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가까이 / 곽주현
손녀가 수업을 마치고 왔다. 할머니가 구워 놓은 가래떡을 맛있게 먹는다. 한입 넣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몰라 반만 알아듣는다. 그래도 귀여워서 말 상대를 해주다 소파에 같이 앉았다. 동화책이 한 권 놓여있다. 펼쳐서 몇 장을 넘겨 봤다. 새것처럼 깨끗하다. 못 본 책인 것 같아 다시 표지를 봤다. <내가 나를 골랐어>, 제목이 생소하다. 바코드와 함께 오룡초등학교라고 인쇄되어 있다. 웬 책이지?
학급문고를 읽다가 몰래 가지고 왔나 싶어 너 왜 그랬냐고 다그치니 도서관에서 빌렸다 한다. 이제 갓 입학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도서관에 간 게 믿기지 않아 꼬치꼬치 물었다. 방과 후 활동 시간이 재미없어서 선생님께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하고 빌렸다 한다. 자기 교실과 같은 2층에 있어 쉽게 갈 수 있단다. 녀석이 벌써 그럴 줄 아는 게 기특해서 “내 손녀 똑똑하네.” 하며 꼭 안아 주었다.
아이가 대여섯 살 무렵에 가까이 있는 전남 도립 도서관에 데리고 갔다. 방학하고 집에만 있으면 아이도 돌봄이도 지루해서 나들이 차 그랬다. 그때는 전혀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몇 권의 그림책을 골라보라 하고는 어쩌나 보자 지켜봤다. 책장을 넘기다가 호랑이다 코끼리다 하고 동생과 큰소리로 외친다. 여러 사람이 책 보는 곳이라 다른 친구에게 방해가 되므로 그러면 안 된다고 손을 잡고 타일렀다. 한참 그렇게 놀더니 읽어 달라며 곁으로 온다. 골방같이 꾸며진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이런 좁은 공간을 좋아한다. 그 이후로도 쉬는 날이 많으면 그곳에 가서 몇 번 놀았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을 거리낌 없이 들어갈 수 있었나 보다. 날마다 한 권씩 빌려오라 일렀다. 그러노라면 책과 더 친해지겠다 싶어서다.
집에서도 늘 책과 가까이했다. 탑 쌓기, 집짓기, 징검다리 놓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한다. 읽을 줄 모르니 책장을 넘기며 그림만 보고 자기끼리 이야기를 지어낸다. 책을 그냥 하나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책이 널려져 있으면 좀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지나다니다 보면 발에 걸리고 온 집안이 너저분해서 처음에는 치우라고 닦달했다. 정리하는 버릇을 갖게 하려고 책꽂이에 꽂는 방법을 설명도 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정리해야 해서 애들이나 어른이나 힘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잠자기 전에 한 번만 정리하기로 하고 그대로 두었다.
초저녁에는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실컷 놀다가 꼭 잠잘 시간이 되면 책을 한 아름 안고 할머니 방으로 간다. 이놈들은 내가 읽어 준다고 해도 아내에게만 매달린다. 그래도 그 방면에서는 내가 더 전문가인데 이 녀석들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할머니가 피곤하니 내가 읽어 주겠다고 해도 소용없다. 할머니 양옆으로 턱을 괴고 엎드려서 빨리 읽어달라고 응석을 피운다. 나는 들어오지 말라고 문을 닫아버린다. 서운하지만 별수 없다. 글 읽는 소리와 내용을 되짚어 묻는 아이들의 질문이 엉키어 들려온다. 조용해지기에 다시 내다보니 아내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한다. 벌써 꿈나라다. 거의 밤마다 이렇게 책과 함께 놀다가 잠이 든다.
내게도 책과 친해지게 된 동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먼 삼촌뻘 되는 친척이 우리 집에 몇 년간 같이 살았다. 한국동란으로 부모를 잃고 기댈 곳이 없어 그랬다고 기억한다. 그분은 농사일을 돕다가 가까운 곳에 오일장이 서면 행상을 나갔다. 해가 설핏해지면 언제 돌아오나 하고 자꾸 대문 쪽으로 눈이 갔다. 어떤 날은 저녁 먹고 한참을 놀고 있어도 기척이 없으면 조바심이 나서 몇 번씩 나갔다 들어왔다 했다. 내가 꼭 빌려오라고 부탁한 것이 있어 서다. 삼촌이 돌아와 별말 없이 식사만 하고 있으면 빨리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어떻게 되었냐고 어렵게 물으면 “야 이놈아 지금 배 고파 죽겠다.”라는 말만 하고는 숟가락질이 바빴다.
그러다 짐을 풀어 한 아름 안겨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가 시장에 갔다 올 때마다 스무 권쯤 빌려왔다. 50년대 말쯤이었는데 만홧가게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시골 오일장에도 팔거나 빌려주는 곳이 있었다. 그 만화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밤새 읽었다. 내용은 잊었지만 한 면에 반은 그림, 나머지는 글씨로 채워져 읽을거리가 많았다. 만화도 동화도 아닌 그 중간쯤의 편집이다. 가정이나 학교에 별로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내게는 그게 유일한 독서였다.
하루는 장이 빨리 끝났다며 삼촌이 해가 지기 전에 일찍 집으로 왔다. 그날이 무슨 제삿날이었는지 친척이 많이 모였다. 시끄러워서 만화책을 안고 몰래 사랑채로 들어가 다락으로 올라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아무리 찾아도 내가 보이지 않더란다. 밤 10시가 되어도 안 나타나서 작은 누님이 혹시나 하고 다락을 열어보니 쿨쿨 자고 있더란다. 읽다가 깜박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 났다. 가족 모두가 그렇게 당해도 싸다는 듯 눈총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두어 시간 외출만 해도 한 권은 꼭 가지고 다닌다. 그게 가방에 없으면 허전하다. 국내건 해외건 여행할 때도 필수품처럼 챙겨간다. 한 페이지도 보지 못하고 그냥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그래야 든든하니 어쩔 수 없다. 틈만 나면 무엇이든 인쇄된 것은 잡히는 대로 읽는다. 동네병원에서 잠깐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으면 광고지라도 보고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활자 중독증에 걸린 것 같다. 그랬으면 책 줄이나 봤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고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실속이 없다. 사람들은 독서를 지식 탐구, 정보 수집, 간접 경험 등을 얻으려고 읽는다지만 나는 그저 심심해서 그럴 뿐이다. 책처럼 무료한 시간을 덜어주는 것도 없다. 덤으로 독서는 내 마음 근육을 단련했고 그래서 지금껏 잘 버티고 있다.
미래는 에이아이(AI, 인공지능)가 인간의 생활을 좌지우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아직은 책 보다 인류의 삶을 더 깊고 넓게 탐구할 수 있는 더 좋은 도구는 없는 것 같다. 즉 책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 전달자의 기능을 여전히 이어갈 것으로 믿는다. 자라는 아이, 청소년 특히 내 손주들이 게임만큼이나 책 읽기를 좋아해 주길 바란다.
첫댓글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길 바라는 건 모든 어른의 마음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책을 좋아하니, 손녀분도 분명히 책을 좋아할 것 같습니다.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 독서 교육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벌써 책과 친구가 됐네요. 곽 선생님이 도서관을 자주 데리고 다닌 덕분입니다.
따뜻한 저녁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저는 요즘 느낍니다. 책이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해준다는 것을요. 손자와의 일상이 참 평화롭게 읽힙니다.
책이 선생님 마음 근육을 단련시켰다는 말이 참 좋아요. 손녀와의 알콩달공 행복한 이야기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다정한 할아버지를 둔 손주들이 부럽습니다.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손주들이 할머니께만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걸 보면서, 학생들에게는 전문가 선생님보다 친한 선생님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육아 전문가시네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는 책 읽는 시간! 최고의 교육 인 듯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따뜻해서 늘 기다려집니다.
이번 주는 또 어떤 시선으로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을까요?
육아돌봄이를 하셔야 좋은 소재를 찾아낼 수 있을 텐데요.
조금 더 연장 근로를 생각해 보셔야 하겠는데요. 하하!
멋진 할아버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