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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 시 106:1-12, 롬 12:14-21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선과 악이 세상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구를 뒤덮은 대홍수 때 온갖 동물들이 노아의 방주에 다가왔다. 이때 선도 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노아는 선을 태워주기를 거절했다. ‘나는 쌍을 지어 오지 않는 자는 태워줄 수가 없다.’ 그래서 선은 숲속으로 들어가 제 쌍이 될 상대를 찾아왔다. 그 상대가 바로 악이었다. 그 이후로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악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선하였다. 거기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악이 침입하여 들어옴으로 아름다웠던 세계는 금방 어둠의 세계로 변하고 말았다. 악이 가져오는 것은 시기와 질투, 복수와 파괴, 전쟁과 살인, 혼돈과 어둠이다.
밀턴이 쓴 ‘실낙원’에 보면, 사탄은 천사의 한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그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거기서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사탄은 한참만에 깨어나 이제까지 자기들이 지내던 하늘나라와는 정반대로, 말할 수 없이 어두운 세게로 떨어졌음을 깨닫고 비통해 하면서 다시 하늘나라를 탈환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다가 그들은 지구라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듣고 이 세계를 파괴하고자 그들의 두목인 사탄이 혼자서 에덴동산으로 침입하여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ᅟᅮᆯ 범하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특히 밀턴은 사탄은 복수심에 불타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저기가 비참하게 타락한데 대한 분풀이와 자기들 대신 아름답게 창조된 인간에 대하여 갖는 질투가 그로 하여금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어 놓는다. 사탄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그려 놓은 그림에 먹물을 끼얹으면서 다니는 심술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존재이다. 사탄은 선을 악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이후 이 세계는 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랑과 아름다움과 기쁨과 평화는 시기와 질투와 살인과 파괴로 얼룩이 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선한 세계가 타락하게 된 것을 슬퍼하셨다. 그래서 다시 이 타락한 악한 세계를 선한 세계로 바꾸어 놓을 구원의 계획을 가지시고 차근차근히 역사를 통하여 실현하여 나가기 시작하셨다. 먼저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선을 파괴하는 모든 행동과 그 마음을 악으로 규정하셨다. 사람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악을 피하고 선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만을 섬기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에 깊이 물들어 악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었다. 악의 뿌리는 사람들 마음 속에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여러 차례 그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셨지만 악을 선으로 돌이키기에는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성서에서 악이 아무리 성하여도 마침내 선에 의하여 정복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를 힘쓸 때 당하는 환난과 박해를 못견뎌 하지만 마침내 그들의 의는 보상을 받고야 말았다는 고백을 기록하여 놓았다.
사울왕과 다윗의 이야기는 바로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는 표본적인 이야기이다. 다윗은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가 한번은 전쟁터에서 형님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보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할 때 다윗은 견딜 수 없는 의분으로 그와 맞서게 된다. 거인 골리앗과 소년 다윗이 맞섰으나 신앙으로 무장한 다윗이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단번에 영웅이 되었다. 개선하는 이들을 맞이하는 군중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왕은 곧 이 노래를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날 후로 사울왕은 오히려 다윗을 경계하엿고,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하였다. 다윗이 사울왕을 위하여 수금을 탈 때 창을 던져 죽이려 했던 적이 두 번이나 되었다. 그 계획이 실패하자 딸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불레셋 사람 200명을 죽여 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불레셋 사람 손에 다윗이 죽기를 바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한번은 또 밤중에 몰래 자객을 보내어 다윗을 살해하려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후 다윗은 사울왕을 피하여 여기저기로 피해다니는데, 한번은 엔게디 황무지 굴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데, 3천명의 부하를 거느린 사울왕 일행이 이 부근까지 왔다가 왕이 뒤가 마려워 굴 속에 들어왔다. 이때 다윗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였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은 종을 함부로 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다만 그의 옷자락 일부를 잘라냈을 뿐이다. 사울왕이 볼 일을 마치고 굴에서 나가자 다윗이 뒤쫓아 나가서 벤 옷자락을 보이며 사울왕에게 호소하였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치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사울왕이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말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그리고 사울왕은 돌아갔다. 그러나 그후에도 다시 다윗을 쫓아 사울왕은 여러 곳을 헤매며 다녔다. 한번은 장막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다윗의 부하가 들어가서 왕의 창과 물병을 들고 나온 적이 있다. 그때에도 왕을 죽일 수 있었으나 원수를 직접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그렇게 못살게 굴던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자,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기 옷을 잡아 찢고 저녁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하였다. 정치가들이 가끔 정적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윗은 진심으로 사울왕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그가 조가를 지어 그를 애도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사울과 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삼하 1:19, 23-25절)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걸어 놓았는데, 사울이 처음 그의 도움을 입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특공대를 조직하화여 밤중에 가서 그 시체를 거두어 가져다가 장사를 지내고 위하여 이레를 금식하며 애도하였다. 이 소식을 나중에 전하여 들은 다윗은 그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하 2:5절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이와같이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그것에 대하여 복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그를 대하기를 끝까지 하였고, 죽은 다음에도 변함없는 아량과 사랑을 베풀었다. 다윗 자신에게 여러 가지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지만, 악을 선으로 대함으로 악을 정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신앙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메시야가 바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악을 선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그 신앙 때문일 것이다.
메시야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악의 역사를 빠꾸어 놓으셨다. 그는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하셨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대신에 누구든지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 자신이 이 악의 세력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신 기도는 바로 악을 선으로 대하신 결정적인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거을 뒤집어 말하면 악을 선으로 정복하고 승리한다는 사실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의 인내와 고통이 수반되는 어려운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를 잘 참아 지셨기 때문에 악을 선으로 정복하는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오늘 악을 선으로 정복하고 승리하려면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좋은 본을 보여준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이다. 그는 30대의 흑인 목사로서 흑인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가 미국의 몽고메리시의 한 흑인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해 갔을 때, 그 도시에게 발생한 버스 승차 차별대우 철폐운동에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이 운동은 흑백인 차별대우가 없어질 때까지 그 도시의 모든 흑인들이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그동안 백인들로부터 수없는 협박 전화와 공갈을 받아야 했다. 한번은 그의 집에 백인이 던진 폭탄이 폭발하였다. 흥분한 흑인 군중들이 제각기 흉기를 들고 이곳으로 모였다. 경찰들도 수습할 힘이 없을만큼 많은 군중이었고, 이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킹 목사가 군중들 앞에 나서서 말했다. ‘여러분들 중에 흉기를 가지신 분이 계시면 그것이 원래 있던 곳에 가만히 갖다 두십시오. 우리는 보복적인 폭력으로써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비폭력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짓을 하든지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세기 동안을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음성으로 지금도 외치고 계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증오를 사랑으로 맞아야만 합니다. 자, 여러분, 이 빛나는 모습의 신앙과 빛나는 확증을 가지고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킹 목사의 말이 끝나자 군중들은 큰소리로 ‘아멘’이라고 응답하였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섰더라면 몽고메리의 흑인 인권은동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을 비폭력으로 대함으로 마침내 찬란한 승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악은 체면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날뛴다. 폭력과 사기와 거짓, 부당한 압력과 착취, 그리고 권모슬수를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지만, 선은 언제나 진리를 행하는 것이며, 의를 추구하는 길이요, 사랑의 길을 가야 하기에 악과 선이 맞붙으면 언제나 선이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두들겨 맞고 상처를 받으며 고난을 당할수록 점점 빛나는 것이 선이요, 때릴수록 힘이 빠지는 것이 악이다. 악의 역사를 선으로 바꾸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바로 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본문 롬 12:17-18, 21절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성서말씀대로 우리를 향한 모든 악을 선으로 이겨나가기를 바란다. (1997-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