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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4) - 안드레 / 요 6:8-11
우리 인생에는 모범 답안이 하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모범 답안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열쇠는, 무슨 일을 시도할 때마다, 모두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시도하는 것입니다. 실패는 늘 가슴이 아픕니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실패는 우리의 노력이, 조금 부족했다는 알림판일 뿐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참 매력 있는 일입니다. 힘들고 괴로워 포기하고 싶어질 때에도, 그것을 견뎌 내고 다시 시작하다 보면, 실패는 아름다운 결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겨운 시간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일이나 사건에 대한 포기는,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한 포기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큰 사람과 일등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수년 전 개그 프로그램에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었습니다. 재벌이나 연예계나 체육계에, 스타들을 기억하고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스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스타였지만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순간적입니다. 이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웃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박수를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 박수를 쳐 주면서 사는 것도 행복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과정입니다. 반드시 더 좋은 기회와 축복은 오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 오게 된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 이어 오늘은 안드레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안드레를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 이어 네 번째 자리에 두었지만, 마태나 누가는 안드레를 두 번째 자리에 두었습니다. 마 10:2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눅 6:14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안드레는 두 번째 자리에 있어도, 문제되지 않을 정도의 심성을 가진 제자라는 말입니다. 안드레는 A, B, C 세 팀 중에서, A팀에 속한 제자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핵심 제자 삼인방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그가 열두 제자 중, 예수님을 최초로 만난 사람인데 말입니다. 열정에서 밀렸는지 모릅니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안드레란 이름의 뜻은 의외입니다. ‘남자다운’이란 뜻입니다. 부모가 ‘남자답게 살아라. 대장부로 살아라’ 하는 마음을 담아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름을 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시몬은 히브리어 시므온의 헬라어 음역으로 ‘들음’이란 뜻입니다. 듣는 사람이 되라고 지은 거 같은데, 시몬은 실제로는 듣는 거 하고는 정반대였습니다. 둘째인 안드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드레는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장부 스타일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부드러운 남자였습니다. 당시 남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힘, 강함, 용기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그런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외유내강형 남자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세례 요한을 따랐습니다. 고된 어부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세례 요한을 따라 다녔습니다. 영적인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 관심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눈에 그런 동생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왔는데,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안드레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안드레는 대중적인 사역자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처럼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대신 개인적인 사역을 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다른 제자와 함께 하던 중,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더니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스승의 그 한 마디가 두 사람의 인생을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길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와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요 1:38-40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안드레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만난 후, 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형의 소매를 잡아끌고,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형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요 1:42절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은 시몬과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게바 곧 베드로란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상 이름이 되었습니다. 안드레가 가장 잘한 일은, 예수님을 만난 일입니다. 자신이 한 동안 믿고 따르던 세례 요한을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보낸 몇 시간이, 자신의 전 생애를 바꿔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에게 이 순간은 가장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란 찬양이 있습니다. 부를 때마다 속으로 울컥 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복된 일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내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 것이라
이 세상 살 동안 내가 걷는 길이 때론 험하여서 넘어질 때도
주의 강한 손이 나를 붙드시니 나는 예수님만 주로 섬기며 살리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 다 주의 은혜니
내가 걸어갈 모든 날도 주만 섬기며 살리 오직 예수 이름 부르며 살아가리라
세상 살 동안 내가 걷는 길이 때론 험하여서 넘어질 때도
주의 강한 손이 나를 붙드시니 나는 예수님만 주로 섬기며 살리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 다 주의 은혜니
내가 걸어갈 모든 날도 주만 섬기며 살리 오직 예수 이름 부르며 살아가리라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안드레가 그 다음으로 잘한 일은,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일입니다. 자신이 메시야를 만나고, 그 소식을 가장 먼저 형에게 전한 것입니다. 호기심 천국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게 베드로의 인생을 바꿔놓을 줄, 안드레도 몰랐을 것입니다. 안드레더러 대중 사역을 하라고 했다면, 아마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수천 명을 상대로 설교를 하라고 하면, 무척 부담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도 그런 사역을 하려고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성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각자에게는 타고난 기질이라는 게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자기 성향과 기질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는 거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어색하고 불편해집니다. 안드레가 중심이 된 사역은, 성경에 몇 번 안 나옵니다. 그나마 사소해 보이는 사역들입니다. 크게 드러나지 않은 보조사역들입니다. 안드레는 특히 연결해주는 걸 잘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열둘 중 안드레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그 연결 능력을, 사역에서 십분 발휘했습니다.
또 누구에게 연결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잘못된 사람에게 연결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을 연결해 줄 대상을 바로 알았습니다. 그 대상은 자신이 먼저 만난 메시야였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을 때 너무 좋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얼마나 좋았던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때 자기 형이 생각났고, 바로 형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연결시켜줬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안드레는 물론이고, 형도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후 안드레는 형 베드로와 함께, 종종 예수님 만났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생업을 감당해 왔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영적으로 너무 충만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하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 4:18-20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보아하니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자기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형과 함께 그물질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예수님이 형과 함께 자기를 부른 것입니다. 전에는 스승의 말을 듣고 따라가서 만났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직접 부르신 것입니다. 자신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곧 자신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부르심에 지체하지 않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자신들을 첫 번째 제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형제는 용감했습니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건 예수님께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한테 자기 인생을 올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전 인생을 예수님한테 던지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형을 예수님께 연결해준 사람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예수님께 연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연결해 준 것이 무엇인지는, 요한복음 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 6:5-1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무리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에, 간만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말씀이 영혼에 꿀송이처럼 달았고, 송이꿀처럼 맛있었습니다. 어디 말씀을 한 번 들어보기는 하자는 생각으로 왔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영혼이 감전되었고, 그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장정만 5000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전하시고, 무리는 한 말씀이라도 놓칠까봐 고도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도, 말씀을 듣는 무리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습니다. 마태 14장에 의하면, 고민하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의를 했습니다. 14:15절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14:1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서 건의했습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이 깊어갔습니다. 제자들의 그런 타는 속도 모르고, 예수님은 태연하게 “가기를 어디 가? 너희가 먹을 걸 주면 되지!” 한 것입니다. 이게 능력자의 여유입니다. 그리고는 도리어 제자들에게 숙제를 안겼습니다. 제자들은 그래도 예수님께는 무슨 생각이 있겠지 하고 여쭈었는데, 제자들한테 숙제를 넘겼습니다. 제자 중에는 계산에 밝은 빌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콕 찍어서 물으셨습니다. 요 6:5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머리회전이 빠른 빌립은 바로 계산이 나왔습니다. 요 6:7절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넉넉잡아서가 아니라 최소를 계산한 것입니다. 이백 데나리온도 없고,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도 떡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어땠습니까? 무리가 허기만 달래고, 간단한 요기만 한 게 아닙니다. 마 14:20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배부르게 먹고도 한참이나 남았다는 것 아닌가요. 빌립의 계산적인 믿음이 빗나갔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계산에 밝다는 것을 아시고, 빌립한테 물으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애초 빌립에게 물을 때, 그의 계산이 빗나갈 것도 아셨습니다. 요 6:6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할 때, 빌립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도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도시락 하나를 들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요 6: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분명히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질문을 받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현장으로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그의 손에, 도시락 하나가 들려져 있습니다. 도시락 하나는 장정 5천명을 급식해야 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요 6: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건 누구보다 안드레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리 개념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이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갖다드리고 봤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고 갖다 드렸는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대하고 갖다 드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이 상황에서 다른 제자들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일단 드리고 봤습니다. 안드레가 갖다드린 도시락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천 명의 급식 이적이, 무에서 유를 불러온 기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마중물의 기적이었습니다. 안드레가 마중물을, 예수님 펌프에 부음으로, 기적이 콸콸 솟아난 것입니다. 오천 명 급식 이적에서, 안드레가 대단한 기여를 한 건 아닙니다. 사소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결정적 기여를 한 건 맞습니다. 안드레는 단지 아이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연결시켜드렸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능력이 안 됩니다. 단지 그들을 예수님께 연결시켜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책임지십니다.
안드레가 예수님한테 연결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요 12:20-24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명절에 헬라인들이 예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방인의 뜰에서라도 예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예수님을 자기들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왜 빌립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그 전에 빌립과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운 사람과 친분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충성스러운 직분자와 사귀는 것이 복입니다. 겉도는 사람들 일명 아웃사이더들과 어울리면, 교회생활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보통 때 누구와 어울리고 있는가?’ ‘나는 교회 안팎에서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가?’ 헬라인들이 빌립과 친분이 있었다면, 빌립은 안드레와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빌립이 헬라인들의 부탁을 받고는, 얼른 안드레를 떠올렸습니다. 안드레가 한 동네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요 1: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에게 있어, 안드레는 함께 자란 친구요, 이젠 믿음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크고 작은 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입니다. 어떤 일에도 임의로이 지낼 수 있고, 허물없는 사이입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도 좋지만, 이런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친구의 숫자보다 친밀도가 중요합니다.
죽음 중에 가장 안타까운 죽음이 “고독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내 고독사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이다.’ 고독사에는 고립생(孤立生)이 앞섭니다. 홀로 살아서 고독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엔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고독사’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통상 3일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을 고독사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죽었는데, 3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서,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을 리 없는데 말입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 말고, 부탁을 위해서 말고, 그냥 맘 편하게, 밥 한 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믿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습니까?
빌립의 말을 들은 안드레는,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요 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안드레 아니었으면 들을 수 없었던 말씀입니다. 안드레는 헬라인들까지도 예수님께 연결시켜준 제자였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사람, 없으면 안 되는 사람, 난 자리가 표 나는 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정교회 전통에 따르면, 러시아, 스코틀랜드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의 수호성인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일 먼저 간 곳은 소아시아, 오늘날 튀르키에의 에베소이고,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러시아인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에서 복음을 전한 그가, 그 다음으로 간 곳이 그리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를 합니다. 그가 러시아와 그리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영향을 받았던 그의 제자들이, 스코틀랜드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테네 근처에 있는 아카야 지방의 총독의 부인과 동생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총독은 그런 가족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자기 아내와 동생에게 믿지 말라고 회유했지만, 그들은 끝내 거절을 했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다고 하자, 그에게 복음을 전한 안드레를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후로 X자 형태의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죽기 직전, 총독과 부인을 향해 “죄를 범하지 말고 구원받으라”는 메시지를 남긴 후,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그리스도 예수여, 나를 받아주옵소서. 나는 당신을 보았고,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 안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내 영혼을 평안히 인도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에 안드레 같은 분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처럼, 사도 요한처럼, 바울처럼 유명한 제자는 아닙니다. 안드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안드레의 모습은, 진리를 탐구하며, 진리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던 제자였으며, 묵묵히 예수님을 따르며, 한 사람,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예수님께 인도하였던 제자입니다. 안드레의 인도로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시작되었고,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베드로가 될 수 없지만, 모두 안드레가 될 수는 있습니다. 갈보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제자 안드레처럼, 깊은 진리의 대한 앎을 추구하고, 우리 주변의 한 사람, 한 영혼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2023년이란 간판을 달고 달려온지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별 한 것도 없이, 1년이 지나간 거 같아 아쉽습니다. 앞으로도 달려가야 할텐데, 더 힘을 내게 하옵소서. 달리다보면, 힘이 날 일도 있고, 힘이 빠질 일도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힘입어 끝까지 달려가게 하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안드레의 신실한 생활의 믿음을 본받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묵묵히 교회를 섬기며, 삶의 자리에 어려운 이웃들과 영적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키는 안드레와 같은 삶을 살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어느 것 하나, 안드레가 앞장 서 주인공으로 이름 내며 한 것은 없지만, 모두 엄청나게 좋은 결과를 이뤄냈습니다. 우리들도 안드레처럼, 조용하면서도 귀한 결과를 얻는 예수님 도우미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