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관촌마을 소나무 숲에 누운
소설가 이문구를 만나면서 쓰게 된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쪽지들
박현재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박준,「광장」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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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한자(漢字) 오만 자 중에 무슨 자가 젤 어려운 잔지 알겠나?” / “무슨 잔데요?” / “가운뎃중(中) 잘세.” / “바로 그걸세. 상(上)도 아니고 하(下)도 아니라서 어렵다는 얘기여.” (이문구,『산 너머 남촌에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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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가 분단이라는 계보를 만나면 모든 담론은 안보에 매몰된다. “군대는 갔다 왔고?” “당선되면 북한 먼저 간다며?” 안보는 대개 이런 말들로 시대정신의 무덤이 된다. 한국은 “법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교차하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어떤 법률적 형식도 가질 수 없는 것의 법률적 형식”(조르조아감벤)에 의해 통치된다. 한·미·일 : 북·중·러가 걱정스럽게 얽혀 그 어떤 위상수학도 길을 내지 못할 즈음 태극기와 촛불은 해방 이래 그 거리를 무한으로 벌인다. 이런 날들의 뉴스는 지겹고 역사는 새롭게 될 기약이 없다. 그렇다고 살기 싫다는 말은 말이 안 되어서 길을 떠난다. 문학은 이후를 알게 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괴테의 말은 얽힌 길이 문학으로 선명해진다는 말일까. 누가 호명한 적도 없지만 문학은 모호하고 시급한 상황에 질문과 답을 해야만 해서 읽히지도 않을 글을 쓰는 것처럼 무모해서 숭고한 길을 떠난다. 이문구(1941~2003)의 관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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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아직 소주 맛. 보령(保寧), 차령산맥이 목숨을 다하는 태안반도 어디쯤으로 가야한다. 달리는 차 타이어에 펑크라도 난다면 나는 죽는다. 문명 때문에 손해 보는 게 많다. 한밤중까지 노동을 하게 된 것은 에디슨이 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관촌수필』의 옹점이는 초콜릿을 얻어내려는 속물적 근대를 비판한다. 자신의 정체를 뚜렷이 하는 옹점이는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들을 보게 한다. 자동차의 근대성은 받아들이되 문학만은 자본에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게 옹점이가 한 말. 빨간 신호에서 멈추고 초록 신호에서 가야만 하는, 생태를 끊어버리는 치명적인 동일성은 문학에서 흩어진다. 도로는 거대한 자본의 각축장. 차들은 언제까지 굶주린 멧돼지처럼 날뛸 수 있을까. 나는 탐구하면서 느리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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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대교, 땅 위에 세운 모든 다리 수와 길이와 공법과 다리가 걸쳐진 바다와 호수의 넓이를 계산하면 얼마나 많은 뾰족한 것들이 지구를 뺑 돌아가며 찌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신비주의의 긴장을 잃어버린 지구는 머지않아 쪼개져버릴지도 모른다. 행담도 휴게소, 멀리 당진 앞바다, 공장이라고 해도 좋을 바다 위 알록달록한 크레인들. 바다는 한 눈에 들어올 수 없을 때만 바다다. 푸른색의 바다가 산소를 만들었으므로 바다는 회색 멍이 없을 때만 생명이다. 두 패로 갈라진 갈매기들은 푸른색을 돌려달라며 촛불과 태극기라도 든 것일까. “비록 개펄은 잃었을지언정 아직도 하늘보다 더 넓은 바다가 남아 있다.”(이문구,「해벽」) 그러므로 두 패로 갈라져도 있는 곳이 바다라면, 여기도 갈매기 저기도 갈매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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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의 연속. 늘 선택이 문제다. 중국산이라는 말을 실체화하면 안 좋은 것만을 골라서 수입하는 한국의 얼굴이 보이고, 비싼 물건만을 원하는 아이들을 실체화하면 아이들에게 집중된 광고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탄핵당한 대통령을 실체화해서 내 얼굴을 본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정치다. 정치를 맑게 해야 할 언론과 방송은 말 없는 무수한 입들을 무시한 채 말 같지 않은 말들 사이에서 상대주의라는 그네를 탄다. 나는 그래서 수필에 정치를 얹는다. 나는 수필가다. 바다에 살면서도 수영을 못하는 조개를 그 누구도 물고기로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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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긴 생(有生無生)은 싫다. 짧게 살아도 영원이 되는 삶이 좋다. 살아 있는 동안 꽉 찬 삶이 영원이고 구원이다. 그리 오래 살지 못한 이문구의 삶은 영원이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다시 좌·우로 찢어져 온갖 위협과 독재와 전쟁과 굶주림과 농단으로 어느 쪽이든 힘없는 이들만 불행하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한반도. 이런 상황에서 이념이란 무의미와의 싸움 같아서 입에 올리기조차도 싫어지는데, 하지만 제대로 된 이념만이 이를 극복하는 길이라서, 그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위해 ‘가운데(中)’라는 이념을 실천했다. 문인협회와 작가회의 이사장이라는 양쪽 모두에서 존경받은 그의 이력은 그래서 특별하고, 그런 이력은 이념을 넘어 신화(mythos행위)에 닿는다.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의 마음에 닿는 것이 문학이기에 그는 평생의 아버지로 모신 스승 김동리를 만나러 갈 때 자신의 이념을 집에 두고 갔는지도 모른다. 이문구에서 추구된 전통과 모던의 양립은 먼저 상대를 부각시키거나 혹은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함으로써 대립의 또 다른 한 축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미적 아이러니로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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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는 완전하지 않은 것을 완전하다고 해서 인간정신을 한 줄로 세웠고 헤겔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판단했으며 아인슈타인은 빛의 파동을 통합하려다 소립자론 앞에서 무릎 꿇었다.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을 결합해도 시대는 충분히 절망적인데도 오래된 기념품 같은 확신들은 표현하는 방법을 태극기와 촛불로만 한정 지운다. 그 중심에 자신들의 이념에 충직할만한 권력을 세우기 위해 국민정신을 줄 세우려는 언론과 방송이 있다고 봐도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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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적 거리라는 것으로 보면 말이야. 나체에 대통령 얼굴을 달아도 예술의 눈으로 보면 그건 그러고 마는 거지. 굳이 ‘옷 벗은 마하’ 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말하지 않더라도 그림의 실체는 절대 권력을 풍자한 양태 중 하나일 뿐이고 그에 대한 험담은 새로운 시대담론에 대한 저항이란 말이지. 예술은 기본적으로 상상이고 예술가의 신념은 그 어떤 규범과도 타협하지 않아야만 해. 그래서 예술은 불소추특권. 도덕이 상상을 규정한다? 이봐 K 수필가, 예술의 생명은 욕망의 대립에서 오는 긴장에 있잖아? 표현의 자유가 극단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예술이고. 상상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기나 했겠어? 그런데 왜 자꾸 딱 여기까지만이라며 타자의 표현을 지정하냔 말이야. 지난 번 내게 준 수필집은 전화번호부를 닮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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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의 논리에 있으면서도 경계에 설 줄 아는, 서로의 가치를 또렷이 드러내면서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어느 한 쪽의 이념이 더 좋다는 판단이 아닌 두 이념을 끊임없이 대화로 이끌어 내는, 동일성의 요구라는 초월적 기의들을 미학으로 해체하는, 그리하여 광장에서 종합의 통일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기존의 소설 형식을 내치고 소설과 수필을 동시에 빛나게 해준,『관촌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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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배우러 온 자신의 제자를 성폭행한 시인이 있다. 그가 쓴 시 한 행.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 하나를 붙들고 밤새 울던 바람을 본 적이 있다”(배용제,「바람의 내부」中) 그의 시에 톨스토이의 말을 얹는다.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톨스토이,「인생의 길」中) 다시 시 한 행 얹는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의 눈물은 잊어도 좋습니다”(문정희,「당신의 손가락에 보석이 빛날 때」中) 그렇다면 문정희는 이 시를 조금 다르게 적어야만 했다. 시인이 시를 쓰던 그 순간에 흘렸던, 딱 그 눈물만은 기억하자고. 시인이 시를 적던 그 순간만은 톨스토이니까. 하지만 순간은 순간일 뿐이라서 이미 사라진 시간. 민중을 배반한 시인은 그러므로 전생을 통틀어 시를 쓰는 순간의 연속에 있음으로써만 용서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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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이란 질문에 답을 내는 일. 답을 내서 타인의 욕망에 벽을 치는 일.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이라서 문학은 결국 답을 내야만 한다. 다만 말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소나무 숲에 누운 이문구가 말하는 듯했다.
박현재 tye2020@hanmail.net
2015『선수필』가을호에「내 삶의 동력」을 발표했다.
(2017년 선수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