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9:11-17절) 면류관의 寶石 같은 성도들 3-104.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날마다 말씀과 은혜에 넘치는 생활을 하면, 당장 무슨 축복(祝福)이 임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은혜(恩惠)가 넘치는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상황이 계속 꼬이고, 어려워질 때, 심각한 침체(沈滯)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야말로 면류관(冕旒冠)에 박힌 보석(寶石)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나 한 사람만 산다면, 이런 연단의 과정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이들의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보석(寶石)으로 연단해 나가십니다. 즉 금고(金庫)속에 감추어진 보석이 아니라, 왕(王)의 면류관 중앙에 박혀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보석으로 만들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과 농사짓는 사람은 행동양식이 많이 다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시간을 다투면서 일합니다. 즉 물건을 제때 구하지 못하면, 팔 기회가 있는데도 팔지 못하게 되고, 남은 물건들은 그대로 재고로 쌓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속전속결로 처리합니다.
그에 비해, 농사짓는 사람은 소처럼 천천히 일합니다. 곡식은 서두른다고 익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오랜 인내한 끝에 열매를 얻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장사는 할 수 있어도 농사는 짓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열매를 얻으려면, 농사지을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깊은 산에서 원석(原石)을 캐내어 보석(寶石)으로 가공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장사처럼 하루 이틀이나, 한두 달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농사처럼 1,2년이나 4,5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열매는 아무리 초고속으로 맺혀도 10년입니다. 제일 속도가 빠른 사람이 10년 걸립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열매를 맺은 사람은 면류관에 박힌 빛나는 보석(寶石)이 되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는 어릴 때, 애굽으로 팔려가서 청년기 대부분을 노예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사용되기 시작하니까 보석처럼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옴으로써 모든 어려움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다윗 왕조가 회복되고, 통일된 독립국가로서 옛 영광과 권세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곧 깨달은 사실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 망한 후, 페르시아가 전 세계를 지배하더니, 알렉산더라는 엄청난 침략자로 등장해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렸습니다. 사실 알렉산더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헬라 문화의 전도사를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강제로 헬라어를 사용하게 했고, 헬라 문화를 퍼뜨렸습니다. 그의 사후(死後)에 팔레스타인은 네 후계자들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성전에 돼지 피를 뿌렸으며 제우스 신(神)에게 절하지 않는 많은 유대인들을 살육(殺戮)했습니다. 그 후에 세계는 로마라는 강대국의 지배 아래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그러한 일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의 축복(祝福)은 왜 이리 더디게 이루어질까? 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만 하면, 곧바로 메시아의 나라가 시작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메시아와 아무 상관없이 힘을 가진 악(惡)한 자들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Ⅰ.물 없는 구덩이에 갇힌 자들 누군가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의 물 없는 우물에 빠졌다면, 물이 없으니까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쉽게 빠져 나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사람의 인기척조차 전혀 느끼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마‘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또 처음에는‘사람 살려!’라고 소리라도 지르겠지만, 결국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온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다시 한 번 혼신의 힘을 다해‘사람 살려!’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동안 유다 백성들은 마치 물 없는 구덩이에 빠진 자들처럼 절망 속에 살아왔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 곳에서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9:11절)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 갇힌 자들로 묘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말 중에 이것과 가장 가까운 표현은‘사면초가(四面楚歌)’일 것입니다. 사면이 완전히 막혀서 도저히 빠져 나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즉 어려움은 계속되는데, 출구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물 없는 구덩이에 갇힌 상황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포로생활이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바벨론으로 잡혀 갔고, 나머지는 전 세계에 노예로 팔려가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리고 부르짖어도 도움의 손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지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열심히 기다렸는데도 구원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체 왜 이처럼 물 없는 구덩이에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 했을까?
하나님은 11절)...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이렇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구덩이에 빠져서 소망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답답한 기간을 보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은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나의 삶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빠져 다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大學)을 졸업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직장이 없습니다. 또 결혼(結婚)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직장이 없습니다. 또 어떤 자매는 하루하루 기쁨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데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변화의 기미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이 물 없는 구덩이에 언제까지 갇혀서 살라야 하는 가’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현재가 불만스러워도 미래의 소망만 보이면,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앙은 냉소주의(冷笑主義)에 빠지고, 뜨거웠던 자신감은 사라지며,‘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패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남들은 겪지 않는 이런 구덩이의 기간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곧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거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연단의 기간을 통해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Ⅱ.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이유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흩어져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유다 백성들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셨구나, 이 비참한 노예생활도 곧 끝내겠구나.’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나타나지 않고 알렉산더라는 더 엄청난 정복자가 타나서 패권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페르시아가 망하기만을 고대했던 백성들은‘도대체 얼마를 더 기다려야 메시아의 나라가 오는 것인 가? 라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깨닫지 못한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인간의 죄 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시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화(映畫)를 보면,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온갖 악당(惡黨)들이 나와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그 악당들을 보면서 왜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지,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또 환자는 아픈 정도가 심하고, 기간이 길어질수록 의사(醫師)를 반가워합니다. 만약 자신은 아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의사(醫師)가 와서 치료해 주겠다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내면서 돌려보낼 것입니다. 유다 백성 일부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것이 이제 곧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신호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세상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죄 성을 생생히 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와 마케도니아 시대가 지나면서 인간들은 전쟁을 지긋지긋하게 겪었습니다.‘이제는 이런 영웅들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평화를 줄 왕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에 들 때까지 하나님은 격동(激動)의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그러한 격동의 역사를 통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동했다고 해서 서로 싸우고, 죽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알렉산더는 문화적으로 메시아의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나라들을 헬라 문화권에 통합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일은 주변 세계가 전부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구약성경도 헬라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또한 로마는 여러 나라의 저항을 진압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도로를 닦아 놓음으로써 전도자들이 마음껏 여행하면서 복음(福音)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와서 복음(福音)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셋째는 장차 임할 메시아의 나라가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나, 마케도이아 처럼 무력(武力)으로 세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오 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같은 위대한 장군(將軍)이 나타나서 온 세상을 칼로 정복하고, 메시아의 나라를 세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나라는 무력으로 정복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확산되는 신앙의 나라였고, 이 세상 나라와 공존하는 나라였습니다. 이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은 메시아가 두 번째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중대한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메시아의 나라를 멀리서 내다보았기 때문에 메시아의 나라가 시작되는 일과 메시아가 세상을 정복하고, 심판하시는 일이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한데 붙어 보이는 이치와 같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조차 그리스도가 오심과 동시에 정복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11:3절)...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면, 이 두 산봉우리가 실제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 교회 시대가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두 번째 오실 때까지 온 세상에 복음(福音)을 전하며, 사람들을 천국으로 초청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정복(征服)은 인류 역사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견뎌 왔는데 내가 소망하던 일과 실제 이루어지는 일이 다른 것으로 판명 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2절)갇혀 있으나 소망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가장 중요한 일은 절망하지 않는 이것입니다. 감정적으로는 슬프고, 절망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의지하기를 중단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절)...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면초과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사방이 막혀 있어도 하늘은 뚫려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는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할 길 또한 전혀 없어도 하늘은 열려 있으며,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어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방이 막히면 막힐수록 더욱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만큼 소리 지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고‘어~어’소리만 질러도 하나님은 다 알아들으십니다. 우리 위에 뚫려 있는 하늘은 느부갓네살도 못 막고, 다리오도 못 막고, 알렉산더도 못 막습니다.
아무 출구(出口)도 보이지 않고, 사방이 막힐 때,‘아 지금은 기도할 때로구나. 좋다! 한평생 기도할 거 이번에 다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바라볼 곳은 하늘뿐입니다.
그 다음에 기억할 사실을 이때가 곧 악(惡)의 때, 즉 악(惡)이 마음껏 활개를 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성급하게 덤비면 안 됩니다. 악(惡)의 때는 자기 영혼 하나만 잘 지켜도 대성공입니다. 즉 가족도 돕지 못하고, 헌금도 많이 못 드린다 해도 내 영혼 하나 똑바로 지키면, 그 보다 더 큰 성공은 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안 죽고 살아만 있어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곰의 겨울잠 전법을 써야 합니다. 즉 가능한 한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숨만 쉬면서 겨울을 넘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직 힘을 주시지 않은 때는 앞에 나서서 무슨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실컷 은혜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위대하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자신을 준비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목회 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流配)되었습니다. 성도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목회자에게 굉장히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섬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고,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고난 가운데 내가 만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하나님이고, 어려움 속에서 내가 체험한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사방이 막혔을 때, 내 힘으로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실컷 은혜 받을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때 만난 하나님, 그때 깨달은 성경, 그때 부른 찬송, 그때 흘린 눈물이 만국 공용어(公用語)가 되어서 다른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로 다가갈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반드시 재기(再起)할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12절)...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붙들고 겪는 고난에는 반드시 보상(報償)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갑절이나 갚아 주십니다. 반드시 구덩이를 빠져 나와서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 잃어버린 기회를 몇 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Ⅲ.헬라를 치는 이스라엘 이미 말했듯이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기간에 세계는 헬라 문화권에 통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시대에 태어나셨지만. 사실 로마는 헬라 문화를 수용하고, 복사한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13절)내가 유다로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용사(勇士)가 활을 쏠 때, 어떻게 합니까? 평범한 사람은 당길 수도 없는 큰 활을 당겨서 튼튼한 화살을 먹여 놓습니다. 그렇게 힘껏 당겼던 시위를 놓으면, 화살이 날아가서 목표에 적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런 화살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실 그들은 노예로 팔려가자마자 이방인들과 섞여 버렸기 때문에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조상이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는 희미한 기억 정도만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을 화살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왔다가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로서 언어(言語)도 통하지 않았고, 생김새도 달랐으며, 옷차림도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지 희미하게 남아있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아왔다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유다를 활로 에브라임을 먹인 살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은 초대교회 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화살처럼 전 세계로 날아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13절)...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헬라자식들’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 때, 통치의 주체는 로마였지만, 그 사고방식은 헬라 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헬라인’으로 총칭해서 불렀습니다. 헬라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 이방인 중에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당시에 야만인으로 불렀던 게르만 족 등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전부 헬라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유용하게 사용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활로 사용하셨고,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먹인 살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주님께 놀랍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방식과 내 입장을 지나치게 고집하면, 사용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 모두를 사용하기 원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장벽을 넘지 못해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따로 준비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유대인의 문화와 관습이라는 장벽(障壁)을 뛰어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자기 틀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용하는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꾸만 자기 틀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내 방식, 내 시간, 내 이익, 내 집, 내 교회, 내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록 더욱 강력한 화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려면, 그 손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좋은 도구는 손에 쥐기 쉬운 도구입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도구는 진열용으로 밖에 쓰이지 못합니다. 활도 용사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구부러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표적에 날아가 박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도구를 만드시려고, 물 없는 구덩이에 넣어서 자꾸만 틀을 깨시는 것입니다. 다음절에서 하나님은 유다나,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는 목적이 철저히 영적인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14절)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그들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즉 그들의 정치적 독립이나, 번영을 위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되도록 자신들이 유다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올바로 사용되려면,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목적은 한국을 번영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죄인들을 회개시켜 새사람 되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9:20-22절)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무슨 뜻입니까?‘나는 한 영혼이라도 얻기 위해 내 틀을 철저하게 깨 버렸고 내 방식을 전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틀을 깨드렸기 때문에 그가 한번 복음의 화살을 쏘면, 헬라 자식들의 가슴에 곧바로 날아가 꽂혔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 취급을 했습니다. 그것으로는 한 영혼도 건지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식(無識)한 사람들 앞에서 유식(有識)한 척해 봐야 한 사람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에 걸림돌만 제공할 뿐입니다. 즉 영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영어 자꾸 해 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기분만 더 나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이 주님께 사용되기에는 더욱 유리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경고(警告)하는 일에 자기 백성들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화살을 번개같이 쏘신 다거나, 나팔을 불게 하신다거나,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행하신다는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알리신다는 뜻입니다. 복음(福音)에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위로의 말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정죄(定罪)의 말씀도 들어 있습니다. 즉 죄인들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양심을 쏘며, 자는 자들을 심판의 나팔 소리로 깨우고, 악(惡)한 자들의 계획을 회오리바람으로 날려 버리는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 백성들에게 먼저 고난(苦難)을 주어서 준비시키십니다. 사실 우리는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세상을 위해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들조차 불신자들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물 없는 구덩이에서 고난(苦難)받은 사람은 강력한 화살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에 정확하게 날아가 꽂힙니다. 다음절은 아주 과격한 표현이 나옵니다.
15절)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재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하나님이 훈련시킨 백성들을 호위하신다는 말씀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원수를 삼키고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의 피를 마시고 즐거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이교도(異敎徒)적 의식을 행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일을 할 때, 그만큼 철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물맷돌을 밟는다는 데는 적(敵)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적(敵)들이 처음부터 물맷돌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창도 던지고, 활도 쏘겠지만, 그런 무기(武器)가 다 떨어지면, 결국 돌을 들고 저항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돌 까지 밟는다는 것은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굴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이교도(異敎徒)들 사이에는 적(敵)을 완전히 섬멸했을 때, 피를 마시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피를 마셨다’는 것은 상황이 완전히 끝났다. 완전히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철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연단 받은 성도들은 대충 싸우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끝장을 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즉 입으로만 항복을 받거나, 대충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이것을‘뱀의 머리를 깨는 것’으로, 여호수아서에서는‘가나안 왕들의 목을 밟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대항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으로 세상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을까? 결국 예수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는 것 외는 완전히 굴복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는 완전히 굴복시킬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복음(福音)의 문턱을 한껏 낮추어서 아무나 누구든지 믿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위태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이 다시 머리를 쳐들고, 뒤에서 발꿈치를 물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굴복이라고 해서 억지로 예수 믿게 하라거나, 강제로 세례 받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성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복음(福音)을 제시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을 오늘 성경은 물맷돌을 밟는 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5절)...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어떻게 하면, 동이에 피가 가득해지고 제단 모퉁이에 피가 묻을까? 제사를 많이 드려야 합니다. 한두 번 제사를 드려서는 그렇게 피가 흥건해지지 않습니다. 수백 번, 수천 번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아져서 신령과 진정으로 수없이 예배를 드릴 때, 이러한 축복(祝福)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Ⅳ.신약 교회의 풍성한 삶 예수를 믿는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의(義)를 모두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즉 옛날의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죽여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시고,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다음절은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삶을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6-17절)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양(羊)떼같이 보호하십니다. 양(羊) 떼의 특징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목자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도 주님이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즉 양(羊)은 풀이 어디 있는지, 시내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가 인도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제멋대로 가면, 절벽으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목자는 양이 알아듣지 못해도 몇 번씩 다시 말해 줍니다. 제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되돌아와서 직접 데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지금 순종하고 있는데도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닙니다. 목자(牧者)가 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풀이 보이고, 물이 보이는 곳으로만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시밭이나, 돌 짝밭이 오히려 지름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방황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정확히 직선 코스로 걸어 왔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왕관에 박힌 보석(寶石)처럼 빛나게 하십니다. 왕관에 박힌 보석의 특징이 무엇일까? 아주 아름답고,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왕관에는 흔한 돌을 박아 놓지 않고, 아름답고 구하기 어려운 보석을 박아 놓습니다. 그 보석은 어두운 방도 환하게 밝힐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납니다. 연단을 받은 성도는 이처럼 어두운 곳을 밝히며,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러므로 연단이 올 때, 자꾸만 피하려고 하지 말고, 기꺼이 받을 생각을 하십시오. 그래야 보석으로 갈고 닦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평범한 삶은 이미 끝나 버렸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전혀 평범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변질됩니다. 그러나 연단을 받은 사람은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을 이겨낸 사람은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그러한 보석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기를 원했고, 흔한 공깃돌처럼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망(亡)한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청년과 처녀처럼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도 병든 청년이나, 처녀가 아니라, 곡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셔서 힘이 넘치는 젊은이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늙은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의욕(意欲)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있고, 꿈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새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일까?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풍성하고, 형통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여기에서 형통(亨通)하다는 것은 그의 하는 일이 선(善)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남에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선(善)하고 아름다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새 기운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께서 늘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풍성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福)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령이 언제나 그의 마음에 계시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청년의 힘과 처녀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늘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신선합니다. 그들은 늘 드리는 예배도 매번 새롭게 드리고, 늘 하는 일도 매번 새롭게 하며, 늘 보는 것도 매번 새롭게 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오랜 침체의 시기를 겪었다 해도 성령만 임하시면, 그동안의 모든 답답함을 이기고도 남을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장사하듯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당일 사서 당일 팔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농부보다 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 있습니까? 언약의 피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심시오. 하나님이 이 시대의 활과 화살로 쓰시려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날아가야 합니다. 죄의 어원(語原)은‘화살이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표적에 꽂이는 화살이 되기 위해 연단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연단 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祝福)은 무엇입니까? 곡식을 먹은 청년처럼, 포도주를 마신 처녀처럼, 신선하고 풍성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오늘 받는 연단을 인내와 믿음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강력한 활과 화살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지 말고, 알곡으로 강건한 청년과 새 포도주로 신선한 처녀의 축복(祝福)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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