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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일기
이 수 영
■ 큰 아들네 집에 가는 날
2017년 2월 9일 흐리다가 맑다가, 바람도 제법 세게 불고.
오늘은 아산에 있는 큰 아들네 집으로 가는 날이다.
늘 다니는 서실은 며칠간 쉬기로 했다. 열차 시간까지 오늘 오전 시간은 비어 있지만 서실까지 가고 오는데 두 시간을 빼면 글씨 쓰는 시간은 두어 시간 남짓, 그리고 집에 와서 떠날 준비까지 하려면 마음이 바쁘다.
예전 같지가 않다. 어디로 떠나고, 며칠간 머물고 그리고 돌아온다는 것은 그냥 몸만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때마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문제는 깜박깜박 잊혀지는 기억력이다. ‘내가 뭘 가져가려고 했지?’ 금방 생각났던 것도 다시 생각하려면 기다림과 애태움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우선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은 약이다.
언제부터인가 생긴 지병에 관계되는 약은 아침저녁 두 차례, 봉지에 담은 것과 낱알로 된 것 까지 일곱 가지나 된다. 그리고 얼마 전 백내장 수술로 수시로 넣어야 하는 안약 두 가지, 집 떠나면 가끔은 생기는 변비나 소화불량 때문에 준비해야 하는 소화제까지 옛날에는 필요 없었던 약들을, 먹는 시간에 맞추고 날짜만큼 챙기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내의 약까지 합쳐 놓으면…. 그런 생각을 다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으라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그리고 또 준비해야 할 게 있다. 속옷은, 양말은, 갈아입을 겉옷은, 세면도구 등등 뭐가 그렇게 많은지 꼼꼼이 챙겨야 한다.
여행을, 길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시간이 그렇게 즐겁다는데 나는 아니다. 그 모든 삶의 흔적들을 그대로 옮겨간다는 것은 스쿠루지의 영혼이 살았을 적의 모든 탐욕의 흔적들 이를테면 장부와 금고 그리고 귀금속을 주렁주렁 걸고 나타나는 환영을 보는 것 같아 끔찍스럽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없이 훌쩍 떠났다가 그냥 돌아 올 수 있는 당일 여행이나 1박 2일 정도의 떠남이 가장 좋다. 우선은 빈손이라서 좋고, 아쉬울 것이 없어서 좋고, 혹시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도 그쯤은 참다보면 금방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뭔가를 타고 오가는 교통수단이라는 것도 그렇다. 한 때는 그 모든 이동 수단들이 설렘의 대상이고 오가며 보는 차창 밖의 풍경이나 사람을 비롯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고 경이롭기만 했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런 감정들이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또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오고 가는 사이사이에 그리고 머무르는 긴 시간의 사이에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그것, 책이다. 무슨 책을 가져갈까? 며칠 전부터 걱정하다 서점엘 갔다. 책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시내의 큰 서점엘 가면 저자와 책 제목 그리고 목차만 대충대충 보고 지나가도 한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리고 눈과 몸이 피곤해지고 골라야 할 책은 점점 오리무중이다. 한쪽 구석에 앉아 혹시나 하고 집에서 적어온 책의 목록을 훑어본다. 신문이나 방송, 친구의 소개로 적어 놓은 책들의 대부분은 내가 고르고 싶은 책하고는 조금씩 거리가 있다.
책을 고를 때마다. '이것이다' 하고 금방 선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가끔은 동네 문방구를 겸한 작은 서점엘 간다. 거기는 책의 종류가 많지 않으니 꼼꼼히 살펴 볼 여유가 있어서 좋다. 더러는 주인에게 이런 책을 언제까지 준비해 달라고 주문을 하기도 좋다.
마침 책 한권을 쉽게 골랐다, 제목 때문이다. 다른 책은 보지도 않고 계산대로 갔다.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이다. 좀은 철학적이기도 하고 꼭 내 마음의 찌꺼기를 보는 것 같은 제목이다.
그 책을 앞에 놓고 지금 읽고 있는 중이다. 잘했다.
동대구역에서 천안아산역까지 아들이 예약한 기차를 탔다. KTX가 아니고 SRT이다. 수서발 철도가 개통되면서 생긴 이름이란다. 좌석 공간이 KTX보다는 조금 더 넓어진 것 같고 조용하고 안락하다.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다. 사람들만 좀 더 친절하고 남들을 배려할 줄 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지명도 예전하고는 달라졌다. 대구에 새로 생긴 설화명곡역, 화원옥포 IC, 그리고 오늘 지나온 김천구미역과 천안아산역 등의 이름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역 갈등이 빚은 무승부의 이름들이다. 보고 듣는 사람들 마음만 불편해 진다. 더 아름다운 이름은 없었을까? 그리고 오늘 또 처음 본 게 있다. 한때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새마을호가 ITX로 바뀐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많은 이름들이 영어의 이니셜로 부르고 있어서 노년들은 점점 더 소외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DJ, YS, JP등으로 불리더니 이제는 은행이름, 운동경기 팀의 이름 등이 앞다투어 이니셜로 바뀌어 간다. 그러니 수십 년간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들도 새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뭔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길을 가다보면 눈에 보이는 간판의 상당수도 '저기는 뭘하는 곳일까?' 궁금해지는 곳이 많아졌다. 내가 그만큼 늙었다는 것일까? 그 영어의 이니셜이라는 것, 왜 꼭 그렇게 써야 하는지, 더 아름다운 우리말도 많을 텐데 참 황당하다.
아들이 사는 아파트 뒤쪽은 온통 논과 밭이고,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멀지 않은 곳에 손녀 손자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중학교들이 보인다. 그 뒤로 나직한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두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는 금년 겨울에 눈 한번 오지 않았는데 여기는 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간밤에도 눈이 제법 내린 모양이다.
아들 집에 와서도 TV는 잘 보지 않는다. 드라마라는 것은 불륜과 음모와 배신, 그리고 시기와 질투,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고, 뉴스라는 것은 저질 코미디 보다 더한 나쁜 예기들을 종합해서 떠들어 대고 있으니 손자손녀들과 함께 보기는 얼굴이 화끈 거려서 보기 민망하다.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들을 섞어 보낼 수는 없을까?
그래서 볼 것이라곤 곤 내가 골라 온 책밖에 없다. 그리고 산과 나무, 하얀 눈이 논과 밭에 그려놓은 직선과 곡선의 아름다운 그림이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힌다.
밤이 깊었다. 요즘은 책을 조금만 읽어도 눈이 피곤해진다. 오늘 밤엔 잠자리가 바뀌어도 아들집이니 깊은 잠에 들기를 기원해 본다.
- 끝 -
첫댓글 재미있게 쓰신 산행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