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에 담긴 얘기 / 최종호
혼자 지내다 무료하면 마실 것을 찾는데 커피보다는 녹차(발효차)를 선호한다. 은은한 맛과 향이 입맛에 맞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찻잎을 따서 덖은 경험이 더 관심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는 생산지와 원두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하나 난 그 미세한 차이를 잘 모른다. 차(茶)는 그렇지 않다. 양을 많이 넣거나 오래 우리면 쓰고, 뜨거운 물을 바로 부으면 떫다. 너무 어린잎으로 만든 차는 싱거우면서도 약간 비릿하다. 적게 덖어도 제 맛이 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과하면 구수해진다. 메마른 땅에서 채취한 것은 떨떠름하고, 그늘과 물기가 촉촉한 곳에서 자란 것으로 만들면 감칠맛이 난다.
찻잎을 따게 된 계기는 강진에 사는 아내 친구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른 차 밭을 가지고 있으며 수제차를 만들어 판다. 오라고 한 날은 경험이 많은 동네 할머니를 고용하여 차를 만드는 날이었다. 우리가 딴 것으로 만들어 줄 요량이었나 보다. 아내와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드는지 유심히 보고 배웠다. 차에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었다. 판매되는 곳은 주로 서울인데 전량 주문 생산한다고 하면서 그 양이 제법 많다고 했다. 그곳에서 찻잎을 따는 일은 그해로 그쳤다. 번잡한 것 같기도 하고 직접 만들면 더 좋을 것 같아서다.
그 이듬해부터는 강진 금곡사 뒤쪽에 있는 야생차 밭으로 다녔다. 후배 부부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절 옆으로 난 숲길에 들어서면 차나무들이 많이 있다. 스님들이 우리를 보아도 제지하지 않아서 마음 편했다. 준비해 간 보자기를 옆구리에 둘러 묶은 다음 주머니처럼 만들어 찻잎을 따서 넣는다.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채워졌는지 궁금하다. 자꾸 웅켜쥐게 되는 데 한 손 가득 잡히면 오지다. 들리는 건 오직 새소리뿐이라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휘파람새가 지저귀는 것만 같다. 점심을 먹으면 소풍을 가서 밥 먹는 것처럼 꿀맛이다.
찻잎은 집으로 가져와 숨을 죽였다가 전용 프라이팬으로 덖는다. 나와 후배는 무명천(나중에는 짚으로 만든 동그란 멍석을 마련함)에 비비고 털어서 말리고, 여자들은 목장갑을 두툼하게 끼고서 고르게 익히고 눌러 붙은 끈끈한 진을 닦아 내는 일을 한다. 그럴 때쯤 온 집안은 차향으로 가득하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색이 짙어진다. 대여섯 번 손을 거치면 푸르던 찻잎이 진한 흑갈색으로 변한다. 크기도 돌돌 말려 아주 작아진다.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피가 확 줄어들어 수제 차 값이 비싼 이유를 알 만하다. 만드는 과정에서 가루가 생기는데 이걸 모아서 우려내면 정말 맛이 기가 막히다.
몇 년 동안 봄이면 그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우리밖에 없었지만 어떻게 알려졌는지 조금씩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해인가 너무 많은 이들이 찾았다. 잎이 나오기가 바쁘게 사람의 손이 탔던지 새 잎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나무가 불쌍하게 보였다. 심지어 벌레들이 차나무 여기저기서 기어다는 것이 보여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 발길을 뚝 끊었다.
그 해에 학운동(증심사 입구)에 사는 지인의 소개로 그 동네의 뒷산으로 갔다. 그런데 오래된 차나무는 많았으나 딸 만한 잎은 많지 않았다. 동네 할머니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으로 보아 손을 많이 댄 것 같았다. 메마른 언덕배기인지라 차 맛도 떨떠름했다. 그 이듬해부터는 화순 만연산 입구에 있는 야생차 밭으로 옮겼다. 그런데 등산객과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편치 않았다. 더군다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허락 없이 임산물을 채취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이후, 한동안 차(茶)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추월산 근처의 학교에 근무하면서 차밭을 발견했다. 2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샘골약수터(추월산 뒤쪽에 있는 유명한 약수터)를 몇 번 오르내리다가 길가에 있는 차나무가 내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숲속 깊숙한 곳에도 많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분위기나 차 맛이 금곡사 계곡과 비슷해서 만족했다. 그런데 사유지 안의 임산물을 채취하면 고발조치한다는 안내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아예 접었다. 차라리 사먹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이제 더 이상 찻잎을 따러 다니지 않는다. 기구도 모두 없애버리고 만드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그렇지만 그 동안 여러 곳을 거친 경험 때문에 차(茶)를 앞에 두고 있으면 찻잔 안에 그동안 겪은 일들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다음, ‘흠’ 하고 코로 내 쉬면 그 향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차(茶)를 멀리할 수 없는 이유다.
첫댓글 옴마, 차 고수셨네요. 그 정도인 줄 몰랐어요.
고수는 아닙니다. 그저 내 손으로 만들어 봤다는 경험이 있기에 관심이 간다는 얘기죠.
오랫동안 커피를 멀리하고 나니 비로소 차의 향과 맛을 느끼게 되었다는 친구가 생각나네요
분명 커피의 매력이 크지만 차의 매력도 이에 뒤지지 않지요. 은은한 맛과 향 그리고 오묘한 색까지 포함되니까요.
선생님이 찻잔을 앞에 두고 여유를 느끼는 장면이 그려지네요.
내 맘대로 녹차 잎을 프라이팬에 볶았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요즘은 차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카페인을 멀리하라고 해서요. 이 얘기는 나중에 풀어내렵니다.ㅎ
저도 발효차를 좋아합니다. 깊은 맛이 느껴지는 것 같거든요. 쑥을 뜯어 쑥차를 만들어 봤는데, 기술이 부족해서인지 쑥 향이 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 배워 다시 해봐야겠어요.
발표차 좋지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쑥차는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답니다.
마감 시간을 넘긴 과제를 하면서 멀리하는 커피를 약으로 쓸까? 하다가 향 좋은 녹차로 바꿨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녹차를 불렀으니까요. 어린 잎을 따서 무쇠 솥에 덖어 말리는 일을 여러 번 하여 우리 곁에 오는
격조 높은 녹차, 녹차향을 다시 찾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녹차 전도사가 된 기분입니다. 분위기에 따라 커피도 즐기고 차도 즐기면 생활이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고수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한때 녹차를 즐겨마신 적도 있으나, 이제는 오직 커피만 마셔대서 뜨끔하며 읽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고수인 척했지요. 찐 고수는 아니랍니다.
매화로 꽃차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찾아봤다가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포기했었습니다. 찻잎부터 정성을 들인 차 맛이 궁금해집니다.
매화 꽃을 차로 만들면 물에 띄웠을 때 꽃이 새롭게 피어날까요? 눈호강하며 마실 수 있겠네요.
선생님, 차도 만들 줄 아시는군요. 능력자.
차향을 아는 사람은 왠지 고품격으로 느껴집니다.
과찬이구요. 그냥 경험이 있는 뿐이랍니다.
녹차 우리러 갑니다.
내 글을 읽고 녹차 우려 마셨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