를 사칭한 무당 행위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병적인 미신적 신앙 현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교인들의 의식 속에 이와 같은 미신적 신앙의 경향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어떤 결단이 필요한가요?
⑴ 기복 적인 신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복적이라는 점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달래서 화를 면하거나 복을 받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 우리가 이런 미신적 신앙을 극복하려면 우리 신앙의 초점을 복 받는데 두지 말고 내가 복된 사람이 되는데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복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된 내 모습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복은 자동적으로 옵니다. 시37: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⑵ 이기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복을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척이나 인색합니다. 수억 원씩 돈을 들여 굿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단돈 한 푼도 기부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들이야 어떻든지 나만 복 받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은혜 받고 내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남들을 배려하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나 외에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그것이 내가 소원하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그것이 내게 유익이 되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내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일이라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⑶ 회개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옷을 찢곤 했습니다. 아이 성 공격에 실패한 후 여호수아는 회개하며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아합 왕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경고를 들을 때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했습니다(요엘 2:13).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행 3:19),
둘째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하는 것이고(잠 1:7),
셋째로는,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골 3:5; 요 6:63).
▶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 온 유럽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던 '루이 햇숀' 목사님이 '갈보리 언덕'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죄와의 투쟁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은 주님의 기준을 맞출 수 없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온전히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거기에는 아무 자격 조건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시선을 자기와 세상에 두지 말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죄를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죄를 진심으로 회개할 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③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호6: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주님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 앞에 고침 받지 못할 질병이 없고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시고 육신의 병을 치료 해주시고 환경의 저주와 절망을 치료하여 주시고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욥5:18-20절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41: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0: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입니다.
④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호 6:3, 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리고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 보면 그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 여기서 '안다'고 할 때 두 가지의 철학적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헬레니즘으로 헬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고, 또 하나는 헤브라이즘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헬레니즘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별개로서 지식과 감정이 따로 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 결심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적인 생각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하나로 봅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라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가 '야다'라는 말입니다.
'야다'는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서, 체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이 바로 야다입니다.
▶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을 세 종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1) 하나님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무관심하게 사는 방임된 인간입니다. (있으나 마나 형 인간) : 자연인(무신론자)으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자기를 내버린 인간입니다. '되는 대로 살다가 가자, 하나님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이렇게 관심 없이 살다보니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도 모르고 사는 버려진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 21:8).
2) 아직 하나님을 발견 못했으나 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사는 철학적인 인간입니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인간형) : 율법아레 사는 인간들.
무지개를 따라가는 어린애처럼 '어딘가에 있겠지'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가 끝나는 종교적, 철학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롬 3:20).
3)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섬기며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꼭 필요한 인간 형) :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하나님의 자녀 (요 1:12)).
'내가 하나님을 찾는 줄 알았는데 벌써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벌써 나를 사랑하셨습니다(요일 4:19) 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매일매일 확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지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순간 나를 알고 남을 알며 세상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잠 1:7 ; 잠 9:10).
그래서 호세아는 4장 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한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믿습니까? 오늘 본문(호 6:1-2)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