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이타주의 / 이훈
요즘도 그런 아이들이 있나 모르겠다. 장래 희망을 물어 보면 나라나 민족을 위하여 뭘 하겠다고 대답하는 아이 말이다. 이런 생각을 두고 시비할 마음은 없다.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나라나 민족 같은 거창한 대상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런 태도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뭐든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해야지 내 욕망을 깡그리 무시하면 그런 일이 잘 될 리도 없고 혹시 잘못되면 후유증도 크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몸을 바쳤는데 너희들은 뭐 했느냐는 원망의 소리가 나오기가 쉬운 것이다. 자식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실컷 희생해 놓고서 무심한 자식보고 이러기냐고 억울해하는 부모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먼저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내가 빠진 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따져야 옳다.
이청준의 초기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친구가 아파서 입원해 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위문을 간다. 당연히 친구는 ‘내’ 방문을 고마워한다. 그런데 진실은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려고 병원에 들른 것이다. 어린 마음에는 이런 이기주의가 놀라운 일일지 모르나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게 우리 삶의 발가벗은 진실일지 모른다는 쪽에 서게 된다.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뭔가 모르게 뿌듯해지는 것도 그 일 자체보다는 나도 이렇게 했다는 자족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이기심의 뿌리는 깊다. 이런 걸 경계하려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나왔을 터이다.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대목도 떠오른다. 주인공 이인화가, 속물로 살아가는 형의, “사람 하나 구하는 셈치고” 최참봉의 딸을 후처로 들였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누구든지 저 사람을 행복스럽게 할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좋은 일 같지마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불완전한 ‘사람’으로서는 너무 지나친 자긍(自矜)이겠지요.” (중략)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고 운명의 진로까지를 간섭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잠월(潛越)한 말이요, 외형으로는 아름다우나 사실상으로는 무의미하고 공허한 말이겠지요.” (중략)
“하여간 소위 구제니 자선이니 하는 것을 향기 있고 아름다운 말이나 행위로 알지만, 실상은 사회가 병들었다는 반증밖에 아니 되는 것이올시다. 근본적 견지에서 사실을 엄정히 본다 하면 구제라는 말처럼 오만한 말도 없고 자선이라는 행위처럼 위선은 없겠지요. 만일, 구제한다 하면 무엇보다도 자기를 구제하고, 자기에게나 자선을 베푸는 것이 온당하고 긴급한 일이겠지요.”(염상섭, <만세전>(염상섭 전집 1권), 1987, 민음사, 67-8쪽.)
남을 구한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은폐하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 이를테면 테레사 수녀님의 빛나는 삶을 저 속물의 이기심과 비교하여 읽는 것은 숭고한 인간을 대하는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저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이기심을 채우는 일에 이타심의 너울을 씌우기도 한다. 부모가 자식보고 공부하라고 하면서 늘상 덧붙이는 말을 생각해 보면 된다. 얼른, '너를 위해서지 나 좋으라고 하는 일 아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를 것이다. 정말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고 자식만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
이기주의라고 하면 보통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당연하다. 남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골몰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그만큼 못난 이기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학연, 지연 등에 바탕을 둔 낙하산 인사, 가족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들이 그 구체적인 예다. 잘난 사람들의 갑질도 을을 사람으로 대접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행태다. 소수자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넘어서 배척하기까지 하는 짓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반감을 줄이자면 이기주의 앞에 ‘합리적’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좋겠다. 한마디로, 내가 소중한 존재라면 남도 그렇게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내 이기주의를 실현하려고 남의 이기주의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도 이기주의라는 말이 꺼림칙하다면 개인주의로 바꿔도 좋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세상의 이타주의는 대부분 합리적인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고 해 보자. 순수한 마음으로 동정심이 시킨 일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혹시 내가 불쌍해질 수 있으니까 그때 도움을 돌려받자는 생각으로 보험 드는 기분으로 한 것일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아마 사회가 유지되는 것도 이런 이기주의가 궁극적으로 이타성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진화심리학 같은 데서는 이타주의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안다. 명료하게 의식하지 못하지만 진화의 긴 역사에서 익힌 명령에 따라 남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 데 유리하고 그 결과로 내 유전자를 후손에게 남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기적 이타주의라는 모순어법이야말로 진실을 담고 있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다.
내가 먼저다. 나를 위하자. 그렇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말자. 그들도 자신에게는 소중한 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이 하도록 도와서 겨우 대리만족을 하”면 불행하므로 “남을 도우려면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기보다는 “내가 필요해서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일”이라고 솔직하게 큰소리 치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는 글(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1261754505&code=990000)을 읽고 그럴듯하다며 해 본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