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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3. 간첩사건 조작(통혁당사건) | 정체성/좌익 논단 | 2004/09/03 1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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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카페 : 박사모 (박근혜를 사랑하는 .. / antidebts님 | |
박정희 대통령 통치시절 많은 간첩사건들이 전부 조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먼저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이 사건의 주모자 김종태는 북한 대남사업 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공작금(미화 7만불,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됩니다. 그는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전남로당원, 지식인, 학생 등을 대량 포섭하였으며,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기도하려 하다가 신고에 의해서 일망타진되었죠. 이들을 검거할 때 무장 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 권총 7정과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더 1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 한화 73만여원 등도 함께 압수되었습니다. 검거된 사람들은 모두 158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 종교인, 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중 23명이 불구속됩니다. 김종태는 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후 이문규 등 4명의 사형이 집행되죠. 김종태는 69년 사형과 동시에 북한에서 영웅으로 추대하고, 전국민이 애도의 묵념을 올렸으며, 해주사범대학교를 김종태사범대학교로 개칭하는 등 그를 기리는 각종 행사를 하죠. 2000년에 출간된 ‘곁에서 본 김정일(김영사 간)’ 에서 보면 김정일은 3시간 간부회의 석상에서 이런 말을 하죠. ‘통혁당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태묵의 동생 정태상이 북에 와있는 동안, 정태상의 부인이 그가 없어진 줄 알고 ‘동생을 찾아내라’ 며 정태욱에게 따질 때, 왜 정태상을 허겁지겁 남으로 내려 보냈나?’ ‘그때, 정태상을 내려 보낼 것이 아니라 정태상의 부인을 북으로 데려올 수 있지 않았나? 조봉암도 그렇고 김종태도 결국 조직원 한사람을 관리하지 못해서 아까운 사람들만 잃고 실패한 것이다.’ – 한참을 생각 후 ‘지나간 일은 털어버리고 잊읍시다. 기회는 언젠가는 다시 올 것이며, 그때는 놓치지 않도록 합시다.’ 남으로 내려온 정태상은 공작금 문제로 형인 정태묵과 다투게 되는데, 정태묵에게 화가 난 정태상의 처는 친척되는 검사에게 밀고하게 되고 그래서 통혁당사건의 가담자들이 일망타진되며,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죠. 김정일이 아쉬워하는 통혁당사건이 현재에 와서 박정희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때 당시 단순 가담자 135명은 주동자 23명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 사건의 핵심인물들은 비밀 유지와 간첩으로의 신고을 방지하기 위해 나머지 135명의 참가자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69년 김종태가 북한에서 영웅으로 추대된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으며, 2000년 김정일의 대남공작 실패 분석회의에서 말한 위의 내용도 전혀 모르고 있어서 자신들이 왜곡된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