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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李翰)은 전주(全州)에 토착해 온 집안 태생으로, 호는 견성(甄城)이다. 전주 이씨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 의하면 이한은 신라 태종무열왕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고, 통일신라문성왕(文聖王 : 재위: 839년 ~ 857년)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1]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역사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 이씨의 분파는 이안사(李安社) 선계에서 갈라진 파와 그 이후 갈라진 파를 합해 모두 123파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이 1174년(명종 4) 피살되자 동생 이린(李隣)이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이린의 손자 이안사(李安社)가 전주에서 지주(知州)의 비위에 거슬리자 처벌을 받을 것을 피해 가솔을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지주가 그곳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하자 1253년(고종 40) 경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로 옮겼고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도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고, 이춘의 아들 이자춘(李子春)도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천호를 지냈다. 이자춘의 몽골이름은 울루스부카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에서 벼슬을 지내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전주 이씨는 시조 이한 이후로 전주에 살아온 토착 성씨(土姓)이다. 시조 이한의 선대에 대해서는 밝혀지고 있진 않으나, 대부분의 성씨와 본관들이 신라말이나 고려조에 들어와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이한에서부터 이(李)씨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
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연대 작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들어오시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 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중국전래설은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성씨 득성 과정을 보면, 인물을 신격화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어떻게든 황실과 연관지어 위상을 높이기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부여받기 힘든 것 같다. 즉 중국전래설을 주장하는 성씨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한림원" 학사, 또는 "황실" 성씨 등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 이씨(陜川 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李謁平)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 이씨(完山 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계보가 갑자기 발견된 점이나,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그리고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주장에 대한 신뢰성은 애매한 것이 많아 합당하지 않다.[1][3] 결국,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없고 믿을 수 없으며, 전주의 토성(土姓)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황현이 저술한 야사집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전주 이씨가 많아진 이유로,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를 원하는 자들을 대동보에 올려주어 전주 이씨를 의도적으로 늘렸다고 쓰여 있다. 병인년(1866년, 고종 3년) 이후 성씨가 없던 천민들 중에서 전주 이씨를 자처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이름을 올려주어 대동보에 오른 자가 잇달았다고 한다. 종친부에서 화수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참가한 자만 7만이라 했다. 전주 이씨의 인구를 늘린 흥선대원군이 "내가 나라를 위해 십만 정병을 얻었다."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을 겪으며 보고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기술한 비사(祕史)라는 점에서 기록의 특성상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 300년 동안 효종 이후의 왕들이 어릴 때 죽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거나 외동 아들만 남겼음에도 조선 후기 전주 이씨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민적법 시행 전후 성씨가 없던 천민들이 전주 이씨가 왕족이라는 이유로 족보를 위조하거나 성씨를 차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이고,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는데,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겼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시조의 발상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완산(完山)은 전주의 백제시대 지명으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전주 이씨의 이칭이다. 파별(派別) 또는 개인의 기호(嗜好)에 따라 '전주 이씨' 또는 '완산 이씨'를 선택하며, 두음법칙(頭音法則)을 따르지 않고 본음에 따라 '리씨'라 선택하기도 한다. 한 때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도 다른 이씨와 차별성을 두기 위하여 '리씨' 사용을 권장한 적도 있다. 북한에서는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리씨'라고 사용하고 있다.
전주 이씨에서 갈라진 대흥 이씨와 영해 이씨가 있다. 대흥 이씨(大興 李氏)의 시조는 전주 이씨 22세에서 분관한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이다. 대흥군은 고려 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대흥군은 태조 이성계와 재종간 임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조선 개국을 반대하였다. 영해 이씨 시조 이연동(李延東)은 완산 이씨(完山 李氏) 이립전(李立全)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