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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8일 일요일(토요무박) 백두대간 38 회차 오대산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38 회차 : 진고개(02:10) – 동대산(03:20) – 차돌백이 (04:45) - 신선목이 (06:00) - 두로봉 (07:30) – 신배령 (09:45) – 만월봉 (10:35) – 응복산 (11:40) – 약수산(14:50) – 구룡령(15:40)
산행거리 : 약 22 km 산행시간 : 약 12 시간
http://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611116
거리 22.3 km
소요 시간 13h 45m 47s
이동 시간 12h 40m 54s
휴식 시간 1h 4m 53s
평균 속도 2.1 km/h
최고점 1,446 m
총 획득고도 1,006 m
난이도 힘듦
백두대간 (白頭大幹) 38 – 오대산
일본
이웃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늘상 얼굴 찌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시비를 걸어온다
담넘어 온 과일나무 가지도
자기꺼라 우기며
동네 방네 소리치며 떠들어댄다
지나온 잘못이야 어떻든 상관말고
보듬고 잘 살아보려 하지만
막무가내 지 잘난 듯 이빨을 드러낸다
프로로그
사람들은 나무나 풀을 보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과연 식용(食用)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인지 아니면 독이 들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약초인가 해초인가를 묻는다. 수 많은 세월동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민초의 DNA가 남아 있는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물음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류는 이 지구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 먹는 문제로 고민을 해 왔으며 근래까지도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숙제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토머스 멜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식량은 산술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인류는 식량문제로 인해 멸망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다행히 60년대에 생겨난 녹색혁명 덕분에 인류는 잠시나마 식량문제에서 해방된 듯하지만 아직도 지구 곳곳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전쟁이 끊이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풀이나 나무를 보면 과연 그것이 먹을 수 있는건지 또는 약초(藥草)인지 해초(害草)인지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낯 선 사람을 만나면 과연 그 사람이 나에게 이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해로운 사람인가 잠시 경계하게 된다. 얼굴에 써 있는 그 사람의 과거 이력을 읽고 악수를 하면서 그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느낀다. 그 사람의 말투를 듣고 그 사람의 살아온 환경을 짐작한다. 이런 행동도 어쩌면 수만 년동안 살아온 사회적 동물의 생존을 위한 DNA의 작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와 친하게 지냄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도모할 수도 있고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동북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오랜 역사적 사건들로 뒤얽힌 한.일관계가 그렇고 세계 최강임을 자부하는 미.중관계가 그렇다. 게다가 러시아도 한 몫 챙기려는 듯 중국과 결탁하여 우리 영공에 발을 들이밀으려 하고 있다. 남.북간 관계가 많이 개선되어 한반도에 봄이 찾아올 듯 하던 정세가 갑자기 얼음짱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북한은 무슨 계산이 있는건지 동해를 향해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인간관계가 그렇듯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도 신경을 곤두 세우고 두 눈 크게 뜨고 조심해야 한다. 지금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불안정한 사태는 언젠가는 터질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지금까지 주변 강국들 틈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불안 불안한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미국의 2차대전 승리 덕분에 1945년 일제 침탈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이데올로기 다툼의 장이 되었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리전을 치루는 긴장된 상태로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에 의존하던 이승만 정권이 부패와 독재로 일관하다가 국민들의 저항에 못이겨 무너지고 나서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 사관학교 출신의 박정희의 손에 넘겨졌다.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965년 일본과 조약을 체켤하여 일제 36년간 우리나라를 침탈한 배상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그리고 민간차관 3억달러로 총 8억 달러 지원을 받고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이 청구권 협정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한 행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협정으로 한반도에서는 일제시대 친일매국을 한 사람들도 함께 완전한 면죄부를 받은 격이었다. 물론 박정희의 친일 행위는 전면에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일제시대 경찰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더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일제시대에 우리 국민들을 탄압하던 그것보다도 더 악랄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저지르게 되었다.
어찌보면 독립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일제에 협력하여 식민통치에 부역한 사람들에 비해 궁핍하고 학대받는 아주 이상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겉으로 대 놓고 항의할 수도 없고 그 아품의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문 듯했으나 실상은 속으로 곪아 있는 종양과 같은 상태였다.
한일 관계라는 것이 그랬다. 일본은 1965년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모든 행위에 대해 용서받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배층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부(副)까지 누리면서 일반 국민들의 삶을 핍박하였다.
일제시대 수 많은 악행 중에서 우리나라 국민 개인의 삶을 망가뜨린 대표적인 행위가 일본군 정신대 (위안부)와 강제 징집 및 강제 노역을 들 수 있겠다. 특히, 민간인 여자 아이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전선에 배치하고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희생시킨 행위는 개인의 삶을 깡그리 파괴해 버린 반인륜적인 행위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정신대 동원은 국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진 것이었음에도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변변한 사과와 배상을 회피하고 있다. 아직 살아있는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삶을 드러내면서까지도 매주 수요일에 모여 그 당시 겪었던 억울함을 토로하며 국가차원에서의 사과와 적절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곪을대로 곪은 한일 양국간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터진 것은 최근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일제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배상 명령이었다. 요약하자면 일제시대 젊은 나이로 강제동원되어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노역한 사람들 중 아직 살아 있는 몇 명이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약으로 이미 보상이 완료된 것이라서 더 이상 개인차원의 배상을 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전 정부인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일관계의 불편함을 피하고자 양승태 대법원장과 협력하여 판결을 미루어 왔으나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는 원칙론을 내세워 판결에 간섭하지 않았고 마침내 대법원은 일본의 기업에게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을 하라는 명령을 판결하였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강압으로 대한제국 정권을 빼앗아 온갖 침탈행위를 한 행위에 대해서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매듭지어졌다 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생당한 것에 대해서 당사자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일본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독일을 머리에 떠 올려본다. 2차 대전 당시 주변 국가들에 대해 국가적인 보상은 물론 개인들의 피해에 대해 찾아다니면서 배상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으면서도 지금도 기회있을 때마다 희생자 묘소에 헌화하고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죄에 대해 끊임없이 사과한다. 일본이 독일의 입장과 똑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의 유태인 학살은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더 심했다는 인식을 갖게 하지만 오히려 일본이 저지른 착취와 인권탄압은 결코 독일의 유태인 학살에 비해 더욱 악랄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나쁜 이웃이다. 우리 남북한이 통일을 이뤄 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끊임없이 주변국들에 정치적인 영향을 행사하려 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로 예속시키려 한다. 그러한 상태로부터 당장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이 번 기회에 일본의 악랄한 저의를 인식하고 국민들이 힘을 모아 향후 일본을 버리고도 잘 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진고개
장마철이다. 태풍 다나스가 남부지방에서 소멸되고 나서 중부 이남 지역으로 많은 비를 뿌리더니 장마전선이 북상한 건지 서울에도 수요일 목요일에 비가 많이 내렸다. 그 동안 가뭄이 심했는데 이제 어느 정도 해갈이 된 듯하다. 토요일 오전에 약간 비가 내리고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일요일까지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으나 많은 양은 되지 않을 듯 보인다. 그래도 우중산행에 대한 준비는 갖추어야 한다.
새벽 2시 깜깜한 진고개 휴게소에 도착하니 전광판 온도계가 21도를 표시한다. 아마 서울은 적어도 26~7 도 정도로 열대야일텐데 이 곳 평창 산지에는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강수량 0.00 mm 라는 것은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말이리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사이로 별이 초롱초롱하다. 그래도 살갗에 느껴지는 습기는 비가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이번에는 맞을 거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지난 번 노인봉으로 오른 길 반대편으로 오른다. 오리보다 좀 일찍 도착한 타 산악회 버스에서 내린 산님들이 아직 주차장에 남아 머뭇거릴 때 우리는 풀섶에 매달린 이슬을 털며 그 반대편 동대산을 향해 어둠속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헤드랜턴이나 손전등이 없으면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일텐데 앞서 간 긴 행렬이 점점이 반딫불처럼 이어진다. 불빛에 비친 왼쪽 고랭지 채소 밭에는 무가 벌써 어른 팔뚝만큼 자랐다.
동대산(東臺山 1,433 m)
오늘 산행의 첫 번째 봉우리인 동대산(東臺山 1,433 m)로 오르는 1.7 km 구간은 상당히 가파르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가지 돌계단을 잘 다듬어 놓아 오르는데 불편함은 없다. 공원 관리공단에서는 왜 이렇게 산길을 잘 가꿔 놓고 비탐방구간이라면서 단속하는건지 모르겠다며 우스개 소리로 힘을 북돋으며 한 발 한 발 오른다. 가슴 속까지 파고 드는 깊은 숨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옅은 안개가 흐르기 시작한다. 손전등에 비치는 동자꽃과 노루오줌 그리고 자주여로 등 수 많은 야생화가 오늘 산행의 예고편처럼 우리 곁을 지나간다.
힘들게 올라온 동대산 정상에는 아담한 이름돌이 세워져 있다. 아직 숨을 고르고 있는 선두팀 산님들은 잠시 눈 인사를 나누고 휭 하니 떠나간다. 그리고 산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선두팀은 모두 걸음이 빠른 준족(駿足)들이다. 한 발 내딛으면 거침없이 산 능선길을 내닫는다.
뒤에는 일반적으로 산악회에서 후미팀이라 부르는 별동대(別動隊)만 남았다. 정상 주변에 보이는 <송이풀>과 <동자꽃> 그리고 이제 피기 시작하는 <오리방풀>에 눈길을 주고 다 함께 모여 단체로 인증사진을 남긴다. 걸음은 좀 느리지만 산행의 진정한 별미를 느끼면서 중간 낙오없이 끝가지 간다는 별동대 대원들이다.
동대산에서 갑자기 길이 가파라진다. 그러나 잠시 내려가던 산길이 차츰 평이해지고 그리 큰 굴곡없이 이어진다. 랜턴불빛에 수풀 속 예쁜 꽃들이 스쳐지나간다. 고대하던 <말나리>가 눈에 띄어 사진에 담아보지만 약한 불빛과 몸부림치며 흔들어 대는 꽃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다. 간간이 빗방울이 듣는 느낌이 든다. 앞서간 회원들을 따라가는 마음이 급하다.
자주색 꽃이 뭉쳐서 피어 있는 것은 <광릉갈퀴>다. 콩과 나비나물속에 속하는 이 광릉갈퀴는 산행을 하는 동안 내내 따라다니며 자기를 봐달라고 조르는데 비에 젖은 모습이 번들거리는데다 꽃은 이파리 속에 감추고 있어 보기에 안쓰럽다. 바람이 불면 온 몸을 흔들어대고 빛이 없어 꽃도 제대로 피지 않았다. 맑은 날 다시 보자 해도 막무가내다. 나비나물과 설악산의 네잎갈퀴와 혼동된다.
차돌백이 (1,200 m)
평소 맑은 날 같으면 먼동이 터서 주변이 어스름하게나마 보일 시간이지만 전등불빛이 미치지 않는 곳은 칠흑같이 어둡다. 차돌백이 이정표 근처에 차돌바위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어두운 주변에 눈빛을 던져본다. 이정표에서 얼마 가지 않아 어둠속에서도 쉽게 구분될 만큼 하얀색의 차돌바위가 여럿 나타난다. 용문산 등 여러곳에서 차돌 바위를 본적이 있지만 이 곳 차돌백이에 있는 차돌은 그 이름값을 한다. 집채 만한 차돌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중생대 주라기때인 1억 8천만년 ~ 1억 3천 500년 (엄청 오래전)전에 마그마가 기반암에 스며들어 형성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약한 기반암이 풍화되어 없어지고 단단한 석영인 차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 한다. 어렸을 때 차돌을 주워다 공기돌을 만들어 놀던 추억이 떠 오른다.
아직 어두운 밤길인데도 걷기에 불편함이 없다. 길도 상당히 뚜렷하여 조금만 주의하면 대간길에서 벗어날 염려도 없다. 몸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나뭇잎에 모여있던 이슬이려니 하는데 그 물방울이 더욱 잦아지고 커지는 것을 보니 가랑비가 내리는 것이다. 날이 궂은 탓인지 산새들도 조용한 아침을 맞는다. 옅게 흐르는 안개가 약간 붉은 빛을 띠더니 점차 여명이 밝아온다. 어둠속에 숨어 있던 숲의 정령이 천천이 나무 그늘속으로 또는 땅속으로 꼬리를 말며 숨어들고 숲은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름답다. 보랏빛 안개가 흐르는 숲은 고요하다. 그 고요함 속에 움직이는 건 낯선 산객 뿐이다.
5시 30분이면 해가 떴어도 벌써 떴어야 할 시간이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가랑비에는 귀챦아서 배낭 커버도 씌우지 않고 비옷도 입지 않은 채 걸어볼 참이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내릴라 치면 귀챦더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미 등산화도 꽤 많이 젖었고 바지 아랫단도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배낭을 내려 비채비를 갖춘다.
비는 오락가락한다. 어두운 숲길 오른쪽이 갑자기 환해지길래 살펴보니 훌륭한 조망처다. 멀리 동해바다 위로 구름이 두텁게 끼어 있고 그 구름속에 아침해가 잠겨있다. 바다 위로 햇빛이 반사되어 해돋이 풍경을 연출한다. 희미한 산 그리매 뒤로 모든 것이 어두운데 오직 바다에 비친 해 그림자만이 찬란하게 빛난다. 맑은 날이면 강릉시라도 보일 듯한데 이런 날에는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안간다.
신선목이 ( 1,120 m)
날이 조금씩 밝아옴에 따라 꽃들도 잠에서 깨어난다. 아직 설잠에서 깨어난 <단풍취>의 꾸미지 않은 얼굴도 꽤나 예쁘다. 이른 봄 보송송한 털을 온 몸에 감싸고 올라와 두 세 달 동안 자라나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다. 꽃대를 세운지도 꽤 오래인 듯한데 이제 꽃대 끝에서부터 하나씩 꽃이 피어난다. <꿩의다리>는 아직도 피고 있고 <개시호>는 이제 피기 시작하는 꽃이다.
평탄한 산길 숲이 조금 훤해지면서 <거제수>가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공터가 나타난다. 이정표에 신선목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오대산 신선들이 드나들던 길목이라니 그 신선들도 백두대간을 즐겨 걸었나보다.
신선목이에서 두루봉(1,421 m)까지는 약 2 km 오르막이다. 평소같으면 이런 산길이야 그리 힘들이지 않고 올랐을 터인데 비가 오는 날에는 행선이 더디다. 길가에 <지리강활>이 큰 키를 자랑하듯 2 m 는 되어보이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건들거린다. 난 이런 애들을 만나면 자꾸만 외면하게 된다. 이른바 산형과(傘形科)식물이다. 꽃 모양이 마치 우산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피는 미나리과에 속한 식물이다.
<두메고들빼기>는 날이 흐려 꽃을 오무린채 필 생각을 안한다. 이런날에는 피어봤자 찾아오는 벌 나비도 없을뿐더러 괜히 헛물만 켤게 뻔한데 굳이 필 이유가 없다. 비라도 날이 더 밝고 비라도 그치면 피어볼 요량이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는 <참취> 꽃이 만발했다. 얘네들은 꽃 피는 시기도 짧으니 밤에도 야근을 해야 한다. 비가 내릴 때 찾아오는 벌이 있을까만은 그래도 꽃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하얀색 꽃으로 단장하고 있다.
두로봉 (頭老峯 1,422 m)
동대산까지 힘들게 올라왔던 큰 형님이 힘들어 할 만한 코스인데 어디까지 가신건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우리가 일출 풍경에 잠시 빠져있는 동안 평지성 숲길을 달음박질 쳐서 내 빼셨는가보다. 큰형님은 평지와 내리막 코스에서는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다.
맨 꼬리쪽에 나와 박상범님 그리고 정구진님이 남았다. 꽃이름과 풀이름을 갖고 갑론을박 다퉈보기도 하지만 모두 자연의 신비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물을 마시면서 잠시 쉬는데 길에서 가까운 숲에 키가 훤칠하게 큰 <독활>꽃이 피어 있다. 이 꽃 이름을 처음 들었을때는 독초라는 느낌이 들었으나 이는 한자로 홀로獨 살㓉자를 써서 어디에 기대지 않고 꿋꿋하게 잘 살아가는 강인함을 표현한 것이다. 달리 <땅두릅>이라고도 부르며 봄에 땅에서 올라온 새싹을 나물로 먹는다.
긴 오르막 숲길을 오르는데 앞서가던 이현구 별동대장님이 전화해서 어디쯤이냐 묻는다. 평소같으면 이렇게 뒤지지 않는데 오늘은 선두가 너무 빠른건지 시간차가 꽤 나는가보다. 두루봉을 지날 때 카메라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과 거기서 500 여미터 내려온 곳에서 아침을 먹을참이니 빨리 오라고 당부한다.
오전 7시 30분 마침내 두로봉 (頭老峯 1,422 m)에 도착했다. 이 두로봉에서 길이 둘로 갈라진다. 계속 직진하면 만월봉 응복산 약수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이요 왼쪽으로 꺽으면 오대산 상왕봉 비로봉을 거쳐 양평 두물머리에서 끝나는 한강기맥으로 이어진다. 그런 연유로 길이 두 개로 갈라진다는데서 두로봉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두루봉은 우리가 지나온 동대산 그리고 이 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상왕봉, 호령봉과 함께 5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어 오대산(五臺山)이라 부른다.
두로봉 벤치에 타 산악회 회원 한 분이 인솔대장으로 보이는 사람한테 간호를 받고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지병이 있는데 산행 중 두통이 찾아와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신배령( 1,080 m )
이 두로봉부터 신배령까지는 소위 비법정탐방로이다. 탐방로는 탐방로인데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탐방로라는 것인데 그 개념이 이상하다. 이 구간을 탐방하다가 적발되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은 이래 저래 다 지나가는 길이고 그 산길은 왠만한 마을길처럼 잘 다듬어져있는데 비법정탐방로라니 그 이름이 공허하게 들린다.
비법정탐방로 안으로 목책을 넘어서 있는 헬기장에 세워진 이름돌 앞에서 간단하게 인증을 하고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힘들게 올라온 만큼 내리막길은 급경사다. 산꾼들이 지나 다닌 길이 패여 나무뿌리가 드러나고 빗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키 큰 주목 군락이 나타나고 또 오랜만에 작은 조망처가 나타난다.
조망처라고 하지만 그저 미역줄나무 덩굴 너머로 산줄기가 보이는데 산의 반은 또 안개로 덮여 있다. 아마 저 곳이 만월봉에서 응복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일텐데 안개로 인해 산 모습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두로봉 정상에서 500 미터 정도 아래에서 아침을 먹는다던 별동대 본대는 어째서 500 미터가 그리 먼 거리인가 하고 의문이 들 때쯤 나타났다. 이미 선두팀은 자리를 뜨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이리 저리 풀들이 누워있다. 별동대도 거의 식사를 마친 상태라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일어선다. 오늘따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왜 이리 빠른건지 모르겠다. 너무 뒤에 쳐지면 안되기에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마친다.
비탐구간이 끝나는 신배령까지는 넓은 평원 같은 느낌이 든다. 비는 그쳤으나 오락 가락 하는지라 비옷을 입은채로 산행을 이어간다. 길가에는 야생화가 즐비하다. 봄에 아카시아 같은 하얀 꽃송이를 뽐내던 <귀룽나무>는 벌써 열매가 까맣게 익어 있다. 약간 떫은 맛이 나는 열매 속에는 팥알만큼이나 큰 씨가 들어 있다. 혹시 이번 산행에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박새> 줄기가 기나긴 가뭄으로 쓰러져 있어 아쉬웠는데 자주색 <박새>꽃이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것이 반갑다. <큰까치수염>도 군락으로 피어 바람에 흔들린다.
길에 떨어진 돌배를 보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이 구간에는 <돌배나무>가 유난히 많다. 이태 전 응복산 산행을 할 때 돌배꽃을 보고 신기했었는데 지금 보니 이 곳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돌배 과수원같다. 우리는 농담으로 가을에 배가 익을 때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걷는다. 그러고 보니 신배령( 1,080 m )이란 고개 이름도 이곳에 맛이 시큼한 배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니 어쩌면 이 돌배나무들은 저 옛날부터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월봉(滿月峰 1,281 m)
비탐구간을 빠져나와 자리를 잡고 뒤에 오는 일행을 기다리다 보니 한 무리의 산꾼들이 반대방향에서 내려온다. 대구에서 왔다는 그 사람들은 새벽에 구룡령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출발했던 진고개까지 가는 중이라 한다. 지난 주에 산행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대구 마루금 산악회 회장을 아느냐 하니 그 사람이 하두 유명한 사람이라서 잘 알려져 있다 한다. 70세 정도 되었는데 대구에서는 백두대간 및 정맥을 뛰는 산악회로서 그 산악회뿐만 아니라 이한성 회장님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다. 우리는 간단하게 과일을 나눠먹고 또 길을 나선다.
신배령에서부터는 능선 왼쪽으로 약간 돌부리가 흐트러져 있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다리힘이 좋은 별동대장은 만월봉에서 총대장님을 만나기로 한건지 빠른 걸음으로 먼저 올라가고 뒤에 남은 대원들은 다시 지구의 중력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써 가며 만월봉(滿月峰 1,281 m) 으로 오른다.
옛날 어느 시인이 이 산 봉우리에 올라 동해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시를 읆었는데 그런 연유로 이 봉우리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2년전 봄날에 저 아래 명개리에서 출발하여 이 만월봉으로 올라 응복산을 거쳐 산행한 일이 있다. 그 때는 백두대간이란 개념이 없이 자동차를 명개리에 주차하고 당일 산행으로 올랐었고 <눈개승마>와 <매발톱나무> 꽃 등 여러가지 귀한 야생화가 피었었다. 비는 잠시 그쳤지만 안개가 짙게 끼어 바다든 산이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응복산(鷹伏山 1,359 m)
총대장님에게 오후 3시까지 하산하기로 하고 뒤에 남았다는 별동대장의 보조에 맞춰 지체할 시간 없이 만월봉을 떠난다. 대간꾼 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데다 큰 나무가 없으니 덩굴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진행이 힘들다. 가끔씩 뭔가를 찾아먹으려 땅을 헤집어 놓은 멧돼지 흔적이 눈에 띈다. 만월봉에서 응복산까지는 1.5 km 짧은 거리이지만 50분이나 소요되어 11시 40분에 도착했다. 구룡령까지 6.7 km 남았으니 일반적인 산행이라면 3시간 남짓 걸릴 것이다. 그러면 오후 3시쯤 하산이 가능할 것 같다.
응복산(鷹伏山 1,359 m)은 산세가 마치 매가 업드려 있는 모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와 달리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을 의미하는 ‘수리’에서 그 유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즉, 새 중에서 제일 높이 나는 새를 독수리 또는 수리라 부르고 사람의 신체중에서 제일 높은 곳을 정수리라 하듯이 높은 산을 부를 때 수리산이라 불렀다 한다. 수리를 우리말로 ‘매’라고 하니 달리 ‘매봉’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써서 ‘응봉’으로 바뀌었다가 응봉산이 되었다. 지역에 따라 응복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이는 옛날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마늘봉(1,126 m)
응복산에서는 명개리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통나무 계단이 물에 젖어 미끄럽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내리려는지 먼데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구룡령까지는 아직 6 km 남짓 남았다.
마늘봉(1,126 m)에서 구룡령까지는 4.78 km 다. 남은 거리가 마디게 줄어든다. 으르렁 거리던 천둥소리가 조용해졌다 싶더니 제법 강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옷은 이미 젖었고 바지며 등산화는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으니 이렇게 비가 계속 내리면 전자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핸드폰과 충전기를 넣어둔 크로스백을 이미 찢어진 우비로 감싸 보지만 여의치 않다.
아미봉( 1,282 m)
산행을 하다보면 어떤 때는 자신의 몸보다 장비를 더 보호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몸은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비옷으로 배낭을 덮고 자신의 몸은 비에 노출한 채 산을 오르는 큰 형님이 저체온으로 힘들어 할까봐 걱정이다. 더운 여름날이라도 비를 오래 맞으면 체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큰 형님이 옷 매무새를 바꾸고 우의로 몸을 가린다.
힘들게 오른 봉우리가 바로 약수봉이겠거니 했는데 정상에 오르니 이정표만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구룡령까지 아직도 3.32 km 를 더 가야 한다. 이 곳이 구룡령과 응복산의 중간쯤에 위치한 아미봉( 1,282 m)이다. 아직 오대산 품속에 들어 있으니 산 이름도 불교식 이름이다.
약수산(藥水山 1,306 m)
원래 우리나라 산이 그렇듯 저 곳이 정상이다 싶어 부지런히 올라가면 또 다시 더 멀찍이 더 높은 봉우리가 떡 버티고 서서 웃고 있게 마련이다. 아미봉에서 또 한참 내려갔다가 가파른 경사를 올라간다. 통나무 계단이 비에 젖어 미끄럽다. 산행을 시작할 때야 이런 길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산행을 마칠 때쯤 나타나는 이런 가파른 경사는 몸속에 남아 있는 진을 다 빼가고 만다.
힘겹게 올라 안부에 서니 오른쪽 끄트머리가 앞이 시원하게 뚫린 전망대다. 날이 맑으면 설악산 줄기와 양양시가 보인다고 안내판에 사진이 붙어 있으나 지금은 안개밖에 안보인다. 산의 고도가 높아서 그런건지 안개가 무척 심하다. 조망처 옆 구석에는 백두대간 중 사망한 동료(용인 산악회 이제윤 )를 그리워하는 용인 산악회회원들이 남긴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얼굴 보여주길 거부하던 약수산(藥水山 1,306 m)가 마침내 나타났다. 작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좁은 정상 마당에 산이름표가 동판으로 박혀 있다. 이 산 아래 약수가 많이 솟는다 하여 붙여진 산 이름이다. 긴 산행으로 지친 몸에는 빗물도 약수다. 그러니 비가 내린다고 하여 불평만 할 일도 아니다. 만일 이렇게 비도 내리지 않고 햇볕 따가운 날이었으면 아마 이 약수산에 도착했을 때는 갈증으로 엄청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약수로 온 몸을 적셨으니 그 기운으로 이렇게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구룡령(九龍領 1,013 m)
약수산에서 구룡령까지는 급경사다. 1.38 km 로 짧은 거리를 발에 날개 단 듯 빠른 걸음으로 내닫는다. 어디에다 저련 괴력을 숨겨놓았었는가 싶다. 미끄러운 길에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걷다 보니 앞이 훤하게 트이고 좁은 풀밭길 너머로 버스가 보인다. 이번 산행 구간의 종점인 구룡령(九龍領 1,013 m)이다. 오전 2시 10분에 시작한 산행이 13시간 만인 오후 3시 40분에 끝이 났다.
한문희 총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젖은 몸을 씻고 식당에서 뒷풀이 중이라고 한다. 구룡령은 꽤나 높은 고개다. 해발 1,000 미터가 조금 넘는 고개이니 충청도에는 그런 높은 산이 없다. 경기지역에서도 1,000 미터가 넘는 산이라 하면 손으로 꼽을 수 있다. 양장구절 굽이굽이 길게 이어진 고갯길을 한참 달려서야 홍천군 내면에 있는 샘골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는 휴가철에 캠핑장도 운영하고 있어 간이 샤워장도 만들어 놓았다. 개인당 2천원을 받고 들어가서 간단하게 샤워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운물로 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두부전골인지 청국장인지 뜨거운 국물이 목줄을 타고 넘어간다. 주류는 소주와 막걸리로 비주류는 콜라로 또 목을 축인다.
이제 차를 타고 눈만 감고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버스기사 박과장님의 몫이다. 어느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지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 오후 5시에 출발한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를 두 번이나 들르고도 8시에 양재역에 도착하여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