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편 말씀의 표제를 보시면 다윗의 기도라고 되어있습니다. 앞에서 주로 공동체 시로서 시편을 살폈는데, 오늘 시편은 도움을 구하는 개인시입니다. 고라 자손의 시가 주로 공동체가 모였을 때 불렸다면, 이 시편은 공적으로도 시편을 불렀지만, 개인적으로도 불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특히 이 시는 기도라고합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노래하며, 그분께 기도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먼저1절을 보시면, 시인은 먼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스스로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다윗이거나 혹은 다윗의 계통의 자손이라면 이 궁핍과 가난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영적이고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궁핍함과 가난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 적들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시인은 지금 자신의 궁핍함과 가난함을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신실한 자입니다. 2절을 보시면 자신이 궁핍하고 가난하다고 하면서 무기력한 모습, 불쌍한 모습만 하나님께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자신이 경건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경건하다”보다는 ‘신실하다’ “faithful”로 번역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궁핍함과가난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존과 필요를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단지 자신의 궁핍함과 가난함으로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실함,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자임을 하나님께 기억해 주셔서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고, 계명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려움을 만났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의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을 구원하여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4절 말씀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께 종일 부르짖고, 하나님을우러러 봅니다.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실함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분께만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심을 고백합니다. 나아가 5절에서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기도 응답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분이 인자하시기 때문에, 헤세드, 하나님의 언약에서 성실하시기 때문에응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평소에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자신의 열심과 신실함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성품이 평소에 늘 인자하고, 항상 하신 약속을 지키는 분이심을 알고 있다면,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그분이 나의 요청에 반드시 응답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의 기도와 간구는 어느새 찬송으로 변합니다. 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성품과 능력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신들은 살아있는 신들이 아니라 인간이 모두 만들어 낸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마땅히 그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참되신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통하여서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더 배우기 원합니다. 그것을 행하고 한 마음으로 경외하도록 해달라고 11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분께서 하신 일과 성품을 배워야 그분을 바르게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분에게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과 깊이 교제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는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바른 찬송을 드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알게 되면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하나님께 바른 찬송을 합니다(11-13) 11절은 배우는 것, 아는 것, 행하는 것, 그리고 경외함이한 절에 들어가 있습니다. 배우고 알고, 행하고, 경외함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배움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경외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대한 간구로 돌아옵니다. 14절에서 17절을 보시면 교만한 자들이 자신을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자기의 영혼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럴 때 다시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면서 기도합니다. 15절 말씀은 이스라엘백성이 금 송아지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 떠나겠다고 할 때 모세가 이 백성과 함께 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그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 더디하시고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일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은총의 표적은 일종에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돕는 분이심을 알게 되고, 시인을 미워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께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가장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 가운데 바른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안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붙들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도 전에, 그분을 찬송할 수 있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의 성품을 알고 신뢰하고 기도하고 또 그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는 이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