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hief's Diary-
28.도주
맑은 날이었으면 아마 수풀은 밝은 연녹색 빛을 내뿜으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풀벌레소리에 맞추어 합창을 불렀을 것이다. 새들의 시끌벅적한,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반짝 빛을 발하는, 벌레들의 찌르르르 하는 소리를 듣노라면 숲은 어느새 친근함으로 한층 가까이 다가오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숲도 불청객을 받지 않겠다는 듯 음산한 빛을 띄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흐린 까닭이었다.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레이렐은 어딘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깊은 숲을 헤치며 더 깊이, 더 음산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뒤에서는 연신 PEC의 고함소리와 그들의 총소리가 들려왔고, 행여 격발 음이 들리는가? 치면 여지없이 날카로운 탄환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까지는 탄환에 의해 상처를 받진 않았지만 언제 당할지는 모르는 상태.
철컥
그때 좌우로부터 철컥, 하는 소리가 나자 레이렐은 그 초록 머리칼을 흩날리며 높이 뛰어올라 좌우를 향해 Mk의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과 함께 쏘아진 탄환과 탄피, 탄환은 여지없이 PEC를 향해 날아갔고, 탄피는 잠시 허공을 날다가 바닥에 툭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몸을 왼쪽으로 반 바퀴 돌려 뒤를 돌아보며 착지한 그는 앞으로 향해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타타탕 타앙
피피앙 퍽 팍 파앙 팅 티앙
"크악!"
털썩
뒤에서 다가오는 대여섯 명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레이렐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연신 희미한 고함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는 몇몇 사람의 급한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레이렐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맡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솔직히 비행선 같은 거 없어도 도둑 일 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고, 또 설사 비행선이 필요하다 해도 실프를 소환하면 모두 해결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길…….세이스가 무서워서였나?’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르는지, 결국 머리만 설레설레 저어 버린 그였다. 대신 그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바로 일행을 향해서.
‘라피노라면 세이스의 아공간에 넣어 둔 총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디에마와 프레일에게도 총이 있으니 다행이고, 데아랑 트레야랑 엘레어는 좀 위험하겠지만 검술로도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세라프랑 피레체인데......’
그 중에서도 피레체가 제일 걱정스러운 레이렐. 세라프에겐 마법, 그 이상한 마법이 있지만 피레체는 성직자라는 걸 빼면 특출한 전투능력이 없는 여자아이였다. 누구라도 좀 데리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 때였다.
타타타타
피피핑 팍
MSD-1의 격발 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레이렐은 서둘러 나무등걸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그 탄환들이 잠시 뜸해지는 느낌이 들자 그는 주저 없이 위력도 좋으면서 정확도도 어느 정도 있는 Hs9930으로 총을 바꿔들곤 세 차례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는 빗나갔지만 연이어 날아간 두 발의 총탄에 녀석은 쓰러졌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낮은 발소리에 그는 다시 총구를 돌려 그 쪽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보단 발소리의 주인고이 쏘아 낸 탄환이 한 발 더 빨랐다.
파파팡
"크윽."
SOA1938이 불을 뿜자 그는 몸을 돌려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탄환들은 레이렐의 뒤쪽에 있던 나무에 박혀 버리고 말았다.
타탕 탕
.......털썩
다시 녀석을 쓰러뜨린 레이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발소리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레이렐은 다시 Mk를 들곤 주변을 불안한 듯 둘러보았다. 깊은 숲의 음험한 만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들려오던 발소리가 툭 끊겼다 싶을 즈음.
철컥
철컥 철컥 척
"......!"
"쏴라!"
순간 수풀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PEC들이 나타나 레이렐을 조준했고,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총소리 때문인지 근처에 있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 버렸다.
레이렐은 갑자기 자기에게 쏟아지는 탄환을 피하기 위해 나무를 박차 반대쪽 나무로 움직이며 아래쪽을 향해 Mk를 쏘았다. 갑자기 움직이느라 대부분은 빗나가 버렸지만 몇몇은 PEC의 팔과 머리를 향해 치솟았고, 누가 쓰러졌는지 보지도 않은 채 레이렐은 다음 나무의 가지에 착지하자마자 PPP777을 들었다. 그리고 나무에 붙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파다다다다
"아악!"
"나무를 엄폐물로 써!"
다시 들린 PEC들의 목소리에 녀석들은 몇 명의 PEC를 재물로 근처 나무에 숨어들었다. 레이렐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제거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 입맛을 다시곤 다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각개전투를 시작하려던 것이었다.
파다다다
털썩
"왼쪽이다!"
다시 한 번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탄환들이 날아왔으나 이미 레이렐은 다른 곳으로 움직인 상태였고, 잠시 후 다시 한 번 다른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역시 PEC가 그 쪽을 노려보았지만 상황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파다다다
"악!"
파다다
"으윽……."
지금까지 명령을 내렸던 PEC의 소대장은 동료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부 나무 뒤쪽에 서 있지만 그렇다고 중앙으로 뭉칠 수도 없는 게, 뭉쳤다간 오히려 응집력이 좋은 PPP777에 전부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저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만 탄환마다 몇 발을 제외하고는 유도 마법이 걸린 것처럼 모두 동료들에게 적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쪽에서는 왜 이리 잡기가 어려운지.
그러던 그들에게 마치 천사가 구원해 주는 듯한 음성이 들렸으니.
"저기다, 발사!"
두두두둑
QR드릴러의 총성이 들리자 레이렐은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탄환을 알아채곤 서둘러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풀썩
"윽."
급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은 레이렐은 자리를 털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총구를 들어 레이렐의 머리를 겨누었다. 레이렐은 별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곤 천천히 몸을 굳히기 시작했다.
"......네가 그 유명한 레이렐이군."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위로 들어라."
레이렐은 군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자신의 주위로 대여섯 명의 PEC가 둘러쌌고, 그들은 무슨 원수를 보는 것처럼 이를 갈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악 한 녀석이 분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내달릴 즈음이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낯익은 격발 음이 들리더니 한 발의 스카우트 라이플 탄환이 수풀엘 헤치며 다가와 PEC의 한 녀석에게 적중했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PEC들은 무척 당황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새로 두 발의 10.9 스카우트 탄환이 날아와 다시 두 명이 쓰러지자 PEC는 레이렐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주변 숲으로 숨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자유로워진 레이렐은 바닥에 떨어진 PPP777을 다시 들었다. 그제야 PEC들도 앛,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몇 초가 지났을 즈음 그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몇몇은 살아서 도망친 모양이지만.
레이렐은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자신을 도운 녀석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윽고 그는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지만.
"라피노!"
"역시, 레이렐님, 살아 계셨네요?"
"내가 죽었을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하하, 그럴 리가요."
다시 재회하게 된 그들은 서로를 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레이렐은 레이렐대로, 라피노는 라피노대로, 잠시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뒤 레이렐은 그의 주변을 둘러보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아직 못 만난 건가?"
"네. 아까 전만 해도 데아 씨와 트레야 씨와 같이 있었는데, 이삼십 명의 PEC들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전부 헤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나머지 일행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네. 안타깝지만......"
어두운 낯빛으로 변한 두 사람.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던 그들은 곧 숲을 나오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라피노는 아공간을 열어 스카우트를 집어넣고 PEC에게서 MSD-1을 빼앗아 들고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수풀 사이에서 떠돌이처럼 혼자 수풀을 뒤지는 PEC들을 차례차례 사냥하던 일행은, 가끔씩 수많은 PEC들을 만나면 레이렐이 선두에서 적을 혼란시키고 라피노가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심적으로도, 상황 면에서도 좋아진 모양인지, 레이렐 혼자 하면 한참이 걸릴 ‘사냥’도 라피노의 도움으로 단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들은 숲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한 줄기 강을 발견했다.
"강이라…….지금 우리가 길에서 어느 쪽으로 벗어났지?"
대충 남쪽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만…….왜요? "
라피노의 물음에 레이렐은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려면 다리가 있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리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기가 있는 곳을 알아야만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게 아니겠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라피노는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자는 레이렐의 말에 동의했다.
그나저나 날이 흐린데도 강은 거침없이 흘러가기만 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거침없이 흘러가는 강물. 그것이 마치 수십억 년 전 만들어진 절대의 약속이라도 되는 듯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기를 반복했다. 내가 거침없이 저 곳처럼 흘러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레이렐의 머리를 짓눌렀다.
PEC를 만나지 않고 곧장 강을 거슬러 올라간 그들은 곧 생각대로 다리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아서 그런지 다리 길이 또한 그다지 길기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으며, 황토 빛 벽돌로 길게 이은 그 다리엔 은근한 고풍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문제는 그 길을 가로막는 PEC들이었지만.
"쳇, 여기에도 있었군."
다리를 발견하자 수풀로 도로 들어간 그들은 PEC의 그런 모습에 낭패라는 듯 중얼거렸다. 다리 양쪽을 지키고 있는 PEC들은 각각 4명씩. 그리고 라피노의 안경을 통해 확인한 두 명의 저격수들. 총 10명. 어느 한 쪽을 치면 반대쪽 녀석들과 저격수들이 몰려들 테고, 헤엄쳐 가다가는 저격수에게 단숨에 저격당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라피노의 말에 따르면 저격수들도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맞추기도 어렵다고 했다.
".......라피노."
그때 레이렐이 가만히 라피노를 불렀다. 그리고 곧 그는 자신을 돌아본 라피노에게 손을 내뻗으며 조음기 달린 스카우트를 달라고 했다. 라피노는 다시 아공간을 열어 소음기 달린 스카우트 라이플을 꺼냈다.
철컥
그것을 받아 든 레이렐은 탄환을 장전하고 스코프에 눈을 대어 가만히 저격수를 조준했다. 저격수는 나무등걸에 숨어 가만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레이렐은 살짝 보이는 그의 손을 맞추는 대신 그가 앉은 나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퓨욱
…….퍽
나무에 탄환이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드리자 녀석은 나무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레이렐은 기다렸다는 듯, 어느새 빠르게 슬라이드를 당기고 밀어 낸 그는 그의 머리를 향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한 번 퓩,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녀석을 발견한 레이렐은 그제야 스코프에서 눈을 떼어 다리에서 한가롭게 서 있는 PEC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저격수 하나가 나가 떨어졌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레이렐은 다시 스코프에 눈을 대어 반대쪽 저격수를 노려보았다.
.......팍
"?"
.......퍼억
털썩
다시금 두 발에 나가떨어진 저격수. 그러나 이번엔 누군가 알아챈 듯 저격수가 떨어진 자리를 PEC 하나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별일 아니라는 듯(아니, 저격수가 당해 버린 걸 깨닫지 못한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녀석을 바라보며 레이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세이스가 만든 아공간에 PSQ9999 있어?"
"글쎄요? 잠시 만요."
라피노는 아공간을 열어 레이렐이 건넨 스카우트를 던져 넣곤 그 안에 몸을 넣어 뭔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리를 하지 않아 잔뜩 쌓여있는 총들 사이에서 PSQ9999를 찾는 모양이었다.
라피노의 아공간에는 각종 무기들과 탄약, 그리고 총 액세서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현존하는 총들은 물론 고대에 있었다는 총들도 몇 개 놓여 있는데, 그 모든 총과 액세서리들은 다름이 아니라 세이스가 공간이동마법(레이렐은 정령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으로 훔쳐 온 총들이었다.
"아, 여기 있다."
잠시 버둥거리던 라피노는 곧 뭔가를 꺼내 레이렐에게 주었고, 레이렐은 기다란 총신을 가진PSQ999의 끝에 소음기를 끼우고 스코프를 달은 뒤 건너편 다리의 네 명에게 조준했다. 그리고 차례차례 방아쇠를 당겼다.
퓩 퓩
털썩
"응?"
"……야, 왜 갑자기……."
……쉬익 퍽
콰당
"…….적이다. 적이다!"
이미 저승으로 간 친구의 뒤를 따르게 배려해 준 레이렐은 나머지 두 녀석이 소리치는 것을 스코프를 통해 바라보다가 무표정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강한 반동과 함께 라우펠 7.7PSQ전용 탄환이 녀석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들도 곧 앞선 두 명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한편 반대 쪽, 그러니까 레이렐이 있는 쪽 다리에 있던 PEC들은 총을 든 체 주변을 경계했다. 레이렐은 약간 왼쪽으로 움직여 PEC들을 쏘려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쉬익 파파팍
"…….?"
레이렐은 PEC들이 갑자기 단검을 맞고 쓰러지자 스코프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레이렐은 PSQ를 집어넣고 Mk 두 정을 꺼내 PEC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라지 갑자기 수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사삭
척
레이렐이 총을 겨누자 흔들리던 수풀이 순식간에 그쳐 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부터 누군가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레이렐은 의외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루시프?"
검은색 옷을 입은 소년. 다름이 아니라 루시프였다. 그러나 그는 레이렐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낮게 입을 열 뿐이었다.
"......그녀가 위험하다."
"뭐?"
"......빨리 마을로 가 보는 게 좋아."
사삭
"어어? 야, 루시프!"
다시 한 번 녀석이 사라지자 레이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사라져 버린 뒤였다.
"레이렐님, 방금......."
"그래.......'그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지금 위험하니 마을로 가라는 듯 하군."
레이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보이는 저 마을…….그때 갑자기 레이렐이 무턱대고 그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하자 라피노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라피노로서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헤이스트 마법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레이렐의 속도가 아까 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기 때문이었다.
레이렐은 ‘그녀’에 대해 떠올리면서 정령을 사용해 마을로 달려 나갔다. 주위의 풍경은 빠르게 스쳐갔고, 곁을 지나가던 동물들은 갑작스런 누군가의 행동에 이리저리 놀라며 달아났지만 그에게는 그런 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녀’였다. 그가 생각하는 ‘그녀’가 마을에서 위험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루시프의 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제발 무사하기를. 아무 일 없기를. 평상시처럼 내게 웃어 줄 수 있기를......!
"…….어라?"
"레이렐 오빠!"
꽈당 쭈우우욱
"꺅! 레이렐 오빠,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어요?"
갑자기 레이렐이 데아와 엘레어를 발견하자 철퍼덕 넘어지며 그 상태로 몇 m의 바닥을 훑어 내었다. 뭐야, 루시프 녀석! 그렇게 분위기를 깔고 말하더니…….
"쓰으…….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오다가 엘레어를 만나곤 저 다리를 건너왔죠. 왜요?"
"PEC들이 길 안 막디?"
"네. 안 막던데……."
레이렐은 힐끗 엘레어를 바라보다가 다시 데아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마나 기운과 함게 한 남자가 짧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레이렐에게 뛰어왔다. 라피노였다.
"아, 라피노 오빠."
"헉, 헉, 에고고, 레이렐님. 확실히, 빠르긴, 하시네요. 헉, 헉."
숨을 고르며 띄엄띄엄 말을 이은 그의 모습에 레이렐은 아까 넘어진 바람에 뭉뚱그려진 얼굴과 옷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데아가 ‘그녀’가 아니라면 다른 두 사람이 위험에 처했다는 건가? 아니, 그런데 마을로 가 보라고 했잖아. 마을에 있는 건 데아뿐인데?
"저기…….엘레어, 다른 일행 못 만났어?"
절레절레.
확실히 못 만난 모양인데…….레이렐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데아가 레이렐더러 왜 그러냐는 듯 물어 왔고, 그는 방금 루시프를 만났다는 것과, 누군가가(여자인 건 확실하지만) 위험에 처했으니 마을로 가 보라고 전하곤 다시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 그리고 그 때문에 자기가 여기로 달려왔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데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루시프가 장난친 모양이네요."
"쳇, 그 애는 장난 같은 거 안 칠 줄 알았는데."
루시프가 장난칠 줄은 몰랐다며 레이렐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뭐 어린애이니만큼 장난을 칠 수도 있겠지. 도와주는 셈 치고, 자신이 마을로 달려가는 모습을 그 대가로 구경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하, 괜히 호들갑을 떨었군.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추켜세운 레이렐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곤 다른 주제를 떠올렸다. 다음 일정에 관한 대화였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지?"
"뭘요?"
"일행을 기다려야 할지, 우리 따로 여행해야 할지."
그 말에 데아는 눈썹을 모으며 뭔가를 야무지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고, 엘레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레이렐은 똑바로 노려보았다. 물론 말은 라피노가 한 발 더 빨리 했지만.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니까요."
"아뇨, 제 생각엔 저희끼리 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라피노의 말을 잇는 엘레어의 의견에 레이렐은 데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다수결에 따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데아가 뭘 깨달은 듯 손바닥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아 참, 세라프 언니에게서 메시지인가 텔레파시인가 하는 마법이 날아왔어요."
"세라프에게?"
레이렐은 데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세라프가 뭐라고 그랬는데?"
"자기는 디에마, 트레야, 피레체와 함께 다른 마을에 있으니 레이렐 오빠에게 전하라고요."
"으음…….그래?"
내가 이 곳에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거군. 역시 그녀란 생각을 하던 레이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가만히 실프를 소환했다. 변함없이 조그만 몸체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실프. 레이렐은 대뜸 실프에게 세라프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실프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밝게 미소를 띠며 공기층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이윽고 그는 세라프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에 이는 바람을 통해 그녀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아, 세라프. 세라프?"
"레이렐 씨?"
건너편에서 가냘프면서도 듣기 좋은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이렐은 밝은 목소리로 화답하기 시작했다.
"저 레이렐이에요. 지금 어디 계세요?"
"전에 있던 마을에서 바로 남으로 내려왔죠. 그 쪽은요?"
"저희는 아마 동쪽에 있을 거예요. 으음…….다시 만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라나?"
레이렐은 그렇게 말하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라프에게 답변을 바라는 중이었지만 그녀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근데, 프레일 씨도 그 쪽에 있나요?"
"......프레일씨 말인가요?"
그러고 보니 프레일이 보이지 않았다. 세라프가 물어 온다는 건 그 곳에도 프레일이 없다는 뜻인데.
문제는 자기가 있는 곳에도 프레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프레일…….없는데요.
"정말요? 프레일 씨가 없단 말에요?"
"네. 안타깝지만 헤어진…….모양이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레이렐은 별로 찾을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어차피 라운 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 어디론가 가서 잘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저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잠깐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그들은 나중에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여관에서 만날 것과, 그 때까지 조심하라는 말로 대화를 끝마쳤다. 그리고 대화의 결과를 일행에게 말하고 곧바로 여관을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