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서원에서 발굴된 금강저와 금강령
서울 도봉구에 있는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고 조광조(趙光祖)의 위폐를 모셨다.
169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없어졌다가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이곳에 서원 이전에 영국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율곡전서에 나온다고 한다,
도봉서원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77점의 불교유물이 나왔다.
12세기 고려시대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 불교유물 중에 밀교의 수행과 의례에서 중요한 불구(佛具)인 금강령과 금강저가 나왔다.
금강령의 윗부분에는 오대명왕이,
아랫부분에는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유물들은 커다란 청동향로에 담겨 있었고 향로 바깥 양쪽에는 동그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사진에는 확실치 않으나 향로 손잡이가 짐승얼굴에 달려 있는지,
향로에 범자가 새겨지진 않았는지 궁금하다.
이번에 출토된 금강령과 금강저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불교문화에서 밀교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불교문화재 중에 경주 불국사와 철원 도피안사. 대구 동화사. 영주 비로사를 비롯한
전국 여러 사찰에 안치된 지권인 비로자나불은 금강계 대일여래이다.
그밖에 석굴암에 있는 11면 관음상. 금강역사상과 사천왕. 오대명왕. 사방불 신앙. 오대산 신앙이 밀교신앙이고,
감은사지에서 나온 사리함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치와 무구정광다라니경도 밀교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의 이름이 금강산(金剛山)이고 주봉이 비로봉(毘盧峰)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 기층문화에까지 밀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번에 출토된 금강저와 금강령에 대해 전문서적의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금강저』
고대 인도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도구로,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불구이다.
금강지저(金剛智杵). 견혜저(堅慧杵) 등으로도 한역하며, 벌절라(伐折羅). 바일라(嚩日羅) 등으로 음사한다.
저(杵)는 원래 제우스(Zeus)의 뇌격저(雷擊杵: 번개))나, 적을 살생하는 무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대인도 서사시인 『리그베다』 속에는 인드라신이 브리르라를 퇴치하는데 금강저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설화가 많이 전해져서 그 힘에 신비함이 전승되어 왔으며
인도의 여러 신과 역사(力士)들이 적을 항복시킬 때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시대가 내려가면서 불교로 수용된 후 금강저는 그 단단함 때문에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으며,
이는 곧 마음의 번뇌를 없애 주는 상징적인 뜻으로 변하여 불교의 법요식에서 금강령과 한 짝이 되어 사용되었다.
나중에 밀교에서는 적을 쳐부순다는 뜻에서 이 무기를 불구로 채용하여,
여러 존상들이 들고 있는 물건의 하나, 또는 수행의 도구로써 사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밀교의 종파에서도 진언(眞言:mantra)을 외우면서 수행하는 자는 항상 금강저를 휴대한다.
그 근본 뜻은 여래의 금강과 같은 지혜로써 능히 마음속에 깃든 번뇌를 소멸시켜 청정한 지혜 광명을 발현시키려는 것에 있다.
밀교의 만다라(曼茶羅:mandala)에는 금강부(金剛部)의 여러 존상들이 모두 금강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
대반열반경』 권3 <수명품>에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가 부처의 신통력을 이어,
금강저로 악마를 쳐부수어 티끌같이 만든다는 내용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신중탱화 속의 위타천(동진보살)은 항상 금강저를 들고 불법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불구의 형태는 손잡이 양쪽이 뾰족한 독고(獨鈷)만 있는 것과
양끝이 2. 3. 4. 5. 9갈래로 갈라진 2.3.4.5.9고저 등이 있다.
처음에는 그 형태가 일종의 무기 모양으로 뾰족하고 날카로웠으나 불구로 사용되면서
끝의 여러 가닥이 모아지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불교 경전에는 금강저 말고도
여래최상금강저(如來最上金剛杵). 분노금강저. 미묘심금강저 등의 이름이 보이나,
이들은 실제 만들어지거나 사용되지 않은 것들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금강저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길이 22cm의 청종5금강저가 있으며
조선시대 금강저는 일반사찰에서 소장한 것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3고저와 5고저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또 고려시대의 사경(寫經). 변상도(變相圖)등에는 가장자리를 금강저문양으로 꾸민 예가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현존하는 신중탱화(神衆幀畵)에서는 대부분 이 불구(佛具)를 찾아볼 수 있다. 내용출처: 『불교대사림』
『금강령』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
종의 형태에 번뇌를 없애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금강저의 형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불교의 의식법구를 말한다.
즉 불교의식 때 소리를 내어 여러 불. 보살들을 기쁘게 해주고 어리석은 중생의 불성을 깨닫게 하여
성불의 길로 이끌어 주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 연원은 인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 밀교의식을 행하기 위한 특수한 법구가 된 것은 8세기 중엽 당나라 때부터이다.
이와 같이 밀교 법구로 출발한 금강령은
늦어도 8세기말 통일신라시대에는 밀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밀교가 하나의 종파로 발전하지 못하고 다른 종파에 습합되는 시대별 추이에 따라
금강령도 점차 종파의 구별없이 일반 불교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손잡이의 형태의 따라
독고령(獨鈷鈴). 3고령(三鈷鈴). 5고령(五鈷鈴). 9고령(九鈷鈴). 보주령(寶珠鈴). 탑령(撘鈴) 등으로 분류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3고령과 5고령 정도만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9고령을 제외한 나머지를 합하여 5종령(五種鈴)이라 하고
금강저와 함께 금강반(金剛盤) 위에 안치하고 밀교대단(密敎大壇)의 중앙 및 사방에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몸체에는 주로 불법을 수호하는 오대명왕(五大明王)을 비롯하여 사천왕(四天王). 범(梵). 석사천왕(釋四天王). 팔부중(八部衆) 등 호법신장상(護法神將像)이 표현되어 있다.
이밖에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용(龍)을 표현한다든가
명왕의 독고저를 교대로 배치한 특이한 형식의 금강령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유형의 금강령은 중국 당. 송대의 금강령과 상통하며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제작되어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티베트 불교의 이색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손잡이 끝에 보살의 얼굴이 새겨진 금강령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얼굴새긴령은 현재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절에서 불교의식이나 제(齊)를 올릴 때 의식법구로 사용하며 요령(搖鈴)이라 부르고 있다.
현존하는 금강령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은
호림미술관 소장의 금강령을 비롯하여 계명대학교 박물관과 전라북도 승주군 송광사에 있는 금강령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