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숙 시 10편-시문학2017.hwp
김지숙 시 10편입니다
우안거(雨安居)
가고 오는 것은 길 가운데 있지 않다.
여름비는 길 위에 머물고
길 끝은 견고한 평온에 닿아 있다.
가지런한 돌담길 중간 즈음에 활짝 열린 대문
능소화 물 흐르듯 핀 와편 굴뚝
대청에 오르면 나뭇결 살아있는 대들보 서까래
창호지 발린 띠살문에 고운 햇살 들어와 속살대고
한여름 잠 못 자던 밤이면 맑은 대쑥 베어다 모깃불 피우고
소반의 찐 감자 먹으며 평상에 누워
입 속으로 떨어지는 별과 얘기 나누며 놀던 밤.
돌담장 안 푸른 풀 사이로 난 징검다리 밟으면
비 개인 연못에서 붕어떼 연잎 위로 뛰고
우물 옆 오동나무 아래에는
좁쌀풀 여주 물속새 바랭이풀 줄풀
장독대 지키는 푸른 빛 돌절구 가만히 앉아
뒤 안을 적막으로 수놓던 질경이
댓잎 바람은 동박새의 눈동자를 흔들고
후원 정자 다실에 앉으면, 벌레소리 그윽한 여름
햇살은 낯선 길처럼 늘어선 행복했던
낡은 그네 오늘 이 자리에서 심심하다.
넋 놓고 걷던 일상에서 문득
낯선 담장 너머 들여다 본
그 집의 춘양목 가지에서
그리움이 진잎처럼 깊이 물들고
유년시절 그 날처럼 나를 기다린다
외로움, 물 안의 따뜻한 물
가격표가 없어 팔 수 없어요
외로움을 구매하려면 쪽지를 주세요 쉼표,
런던 던트북스(Daunt Books) 무명소설의 등 뒤에서 찾은 셜록의 눈. 습한 바람에 젊은 삶이 설익다.
구급대원 현장투입 응급 처치된 흔들리지 않는 청춘은 증폭된 새순이다. 이따금 들어 올린 하늘은 삶 아래에 고인 더러운 물을 버린다 격리된 푸른 싹이 물 안에서 자유롭다
화산폭발은 외로움. 화산재로 뒤덮인 폼페이. 제주 용두암 현무암은 일본 강진에 흔들리고, 화강암반 지하420m 삼다수 시장점유율 1위 비슷한 곳의 한라수를 마신다
물방울은 물의 숨 주의사항 수돗물 및 생수 중에도 발암성 환경 호르몬 비스페놀A 검출 북한산 인수봉 화강암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은 풍혈을 찾는다. 그 곳의 따뜻한 물, 서늘한 외로움
빈집
길가에서 내려다보면 마당이 훤히 보이는 빈집 한 채. 마당 넓은 그 집에는 먼발치서 봐도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하다.
자주 지나다니지만 딱 한번 노부부가 마지막 인사처럼 그 집 마당을 정성껏 쓰는 모습을 봤다.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 그 집은 낙엽이 차지했다. 봄이 오면 사람보다 먼저 새들이 다녀가고 뒤 안의 오죽은 대숲을 이룬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 머위 꽃대는 저 홀로 오르고 연산홍이 피고, 햇살이 머물다가는 담벼락에 담쟁이 넝쿨이 벽화를 그린다. 찾아오는 손님은 바람소리뿐.
늘 비어 있는 그 집을 지날 때면 이따금 들깨향이 났다
세월호 구름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다시 보고 숨을 멈추고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말없이 참아 온 세월
얼마나 상심되어 단구동 하늘에
노란 리본을 달았을까
피지 못한 어린 젊음들
이제는 먼 길 떠나간다고
차갑고 냉정한 사람들 머리 위를
맴돌며 꼭 하고 싶었던 말
‘누구든 언제든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기억해
기억해 줘
기억하라고
이밥, 악상기호
병든 어미 마음 아플까(amorevole 애정을 가지고) 제 밥그릇 이밥꽃 수북(alla pollacca 폴로네이즈풍으로) 어미 그릇 쌀밥 소복(agevole 가볍게) 편히 드시게(deciso 똑똑히) 흉년 들자(debile 약하게) 수덕 배곯아 죽고 뒷동산에 묻히네(doloroso 비통하게) 죽어 배곯지 말라고 무덤가 이밥나무 심네.(lacrimoso 비통하게) 이듬해 여름초입, 이젠 쌀밥 먹는다고 무덤가 흰꽃 피다.(eclatant 빛나게) 유진박의 빠른 악상이 밥알처럼 튕겨 달빛 후려친다.(flebile 탄식하듯) 제사음식 만들던 종부(espressivo 풍부하게) 설익었나 밥알 몇개 입에 넣다 시어미 눈 밖에 나서 목을 매다.(estinto 사라진 듯) 며늘아기 한을 푸는 입하(立夏)목. 가난에 다 쓸려가고 홀로 남은 저녁달. 맹물밥그릇 흰달 비쳐 눈으로 먹던 쌀밥꽃. 품삯 쌀밥한그릇 주린 배 움켜쥐고 집 가는 어미(forte 강하게) 산도적 만나 그 밥 지키려 안간힘 쓰는데 음흉한 그 놈 당할 재간 없어 버둥대고(fortissimo 더 세게) 밥소쿠리 못 내려놓네(lamentabiIle 탄식하듯) 진노한 신 벼락치네(wirbel 소용돌이) 산도적 바위 되고 어미는 *타레가의 맑은 음색의 이밥꽃나무(fine, al fine) 되네
*타레가 : 스페인 기타리스트 복잡한 악곡을 기타연주가 가능하도록 주법 개발한 음악인
봄을 씹다
베란다에서 잘 키운
무농약 새싹을 수확하는 날
어느 틈엔가
달팽이가 저 먼저 시식을 했다
초록의 머리가 댕강 떨어진 무순은
허연 목덜미만 쏙쏙 내밀고 있다
달팽이 배불리고 간 자리에
지렁이가 따라 갔나?
달팽이 똥을 지렁이가 먹고
동글동글 흙덩이만 남겼다.
달팽이 지나간 자리마다 초록이 사라졌다
새싹 샐러드 한 접시에 참깨 드레싱 뿌리고
혀의 돌기에 미끄덩 유영하는 물체
불길한 예감에 멈춰 선 혀 끝에서
소근소근 새싹을 갉던 그 달팽이다
달팽이의 웃음 소리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질끈, 쓰고 미끄러운 봄이다
밥, 고시레 고시레
삼대독자 외아들 잘 되라고 *성모암 고시례전에서 새벽마다 기도하던 할머니 쌀 한 그릇 올리고 귀 어둡도록 입이 마르도록 고술해 고시레 고수레 고시래 80평생 그 그릇 비운 적 없다. 나 죽으면 쌀알 입속 가득 채워 다오 젊어서 배 많이 곯아서 저승 가는 길에는 배곯기 싫다시던 할머니. 요즘 밥 굶는 사람 어디 있겠냐고. 뒷말 흐리더니 고두로 담은 하얀 쌀밥그릇 같은 흰 머리 곱게 단장하고 저승길 나선다. 세상의 모든 쌀 다 가져다 밤낮으로 밥을 지어 쌀밥 융단을 깔아드릴게요
할머니 저승길은 대낮보다 환한가요
* 진묵대사와 그 어머니의 영정이 있는 곳
* 고시레는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한 고술해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나온 관습에서 온 말
밥 먹는 풍경
김장하는 날
노오란 속살 잘 절여진 소금기 남은 배추잎 고춧가루 생강 마늘 파 홍당무 붉은 갓. 갓 절인 멸치액젓 까나리 젓갈 토하젓 새우젓 고루 섞어 붉은 양념 살살 버무린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 크게 한술에 떠서 김치 한쪽 길게 쭉 찢어 얹는다. 쌀의 이력들이 하나 둘 내려 앉는다 화포천 친환경 우렁이 농법으로 잘 자란 눈이 산 유기농 밥알들 두 눈이 반짝이고 침샘은 폭발한다.
막 튀어나온 쌀밥 광고.
리모컨 버튼 툭 치니 김치광고 곰삭은 멸치 젓갈 군침 도는 김치 냄새가 온 몸에 밴다.
구매 버튼 클릭 클릭
딩동딩동 택배가 왔어요.
갓담근 김치며 한달치 식량이요. 하얀 레토르트 용기의 반쯤 밥이 된 허연 알갱이들 모임있나요? 전자레인지 정확히 2분 땡 혼밥을 먹다 재봉틀 이빨 새로 삐져나오는 나일론고무처럼 어금니에서 미끌대는 밥알이 도르르 입안에서 롤러코스트를 탄다. 무료 배송 햇반. 설익은 밥알갱이. 영혼이 생략된 밥. 혼자 먹는 밥 TV속 맛있는 밥이 여기 있어요
밥, 숨을 삼키다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박물관 영상실, 너른 벌에서 수확한 볍씨 모아 고슬고슬 화덕밥 짓는다. 뜸이 들 동안 원시인들이 히득대며 짐승춤 친구춤을 춘다 함께 밥(共式)을 먹고 부른 배 두드리며 짐승의 뼈로 만든 피리를 분다 밥을 부르는 춤을 춘다 날짐승 길짐승이 소꼬리를 잡고 뛰놀며 춤을 추고 수렵노동 재현한다
고대 신화, 웅심산 밑 압록강 강가에서 물놀이 하던 하백의 딸 유화는 오색구름 오룡차를 타고 내려온 하늘 임금 아들 해모수가 부르는 사랑의 선율에 이끌렸지만 유하를 버려두고 하늘로 달아난 비겁한 해모수, 기이한 인연으로 금와왕을 만나 그의 아들 아니 알을 낳는다. 그 알에서 태어난 주몽. 일곱 왕자 시샘으로 먼 길 떠나는데, 유화부인 아들 주몽 손에 볍씨 몇 톨 쥐어준다. ‘아들아 쌀이 하늘이고, 밥이 보약이다’.
그래 밥이 보약이고 밥이 박이다. 설렁설렁 톱질하니 툭 갈라지는 누런 박덩이, 흥부집 마당에 쌀밥 자꾸 쏟아진다. 허기진 배 허급지급 채우고도 남은 쌀밥. 동네방네 퍼 나르고 돌아서도 자꾸만 쌓이는 밥이 산이다 흥부네 집은 집밥집 온밥집
산을 오르는 심봉사 어린 심청 밥 동냥 나간 사이 눈먼 아비 눈뜰 욕심으로 공양미 삼백석(供養米三百石)시주 약속한다(엇모리장단) 정녕 아비 눈이 밝아진다면 기꺼이 인당수의 제물 될게요(진양조장단) 몸값으로 받은 쌀가마 소달구지에 싣고 산을 오르는 철없는 아비. 그 아비의 밥이 된 딸
길가다 개미조차 밟지 못하던 맘 여린 아비, 영조가 금주령 내린지 넉달만에. 낙선당에 행차한다. 경패증 뇌벽증 의대증 앓아 휘청대던 세자 의재가 술 취한 줄 알고 뒤주에 가둔 8일 동안. 왕은 불행 불망 불신의 허연 쌀밥 3첩 수라상을 받았지. 아들 의소세손 정과 남편 선을 먼저 보낸 동갑내기 세자빈 혜빈 홍씨는 육포 다식에 하얀 쌀밥 붉디 붉은 다반상을 받고.
산해진미 가득한 붉은 잔치상 차리고 변학도 수청 거절한 춘향 목을 치려는데, 걸인 가장한 이도령은 御史詩를 짓네 ‘금동이 향기로운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소반 맛난 음식과 흰 쌀밥은 만백성의 기름이라’ 변학도 밥그릇을 내동댕이치며 혼비백산 달아나는 뒷꽁무니에 허연 밥풀데기가 수두룩하다
*tacet, tac. 그리고 진도 5.8
오늘을 여는 손끝에 닿는 지진. p파가 낯설다.
지진발생 6시간 전 에어로졸이 숭어떼를 자극하고 몸속에 흐르는 세로토닌. 갈비 구름으로 하늘 뒤덮고 개미더듬이는 광안리 모래사장을 줄지어간다. 모스크바에서 일본지진을 느낀 덤불 여치의 촉수. 쓰쵠성 지진이 일어나기 전, 단무마을 두꺼비떼는 죽음을 불사하고 한 방향으로 갔다지. 열린 지각의 문 아래는 유라시아 판구조 모랑단층 울산단층 양산단층 동래단층 P파의 초동 운동 방향으로 서 있는 이 자리 진원방향으로 따라가는 발끝이 떨리고 살갗이 낯설다
큰 진폭으로 더운 열기가 몸짓하며 다가온 지진파 콩팥 한쪽 떠나보낸 활성단층. 哀悼없는 사랑으로 오래 전에 너를 떠나보냈다. 남은 한쪽의 콩팥, 너를 혹사시켰다 설산같은 두려움 멈춤과 진동 에너지를 번갈아 방출하며 두서없이 살아온 삶 엉금엉금 힘들게 걷던 내 몸을 외면했다 미끄러지고 되튕기며 진동하고 뒤틀리며 상처 입은 나. p파와 s파가 모두 사라지고 지진운도 떠나간 오후. 뭉게구름 속에서 푸른 콩팥 한덩이. 익숙한 발길로 집을 찾는다.
방위각 입사각으로 지진계에 기록된 진앙의 위치 겹겹이 포개진 마음, 송두리째 협곡 속에서 살아남은 험준한 주름살이 단층을 지운다, 나의 떠나보낸 왼쪽 콩팥처럼 단층이 허물어진다 진앙의 거리 굽이굽이 낯선 통증을 희망으로 날 세워온 몸에게 미안하다 진도 2.2 기상청보다 먼저 감지한 지진멀미 튼튼한 판구조물 하나 덧대 야물게 기울어져도 내 삶에 더 이상 지진 없다
* tacet, tac :관현악 악기에서 한 성부가 일시적으로 ‘침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