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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學 수용에 따른 朝鮮實學思想의 전개양상
1. 서 론
2. 西學과 朝鮮知識人의 관계: 李睟光에서 丁若鏞까지
3. 세계지도와 천문도의 영향: 脫中華主義와 萬邦均是로
4. 西器의 영향: 本末論的 産業論의 變化와 利用厚生論에로
5. 西敎의 영향: 脫朱子學的 形而上學論에로
6. 결 론: 西學과 訣別, 그리고 洙泗學에로
1. 서 론
필자는 이 글에 앞서 조선실학을 대표하는 정약용의 사상에 나타난 서학의 수용양상과 그 결별과정을 살펴본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정약용만이 아니라 별도로 조선실학자 전체 사상에 나타난 서학 수용 양상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정약용만이 아니라 대표적인 실학자라고 불리우는 조선실학자들 대부분이 그들의 실학사상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서학의 수용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조선실학자들의 서학 수용과 실학사상의 형성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실학사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에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들이 당시 조선에 유입되었던 서학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특징적 사유를 어떻게 형성하였는지, 그리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서학 자체’와는 달리 ‘유학의 한 유파로서의 실학’으로 남게 되는 사상적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다음의 구성으로 진행될 것이다. 먼저 2장에서는 西學과 朝鮮知識人의 관계를 간략하게나마 사상가의 전개순으로 살펴볼 것이다. 즉 李睟光에서 丁若鏞까지 전개되는 서학의 수용사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이것은 개별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서학의 수용사가 될 것이다. 3장부터 5장까지는 서학이 실학사상 형성에 끼친 영향을 주제별로, 곧 세계지도와 천문도의 영향, 西器의 영향, 西敎의 영향별로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호학파, 북학파, 정약용의 실학사상의 특징적 사유라고 규정되어왔던 쟁점들이 결코 이들의 서학 수용의 쟁점과 무관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장 결론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은 서학’이고 ‘실학은 유학’인 이유, 곧 조선 실학자들이 西學과 訣別하고 孔孟儒學, 곧 洙泗學의 재해석, 재전유로 헌신하게 되는 과정과 사상적 원인을 고찰하는 것으로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2. 서학과 조선지식인의 관계
예수회의 補儒主義的, 文明傳達者的 전략3)은 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실학자들에도 西學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이수광으로부터 시작된 서학에 대한 관심은 이익, 김석문,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김상범, 김육, 정약용, 최한기 등에 이르기까지 천문, 역법, 지리학, 생물학, 심리학, 기하학, 기기학, 의학, 철학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서 수용되었다. 또 예수회의 본래 의도대로 이러한 포교전략은 천주교 포교 차원에서도 일단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星湖左派, 곧 信西派들이 과학관련 서학서와 과학기기의 전래만 접하고서도 자발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天主實義를 강학한 다음 淸 駐在 선교사를 방문, 세례를 받고 조선교회를 설립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학’이 알려진 것은 淸과 비슷한 宣祖대이지만 본격적인 탐구, 분석에 들어 간 것은 주로 개혁군주인 英祖/正祖代이다. 조선의 학자들이 서학을 접한 방식은 주로 明/淸의 漢譯西學書를 통하거나 사신에 의한 간접견문 형식이었다.
조선에 서학을 최초로 전달한 사람은 주지하듯이 芝峯 李晬光(1563-1628)이다. 그는 세 차례나 연행을 했고, 1611년의 연행에서는 선조의 명으로 燕京에서의 공식적인 체류기간이 30-40일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고 140일을 체류하면서까지 西洋事情을 탐문하고 한역서학서를 구하였다.7) 아마도 그의 서학에 대한 인식은 이때 형성된 것 같다. 그후 귀국하여 그는 明에서 발간된 수십종의 중국서적과 傳聞 부분 및 元史와 唐史를 전고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芝峰類說의 「諸國」 ‘外國’ 부분을 저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후 조선의 서학 수용과정에서 보여주는 세 가지 인식 흐름을 모두 제시하였다. 첫째, 세계인문지리적인 차원의 지식을 제공하였다. 둘째, 서구의 천문학을 소개하면서 그 정확성을 인정하고 地球의 球體說을 수용하였다. 셋째, 그는 續耳談을 인용하여 마테오 리치와 천주교도 소개하였다. 이러한 이수광의 서구세계에 대한 소개와 서학서에 대한 소개는 100여년 후 이익이 이로부터 서학의 소개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漢譯된 西學書와 서구의 과학문명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鄭斗源이 인조8년(1630) 陳奏使로 燕京에 가던 중 登州에서 서양인 J. Rodriquez[陸若漢]을 만나 「天文圖」/「萬國輿圖」/職方外紀/治曆緣起 등 서학서와 마테오 리치의 天文書 및 紅夷砲, 千里鏡, 自鳴鐘 등 과학기물을 가지고 귀국하고, 昭顯世子가 아담 샬로부터 수학하고 천주실의 등을 가지고 귀국한 이후에는 서학에 관심을 지닌 조선 지식인들이 직접 한역 서학서를 접하면서 더욱 서학연구에 활기를 띨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실제 다시 조선에서 서학 열기가 일기까지는 100여 년에 이르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것은 조선의 政局에 기인하는 것 같다. 淸에게 ‘羈靡策’을 쓰던 光海君을 ‘背義’했다는 이유로 서인과 남인의 연합세력이 퇴위시킨 뒤 등장시킨 인조정권은 淸으로부터 丙子/丁卯胡亂까지 겪고나자 더욱 강력한 ‘尊明排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학과 천주교에 긍정적인 관심을 표하던 소현세자가 귀국 후 급서하고, 대신 봉림대군이 孝宗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효종의 즉위로 西人의 영수였던 宋時烈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후 顯宗과 肅宗 연간까지 이어지는 수차례의 논쟁과 유혈적인 정쟁과정을 통해 조선의 정계와 학계는 ‘朱子學’ 이외에는 언론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肅宗 말기부터 우호적인 朝淸 관계에 힘입어 英祖(재위: 1724-1776)대에 이르기까지 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서학서적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서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물론 여전히 지배적인 학풍은 ‘朱子學’이었지만 영조의 富國策과 더불어 문화/학술장려책에 힘입어 다양한 논의들이 가능해졌고, 특히 그것은 유형원 이래 고조되던 실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서학의 유입이 본래 유학에 고유한 實用과 實事의 實學의 성격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폭제가 되었다.
서학의 탐구와 수용 재개는 특히 영조의 등용요청도 사양한 채 학문활동에만 전념한 星湖 李瀷(1681~1763)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계 유형원의 經世致用 정신을 계승, 천문・지리・역사・제도・풍속・군사에 이르는 종합적이면서도 진일보한 학문체계를 이루어 성호학파의 종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가고전을 재해석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분명 이수광의 서학 소개뿐만 아니라 세계지도인 「坤輿圖說」, 인체해부학인 主制群徵, 심리학인 靈言蠡勺, 유크리트 기하학인 幾何原本 등을 접한 영향이 큰 것이었다.
正祖(재위:1776-1800)대에 이르러서 서학 연구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북학파는 물론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이 정조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활동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이익의 문하생으로 성호좌파라고 불리우는 이가환/권철신 등 이른바 信西派, 곧 성호좌파라 불리우는 초기 지식인 천주교도들도 배출되었던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대부터 天文學에 관심을 쏟아오던 湛軒 洪大容(1731~1783)은 마테오 리치가 口授하고 李之藻가 쓴 渾盖通憲과 律曆淵源 등의 서학 천문서를 통해 자신의 천문지식을 독자적인 수준까지 높여, 35(1765)세 때 서장관으로 연행하는 숙부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淸의 欽天監正 독일인 Hallerstein[劉松齡]과 Gogeisl[鮑友管] 등과 고차원의 천문학 관련 토론을 벌였는데, 이때 그의 천문학 수준이 서학의 수준 및 서양 선교사들의 수준을 능가하여 淸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북학파의 서학 수용경향은 燕岩 박지원을 거쳐 그의 제자인 庶孼 출신 楚亭 朴齊家(1750~1815)에게 이르러 중상주의론으로 전개되었다. 박제가 역시 4차례의 연행을 통하여 淸의 석학인 紀昀・潘庭筠・李調元・李鼎元 등과 교유하고, 淸의 문물을 견문한 결과로 北學議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상공업 활성화, 국제무역, 효율적 기술개발론 등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茶山 丁若鏞(1762-1836)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지적 유산을 집대성하였다.14) 그리고 이 과정은 곧 조선서학의 집대성과정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주로 서구의 산업과 과학문물 중심의 서학의 영향을 수용한 데 반해 정약용에 이르면 이러한 천문학과 이용후생론은 물론 기존 조선주자학의 지배담론이던 理氣性情論的 형이상학까지 벗어나 새로운 형이상학론을 구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군주이던 正祖가 1800년 急逝하고 純祖가 즉위하면서부터 조선의 정국분위기도 급변하였다. 이미 윤지충의 廢祭焚主 사건(1792)으로 서교로서의 서학이 지식인들로부터 외면 당하기 시작하던 터에 申酉事獄과 黃嗣永帛書 事件(1801)이 터지면서 정부는 천주교 탄압조치는 물론 西器로서의 西學마저도 봉쇄하였다. 이후 조선에서의 서구 문화와 학문에 대한 접근은 개항시기까지 70여년 넘게 공식적으로 봉쇄되었다.
여기서 조선의 ‘서학’ 수용은 일단 막을 내려야 했고, 동시에 조선실학파도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30년 후 조선의 개화파들은, 통설과는 달리, 선학들의 업적을 누리지 못한 채 다시 ‘근대 서학’, 곧 ‘泰西新學’을 밑바닥부터 수용해야 했다.
3. 세계지도와 천문도: 脫中華主義와 萬邦均是에로
서학의 영향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그리고 최초의 영향은 세계지도와 천문도의 전래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중원문화권에 살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국 이외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세계관에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왕조가 어떻게 바뀌든 夏王朝의 후예들을 세계의 중앙이자 최고문명이라고 생각하여 공식적인 왕조명과는 상관 없이 항상 ‘中國’, ‘中原’, ‘중화’라고 하고 이를 기준으로 주변민족들을 南蠻(남쪽 오랑캐), 北狄(북쪽 오랑캐), 西戎(서쪽 오랑캐), 東夷(동쪽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을 당연시하였던 것이 中華主義的 사고이다. 이 중화주의적 사유는 조선왕조에서 주자학만큼이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국제관념이었다.
그런데 실학자들은 서학이 전래시킨 세계지도를 보고 중원문화권이 ‘중앙’이 아니라 ‘일국’의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서구에서 항로여행을 통해 ‘지리상의 발견’을 하였다면 조선의 서학자들은 세계지도를 통해 중화권 이외의 세계도 존재한다는 ‘지리상의 발견’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지구가 둥글다는 천문지식 역시 ‘중국’이 결코 중앙이 아니며 ‘조선’도 중앙일 수 있다는 인식을 도출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발딛고 사는 지구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 지구는 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의 지각 역시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환경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선두에 기호 남인 이익이 자리하였다. 그는 아담 샬(Adam Schall)의 西洋新法曆書을 접한 뒤 그 정밀성을 높이 평가하고 조선의 지식인들이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
道具와 數理의 법도는 뒤에 나온 것이 더 巧妙하다. 비록 聖人의 지혜라고 할지라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들은 후일 더욱 연마하여 시간이 지난 것일수록 더욱 정교해진다. 지금 행하는 時憲曆은 서양인 湯若望(Adam Schall)이 만든 것인데 曆道가 지극하여 日蝕과 月蝕에 착오가 없다. 따라서 聖人이 다시 나와도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다.
이익의 이러한 서구 천문학에 대한 태도는 “災異는 하늘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 사람에 속한 것이 있으니 이를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日/月/五星이 모두 일정한 궤도가 있는데, 그것이 얇아지거나 부식되거나 능멸하고 침범 당하는 현상이 어찌 한 나라의 사소한 문제나 하찮은 일로 인해 옮겨지거나 바뀌겠는가?”라고 하여 종전의 天人合一的 사고에서 벗어나 天人之分的 사고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홍대용 역시 ‘일식과 월식 현상은 달・지구・해의 항구적인 운행법칙의 결과이지 지구상의 인간이 행하는 治亂과는 무관하다’고 하여 이익의 천인지분적 사고에 동의하면서 ‘陰陽論에 얽매이고 義理에 빠져 자연과학적인 天道를 살피지 않은 것은 先儒들의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특히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홍대용은 아담 샬의 西洋新法曆書은 물론 쾌글러의 曆象考成後編을 閱讀하여 天圓地方說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地球說’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홍대용의 경우 특기할 점은 그의 천문학 수준이 처음에는 서학에 자극을 받았으나 종국토록 서학이 중세적인 수준에서 머물러, 自轉說에 못미치고 있었는데 반해, 홍대용은 “지구는 빙빙 돌아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 지구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간인데 9만 리의 넓은 둘레를 12시간에 도니, 그 운행의 속도가 천둥과 포탄보다도 빠르다”라고 하여 一日一週의 地球自轉說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서학서의 주장은 기껏해야 九重天 혹은 12重天 등 有限宇宙說을 담고 있는데 반해 그는 無限宇宙說을 주장함으로써 地球中心說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였다.
하늘에 가득찬 별치고 세계를 이루지 않는 것은 없다. 星界에서 보자면 地界도 또한 하나의 별이다. 한량 없는 세계가 空界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이 地界만 중심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리학/천문학적 지식의 서학이 조선의 실학자들로 하여금 종전의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나아가 조선 주체성 및 주체적 역사관을 보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익에게서, ‘中國이라는 것은 지구라는 큰 땅덩어리 중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 크게는 九州가 하나의 나라이지만, 작게는 楚도 一國이고, 齊도 一國이다. 그러므로 萬國은 국토의 大小와 상관없이 一國으로서의 평등성을 지닌다’는 인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은 둥근 지구의 표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가장 높은 위치”라는 地球說을 근거로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화이론을 탈피하여 자국 중심의 주체성을 최초로 확립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선의 자주성/자주적 역사관의 자각에로 귀결되었다.
지금 사람들은 조선에서 나서 조선의 일은 전혀 모른다. 심지어는 동국통감이 있지만 ‘누가 읽는가’라고 말하니 그 그릇됨이 이와 같다. 東國은 스스로 동국이니 그 역사의 規制와 體勢[體制・形勢]도 본래 중국가 다름이 있는 것이다. 그 事大하고 交隣하는 일에 미쳐 옛것을 증험하여 오늘날에 준용하고자 할 때 진실로 상고하지 않을 수 없다.
홍대용 역시 그의 무한우주론에 입각한 지구중심설의 극복을 토대로 중국중심주의적 중화주의를 극복하고 주체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만국의 자국중심주의를 力說하였다. 특히 그는 朝鮮을 ‘東夷’ 혹은 ‘夷狄’이라 지칭하는 것은 단지 방향을 지적하는 용어에 불과하며, 그것이 가치폄하될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 위에 그는 中華主義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春秋를 재해석하여, 孔子가 周 중심으로 정치사를 진단한 것은 孔子가 周人이었기에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그 논리에 따른다면 孔子가 九夷에 살았다면 九夷를 중심으로 하는 域外春秋를 저술했을 것이라고 하는 ‘域外春秋論’을 주장하였다. 상대적 자국중심주의를 강조하는 그의 ‘역외춘추론’적 인식은 다음과 같은 국경론 인식에서 더욱 극명하게 표현된다.
鄂羅[러시아]人은 鄂羅를 正界로 삼고 眞臘[캄보디아]을 橫界로 삼는다. 眞臘人은 眞臘을 正界로 삼고 鄂羅를 橫界를 삼는다. 또 중국이 서양에 대해 경도차가 180도에 이르는데 중국인은 중국을 正界로 삼고, 서양으로 倒界를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正界로 삼고 중국으로 倒界를 삼는다. 실로 이것은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이라면 지역에 따라 모두 그러하다. 결국 橫界나 倒界라고 할 것 없이 사실은 모두 正界이다.
그 결과 그는 “각각 自國人을 친히 하고 自國王을 높이며, 自國을 지키고, 自國風俗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나 마찬가지다”라고 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藩邦意識을 극복하고 자주의식을 지니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선학의 인식들에 힘입어 정약용은 보다 중국중심적 천하관, 곧 기존의 중화관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른바 중국이라는 것이 왜 ‘가운데[中]'이 되는지 모르겠고, 이른바 동국이라는 것이 왜 ’동(東)‘이 되는지 모르겠다...... 대저 이미 동서남북의 중심이면 어느 곳이나 中國 아닌 곳이 없으니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어디 있는가?
정약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중화주의적 태도는 중국인만이 아니라 무조건 중국 것만 흠모하는 조선 지식인들 스스로 만들어 태도이기도 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수십년 이래로 일종의 괴이한 논의가 횡행하여 조선의 학문을 한창 배척하고 있다. 무릇 선배들의 문집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 이는 큰 병통이다. 사대부의 자제가 國朝의 故事를 모르고 선배의 논의를 보지 않는다면 비록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조악한 것이다.
국학을 무시하고 중국학문만을 존숭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은 이른바 다음의 ‘朝鮮詩宣言’으로도 이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으레 중국의 역사를 인용하는데 또한 비루한 행위이다. 모름지기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동국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 등 우리나라의 저술에서 역사적 사실을 채택하고 그 지방의 현실을 참고하여 詩에 인용해야 한다.
200여 년 전 정약용의 이러한 조선학문, 조선시 주창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의 학문세계, 특히 사회과학계는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90년대 한국지식인들에게 푸코와 에코가 구분되지 않으면 사이코라고 하는데 孔/孟의 사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해서 맹꽁이 대접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어느 정치학자의 혼자서의 반추에서 보듯이, 평등과 주체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근/현대에도 한국의 지식인들을 서양 것을 흠모하기에 바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탈중화주의적 사고의 츨현은 ‘서학’의 천문도, 세계지리도의 목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리고 천문지식이나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가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나는 엄청난 충격을 제공하였다. 탈중화주의 자체가 유교권에서는 제일차적인 ‘근대지향적’ 가치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서학은, 그들의 본래 의도나 목적과는 달리, 조선 지식인들에게 ‘근대지향적’ 가치를 유도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탈중화 관념은 이후 ‘泰西新書’를 접한 崔漢綺에 이르면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이제 중화라는 것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조선의 발전과 세계의 평화적 공존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4. 西器의 영향: 本末論的 農工商論의 변화와 利用厚生論
‘세계’의 확대, ‘상이한 문명’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인 조선의 산업관에도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서구의 과학문명과 관련된 기자재들에 대한 견문은 세계지도나 천문도의 기여만큼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것은 천주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東漸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던 가장 최근의 서구 ‘근대과학’ 기기문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즉 이것은 서학 관련 이론서가 ‘중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 달리 그들이 타고 온 배, 망원경, 자명종 등등은 지리상의 발견이 가능케 했던 것들로서, 이것들이야말로 근대적인 것이었으며, 그것도 이들이 동방으로 파견될 때 가장 첨단의 것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적에 의존하여 서학을 접근한 초기의 성호학파가 주로 전통적인 중농주의적 견해를 펼친 반면37) 燕行을 통해서 ‘서구 근대’의 산물을 직접 견문한 북학파들은 상업과 유통의 활성화를 통한 利用厚生的 시장경제 원리에 접근할 수 있었던 차이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용후생론의 논의는 북학파와 그 이후세대를 중심으로 가능했다. 특히 그것은 박제가에게서 국내외 유통망의 구축론에 입각한 상공업 촉진론으로 구체적인 인식이 체계화된다. 물론 그의 논의는 박지원의 이용후생론/운송론/통상론에서 모두 제시한 것을 더 구체화한 것이었다. 스승의 논지를 이어 받아 박제가는 황폐한 조선의 기술론을 五行의 무용으로 설명한다.
지금 천 리나 되는 긴 강이 있으나 갑문을 이용하여 곡식을 빻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이것은 水의 이로움을 버린 것이다. 석탄을 이용할 강철도가니를 만들지 못하여 영해 지방의 구리를 녹이지 못하니, 金이 金 이 아니고 火가 제 구실을 못한다. 통행하는 데 수레가 없고 집 짓는 데 벽돌이 없으니, 木工이 쇠퇴하고 土德이 일그러졌다.
그가 말하는 이용후생의 기준은 기술의 정밀성과 효율성이다. 즉 그에 의하면 기구의 불편으로 오랜 작업시간이 걸리면 天時를 잃는 것이고, 무계획적으로 농사를 지어 수행하여 수확이 적다면 地利를 잃은 것이며, 상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遊食者가 많으면 人事를 잃은 것이다. 때문에 그는 기술의 정밀성을 위해 조선도 淸처럼 西士들을 招聘하여 서양의 선진기술을 직접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조선은 이 모든 것을 잃은 상태이므로 가장 시급한 것은 수레, 배 등 운송수단의 혁신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수레 백 대에 싣는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만 못하고, 육로로 천 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만 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하다.” 그가 이렇게 상업을 강조한 이유는 수레와 배를 이용한 상품의 유통은 물가의 안정을 가져오며, 아울러 전국적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생산물의 공급이 확대되어 농업과 수공업이 모두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본 데 따른 것이다.
나아가 그는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낭비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더 나아가 “재물을 비유하면 우물과 같아 퍼내면 차고 내버려두면 말라 버린다”라고 하여 소비가 생산을 촉진시킨다는 소비적 시장경제 논리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국내통상뿐만이 아니라 해외통상에 대해서도 국가적 빈곤을 극복하는 지름길로 파악하면서 중국만이 아니라 여타 외국과 점진적인 무역도 강조하였다. 또 이를 위해서는 商人을 四民 가운데 30%까지 확대해야 하며, 그 방법의 하나로 遊食兩班層의 商人化도 주장하는 등 주요 산업형태의 변화 필요성도 전개하였다.
성호 이익을 私淑한 동시에 북학파와 함께 개혁군주인 정조의 정치에 적극 가담하였던 정약용은 성호학파이면서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북학파와 같은 이용후생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의 가장 급무를 北學을 배우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가까운 知人들이 淸에 가게 되면 그들에게 꼭 ‘實用之學’과 ‘厚生之方’을 배워 오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아니 그의 단계에 오면 실용지학으로서의 서학은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직접 이를 실험하고 제작하고 제도화하는 등 몸소 ‘실천’하는 데로 나아갔다.
정약용은 技藝論에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五倫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技術을 소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다고 보면서, 政治의 근본을 國富와 民裕의 실현에 놓고 이를 위하여 産業技術의 개선과 발전을 강조하였다.
농업기술이 정밀하면 그 점유지가 적어도 곡식을 많이 소득하고, 그 노동력이 적어도 穀米는 實하다. ...모두 그 利를 도와 그 勞를 줄이게 된다. 방직 기술이 정밀하면 물자를 조금 쓰고도 실을 많이 소득하며 노동의 속도가 빠르고 옷감은 곱고 아름답다.......그 利를 도와 勞를 줄인다.... 百工의 기술이 정밀하면 모든 製造, 宮室, 器用으로부터 城郭, 船舶, 수레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견고하고 편리하게 된다. 진실로 그 방법을 모두 터득하여 力行하면 國은 富할 수 있으며, 兵은 强할 수 있으며, 民은 여유있게 되어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산업발전과 개선의 요체는 기술자들을 후대하여 이들로 하여금 農器, 織器, 舟車制作, 引重法, 起重法 등을 연구 개량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사신을 淸에 파견하여 농기 등은 물론 銃砲 등의 軍器와 天文 曆法에 쓰일 儀器, 測器 등의 모든 實用之器를 수입하고 利用監으로 하여금 관리, 교육토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 자신 직접 起重機나 滑車輪制를 이용하여 수원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정약용 역시 공업만이 아니라 商業에 대해서도 기존의 本末論的 상업관을 수정하여 商業稅源의 확대를 강조하는 동시에 특권・매점상업의 금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대신 백성이 利를 추구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고 害를 피하는 것은 불이 물을 피하는 것과 같으므로, 정부가 인간의 이기적 성향에 방임하면 “위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民의 宅里가 均等해지며, 위에서 명하지 않아도 민의 田地가 균등해지며, 위에서 명하지 않아도 민의 貧富가 균등”해질 것이라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시장경제론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정약용은 기술문명적 차원에서의 경험적 축적에 의한 발전론적 진보사관을 견지함으로써 역사에 있어서 물질적 진보를 중시하였다.
사람이 知慮를 미루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고, 巧思를 천착하는 데도 점진적인 단계가 있다. 비록 聖人이라고 하더라도 千萬人이 함께 의논한 것을 당할 수 없으며, 비록 聖人이라고 하더라도 日朝에 그 아름다움을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技藝는 더욱 정밀해지고, 후세로 오면 올수록 기예는 더욱 기술적이 된다. 이것은 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村里의 기술자는 縣邑의 工作 있는 자만 못하고, 縣邑의 기술자는 名城大都의 技巧있는 자만 못하며, 이름있는 名城大都의 기술자는 京城의 新式妙制를 지닌 자만 못하다.
그에 의하면 기술은 경험의 축적에 의해 발전하는 것으로서 후세의 것일수록 더 기술적으로 되므로 항상 최근의 새로운 기술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西器의 目睹는 조선실학자들에게 종전의 본말론적 농업 중심적 산업관에 변화를 결과, 이용후생론적 상공업 중심으로의 전환을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후 최한기에 이르면 이용후생론적 상공업론과 기술개발론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시장체제적인 산업의 개발과 이를 통한 개국통상을 주장하는 데로 연결되었다.
5. 西敎의 영향: 탈주자학적 형이상학론
西器로서의 西學의 성격은 실용/실사의 문제를 고민하던 조선실학자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특히 그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李瀷에게서는 세계지도 등에 의한 지리학적 인식의 영향이, 洪大容에게서는 천문학적 영향이, 朴齊家에게서는 상공업론적 영향이 크게 수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곧 성호학파나 북학파는 이러한 서학의 논리를 각각 經世致用과 利用厚生이라는 고대 유가논리로 재해석하여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에게서 이것은 더욱 발전된 형태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 이전의 실학자들에게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사유까지 서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은 이기론이나 성정론적 사유구조는 어떤 형태로든 주자학적 논리를 답습하고 있었다.
서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보유론적 차원, 곧 형이상학적 차원까지 수용하여 마침내 독자적인 유가적 세계관, 인성관을 구축한 사상가는 정약용이었다. 즉 정약용은 이상에서 말한 西器로서의 서학뿐만 아니라 西敎로서의 서학도 그 철학적인 측면에서 상당부분 수용함으로써 주자학적 철학세계를 해체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순히 서학을 수용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서학의 수준이나 의도를 넘어서서 그것을 공맹유학의 철학논리를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데 활용하였다.
주자학적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太極과 陰陽五行論으로 구성되며 그 핵심에 理氣論이 자리한다. 그런데 정약용은 太極 내지는 理의 궁극성을 추구하는 주자학이 無形之天의 입장에서 전개한 太極, 陰陽五行, 理氣 중심의 우주발생론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였다. 대신 그는 有形之天의 시각에서 人格的 上宰 개념을 도출하였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는 天主實義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다만 그는 마지막까지 리치가 유가 경전에 나오는 ‘上帝’가 천주교의 ‘天主’와 명칭만 다를 뿐이라고 전제하는 데 대해서56) 동의하지 않은 것은 차이점이다.
리치는 주자학에서 만물의 존재 준칙으로 기능하는 ‘理=太極’론에 대해 ‘無形의 理’나 ‘太極’ 만물의 존재근거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정약용 역시 心/性/天을 모두 理로 귀결시키는 程子의 환원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無形의, 無意志의 理(太極/天)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의 “저 理란 무엇인가? (그곳에는)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노여움도 없다. 한없이 비어 있고, 아득하며, 이름도 없고, 몸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이 이것으로부터 性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역시 그것을 道라고 하기 어렵다.”라는 진술과도 연결된다. 한편 理氣의 氣에 대해서도 정약용은 리치가 성리학의 五行說을 부정하고 대신 四行說로 설명한 것과 유사하게 ‘해가 숨은 것을 陰이라 하고 해가 비치는 陽이라고 할 뿐 陰陽은 본래 體質이 없고 오직 明暗만 있을 뿐이니 본래 만물의 부모로 삼을 수 없으며, 五行 역시 萬物 중의 5物에 지나지 않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오행을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억지로서’ “一陰과 一陽의 배후에는 분명히 모든 것을 다스리는 天이 있다. 그런데 지금 一陰一陽을 道體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틀렸다”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天卽理’를 전제로 한 ‘무형의 天/理’, 곧 理致論的 理氣 개념에 대해 비판한 정약용은 그 대안으로 ‘有形의 天’, 곧 人格的인 天, 主宰者로서의 天, 意志的인 天 개념을 도출하였는 데 이 역시 리치적 발상에서 도움받고 있다. 즉 ““日月星辰은 서쪽으로부터 거꾸로 좇아가며 일정한 도수대로 각각의 법칙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각기 제자리에서 안정되며 일찍이 실오라기만큼의 착오도 없었다. 만약 그것들을 斡旋하고 主宰하는 尊主가 없다면 어그러짐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리치의 견해를 수용하여 정약용 역시 “日月星辰이 돌고, 四時가 어김이 없고, 風雷가 일고 雨露가 내려 온갖 만물이 번성한다. 바로 이것이 말없이 스스로 主宰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理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理는 본래 앎이 없으므로 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나아가 전지전능한 주재자로서의 天의 존재에 대한 증명방식은 한층 더 리치적이다. “天主는......그 신령함이 귀신이나 신령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천주는) 인간이 아니지만 성인의 지혜를 훨씬 초월해 있다. (천주는) 도와 덕이라 말할 수 없고 道와 德의 根源이다. ......천주의 능력은 망가짐도 쇠함도 없으며, 無를 有로 만들 수 있다. 천주의 지능은 몽매함도 없고 오류도 없어서 만세 이전의 과거나 만세 이후의 미래의 일이라고 그의 앎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마치 바로 눈앞에 보고 있는 것과 같다.”는 리치의 주장과 “天의 靈明함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뚫어 보므로 아무리 숨은 것이라도 살피지 않음이 없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밝히지 않음이 없다. 이 방안을 굽어보고 날마다 지켜보면서 이 자리에 있다. 사람이 참으로 이것을 안다면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도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약용의 진술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 이기론에 기초한 주자학의 인간론은 性情論으로 표현된다. 조선주자학을 理氣性情論이라고 할만큼 성정론은 통치자의 修己를 강조하였던 조선주자학자들의 주요 담론주제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無形한 것을 理라고 하고 質料가 있는 것을 氣라 하고, 天命之性을 理라 하고 七情이 발한 것을 氣”라고 하는 주자학적 인간론을 부정하고 자신의 인간론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역시 일정 정도 天主實義의 영향을 받고 있다.
첫째, 마테오 리치는 魂이나 心性이 인간에게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心을 獸心과 人心으로 구별하였고, 性도 形性과 神性으로 나누면서 영혼도 魂三品說로 구분하여 보았다. 그런데 정약용도 人/物의 공통성을 부정하면서도 지각/운동이나 食色의 氣質之性은 오히려 인간과 금수가 상통한다고 보았으며 人/物의 본성을 三品으로 나누어 性三品說을 주장한 점이 유사하다고 하겠다. 둘째, 인간의 본성을 耳目口體의 기호인 形軀嗜好와 도덕적 지향의 靈知嗜好로 구분되는 嗜好의 문제로서 “善惡은 의지[力行]의 문제이지 기질(氣質)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정약용의 意志的 善惡觀도 “나는 (인간의) 본성이란 악도 선도 모두 행할 수 있다고 본다.......그 善한 것은 우리가 意志[司愛]로써 사랑하고 욕구하며, 그 惡한 것은 의지[司愛]로써 미워하고 원망한다”라고 하는 천주실의의 司愛司欲說과 유사하다. 셋째, 이와 같이 인간의 선악을 의지의 문제로 보는 양자의 인식은 仁義禮智를 본성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는 면에서도 유사하다. 정약용은 仁義禮智는 행위에 의해서 성취되는 덕목이지 행위 이전에 내재하는 본성이 아니며 行使, 즉 實行 이후에 성립되는 명칭으로 보았다. 리치 역시 “무릇 良善은 천주께서 원래 창생한 본성 생명의 덕성이니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功이란 다만 (우리 인간이) 스스로 배운 習善에 있을 뿐이다......義를 보면 實踐하는 것이 德行일 뿐”이라고 하여 선한 행위의 실현인 德[인의예지]은 習善 혹은 실천으로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며, 功도 인간이 실천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6. 결 론: 서학과의 訣別, 그리고 洙泗學에로
지금까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서학 수용 내용을 검토하였다. 그것은 탈중화주의, 곧 균등한 국제질서적 관념의 정립, 중농주의로부터 중상(공)주의로의 전환, 이기성정론적 형이상학론으로부터 일종의 물활론적 세계관과 의지적 인간관으로의 전향이라는 순서를 밟았고, 또 이 과정에서 서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탈주자학과정에서 실학자들이 서학을 크게 수용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서학 수용 노력은 여기서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주자학과 분리된 이후에는 더 이상 서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양자의 길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새로운 공맹유학의 세계, 그리고 그 원리를 재구성하는 데 헌신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약용은 “西學을 通해서 洙泗學으로 들어”(유종선, 1997, 21, 주29)간 다음에는 서학과 결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기존연구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찾았다. 즉 조선정부의 천주교도 박해 혹은 예수회 노선을 기각시킨 교황청의 바뀐 포교노선으로 그 원인을 돌려왔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학과 서학의 사상적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조선 실학자들이 서학과 결별하고 공맹유학에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던 주 요인은 무엇보다도 서학전래의 본질적 목적과 실학의 목적상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서학의 본질은 ‘동방사회에서의 중세적 교회질서 구축’이라는 목적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물론 주지하다시피 로마 교황청에서 후발로 淸에 파견한 도미니코회(Dominicus)와 프란치스코회(Franciscus) 소속 선교사들의 교조주의적 포교방식에서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서학의 주체인 예수회 활동의 본질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회의 正體性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정체성, 곧 서학과 조선실학, 곧 유학의 정체성은 각각 神의 질서 수립이냐 人間질서 수립이냐의 문제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었다. 양자의 사상적/이념적 충돌의 핵심이 조선에서 노출된 것은 바로 尹持忠 廢祭焚主事件(1791)’과 ‘黃嗣永帛書事件(1801)’이었다. 尹持忠 廢祭焚主事件이란 1791년 전라도 珍山에서 천주교도인 윤지충과 외종형인 權尙然이 곧 모친상을 당하고서 祭祀를 지내지 않고 神主도 불태워버린 사건을 말한다. 黃嗣永帛書事件(1801)은 동년에 발생한 신유사옥으로 숨어서 포교활동을 하던 黃嗣永(1775-1801)이 포교를 위하여 북경주재 서양주교에게 종교적 원조는 물론 군사 파병까지 요청했던 사건을 말한다.
유학자의 입장에서 두 사건은 인륜질서를 최대목표로 삼는 유가사회에 ‘無父[不孝]’와 ‘無君[不忠]’이라는 不倫의 표상이었다. 유교는 ‘人倫의 실현’을 가장 중요한 이념적 목표로 삼는다. ‘인륜’이란 ‘사람 사이의 질서’이다. ‘질서’, 곧 ‘차례’라고 하는 것은 ‘몫’, 곧 ‘역할’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관계 속의 존재이며, 관계 속에서는 또한 필연적으로 자신이 담당해야 할 권리와 의무라는 ‘몫’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인간 관계는 公과 私, 그 양자 중의 어느 한 경우이다. 公과 私의 관계는 ‘君-臣(民)’ ‘父-子’ 관계로 대표될 수 있다. 君臣關係에서 각자의 몫은 각각 상대에게 그리고 상대로부터 ‘信’과 ‘忠’을 ‘주고받는 것’이며, 父子關係에서는 ‘慈’와 ‘孝’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것이 잘 수행된 상태가 ‘正名’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곧 인륜적 공동체가 실현된 상태이다. 결국 忠(信)孝(慈)는 ‘君君臣臣父父子子’로 표현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질서나 국가질서를 수립하는데 대표적인 유가의 으뜸 덕목이다. 즉 忠孝(信慈)가 실천되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집안이 집안답지 못한 상태에 빠진다. 곧 無國, 無家인 상태에 빠진다. 이것을 유가는 ‘無父無君’이라고 한다. 이 상태는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방기한 ‘無人倫’ 곧 ‘無秩序’ 상태로서 유교에서 가장 혐오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윤지충 사건과 황사영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이 유학이 가장 우려하는 무인륜 상태를 초래하는 극단적인 예였던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모든 질서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신의 질서를 위해서 반가족, 반국가적 행위도 불사하는 서학의 논리 앞에 유학자들은 더 이상 서학을 옹호할 수 없었다. 양자는 철저하게 대립된 사상체계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서학은 신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유학은 인륜질서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로마 교황의 해석,’ 곧 ‘교회의 해석’이 곧 ‘신의 목소리’였던 천주교는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는 것인 人德이라는 유가의 교리에 대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선에서만 허용하였던 것이다. 유가는 인간이 현세에서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교육하지만, 천주교는 내세의 더 나은 세상에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인간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교육한다. 천주교의 눈에 유교의 이러한 목표는 피상적이며 천박한 것이었고, 유학자에게는 그러한 천주교의 목표가 비도덕적이며 불합리한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모든 儒者들이 그러하듯이 정약용 역시 신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질서, 곧 인륜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다. 본인이 유자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은 당연한 정체성이었다. 이 점에서 모든 유자는 현실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이고, 실학자이다.
결국 ‘서양 중세적 교회질서’를 동방에 실현하기 위한 포교수단이라는 점이 서학의 정체성이고, 바로 이러한 정체성 때문에 서학은 궁극적으로 조선(은 물론 淸의에서도 마찬가지) 유학과 일대 충돌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중세’와 ‘동양 중세’가 만난 결과는 朝鮮 지식인들에게 ‘實學’을 심화시키고 집대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침으로써 일종의 ‘근대적 지향적’ 사유를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것은 ‘중세적 교회질서의 연장’을 추구했던 예수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逆說的 결과였다. 때문에 양자는 더욱 심각한 충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에서 근대는 ‘신의질서로부터 인간질서로의 이행’이다. 본래부터 인간질서 구현에 기본적인 관심을 가진 유학자 출신인 터에 이제 서학이 계기가 되어 역설적으로 근대지향적 인식까지 보유하게 된 실학자로서는 ‘교회의 논리’ ‘신의 논리’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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