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우리들은 드디어 1학년이 되었다.
3월 며칠 날 학교에 나오라는 취학통지서가 집에 배달되었다.
학교를 가려 여러 가지 물건들을 준비되었었겠지만,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붉은 색 플라스틱 통짜가방과 연필, 그리고 손수건과 명찰이다. 연필은 아버지가 직접 깎아주셨기 때문에 기억이 나고, 책가방은 버리고 싶도록 지겨움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상한 아버지를 두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시절엔 아버지들이 다 해주었던 일이고, 애들이 깎으면 손을 베인다거나, 연필심을 부러뜨려 버리게 될 염려가 있어서 아까운 마음에서라도 아버지들이 나섰으리라 생각된다.
연필 깎는 얘기가 나왔으니... 당시에도 연필 깎는 기계는 있었다. 비싸고, 부안에서는 구할 수 없었지만… 손에 쥘 수 있도록 작은 사이즈로 돌려 깎을 수 있는 방식은 4학년 쯤에 처음 선보였나…
명찰은 학교별로 다른 포맷을 갖고 있었고, 우리학교 명찰은 둥근 직사각형 모양에 위쪽에 핀이 꽂힐 자리가 튀어 올라 있고, 중간에 푸른 색 띠가 수평으로 그려졌으며, 부안국민학교를 상징하는 마크가 양각으로 돌출되고, 하단에는 종이로 학년 반과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는 비닐로 덮여진 그런 것이었다. (내가 직접 그린 명찰 그림 참고하시라. 누군가 추가로 그림을 완성해 주기를 희망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시계탑 근처의 모자 점에서 120원쯤 주고 가방을 산 것 같다. (그 시절 “동진모자점”이 유명했음.)
플라스틱 네모난 통에 큰 재봉틀로 덮개만 비닐재질로 된 것을 박음질을 한 것이라서 웬만큼 집어 던져도 닳지 않았던 것 같은데(추울 때는 단단해져서 깨지기도 하는), 등에 메고 나면 뒤쪽으로 불룩한 것이 제법 무겁기도 하였다.
학교에는 할머니 손을 잡고 갔는데, 입학식이 끝나고 나서는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미리 반 편성이 되어 있어서, 호명하는 대로 담임을 맡은 선생님 앞으로 모인 후, 모두 끝났을 때, 선생님을 졸졸 따라가면서 참새-짹짹, 돼지-꿀꿀, 강아지-멍멍을 외쳐댔다.
1학년 4반 담임은 이문식 선생이셨다.
1학년인지라 선생님 이름도 몇 일 지나 알려주었던 것 같다.
1학년 4반 교실은 큰 느티나무가 서 있던 바로 앞쪽이었다. 앞으로 들어오기보다는 뒤편에서 들어가도록 된 구조였고, 블록건물에 지붕은 함석으로 된 오래된 건물로 기억된다.
오랫동안 우리가 사용했던 본관 건물의 바로 뒤쪽에 있는 일제 때 지어진 것으로, 뒤편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1반부터 왼쪽으로 4반까지 교실이 연속되어 있고, 4반 옆에는 복도처럼 생긴 공간이 있은 후, 5반 교실이 왼쪽으로 나 있었다. 이 건물은 몇 년간 방치되다가 졸업하기 전에 없어진 것 같다.
교실로 들어와 선생님께서 자리를 배정해 주셨다. 4반 전체가 60명이었는데, 남자가 31명 여자가 29명 이었다. 어떻게 이걸 다 기억하냐고?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태생이 원체 숫기가 없다.
남자, 여자를 각기 일렬로 세우더니, 남-녀를 짝으로 하여 1-8 분단 순으로 앞에서 뒤로 앉혀 주셨는데, 내가 거의 뒤였고, 나와 한귀례 라는 친구가 짝이되는 순간이 왔다.
처음 본 귀례와 짝을 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해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요놈이 원하는 것이 뭔지를 몰라 하시고 … 한동안 그러다가, 남자 짝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배형용과 짝을 지어 주셨다.
우리 반의 유일한 남-남 커플.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참으로 조용히 1학년을 보냈다.
낯을 가린다는 것은 사람마다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지금도 나에게는, 처음 본 사람들이 정겹게 느껴지지 않고 낯설어서, 쳐다보고 앉아 있는 것이 어색해서 싫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듯 하다.
지금도 아주 가끔, 배형용과 한귀례를 떠 올릴 때가 있다.
그 친구들에게는 참으로 재수없는 기억이 되었겠지만,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수 년 전에 울산 회사 근처의 한 분식집 벽에 낙서된 글자 중에서 한귀례 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궁금하기도 하였다. 혹시 그 친구가 울산에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마 전에 밴드에서 누군가 문자영이란 이름을 꺼내던데, 문자영은 우리의 1학년 동기생이었다. (같은 반이던 김상윤은 기억하려나?) 당시에는 부모와 자녀가 똘똘하기만 하면 조기 입학에 제한이 없었다. (지금보다 많이 자유롭던 시절일세.)
문자영이 입학하게 된 것이, 잘 적응하면 계속 보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전적응을 위한 목적인지는 걔네 부모가 아시겠지만, 한두 달 정도 다니다가 말았고, 나중엔 후배가 되었다.
동기생이었던 그 기간 중에, 우리 반 친구 중 누군가를 따라 농촌지도소 자리(아니면 그 뒷집)에 위치한 문자영의 집에 한 번 놀러 간 적이 있다.
그 날, 어린이용 타는 자동차를 처음 본 것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배터리가 달린 자동인지, 수동인지는 탑승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어차피 1학년 기억을 시작했으니, 마저 마무리를 해야겠다.
1학년 때, 내게 같이 놀자고 집으로 초대한 친구는 김상윤, 김하영 이 둘 뿐이다.
상윤이 집에 갔을 때는 TV란걸 처음 보았다. 마침 고교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S B O 글자가 뜻하는 것이 뭣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었고,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눌려 조금 놀다가 나왔던 것 같다.
김하영네 집은 향교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서너 명을 같이 초대해 갔던 것 같은데, 어머니가 마미 같은 과자를 잔뜩 내 주신 것과, 여럿이 놀아도 남을 만큼 방안에 장난감이 가득했었던 기억이 있다. 레고 블록 같은 것 등, 이 친구가 놀았던 스타일은 지금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1학년의 기억은 이 외에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 적습니다.
갑자기 우리가 달고 다니던 명찰이 생각나서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기억이 맞는지... 많은 것을 잊고 살았네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212E454A51AFE17602)
첫댓글 경환이! 기억도 아주 또렸하구나...
나도 1년 선배들이랑 입학해서 1달가량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난다...
계속 다녔었으면 니들 다 내후배 이었을 텐데 말야... ㅎ~ ㅎ~ ㅎ~
하여튼 어떻게 짝궁까지 기억할까... 대단해^^
맞어.....명찰....ㅎㅎㅎ
중학교 졸업후 사진으로 처음보고 네 얼굴이 예전하고 별로 변한것이 없는 것 같아 반갑구나!
1학년때 기억도 너무 또렷이 하는것 보니 머리 좋은것은 변하지도 않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