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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공동체의 종말론적 해석에 대한 소고(小考)
- 새 밀레니움의 해석학을 기대하면서 - 유승원 (나사렛 대학교, 신약학)
I. 들어가는 말
글을 쓰는 저자는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그들에게 전달하고자, '의도된'(intended) 생각을 문자의 집합으로 구성된 '텍스트'(text)에 담는다. 그래서 역사적 비평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대의 석의(釋義)는 '텍스트'의 저자가 의도했던 바인 '그때의 의미'(what it meant)를 찾아내는 작업을 주 사명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글이던간에 일단 '텍스트'로 고정되는 그 순간부터 저자의 손을 떠나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텍스트'는 저자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자기 운동성을 갖는 독자적 주체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의 독립성은 저자와 독자 사이의 시공(時空)의 간극이 커질수록 그 심도(深度)를 더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를 떠난 '텍스트'는 일단 시공(時空) 속에 묻혀 있다가 자신을 발견하여 읽어주는 독자와 대면하는 순간에 본래의 'what it meant'와는 다소의 편차(偏差)를 갖는 '현재의 의미'(what it means), 또는 '의의'(意義, significance)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텍스트'의 의미(意味, meaning)는 언제나 현재의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의의'를 포함하면서 완성된 형태를 갖게 된다.
더구나 '텍스트'가 성경일 경우, '텍스트'와 독자의 특별한 관계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경향성은 더욱 농후(濃厚)해진다. 개별 저자 또는 기록자의 손을 떠난 글이 '성경'이 되면 그 글의 인간 저자의 본래 의도는 그 중요성이 약화되고 현재 독자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독립성이 강화되며, 따라서 '텍스트'의 역사적 과거의 의미가 희석(稀釋)되고 현재의 독자를 위한 '의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신앙 공동체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현재 중심의 성경 읽기가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現狀)됨'을 넘어서, 요구되는 '당위'(當爲)로 다가온다. 신앙의 공동체는 성경을 지나가 버린 고대의 문헌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통하여 현재 우리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과거 역사 속의 '텍스트'에서 현재 발성(發聲)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하는 문제는 문헌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책인 성경의 주석가로서의 부담을 안고 있는 성서학자들의 영원한 숙제가 된다. 이러한 과제를 안고 신약의 기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성경인 구약을 자신들의 시대와 공동체를 위하여 읽어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 기자들의 구약 읽기는 '역사적 의미'의 축보다는 '현재적 의의'의 축으로 많이 기울어서,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가 저자의 원 의도 파악보다 더 중요시되는 경향을 보이는 해석의 일례(一例)가 되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초기 케리그마의 부활에 대한 증거 자료로서의 구약 해석의 방식, 마태복음의 독특한 성서관이 담겨있는 '정형화된 인용'(formula quotations), 신약의 구약 해석 방법과 일맥상통하는 쿰란 공동체의 '페샤림'과의 비교, 그리고 이들을 종합하는 의미에서 바울의 해석관 등을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며 고대 문헌으로서의 성경을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 말씀으로 읽어야 하는 21세기의 해석학은 우리 모두의 부담이다. 신약에서의 구약 해석에 대한 필자의 연구 졸고(拙稿)가 그러한 부담을 짊어지기 위한 작은 노력의 일환(一環)으로 기여되기를 소망한다.
II. 신약에서의 구약 사용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신자의 부활'에 대한 논란에 답하기 위한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물려받았고 다시 그대로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공동체에게 전해 주었던 신조형태(creedal formula)의 초기 케리그마의 전승을 인용한다. 이것은 현존하고 있는 전승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가 어떻게 구약 성경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경대로 (kata. ta.j grafa,j)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kata. ta.j grafa,j)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후 15:3b-5, 개역)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성경대로"(kata. ta.j grafa,j)라는 문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정적이지는 않다. 성경에 의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예언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 복음에 담긴 대속(代贖)과 구원의 사실에 '일반적으로' 부합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전자(前者)의 해석을 취할 경우, 구약의 어느 부분들이 이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는지 명시하고 있지 않아 여러 추측의 설들만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구약 성경의 해석을 통해 설명하려는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극도로 압축된 교의적(敎義的) 고백에 "성경대로"라는 문구가 두 번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초대 교회가 성경을 현재적 사건과 연관시키는 일에 크게 중요성을 부과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구약에서 읽어보려는 누가의 노력을 시작으로 해서 이러한 초대교회의 구약 해석의 성격을 조명해 본다.
가. 부활과 구약 성경 - 케리그마 전승에 나타난 확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신약 전반에 걸쳐 다양한 해석을 보이고 있고 그에 따른 구약과의 연계도 비교적 궁색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구약에서 '부활', 특히 '메시아의 부활'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고린도 전서 15장 4절의 확언(確言)과는 달리 신약에서 부활을 구약의 구체적인 구절(句節)을 들어 설명하는 시도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예외적인 것이 누가이다. 누가는 케리그마에 포함된 사건들과 구약의 관계를 좀더 분명하게 예언과 성취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난 부활의 예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필연(必然)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되어있던 것이 아니냐?" (ouvci. tau/ta e;dei paqei/n to.n Cristo.n kai. eivselqei/n eivj th.n do,xan auvtou/, 눅 24:26, 필자 역) 필연성을 가리키는 동사 dei/를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27절에 쓰여져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눅 24:27, 새번역).
현재 예수에게 발생한 부활의 사건은 "성경 전체에"(evn pa,saij tai/j grafai/j) 예시(豫示)되어 있고 그것을 예수가 두 제자에게 풀어서 가르쳐 깨우쳐 주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도 구약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상술하지는 않고 "성경 전체"가 케리그마의 사건과 부합하고 있다고 일반적 진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과 성취의 모티브에 대한 천명(闡明)은 실제로 누가복음의 말미를 장식하면서 누가의 예수 이야기의 목적과 결론을 구성한다.
44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너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48이 일의 증인이다. 49보아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눅 24:44-49, 새번역)
이택릭체로 표기된 누가 24장 46a-47b절은 초대교회 케리그마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고 그것은 누가의 예수의 말에 따르면 이미 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46절, ou[twj ge,graptai). 그러한 예언을 담고 있는 곳으로서 '토라'와 (모세의 율법), '네비임' (예언자의 글), '케투빔' (시편이 속한 성문서) 모두를 언급함으로써 히브리 정경의 세 구분을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누가 24장 27절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케리그마가 "모든 성경"에서 예언되었다는 말이다. 같은 의미로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후 솔로몬의 행각에서 한 대중 설교에서는 (행 3:12-26),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을 하나님께서 '미리 선포'(prokath,ggeilen)하셨었고 그것을 이제 성취시키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행 3:18).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경의 어디에 예언되었는가는 그의 설교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대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서 신명기 18:15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거론하면서 그 예언된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3:22-23). 또한 창세기 12장 3절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리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금에 되어진 예수의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3:25). 이것은 누가 2장 41절에서 언급된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죄사함의 회개'를 예언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케리그마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구체적 예언의 문구나 성경의 부분에 대한 직접적 지적은 없다.
나. 예수 부활의 단서 찾기
그리스도의 부활의 구약 예언에 대한 구체적 내용의 지적은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다른 정황에서 이루어진다. 누가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이 구약에서 예언되었다는 것을 거증(擧證)하기 위해 시편 16편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의 해석을 배제하고 시편 16편 자체로만 볼 때는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 시편이 당대에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읽혔다는 증거 또한 없다. 시편 16편은 본래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는 '신뢰의 시'로서, 시인이 자기 수명(壽命)에 합당치 않은 횡사(橫死)에서 건짐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다. 베드로는 시인이 자신의 생명이 보전되리라고 확신하는 내용이 담긴 부분을 (시 16:8-11) 인용한다.
25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ouvde. ... ivdei/n diafqora,n).
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시편 16:8-11을 인용한 행 2:25-28)
베드로가 이 시편의 구절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펴는 논리는 이렇다.
1) 위 시편의 기자인 다윗은 분명히 죽었고 그 증거로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행 2:29).
2) 따라서 밑줄 친 부분의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시신이 썩지 않으리라'는 언급은 다윗 자신 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다.
3) 사무엘하 7장 12-13절에 기초한 시편 132편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맹세하시기를 다윗의 자손을 영원한 왕위에 앉히겠다고 하셨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자신의 후손으로 올 영원한 왕에 대해 그의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행 2:30). 4) 다윗의 후손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 따라서 이 시편 구절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행 2:31-32).
사도행전의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베푼 권면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시편 16편 10절이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행 13:33-39). 이 경우 사무엘하 7장 12-13절의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이사야 55장 3절 후반절을 통해 상기시키고 (행 13:34) 그것을 시편 16편 10절의 '썩음을 당치 않는 은사'에 연결한다.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 13:35-37).
초기 케리그마의 핵심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는 시편 16편이 주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약 문헌 내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서 제시되는 구약의 다른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5장 3b-5절에서 복음의 핵을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강하게 확언하는 것에 비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구약 예언의 실질적 예증은 매우 빈약한 셈이다.
부활에 대한 구약 예언으로 들고 있는 유일한 예인 시편 16편조차도 현대인의 객관주의적 시각으로 판단하건대 흔쾌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가 힘들다.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나타난 논리는 역사-문학적 비평에 익숙해 있는 현대 성서해석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오직 부활의 확실성과 그 경험의 충격을 성경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취한 해석상의 고육지책(苦肉之策)처럼 보이기도 한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주는 시편 16편의 해석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증명의 논리로서 기능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활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소유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현재 그들 가운데 운동하여 경험하는 성령이라는 필터(filter)를 통해 구약의 글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눅 24:32, 45, 고후 3:12-18, 딤후 3:16) 넉넉하게 적절한 해석으로 이해되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감을 갖고 그 해석의 논리를 두 번에 걸쳐 베드로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에 포함시켰다.
케리그마가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구약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추적해내고 그것을 선포하는 일은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화 작업이었고 그 해석의 논리는 사건과 성령의 체험에 기초한 내부인들만이 수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경험이 해석에 선행하며 공동체의 믿음이 텍스트를 주도(主導)하는 경향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발생한 일을 준거(準據)로 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현상이다.
다. 마태의 정형화된 구약 인용 (Formula Quotations) - 기독론적 예언과 성취
예전에 기록된 구약의 내용들이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는 믿음은 베드로전서에서 좀더 극적인 표현으로 고백된다.
예언자들이 이 구원을 추구하고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섬기고 있는 것임이 그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합니다(벧전 1:10-12, 새번역, 괄호 안은 필자 역).
구약을 기록한 선지자들의 글은 선지자 자신들의 시대와 상관이 없고 베드로전서를 읽는 종말의 공동체를 위한 예언과 계시였다는 논지이다. 더구나 선지자들은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느 때에 어떤 모양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발생할 것인가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한다(벧전 1:11). 그래서 그 옛날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의 중심 축은 자신들의 시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취되고 선포된 베드로전서의 시대이다(벧전 1:12).
이처럼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끌어당기는 종말론적 해석은 케리그마의 핵을 이루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구약에서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삶과 사역의 이야기 전반, 그리고 그로 인한 공동체의 경험 일반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모티브의 확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마태의 정형화된 구약인용(formula quotations)이다.
(1) 텍스트의 현재화(現在化)
일반적으로 마태는 자료로 사용한 마가복음에서의 구약 인용을 그대로 옮겨오는 경향이 있지만 마가의 것으로부터 변이를 보이는 인용들이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무디 스미스(D. Moody Smith)의 계산에 따르면 4 건의 공식적 인용이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면서 마가와는 차별성을 보인다. 반면에 마태에게만 독특한 공식적 구약 인용은 20건에 달한다.
이 중 11개의 (계산에 따라서는 12개일 수 있음) 공식적 구약 인용을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이 'Formula Quotations'(정형화된 구약인용)이라 명명(命名)하여 구분해 내었다. 이 구약 인용문들은 모두 i[na plhrwqh/| to. r`hqe.n u`po. kuri,ou dia. tou/ profh,tou le,gontoj ("선지자를 통하여 주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기 위하여..." (마 1:22) 또는 이와 근접한 형태의 정형화된 마태의 코멘트를 수반한다.
이 십여 개의 구약 인용과 이에 첨부된 마태의 코멘트는 예수의 탄생, 삶과 사역, 그리고 고난의 전 과정이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마태 공동체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인용을 위해 마태가 고정된 하나의 구약 텍스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마태는 필요에 따라서 히브리 성경과 헬라어 번역 성경을 왕래하며 인용 상황에 적절하도록 비교적 자유롭게 인용문을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주 논란에 붙여지는 마태 2장 6절을 살펴보면 마태가 구약 본문을 인용할 때 구사하는 자유가 잘 드러난다. Kai. su, Bhqle,em( gh/ VIou,da( ouvdamw/j evlaci,sth ei= evn toi/j h`gemo,sin VIou,da\ evk sou/ ga.r evxeleu,setai h`gou,menoj( o[stij poimanei/ to.n lao,n mou to.n VIsrah,l (너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마 2:6, 새번역). 여기서 인용된 미가 5장 2절에 대한 70인역의 헬라어 본문은 (70인역은 5:1) 마소라 텍스트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정확한 문자적 번역이다. 그런데 마태의 인용문은 그러한 구약 본문과 상반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소라 텍스트의 미가 5:2 hd'Why> ypel.a;B. tAyh.li ry[ic'
(유대의 부족이 되기에는 너무 작다)
70인역의 미가 5:1 ovligosto.j ei= tou/ ei=nai evn cilia,sin Iouda
(유대의 부족이 되기에는 너무 작다)
마태 2:6 ouvdamw/j evlaci,sth ei= evn toi/j h`gemo,sin VIou,da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또한 마태는 구약의 tou/ Efraqa (ht'r'p.a) 대신에 Bhqle,em gh/ VIou,da를 말하고 있다. 더구나 마태 2장 6절 하반절은 미가 5장 2절보다는 사무엘하 5장 2절 하반절의 인용이라고 보아야 옳다(밑줄 친 부분은 마태의 인용문과 일치하는 부분임).
마태 2:6b evk sou/ ga.r evxeleu,setai h`gou,menoj( o[stij poimanei/ to.n lao,n mou to.n VIsrah,l.
사무엘하 5:2b kai. ei=pen ku,rioj pro.j se, su. poimanei/j to.n lao,n mou to.n Israhl kai. su. e;sei
eivj h`gou,menon evpi. to.n Israhl.
미가 2:6b evk sou/ moi evxeleu,setai tou/ ei=nai eivj a;rconta evn tw/| Israhl kai. ai` e;xodoi
auvtou/ avpV avrch/j evx h`merw/n aivw/noj.
이것은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이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되어 있고 그것이 이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다. 마태는 구약의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오지 않고 인용문에 자신의 해석을 섞으며 두 다른 곳에서의 부분들을 한 곳에 혼합시키고 있다. 만일 마태가 히브리 원문을 번역하여 인용을 하고 있다면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번역과 동시에 재해석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마태의 이러한 작업은 몇 가지 명제의 논리적 고리에 바탕하고 있다.
1) 마태의 성경, 즉 구약 성서는 역사 속의 기록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초역사적 문헌으로서 그 안에 담겨진 단어와 문장들이 예언의 말씀으로 기능한다.
2) 마태가 알고 있는 예수의 사건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신 일이다.
3) 그렇다면 예수의 사건은 예언의 말씀인 구약 성서 어딘가에 기록이 되어 있다.
4) 그래서 성경 내의 단어와 문장들은 예수의 사건에 맞도록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태는 '예언-성취'의 연결을 위해 성경을 뒤지는 천국의 서기관이 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개역: 서기관)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 13:52, 새번역). 도우브(J. W. Doeve)는 구약과 예수의 사건을 연결시키는 마태의 작업을 암시하고 있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이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의 상황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가져온 옛것 옆에서 이제 이전에는 가르침을 받거나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새것의 주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즉, 자신의 성서 주해(註解)가 이전에 얻었던 것들과는 차별성이 있는 결과를 산출해 낼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 본 베드로전서 1장 10-12절에 담겨진 종말론적 해석의 모티브이다. 마태의 공동체를 위해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새로운 시대를 연 하나님의 사건이고 옛 책, 즉 구약의 문헌들은 자신의 시대와 사건을 가리키는 예언으로 환원된다.
(2) 모형론(模型論)으로서의 예언과 성취 모티브
마태의 정형화된 인용은 소위 모형론(模型論, typology)에 입각한 해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형론적인 설명도 현대의 주석가들이 느끼는 어색함을 말끔하게 씻어주지는 못한다. 모형론이 갖는 설득력은 이미 자신들의 믿음 안에서 구약을 보는 마태와 그의 공동체를 위해서만 기능하는 내부용(內部用)이다. 마태의 신학적 적(敵)이나 외부인이 모형론에 의해 기독론적 설득을 당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마태는 정형화된 구약인용문 중에서 네 개의 경우를 종말론적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다 (2:5-6; 8:17; 12:18-21; 21:5). 위에서 살펴본 2장 5-6절의 경우 구약에서 예언의 구절로 여겨지는 부분을 골라잡지만 원문을 변경, 혼합하는 경향을 보였다. 마태 8장 1-17절과 마태 12장 15-21절은 이사야의 종에 대한 구절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경우 이사야서의 텍스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기술(記述)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올 어떤 인물에 대한 기대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마태는 구약의 이 구절들을 오실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보고 있다. 마태 21장 5절의 스가랴 9장 9절은 본문의 성격상 종말론적 기대를 담고 있는 텍스트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이 네 경우는 본래 성취를 기대하고 있던 예언의 구절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는 믿음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 마태가 예수에 대한 약속-성취의 도식을 이 구절들에 적용하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 독자들의 의아심을 불러일으키는 마태 2장 23절의 Nazwrai/oj klhqh,setai도 직접적 예언과 성취의 범주로 분류하면 설명이 가능해 진다. 이 구절에서 예언의 주체를 가리킬 때 복수형 tw/n profhtow/n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건드리의 설명이 설득력을 갖는다.
여기서는 다른 열 개의 정형화된 구약 인용과는 달리 마태가 한 명의 개별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선지자 전체로서의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메시아의 굴욕과 고난을 예언한 것은 초대 교회와 마태에 의해 사용되어진 시편 22편, 이사야 53장, 그리고 스가랴 11장들을 염두에 둔 복수로서의 '선지자들'이 된다. 마태 26장 56절에서 예수가 체포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수형인 tw/n profhtow/n이 사용된 것을 보면 이 점이 더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Nazwrai/oj klhqh,setai는 구약의 특정 구절이 아니고 당대에 통용되던 경멸 조의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참조, 요 1:46). 이 단어는 그 지정학적 특성과 연계되어 천한 신분을 가리킬 때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마태 2장 23절에서 성취된 것은 이 명칭의 단어 자체라기보다는 그 명칭이 함축하고 있는 2차적 의미, 즉 예수의 비천함이 된다. 그래서 다른 인용문에서는 예언 내용의 서술을 이끄는 접속어로서 le,gontoj가 사용된 반면 여기서는 o[ti가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나머지 정형화된 구약 인용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메시아를 기대하거나 종말론적인 예고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들 중 일부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진술(眞術)이거나 행위의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의 경우 미래에 대한 예고이기는 하나 곧 임박한 역사 속의 사건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마태 2장 15절에서 인용된 호세아 11장 1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가리킨다. 어떻게 이 구절이 예수의 애굽 체류의 사실에 적용이 될 수 있을까?
마태는 이를 인용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i[na plhrwqh/ r`hqe.n u`po, kuri,ou) 성취가 되었다고 말한다. 표면상으로 볼 때 두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예수와 이스라엘 모두 애굽을 떠났다는 사실에서만 공통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애굽에서 나오기만 하면 이 구절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셈이다. 그러나 마태의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서 양 사건을 살펴보기 시작하면 모종의 유비(類比)가 가능해진다.
우선 분명한 출애굽의 유형이 감지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갔다가 바로의 학정으로부터 구출되어 나왔던 것처럼 메시아도 헤롯의 박해 때문에 애굽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나왔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서 또 하나의 출애굽을 기대하고 있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물론 여기서 호세아는 종말론적 또는 상징적 출애굽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새 출발에 대한 기대이고 '새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발생할 사건으로 생각되어졌다. 믿음을 가진 마태의 공동체라면 여기서 기대되는 새 시대의 도래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리킨다. 또 하나의 연결점은 "내 아들"이라는 호칭이다. 이 말은 출애굽기 4장 22-23절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전체 공동체가 단수 명사로 지칭되면서, 한 사람에 의해 다수가 대표되며 한 사람이 다수를 상징하게 된다." 결국, '아들'이라는 표현은 구약 내의 전승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의미에서 앞으로 올 것으로 기대되는 대표적 인물을 가리키는 의미로 발전된다. 마태로서는 당연히 예수를 새 출애굽을 발진(發進)시키는 '순종하는 아들'로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격화 된 이스라엘로 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사건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예수에게 적용이 되는가 하면, 이사야의 구절이 예수의 사건으로 유비(類比)되기도 한다.
소위 모형론(模型論)에 입각한 유비(類比, analogy)의 추적은 가능하다. 그러나 인용의 모든 배경이 마태 복음에 묘사된 사건과 유비를 갖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한 유비를 그린다 하더라도 현대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주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의 것들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유비를 추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 한가지는, 마태와 그의 공동체가 소위 현대적 의미의 모형론에 입각한 해석의 방법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이미 이루어진 고백 속의 확신이 마태의 해석학을 통제하고 주도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모형론에 입각한 유비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 모형론은 마태 공동체의 선이해(先理解)로서의 기독론적 확신의 범주 내에서만 가능한 작용이지 모형론 자체로서 공동체 밖에서도 기능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형론의 원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마태의 구약해석은 공동체의 확신과 경험에서 시작되어 구약의 본문으로 이행된 것이지, 구약의 본문에서 출발하여 현재 마태의 정형화된 인용으로 귀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태와 마태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고정불변의 확신이 구약의 본문들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해석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적용상의 이동(shift of application)" 또는 "텍스트의 변형(modification of text)"도 불사(不辭)한다. 철저한 공동체 중심의 종말론적 해석이다.
III. 쿰란 공동체의 페쉐르(rvp)
이와 같이 공동체의 경험이 중심이 되어 본문을 공동체와 독자의 상황으로 끌어당기는 종말론적 성서 읽기는 신약 공동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사한 현상을 쿰란의 구약 해석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쿰란의 사해문서 중 '페샤림'(myrvp)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18개의 문헌이 있다. 이 '페샤림'은 구약 성서의 개별서들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페샤림'은 구약의 구절들을 쿰란 공동체와 연관된 구체적 사건들에 연결시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쿰란 공동체의 독특한 구약 읽기와 해석 방식을 '페쉐르'(rvp)라 한다.
쿰란의 '페쉐르'는 일정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페샤림의 기본 유형은 '레마'(lemma)를 구성하는 성경 구절이 적힌 부분과 그것에 이어지는 인용 구절 해석 부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불규칙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해석 부분은 rbdh rvp 또는 wrvp로 시작된다. 쿰란의 독특한 성경 해독 방법의 이름이 된 이 rvp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히브리 단어로서의 rvp는 구약에서 오직 한번 전도서 8장 1절에서만 등장한다. rb'D' rv,Pe ymiW ~k'x'h,K. ymi (지혜자와 같은 이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전 8:1a). 쿰란의 문서에서는 주로 숨겨진 성경 구절의 뜻을 해석하는 작업에 이 단어가 사용되어 학자들의 다양한 번역을 낳았지만, 전도서의 구절에 기초해 '해석'(解釋)이란 말로 옮기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도입부 다음에는 레마의 성경 구절에 있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쿰란 공동체와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과 연결시키는 해설의 작업이 뒤따른다. 하박국 2장 4절에 대한 '페쉐르'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보라, [그의 영혼은] 교만하며 올곧지 못하다(합 2:4a).
그것의 페쉐르(rva wrvp)는 [악한 이들이] 자신들의 죄업을 배가하며, 그들이 심판받을 때에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뜻한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에 의해 살 것이다(합 2:4b).
그 페쉐르는(l[ wrvp), 고난 때문에, 또한 그들이 의(義)의 선생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의 집'으로부터 구원해 내실, '유다의 집' 안에서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1QpHab 7.14-8.2)
먼저 성경 본문의 한 문장이 인용되고 정형화된 도입 단어인 rvp와 더불어 그 구절에 대한 해석이 이어진다. 해석이 완료되면 다시 성경의 문장이 인용되고 같은 형식의 해석이 뒤따르는 양태이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바벨론에 대한 하박국의 예언은 그대로 쿰란 공동체의 역사적 사건들에 적용된다.
바벨론에 대한 묘사는 (합 2:4a) 쿰란 공동체의 적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의 전조(前兆)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믿음으로 살게 될 이스라엘의 의인(義人)은 (합 2:4b) 쿰란 공동체의 신실한 구성원들이며 그들의 믿음은 '의(義)의 선생'에 대한 신뢰가 된다. '의인이 살리라'라는 말은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그 무리들로 인해 발생하는 현재의 고통에서 구원받을 '유다의 집', 즉 쿰란 공동체의 미래적 소망을 가리킨다.
'레마'와 해석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 방식은 다양하다. 호르간(Horgan)은 네가지로 분류된 페쉐르 해석의 방식을 발견한다.
1) 레마의 구절에 있는 행위, 생각, 단어들과 유사한 현재의 상황을 찾아 맞추어 설명한다(1QpHa b 2.10-16; 2.16-3:2, 4QpIsaa 7-10 iii 15-29, 4QpNah 3-4 i 4-6 등).
2) 레마의 기술(記述)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어근, 개념 등의 연상(聯想) 작업을 통해 현실 상황에의 적용을 유도한다(1QpHab 1.10-11; 4.9-13; 4Qp Isad 1.1-3, 4QpHosa 2.14-17, 4QpNah 3-4 ii 1).
3) 레마에 있는 인물이나 사건과 은유적인 동일시(同一視)를 유도하기도 한다(1QpHab 1.12-13, 11.17-12:26, 4QpIsaa 7-10 iii 6-13, 4QpPsa 1-10 ii 4-5). 4) 레마와 그 해석이 드러나는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억지로 연결된 느낌을 줄 때도 있다(1QpHab 9.8-12, 4QIsaa 2-6 ii 21-29, 4QpIsad 1.6-8).
이와 같이 성경의 예언이 자신의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믿어 공동체의 관점으로 성경을 끌어당기는 페쉐르의 양태(樣態)를 롱게넥커(Richard N. Longernecker)는 일상적인 표현을 빌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This is that) 방식(方式)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성경 본문의 문장이나 단어를 변경시키기도 하다. 티모씨 림(Timothy H. Lim)은 하박국 주석(1QpHab)에서 원문을 변경시키는 경우를 두 차례 찾아냈다. 쿰란의 하박국 주석 12.1-10에 보면, 하박국 2장 17절이 인용되고 '사악한 제사장'에 대한 페쉐르가 주어진다. 여기서 레마에 인용된 본문과(1a) 해석에서 다시 인용하는 본문이(6b-7a) 다르게 나타난다.
hyrq #ra smxw ~mda ymdm (1QpHab 12.1a)
#ra smxw hyrq ymdm (1QpHab 12.6b-7a)
해석의 재인용에서는 hyrp와 ymdm 사이의 단어들을 생략함으로써 원문의 "사람들의 피 때문에"를 "도성(都城)의 피 때문에"로 읽어 그 내용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악한 제사장'의 사건에 맞도록 조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12.9-10). 주석가가 하박국 1장 13절과 '압살롬의 집'의 옳지 못한 행위를 연결시키는 1QpHab 5.8-12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본문 변경이 발견된다. 하박국 원문에서 두 미완료시제 동사 jybt와 vyrxt의 주어는 하나님이고 두 동사 모두 2인칭 단수를 받고 있다.
그런데, 하박국 주석의 저자는 jybt를 wiiIjybt로 변경하여(5.8) 하나님 대신 '압살롬 집'이 문장의 주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의(義)의 선생'이 핍박을 받을 때 침묵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압살롬의 집'이 된다. 이러한 본문 인용의 유연성(柔軟性)은 쿰란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나름대로의 확신에 연유한다. 자신들과 '의(義)의 선생'이 택한 길이 옳은 길이며,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일하시며 역사하신다는 확신은 성경을 공동체 중심의 '페쉐르'로 읽어야만 한다는 신학적 부담까지 지우게 한 것 같다.
페샤림의 저자들에게 암시되어 있는 논리는 마태에게서 읽혀지는 논리와 유사하다. 그들의 책 토라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와 삶을 위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누구도 이 토라를 범할 수는 없다. 또 한편으로 쿰란 공동체는, 그들의 '의(義)의 선생'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토라의 정통 수호자로서 자신들의 역사(歷史) 경험 또한 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논리상으로 생각해 볼 때, '범할 수 없는 토라'는 '부인할 수 없는 공동체의 경험'과 일치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성경 안에는 공동체의 경험을 예고하는 역사(歷史)의 비밀(~yzr)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비밀을 '의(義)의 선생'에게 알려 주었다 한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마지막 세대에 발생할 일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하박국]에게 언제가 그 때가 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읽는 자가 그것을 서둘러 읽을 수 있도록" 쓰라 했다(합 2:2, 한글 개역,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게"). 이것의 해석은(hrwm li[ wrvp)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인 선지자들의 글의 모든 비밀을 알려주신 '의(義)의 선생'에 관한 것이다(1QpHab 7.1-5).
'의의 선생'으로부터 이 비밀을 전수받은 쿰란 공동체는 그 숨겨진 비밀의 해석자로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 비밀은 이에 대해 기록한 하박국조차도 모르던 것이었고 후에 올 공동체인 자신들을 위하여 예비되고 숨겨진 것이 된다. 따라서 공동체의 계시 경험만이 하박국의 참 의미를 조명하는 등불이 된다. 베드로전서 1장 10-12절에서처럼 선지자 자신은 자신의 시대를 위해 예언한 것이 아니다. 하박국은 쿰란 공동체를 위하여 예언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해석상의 전제는 마태의 '정형화된 구약인용'의 예언-성취의 신념과 유사하며, 그래서 스텐달은 마태의 구약 사용 방법을 "페쉐르 유형"(pesher type)으로 정의했고 롱게넥커는 "페쉐르 처리법"(pesher treatments)이라 명명(命名)했다.
신약과 페샤림은 장르와 형식상 판이하게 서로 다르다. 신약은 내러티브(narrative)나 서신의 형태로 전개되고 이야기 진행이나 주장 서술의 중간 중간에 성경의 인용이 삽입되어 사건과 인물과 개념의 예언 성취를 증명한다. 반면에 페샤림은 주석의 형태를 지니며 성경구절을 읽는데 있어 쿰란 공동체의 인물과 사건이 해석의 열쇠로 기능한다. 하지만 성경을 예언으로 보고 그 예언이 자신의 공동체 속에 성취되었다고 보는 해석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양자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공동체에만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약에서의 구약 사용이 쿰란과 구별되는 점은 기독론적 경험에서 발견된다. 쿰란의 구약 해석은 마카비 혁명이 완수될 때 요나단이 사독계열로 이어지던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면서 생긴 율법 해석의 교리적 갈등을 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페샤림의 주종(主從)을 이룬다.
그렇다면 쿰란은 기원부터가 '해석'의 문제였고 '해석'의 갈등으로 형성된 공동체 내부의 이념적 결속을 목적하는 뒤이어진 '해석'의 작업이 페샤림이 되었다 볼 수 있다. 반면에 신약의 공동체는 해석이 있기 이전에 기독론적 경험이 있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케리그마의 골간에 대한 폭발적 경험이 선행되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해석으로 이행했다. 쿰란의 경우 그들의 종말론적 해석의 배경으로 교리적 '해석'이 있었고 신약의 경우 자신들의 종말론적 해석의 배경에 '기독론적 경험'이 있었다는 것은 양자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될 것이다.
VI. 성경 해석과 신앙 공동체 - 바울의 고백
경험을 배경으로 하는 신약의 구약 해석이었기에, 많은 경우 동일한 구약 본문에 대한 신약 공동체의 해석은 기존의 해석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라는 개별 인물의 우주적 대속의 죽음과 뒤이은 부활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해석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로 신약 공동체는 그들의 기독론적 사건을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성경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기존의 구약종교인 유대교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같은 성경을 놓고 이와 같이 다른 해석이 발생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바울이다. 그리고 이 바울의 설명이야말로 우리에게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성서 해석의 기원과 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도 다른 신약의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모든 것이 구약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약속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미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 (롬 1: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그 복음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은 성경에 의해 증거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조차도 자신이 현재 일면 부인하고 있는 율법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롬 3:21). 율법의 불필요성에 대한 설명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할만큼 바울은 성경에 기초한 설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경은 베드로전서의 고백에 담겨져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해독하는 바울과 바울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창세기 15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이다(롬 4:23-24a).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도 바울의 상황에 적용된다(롬 11:5). 황소에 대한 모세의 지시까지도 (신 25:4) "전혀 우리를 위하여" (diV h`ma/j pa,ntwj) 기록된 것이라 한다(고전 9:10). 또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이다(롬 15:4).
그러나 그러한 성경이 바울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 성경을 선물로 받아 성경의 수호자로서의 사명을 지닌 유대인들이었다(롬 3:2, evpisteu,qhsan ta. lo,gia tou/ qeou/).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나 (롬 2:17-20), 이상하게도 그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하고 있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한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바울 자신은 볼 수 있는 진리를 율법의 수호자라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정작 바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완고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고후 3:14-17, 새번역).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 여기서도 해석을 주도하는 공동체의 경험의 원리를 읽게 된다. 해석이 경험을 유도하지는 않았다. 현재 바울과 신약 공동체의 해석의 결과는 그들이 가진 독특한 케리그마의 경험과 성령의 체험의 확고함에 입각하고 있다.
먼저 경험으로 인한 확신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은 성경의 해석이 뒤이었다. 그래서 경험의 공유가 없이 성경만으로는 그들의 해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들의 경험이 확고부동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게 될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에 대한 예언과 가르침을 성경에서 읽으려면 먼저 주께로 돌아가라는 바울의 순환논리의 권고가 성립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신약 전체를 궤뚫고 있는 구약 해석의 기본 원리가 된다. 독자와 만날 때 텍스트는 살아나는데, 신약의 독자는 기독론적 복음의 경험에서 텍스트를 만나고 텍스트는 신약 공동체의 독자들을 만날 때 새로운 의미로 변형되어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더 이상 '의미'가 텍스트에 의해 갇혀진 실체(實體)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텍스트는 오직 독자 공동체에 의해 읽히고 사용되어질 때만 의미를 갖게 된다."
V. 나가는 말: 신약의 해석학과 우리 시대의 성경 읽기
신약의 기자(記者)들과 그 독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도래한 종말의 시대에서 중심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성경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인용하면서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고전 10:11, 새번역).
말세라고 번역이 된 ta. te,lh tw/n aivw,nwn을 직역할 경우, '이온(aeon)들의 끝들' 즉 '시대들의 끝들'이 되어, 선행사 h`mw/n(우리)을 포함하여 이 구가 속해 있는 관계절 전체는, 두 시대(aeon)의 '가장자리'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닿아 있다는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
바울의 이 말에서 신약의 해석학과 관계해서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건져진다. 양 시대의 중첩(重疊)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우리'라는 공동체이다. 시대의 가장자리들이 만나는 곳은 일반 역사 속의 기계적인 시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창조된 (고후 5:17) 인격들의 구성체인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새 시대를 만난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 새로운 공동체의 경험에 의해 읽힐 때 제 의미를 갖는다는 암시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에 부합(符合)한다.
신약 공동체에게 있어서 성경의 객관적 해석이 신약의 케리그마와 초대교회의 신학을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해석 이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독특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성령의 경험이 선행했고, 현존하는 신약 내의 구약의 해석은 그러한 공동체 경험이 전제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내용의 궤적(軌跡)을 추적해 보았다. 공동체의 경험이 해석을 통제하는 중심 요인이다.
즉, 성경은 '과거의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와 '현재 공동체의 경험' 속에서 역동적으로 해석되었다. 오늘날의 석의(釋義)의 철칙과 같은 역사-문학적 비평에 입각한 과학적 해석 원리가 적용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부 때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긴 세대를 지배하다가 이제는 식자(識者)라 하는 이들의 심판거리가 되어버린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요소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문맥과 배경을 무시한 채 단어와 구절의 유사함이나 연상(聯想) 작용을 통해 본문과 주장하는 논지를 연결시키는 1세기 미드라쉬의 냄새도 농후하다. 현대의 학자들이 보기에는, 특히 신앙공동체 밖의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방식들로 해석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볼 때 성경의 텍스트는, 그 역사적 의미가 그대로 적용되기보다는 당시의 종말론적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해석의 자료로 바로 건너뛰어 사용되었다. 그들은 텍스트가 지닌 고전적 어의(語義)보다는 현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심의 축을 기울였던 것이다.
해석을 위한 고민의 시발점은 그들이 겪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부활'이라는 사건이 있고 나서 제자들은 그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해석을 '강요' 받았다.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간 역사의 사건, 카리스마적인 권능의 분출, 그리고 현재 계속되는 공동체의 경험들은 그들로 하여금 '해석'을 강제하게 했다. 여기에서 기독론적 고백과 그에 부합하는 신약의 구약 해석의 현상이 만들어진다.
새 시대를 맞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리라. 우리는 해석을 강요받는다.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계시, 현대로 이어지는 성령의 운동, 고전적인 조직신학의 설명대로만 진행되지 않는 현실의 역사, 예상치 못했던 인간 세계와 주변 환경의 변화 등에 직면할 때, 우리는 '해석'을 강제당한다. 신약시대의 공동체가 그들 나름대로의 허용된 방법으로 구약의 기독론적, 종말론적 해석을 하나님과 시대로부터 '강요'받아 (당위와 필요성의 압력을 느꼈다는 의미에서) 그 작업을 수행했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역사하시는 케리그마의 주님 안에서 우리 시대에 허용된 석의(釋義)의 원칙에 따라 해석을 '강제' 당한다.
해석의 방법은 변한다. 변하는 해석의 방법들은 그 시대마다 제 기능을 했다. 어느 시대의 것이 특별히 더 옳았다고 평면적인 비교를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anachronistic) 오만이다. 우리의 교범(敎範)이었던 역사-문학적 비평이 각종 신비평(新批評),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의 도전을 받는 것을 보라.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은 독자 공동체의 존재와 반응이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데 있어 주체적 구실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 신약 내의 구약해석과 얼마나 유사한가?
필자는 역사-문학적 비평에 강도 높은 신뢰를 부여하며 그 방법을 골간으로 성서 학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역사가 계속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우리의 역사-문학적 비평 방법이 오늘날의 풍유적 해석방법처럼 조롱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역사비평의 방법을 규범으로 삼는 것도 지극히 시대적 사조에 지나지 않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신약의 구약 사용은 그러한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신약의 구약 해석 방법을 구해내기 위해서 오늘날의 역사-문학적 비평 방법에 부합하는 것으로 짜 맞추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 시대의 계시에 충실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계시에 마음을 열고 해석의 사명을 감당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 시대에 그들에게 역사(役事)하면서 그들의 해석을 통제했던 성령의 인도를 새 밀레니엄을 맞는 이 시대에도 받는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창조적 해석의 참된 자유함이 있기 때문이다(고후 3:17).
출처: 아르케 아키데미
옮긴이: 염 찬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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