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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이왕주
한보경 글
1, 철학이 영화를 캐스팅한 것일까,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한 것일까
철학과 영화가 함께 한 팀을 이룬 책 한 권과 마주한다.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팀을 이루어 함께 작업하는 일’을 의미하는 콜라보 같은 것일까. 콜라보라는 말 속에서 목표, 일시적, 함께, 세 단어에 방점을 찍고 건져내본다. 이종의 교합이든 동종의 교합이든 예상치 못한 관계 맺음에서 얻을 수 있는 읽기의 덤을 예상한다.
철학과 영화, 둘의 관계 맺기 작업?이 일시적일지 아닐지, 함께 하는 목표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있다면 그 목표는 무엇인가, 궁금하지는 않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뜻밖의 덤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인가에 거는 기대가 크다.
철학과 영화는 출발의 기원이 다른 종이라 생각한다. 하나는 무겁고 어렵고 지루하고 멀리 있고 딱딱하고 굳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가볍고 쉽고 재미있고 가깝고 달달하고 부드럽다.
그런데 철학과 영화를 각각 어느 것과 줄긋기를 할 것인지 결정하려니 잠시 망설이게 된다. 처음의 줄긋기를 서로 바꾸어 다시 이어보아도 줄긋기의 조합은 어색하지 않다. 거기서 거기이다.
이들의 다름은 다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으로 보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영화와 철학은 숨겨진 어느 지점에선가 자연스럽게 서로를 품는 통로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굳이 분별해서 바라보던 생각이 바뀐다. 철학과 영화가 이종이라는 선입견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한때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읽으며 나 역시 헐리우드 키드였다고 생각할 만큼 영화에 탐닉한 적이 있다. 그때의 어린 탐닉은 아마도 가볍고 쉽고 재미있고 가깝고 달고 부드러웠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설익은 나의 탐닉의 바닥에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설명하기 힘든 나만의 고집스러운 생각과 느낌이 나름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축적한 고집스러움이 이번 책을 읽어내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를 읽는 동안 나를 조금씩 플러스-업 시켜주었을, 결코 가볍게 넘기면 안 될 영화가 주었을 ‘어떤 것’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막연하고 무모했지만 그저 하찮은 것만은 아니었다. 힘들고 혼란스러운 사춘기의 시간을 무사히 건너오게 한 친구처럼 든든한 존재였다. 풀기 어려웠던 시간들이 궁여지책으로 허공에 흩뿌린 씨앗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저자의 책을 읽는 동안 문득 문득 아주 오래 전에 아무렇게나 파종하고 한 번도 물과 거름을 주지 않고 버려둔 생각의 씨앗들에서 꿈틀거리는 발아의 기미를 느꼈다. 이번의 책읽기는 아득한 시간 너머에서 오래 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타전하는 희미한 암호를 해독하는 시간이었다.
트루먼이 보낸 전언에서 들뢰즈가 내민 탈주와 유목의 길을 해독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 길을 따라가 볼 것인지 궁리한다. 내가 고집한 ‘붙박이 삶’에 나를 묶어둔 가장 굵고 강한 올가미는 무엇일까. 그것을 끊어내기 위한 용기를 내는 일에서 이미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닐까. 스스로 더 강하게 내 목을 윽박지를 수 있는 더 많은 올가미들을 지금도 나는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은 많아지고 묘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제자리걸음이라도 쉼 없이 한다면 단단한 올가미의 힘이 좀 느슨해질지 모른다는 소극적인 탈주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끝내 붙박이 삶을 벗어나기 위해 더는 안간힘을 쓰고 싶지 않다는 자포자기적인 안주를 택한다. 쓸쓸한 수긍이라 이름 짓고 싶은, 어리석은 안주다. 그것이 최선의 자유라고 자위한다. 평온하게 맞이하는 저녁 노을빛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혼잣말을 해본다.
내게도 슈렉과 피오나는 반전의 매력으로 다가오던 캐릭터였다. 저자는 이 영화에서 ‘바깥’이 품은 의미들을 환기시킨다. ‘바깥’은 내게도 다양하게 변주되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음을 환기시킨다. 환기의 순간은 또 다른 환기를 불러온다. ‘위반의 정열’이 각성시킨 숭고함의 미학을 환기하는 순간 나 역시 ‘위반의 정열’이 각성시킨 숭고함의 미학에 전적으로 빠져 살았음을 환기한다.
나는 늘 동화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서 엉거주춤 서 있었던 것 같다. 적극적으로 바깥을 원하거나 바깥으로 나오려 애쓰지도 않고 경계인만을 고집하던 나. 용기를 꿈꾸면서 한 번도 용기내지 않았던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바깥은 진짜 바깥이 아닌 비겁한 경계였음을 돌아본다. 나는 바깥은 꿈꾸기만 해도 충분한 ‘경계인의 삶’이 편했다. 여전히 나는 ‘바깥’을 매력적인 화두로 남겨둔 채 아슬아슬한 경계만을 붙잡고 있다.
철학은 미루어 둔 숙제를 끝없이 환기시킨다. 영화는 밀린 숙제를 묻어두고 잠깐의 꿀 같은 망각을 허용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부분은 ‘디 아더스’ 부분이다. 나의 영화 베스트 목록에 저장된 영화여서 반갑기도 했지만 놀라운 결말만으로도 호들갑을 떨던 영화를 철학자인 저자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캐스팅한 철학의 메시지에 거는 기대도 컸다.
대체로 ‘디 아더스’를 보고 나누었던 무수한 난상토론은 늘 안개 속에서 잡히는 것 하나 없이 용두사미로 끝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단순한 기대를 넘어서는 놀라운 발견들이 수두룩하다.
가장 긴 시간을 영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 책을 읽는다. 그것은 영화라는 강물에 처음으로 나의 낚시 줄을 드리운 시간이다. 내가 드리운 낚시 줄의 끝을 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대어들이 줄줄이 올라온다.
저자가 내민 ‘이쪽과 저쪽’의 문제는 내게도 오랜 사색의 대상이기도 하다. ‘동일자와 타자’의 키워드는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나의 시 ‘거기가 여기였을 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마 이 책을 읽은 후에 내가 그 시를 썼다면 나는 생각의 표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천만다행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동일자와 타자’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구별하여 바라볼 수 있을까. 내게는 풀 수 없는 사념의 대상이었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익숙했었으나 아직도 생경해서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영화와 철학 읽기를 통해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와가 말한 ‘아비튀스habitus’에서 좀 더 쉽게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아비튀스habitus’라는 말이 품고 있는 ‘타자성이 주는 두려움’을 생각하면서 관계가 숨긴 의미를 다르게 생각해 본다.
본 적 없는 형상, 들어본 적 없는 소리, 맡아본 적 없는 냄새 앞에서 반사적으로 움츠려 들던 내 몸의 생리현상이 낯 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 본능적 움츠림에서 나아가 문화적 체스처까지 우리 몸이 보이는 고유한 아비튀스라는 것. 그리고 그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차이’ 앞에 당혹해하는 신체의 추억이 스며있다는 부분에서 나는 압도된다.
동일자의 ‘결속’이 타자에게 ‘폭력’이 된다는 놀라운 결론. 개방, 포용, 연대, 제휴가 때론 왜 그렇게 불편하게 다가왔던지 알 것 같다. 타자의 동일화를 통한 영역 진입과 그에 따른 문제는 충격적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편입된 영역의 동일화가 ‘같은 영토’ 안에 남겨진 여전한‘타자’로 남는 일이라니, 존재의 상대성은 가혹함과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떤 경우여도 우리의 관계는 동병상련을 공통분모로 갖는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외로움은 외로워도 외롭지 않아도 통한다. 우리는 모두 ‘식민’이라는 슬픈 서로의 이름표를 달고 있음을 확인한다. 울컥했던 순간이다.
‘디 아더스’는 영화도 메시지도 심오하고 슬프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역전을 꿈꾸기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그레이스로 머물기만 할 것인가. 부지불식의 고민과 변명의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한 그레고르 잠자처럼 슬프기만 한 존재인 걸까. 생각이 결론도 없이 이어지곤 한다.
영화보다 더 먹먹한 현실을 일깨운 것은 철학인가 영화인가 헷갈린 시간이다. 나는 은근슬쩍 ‘디 아더스’를 다룬 부분은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한 것이라고 마음 가는대로 생각을 바꾸어 본다. 철학이 눈부신 역할을 한 영화 ‘디 아더스’는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한 것이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철학 속으로 깊이 스며들 수 있는지 알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저자는 영화를 캐스팅한 철학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철학이 캐스팅한 여러 영화에서 ‘바깥’이 품은 철학적 접근을 제시한다. ‘바깥’에 대한 심층적 접근을 통해 우리는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읽기의 묘미를 느낀다.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자아’의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다룬 부분들은 우리가 영화라는 시청각을 통해 좀 더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철학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소유와 존재’ 라는 어려운 철학적 개념마저 책을 읽기 이전보다는 훨씬 친숙하게 와 닿게 해준 마력을 맛본다. 금세 잊힌다 할지라도 그것은 짧은 기적이다.
저자는 영화와 철학의 관계를 부드러운 솜씨로 잘 꿰매어 우리 앞에 두었다. 저자는 영화라는 조각과 조각으로 꿰맨 아름다운 철학의 조각보를 완성했다. 어디에도 바늘이 뚫고 간 거친 매듭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바느질 선 위에는 자아의 해방을 위한 자기성찰과 세상과의 화해라는 보이지 않는 매듭들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그것들은 영화라는 바탕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그 무늬에서 우리는 싸우고 춤추고 사랑하는 다양한 삶의 변주를 발견한다. 창조적아고 새롭다. 그가 우리에게 내민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영화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을 향해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 책, 이해하기 결코 쉽지 않은 용어들과 좀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 생경한 개념과 역설적인 논리에도 잠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책, 멀고 먼 철학이라는 학문이 우리 일상 속 가까이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일깨운 책이다.
나는 이 책이 가진 가장 놀라운 힘은 여러 계층의 독자를 자연스럽게 책 속으로 끌어당기는 강한 흡입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라는 책을 만난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다.
2, 책과 사람이 만든 장면 하나
한해가 저무는 12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고스란히 뼈대를 들어내고 한결 편안해진 무루의 뜰처럼 12월 책모임은 간결하고 순수했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주한 소박한 시간을 처음 열어준 현경님, 책에 대한 그의 진심을 이번 독회에서도 여전히 확인한다. 어렵게 여긴 철학 속으로 선뜻 한발 들어서게 해준 저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전한 후 꼼꼼하게 읽은 독자만이 내밀 수 있는 진지한 공감과 궁금함을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수샘. 오래전부터 익히 저자의 면면을 눈치?채고 있던 그였지만 이번 책을 통해 더욱 새롭고 놀라운 발견과 깨우침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의 목소리가 존경과 감동의 마음으로 살짝 흔들린다. 뒤를 이은 변선생님의 나직하고 차분한 리뷰 역시 감동과 감사가 키워드이다. 처음 참가했지만 오래 함께 토론을 해 온 회원인 듯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열띤 토론을 펼친 이강혁선생님, 언뜻 공개한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그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해본다. 다음 독회에서도 풍성한 성량과 넘치는 재기를 기대한다. 김민정님의 발랄하고 솔직한 느낌을 듣는다. 꾸밈없는 말투와 표정에 누구 하나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 회원이 없다. 내 옆자리에 앉은 서현아선생님, 마지막 발표 순서라서 좀 부담스럽다고 운을 뗐지만 그가 준비한 책은 메모지로 그득하다. 얼마나 열심히 탐독했는지 표지와 표지 사이에서 날긋해진 메모지들이 나부낀다. 메모지들은 많은 궁금증들을 묻고 또 묻기 위해 힘차게 거수한 팔처럼 그의 물음표를 대신한다. 그 물음에 이어지던 저자만의 개성적이고 자상한 설명이 그의 물음표를 함께 공유한 시간이다.
토론의 시간은 충분히 유익했다. 그만큼 아쉬움도 크다. 각자가 가진 생각과 느낌과 궁금함을 나눈 시간이 책의 깊이와 감동에 비해 턱없이 짧았기 때문이다. 모두 발언에 불과한 첫 느낌만을 돌아가며 겨우 말하고 난 후에 다시 자유롭게 심층토론의 본론으로 들어서리라 여겼다. 어찌어찌하다보니 토론은 샛길로 빠져 들어 다시 본길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정해둔 시간에 밀린 듯하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듣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그래도 짧았지만 각자의 일목요연함들이 번뜩이며 살아 있는 감상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 차례의 개론적인 느낌과 생각이 돌아가는 사이사이로 시의적절하게 내민 저자의 해설은 쉽지 않은 책 읽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솔직하게 털어낸 생각과 느낌과 물음들을 말하고 들으며 감동을 공유한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음을 인정한다. 다만 좀 더 깊이 책 속으로 들어가 책의 한 페이지가 되어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나만의 아쉬움은 아니었으리라 여긴다. 독회 후의 일정이 이미 정해진 탓도 있었지만 막상 토론을 진행해보니 인원에 비해 토론 시간이 부족하여 다소 쫒기는 토론이 된 듯하다. 그러함에도 철학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덜어내기에 독회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