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48 – 위빠사나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이다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질문 :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면서 바람이 부풀었다가 바람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답변 : 일어남과 꺼짐의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의 빠라마타(paramaṭṭha, 최고의 의미)를 보는 것이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계속해서 알아차려라.
< 참고 >
깨달음의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을 최고의 의미라는 뜻으로 빠라마타(paramaṭṭha)라고 합니다. 더 이상 다다를 것이 없는 궁극의 진리를 빠라마타 사짜(paramaṭṭha sacca)라고 합니다. 이를 최고의 진리,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최고의 진리란 명칭이나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또 최고의 법을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 Dhamma)라고 하는데 최승의법(最勝儀法), 최상의법(最上儀法)라고도 합니다. 이는 최고의 의미를 가진 법을 말합니다.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 Dhamma)라고 하는 최승의법(最勝儀法)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 마음의 작용[五蘊의 受蘊, 想蘊, 行蘊], 물질, 열반입니다. 최승의법은 이 네 가지의 관념이 아닌 실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손은 명칭, 모양. 개념, 관념으로 세속의 진리라는 뜻으로 속제(俗諦)라고 합니다. 하지만 손의 단단함, 부드러움, 축축함, 건조함, 따뜻함, 차가움, 진동 등은 실재하는 현상으로 출세간의 진리라는 뜻으로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이때 모양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고 실재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과연 왜 몸과 마음을 최고라고 하고, 실재를 최고라고 할까요?
제가 처음에 위빠사나 수행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이라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배우는 첫 날 좋은 체험을 하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법에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석서에서 최승의법(最勝儀法)이라고 하는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 Dhamma)라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이것 하나면 위빠사나 수행을 관통하는 최고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법이라는 것이 고작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이라는세 가지는 오온에 불과했고 마지막에 열반이 포함되어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처음에 비밀의 문처럼 생각했는데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차츰 오온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생긴 문제는 오직 몸과 마음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죽음 직전까지 가서 발견한 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이란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12연기란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느낌이 발견되어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처음 발견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림으로써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본 것입니다. 이 실재가 오온의 빠라마타 담마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해탈의 자유는 이 빠라마타 담마가 아니면 이룰 수 없습니다.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존재의 실재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그러면 집착이 끊어진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온에 열반이 포함된 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깨달음이며, 지고의 행복이고,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의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란 관념이 아닌 실재입니다. 이렇게 실재를 알아차릴 때만이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처럼 구도자의 수행대상은 오직 몸과 마음이며 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열반에 이른 것이 바로 빠라마타 담마입니다.
오온인 몸, 마음의 작용, 물질은 유위법(有爲法)으로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열반은 무위법(無爲法)으로 원인과 결과가 없습니다. 몸, 마음의 작용, 물질만 있으면 원인과 결과가 지속되어 괴로움뿐인 윤회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면 집착이 끊어져 열반에 이릅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날 원인이 사라져 태어나는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에 열반이 포함되어야 인생의 고단한 대장정이 비로소 막을 내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열반이 포함되어야 최고의 법에 등극합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에 특별한 비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에나 빠라마타만 붙으면 모든 것에서 최고로 치는 것은 오직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반적 특성이 바로 무상, 고, 무아입니다. 그러므로 빠라마타 담마 안에는 이런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라서 네 가지를 통 털어서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비로운 비밀을 찾기는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비밀이 아닌 비밀입니다. 인간에게 이것 말고는 결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끝내려면 누구나 가야하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간 한국에 위빠사나 수행이 없었던 것은 단지 인연이 닿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수행은 어느 종교인의 수행이 아니고, 어느 불교 종파의 수행이 아닙니다. 오직 괴로움을 해결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것입니다.
2. 질문 : 걱정거리가 생긴 뒤부터 계속 그 생각이 나서 명상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답변 : 수행을 하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수행을 해라.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 즉시 ‘걱정함’ ‘걱정함’하고 걱정하는 것을 알아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망상’ ‘망상’하고 망상하는 것을 알아차려라. 걱정을 시작할 때 걱정이 진행되기 시작할 때 즉시 알아차리면 쉽게 다스려진다. 그러나 걱정의 뿌리가 깊거나 가지가 길게 늘어지면 알아차리는 것으로 다스려지기가 힘들어진다. 문제가 생길 때 초기에 빨리 알아차려야한다.
수행 중에 생기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마라. 까사빠 부처님 시절에 마지막 비구 일곱 분이 도를 얻기 전에는 절대 내려오지 말라는 결의를 하고 절벽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다리를 아래로 밀어버렸다. 다음 날 한 분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이 분이 신통으로 음식을 가져와 함께 먹기를 권했으나 그것을 먹으면 해태심이 생긴다고 모두 거절했다. 다음 날 다른 한 분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분은 도를 얻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모두 천상에 태어났고 그중에 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에 태어나 7살에 아라한이 된 경우도 있다. 그러니 수행 중에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마라.
< 참고 >
걱정은 자기가 걱정하는 것이 좋아서 합니다. 걱정하는 것이 싫으면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항상 좋지 않은 것을 좋아합니다. 걱정하는 것이나, 자기를 비하는 것이나, 남을 비난하는 것이나 모두 좋아서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러한 축적된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축적된 성향이 바로 업의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생각이나 습성도 모두 업의 과보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쌓인 축적된 성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단 한 가지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축적된 성향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축적된 성향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지혜가 나서 축적된 성향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아니고서는 잠재의식이 개선되기 어렵습니다. 걱정도 팔자라고 하는 것은 걱정하는 것을 좋아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고민은 바뀔 수 없는 축적된 성향을 바꾸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는 명칭을 붙여서 걱정을 개념화합니다. 그래서 ‘걱정함’ ‘걱정함’을 두 번을 합니다. 그러면 걱정하는 마음에서 걱정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걱정을 할 때 먼저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걱정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립니다. 이때 콩닥거리거나 무겁거나 현재 있는 느낌을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물론 이때 가슴에서 걱정으로 인해서 생긴 거친 호흡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릴 때 없애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그냥 느낌이 있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이 기분이 좋지 않아도 피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의 압박감이 강할 때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가슴의 느낌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릴 때 처음에는 거친 느낌을, 차츰 중간 느낌을, 나중에는 미세한 느낌이 될 때까지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의 느낌이 고요해지면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때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순간적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새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려야 걱정하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소멸합니다.
걱정이 순간적 소멸에서 일시적으로 소멸한 것도 큰 효과입니다. 다시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계속 똑같이 알아차려서 지혜가 나면 걱정이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완전하게 소멸할 때까지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 다른 조건이 붙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지혜가 날 때까지 계속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걱정하고 살아온 습관이 걱정하지 않는 습관으로 바뀌려면 새로운 질서를 개편하는 지혜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