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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52회. '밀레니엄 특집 역사스페셜 4회연속기획 [大고구려]1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염수의 비밀 ' (2000.01.01.)
52회 : 밀레니엄 특집 역사스페셜 4회연속기획 [大고구려]1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염수의 비밀
밀레니엄 특집 역사스페셜 4회연속기획
[大고구려]1부
방송일: 20000101 조회수 : 8237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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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특집] 역사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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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연속기획- " 大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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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 "광개토대왕 정복 루트를 가다-염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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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오프닝]
(어둠 속에서 서서히 밝아지고 )
역사는 스스로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찾고 묻는 이에게만 대답해 줄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역사를 찾아볼까 합니다 .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또 세계를 향해 열려있었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입니다.
새 천년을 맞아 <역사스페셜>은 모두 4회에 걸쳐서 고구려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나라였는지 또 그 힘은 어디
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MC 뒤로 동아시아 지도가 비스듬히 서고 + 광개토대왕 이미지)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광개토대왕, 그리고 그가 이룩한 거대한 고구려의 영토일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19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20여년 동안 끊임없이 주변 민족을 정복해나간
정복군주였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정복활동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아주 거대했다'고 하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영토를 알려주는 기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고구려의 영토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을 그 동안
우리가 마음놓고 답사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스페셜>이 최초로, 고구려의 영토를 밝히는 현장답사에 나섰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루트를 따라 장장 3만리의 대장정에 오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대장정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광대한 고구려 제국 건설의 주인공, 광개토대왕!
그의 발길은 과연 어디까지 미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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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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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
집안 팬 15 (3초 후)
고구려가 두 번째 수도를 세운 중국 집안시. 고구려는 이곳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웅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사람들 10 고구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이미 13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곳
고구려간판 9 집안에서는 고구려의 이름이 전혀 낯설지 않다.
(좀 보고)
시장 9 그런 도시의 내력 때문인지, 집안의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이들도 조선족이다.
아줌마 -찹쌀떡 6 (세 개에 2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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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벽 10 한편으로 도시화의 물결속에서 고구려의 자취는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거대했던 수도 국내성
성벽 타이트 3 은 지금은 성벽의 일부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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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 가고 3 하지만 도심을 조금 벗어나면 고구려를 만날 수
통구 무덤군 12 있다.( 좀 보고 ) 무려 만 천여기의 고구려 고분이 밀집돼 있는 세계 최대의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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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 비석 9 고구려유적지인 집안에서 취재팀이 찾은 곳은 고구려로 들어가는 비밀의문, 광개토왕비였다.
줌인시작 23 (좀 보고)
비석은 외부인이 촬영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쭉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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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실물틸업 12 높이 6미터 39센티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비석.
비의 네 면엔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한 1700여자의 비문이 빼곡히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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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비석 돌고 12 (3-4초후)
이 비문속에 바로 광개토대왕의 정복루트를 알려주는 단서가 있다.
비문세개로 구분 13 비문의 내용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고구려 건국설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그리고 능지기에 대한 것이다.
정복기사에서 글씨 7 이 중에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기록
화살표-비려줌인 11 여기에는 고구려 서쪽영역을 알려주는 열쇠가 있다. 비려 또는 패려라고도 하는 거란족
정벌이다.
비려정복기사 17 광개토대왕이 거란 정벌에 나선 것은 395년.
비문은 부산부산을 지나 염수가에 있는 세 부락과 6-700영을 부수고 셀 수없이 많은 말과 양을 얻었다고 적고
있다.
네 개의 단서 8 비려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우마군양 6-700개의 영, 염수, 그리고 부산부산.
염수 13 이중에서 가장 확실한 단서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염수 즉 소금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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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싣고 10 (2-3초 후)
아직 그 누구도 확인해보지 않은 고구려의 실체를 향해 탐사단은 지난 6월 첫걸음을 내딛었다.
차안 풀샷 4 고구려 영역을 확인하기 위한 이번 답사에는
서길수 6 학술적인 고증을 위해 고구려 성 전문가인 서길수 교수와
서영수 7 사학계의 고구려사 권위자인 서영수 교수가 동행했다.
지도 12 염수를 찾기 위해 탐사단은 광개토대왕의 정복루트를 따라가기로 했다. 먼저 그 출발지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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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지도 1'30 (10초 정도 보고 )
광개토대왕의 정복루트를 추정하는데는 무엇보다 지형파악이 중요하다. 이것은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위성
사진으로 촬영한 후 원래의 지형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대로 복원한 지도다.
당시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살고 있는 지역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초원지대로 알려져 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 고구려는 서쪽 통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
수도 집안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지만 아랫길은 후대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은 윗길을 이용해서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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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 팬 신성 15 광개토대왕은 집안을 출발해서 혼하를 끼고 무순으로 들어온다. 중국의 철광산지인 이 무순
에는 아주 오래된 산성이 있다.
올라가는 일행 4 지금은 고이산 산성이라 불리는 이 고성은 고구려의 신성이다.
산능선 8 언뜻 보기에도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는 고구려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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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요 자체가 성이예요.
그대로 형태가 보이네요 ,이쪽으로 해서
깁니까?
쭉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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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능선 성벽 8 (2-3초 후)
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은 그 둘레가 4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성벽 6 성벽 밖으로는 가파른 경사가 이어져 쉽게 공략할 수 없다.
요동 팬 신성 8 이렇듯 견고한 성을 쌓은 것은 이곳이 요동벌과 고구려를 잇는 중요한 관문이기 때문이었다.
기록 37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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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이쪽은 서쪽으로 서남쪽지역으로 요동반도를 아우르고 그 다음에 북쪽으로는 길림, 장춘 넓은
평원을 사이에 둔 가장 요충지이고 요기어 얼마 안가면 바로 요하를 만나게 됩니다. 그쪽으로 해 가지고 서북
으로 가기 때문에 이 신성이 고국원왕 때 중국과의 치열한 항쟁이후 또 북방세력과 치열한 항쟁을 했던 그런
지역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지역이 역사사료에도 많이 나오고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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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들어 가고 6 4세기초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 3호분.
벽화, 무장행렬도 12 무덤 속에 그려진 대 행렬도를 통해 거란 정벌에 나선 광개토대왕의 병력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궁수 4 당시 고구려의 군사는 활을 쏘는 궁수
부월수 4 도끼를 사용하는 부월수
창수 5 창을 무기로 하는 창수, 그리고
중갑기병 4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마병이 있었다.
병사들 도열-디졸브 9 그렇다면 먼 원정을 떠나는 광개토대왕의 정벌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군단이 아니었
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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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4초 지도) 14 (4초후)
신성을 출발한 고구려군은 서쪽으로 진군했을 것이다. 탐사단은 신성 서쪽에 있는 요하로 향했다.
요하 팬 18 (2-3초 후)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달리다 보면 큰강이 가로막는다. 요하다. 탐사단이 도착한 요하 중류는 생각보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강가 소들 /강 건너는 12 (보고)
그리고 지금까지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영토를 이 요하동쪽 지역으로 한정시켜 왔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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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 지도 보는 사람들 4 탐사단은 요하서쪽에 있는 고구려의 흔적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섰다.
지도에 기록 나오고 13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요하 서쪽에 고구려성 무려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덧붙였는데,
기록 14 고구려가 요수 서쪽에 무려라성을 두어 요수를 건너는 자들을 감독했다는 것이다.
탐사단은 그 무려라 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을 팬 성 15 (2-3초후 )
요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민시의 한 마을에서 탐사단은 커다란 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성에 물어보는 일행 풀샷 3 대해서 먼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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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말하고 (고구려성이예요, 고구려성 )
4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고구려성이라고 했다.
집으로 들어가고 4 탐사단은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마을 노
노인 보이고 17 인을 만나 보았다.
올해 77세인 리뀌쉬 할아버지는 9 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성의 유래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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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인터뷰 저 성을 고구려 성이라고 부릅니까?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옛날 어른들도 그렇게 불렀습니까?
옛날 어른들이 고구려 성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시대인지는 난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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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서 있고 노인까지 20 (2-3초 후)
리뀌시 노인의 집을 나와 다시 탐문조사를 하던중,길에서 만난 함펑츈 노인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원래는 고구려성이라 불렀지만 나중에는 조선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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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인터뷰 왜 조선성이라고 했습니까?
고구려 사람이 조선사람이니까 조선성이라고 부르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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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가는 일행 8 주민들의 이야기에 확신을 얻은 탐사단은 성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성벽팬 12 (2-3초 후)
옥수수밭 한가운데 남아있는 조그만 성터.
이곳에서 과연 고구려 성의 흔적을 찾을 수
교수 얼굴 4 있을까? (보고)
판축흔적 8 흙을 다져서 쌓은 이 판출자국은 틀림없이 토성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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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판축할 때 이 자세히 보세요, 이 소금기가 있죠. 이렇게 소금기 있는 거예요
판축 자국 10 고구려의 토성은 성벽을 단단히 하기 위해 소금을 섞는다. 그래서 성벽엔 하얀 소금기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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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지금 굉장히 큰 성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넙적하니 돼 있지만 이 넓이 정도로 하면 높이가
지금 이렇게 낮아져서 그렇게 적어도 이것의 세배정도 높아졌다고 봐야돼요. (다음에)
서영수에서 산까지 11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변했지만 원래의 성은 건너편 산까지 이어지는 약 3만평의 거성이
었을 것이다.
벽 파내는 손 7 탐사단은 성에 고구려의 유물이 남아있는지 찾아보았다.
서영수 보고 2 (보고)
기와 보는 사람들 3 (보고)
기와 9 붉은 색의 줄무늬 기와 그것은 바로
집안출토기와와 비교 10 고구려였다. (쭉 보고)
기와 3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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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성의 실체를 발견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우리가 여러 가지 학술조사를 했습니다만 발견한적이 없었고. 또 우리학계에 보고된바도 없었고 이 성도 중국
학계에서 그런 성이 있을거라고 추정했지만은 그 실물을확인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는데 요번 답사에서 성의
실물을 보게 되니까 정말 감개가 무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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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라성팬 (지도 무려라)8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요하 서쪽입구의 고구려성 탐사단은 그 무려성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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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중국인 16 시작단계에서 얻은 의외의 성과는 탐사단에게 앞으로의 여정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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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길 트래킹 12 탐사단은 밤길을 달려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보고)
아침 길 트래킹 12(평원) 요하의 서북쪽엔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계속되고있었다.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탐사단은 이정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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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지도 35 평원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위성지도를 보자.
요하를 건너면 탐사단이 지나온 것처럼 광활한 평원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요동벌을 지나
초원지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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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보이고 8 실제로 평원을 달려온 탐사단의 눈앞에 갑자기 꽤 커다란 산이 나타났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산 입구 3(관광지) 관광지로 이름난 의무려산이다
올라가는 일행 4 요동벌을 달려온 고구려군도 이 산을 만났을 것
산세 9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무려산이 비문에 기록된 부산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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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산에 들어와 보니까 밤나무라든지 소나무 머루 여러 가지 나무들이 울창한데 우리 나라의 꼭
북한산 같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래서 광개토왕때 서북원정을 떠날 때 고구려군사도 저희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쭉 강과 평야를 달려오다가 이산을 만나니까 이산을 부산을 부른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산 위에 올라오니까 더욱 실감이 나고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고구려 군사들이 이 산 북쪽을
통해서 초원지대로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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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전경 4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비문엔 왜 부산부산이라고
초원 10 했을까? (보고)
그것은 또 하나의 산이 있다는 암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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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노루산맥 팬 9 (2초정도 보고)
의무려산을 지나 초원을 달려온 탐사단을
또 하나의 산이 가로막는다. 노노루산맥이다.
정상에 서있는 사람들 5 (보고)
산구릉들 18 (2-3초 후)
단지 세시간 거리에 불과한데도 의무려 산과 노
노루 산맥은 놀라울 정도로 다른 풍광이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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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그 다음 평지를 달리다가 또 산이 나타나다 보니까 나무도 하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단 말이요
이게 그런 산을 원래 부자는 마이너스 부의 효과라 그러잖아요. 마이너스라는 말을 쓰거든요. 거기가 플러스라면
여기가 마이나스라는 형태에서 왜냐면 부산부산이라는 것은 여기 현지 지명이 아니라 고구려군들이 오면서 보는
느낌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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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샷 3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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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MC 위성지도의 화살표를 따라 걷다가 부산에서 멈춰 선다)
저는 지금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나오는 바로 그 부산에 서 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법 커다란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굳이 이 두 개의 산을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기록해놓고 ,그 이름도 부산부산이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대왕의 군사들은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달리다가 처음으로 산다운 산을 만났고 ,
그래서 이 산이 염수로 가는 길의 이정표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비문이 옆에 서고,MC 멘트에 따라 비문 속의 단서들이 표시)
자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비문 속에서 우리는 한가지 단서를 확인했습니다.
염수를 찾기 위한 또 다른 단서는 영 그리고 우마군양입니다.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6-700개의 영을 공격하고
빼앗았다고 했습니다. 이 문장으로 보아서 영이라는 것은 어떤 특수한 지역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가침수 우마군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와 말과 양떼들 언뜻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지역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비문에 나오는 영과 우마군양, 만약 이 단서들이 확인된다면 우리의 목적지인 염수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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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거리+지도(임동) 13 (2-3초 후)
노노루 산맥을 넘은 탐사단은 먼저 내몽고자치주에 있는 임동에 들렸다 . 임동은 천년 전 거란의 본거지였다.
상경성터 팬 12 시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엔 거란의수도인 상경성터가 남아 있다.
현재 발견된 성둘레만 13.5킬로 미터
성벽 6 이 거대한 성은 태조 야율아보기가 스스로 황제
건물 4 라 칭하고 요 제국을 세운지 3년째 되는 해에 건설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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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줌인 9 (2-3초 후)
상경성과 함께 태조 야율아보기의 거대한 릉은 당시 강성했던 요 제국의 힘을 보여준다.
비석 3 그런데 야율아보기가 중원을 통일하고 요제국을
릉 팬 8 건설할 수 있었던 그 비결 속에 바로 염수의 실마리가 있었다.
요사 기록 21 요나라 사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요나라 태조는 강에서 소금을 취해 군에게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강 상중류에는 소금이 많아 모든이가 쓰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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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우리가 일반적으로 요나라 거란민족하면 단순히 유목민족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거란이
세운 요제국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정복왕조입니다. 그당시 단순한 유목가지고 정복한 것이 아니라 바로그
내륙의 소금산지를 장악했기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에 잘 알려져 있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요사나 속통전에
야율아보기가 한성에 남쪽 ,한성에 살았다가 난하 상원, 이것이 시라무렌 상류와 거의 비슷한 지역입니다.
이런 지역으로 소금을 구하러 갔다 이런 기록은 의미심장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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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7 거란족이 소금을 얻은 강, 그곳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정복지인 염수일 것이다.
초원의 양떼들 13 초원을 달리던 탐사단은 비문에 들어있는 하나의 단서를 쉽게 풀 수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우마군양은 초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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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표지판으로 줌인 15 (2-3초)
탐사단은 길 위에서 전혀 뜻밖의 새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이 영자가 바로 비문속의 영이 아닐까
마을로 들어가는 일행 3 탐사단은 영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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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인터뷰 영자, 영자는 여기 마을을 그렇게 부릅니다.
옛날부터 영자라고 불렀습니까?
여기 마을이 생길때부터 영자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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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모는 아저씨 19 이 일대엔 유난히 영자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유목민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유목민들은 천막으로 구성된 일정한 단위의 거주지를 이루며 살았는데 그 거주지를 영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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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전경 4 (보고)
지도 보는 사람들 (현장음 살리고..이 부근인 모양인데요)
지도 13 1930년대 만주진출을 위해 일본이 제작한 이지역의 지도엔 고려 아이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탐사단은 그 고려 아이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차 강 건너고 6 (보고)
들어가는 차 17 왜 이곳에 고려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지,그것이 탐사단의 의문이었다.
(보고)
서영수 걸어가고 여기 고려아이리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혹시 나이 드신 분은 안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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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아저씨 나오고 23 (보고)
탐사단은 마을 주민에게 고려아이리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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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아저씨 인터뷰 고려라는 이름을 강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저쪽에 흐르는 그 강이 고려강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고려아이리라고 합니다.
저강은 언제부터 고려강이라고 했습니까?
그거야 몇천년 전부터 고려강이라고 불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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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3 (2-3초 보고)
탐사단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들어가는 일행 4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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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치즈 3 몇백년전 부터 이 마을에 정착했다는 이 가족은
집안 풀샷 7 몽고족이었다.
부인과 아들 4 몽고족과의 이 만남에서 탐사단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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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인터뷰 아이리가 무슨 뜻입니까?
영자라는 뜻입니다.
아이리를 한자로 번역하면 영자입니까?
몽고말로 아이리는 마을이란 뜻이고 그게 바로 영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리(영자)에는 몇가구 정도 삽니까
일반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지만 15가구 이상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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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경 2 아이리는 15가구 이상의 마을, 즉 비문 속의
악수하는 일행 3 염수였다.
쳐다보는 할머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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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강 24 중국 대륙 깊숙히 남아있는 고려마을과 고려강 끝내 그 유래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탐사단의 뒤로 남아있는 마을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초원의 양떼들 5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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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15 탐사단은 다시 염수를 찾기 시작했다.
먼저 시라무렌강 유역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보고)
아저씨 7 하지만 변변한 길도 없는 초원에서 강으로 가는 길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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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 11 (4-5초 보고)
탐사단이 겨우 도착한 시라무렌강은 흙먼지 날리는 길이 되어 있었다. 건기에는 이렇게 강물이 말라버린다고
한다.
시라무렌강 중류 4 시라무렌강을 따라 중류에 이르자 이상하게 생긴
나무보이고 8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보고)
논 팬 황무지 9 그리고 그 인근지역엔 초지 옆으로 드문드문 버려진 황무지가 보였다.
검은 흙 8 검게 죽어버린 땅, 탐사단은 발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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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인터뷰 왜 여기에 옥수수같은 작물을 심지 않습니까?
소금 때문에 곡식이 되지 않습니다.
어 소금기 있어서 안 된다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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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파보고 21 땅이 버려진 이유는 바로 염분 때문이었다.
풀이 덮인 땅도 조금만 파보면 염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엔 이렇게 강알칼리성 소금땅이 집중적으
하얀 땅 팬 5 로 분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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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 팬 차 7 탐사단은 염수에 대한 더욱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소금호수 7 시라무렌강 북쪽의 초원지역 천연호수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공장이 있었다.
염전호수 팬 11 20미터 깊이의 이 호수를 모두 소금으로 만들면
무려 3천 톤에 이른다고 한다. (보고)
소금으로 가는 일행 2 거란이 장악한 소금산지는 바로 이런 곳이었을
소금 맛보는 교수들 9 것이다. (보고)
소금,기계로 싣고 10 그리고 소금이 나는 강과 호수를 광개토대왕은 염수라고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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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지도 줌인 시라무렌 20 (3-4초보고)
결국 광개토대왕이 만 오천리 길을 달려가 거란족을 정벌한 곳은 염수 즉 시라무렌강 중상류지역 인근에 있는
초원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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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 3]
우리는 드디어 광개토대왕의 정복지인 염수를 찾았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바로 이 염수 지역에 살고 있는 거란족을 정벌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얻어왔던 것입
니다.그런데 아직 한가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이곳을 정벌한 것이 단순히 거란족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나 또는 말을 얻기 위해
서였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쪽에 기록 뜨고)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유 遊觀土境 田獵而還)
자 이 것은 정벌을 마친 후, 광개토대왕이 돌아온 길을 기록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양평도를 지나 0성. 역성, 북풍, 오비해로 와서 고구려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고구려로
돌아왔다."
이 역성, 북풍 ,오비해는 어디일까요 ?
(지도에 지명 표시되고, MC 지도 보며)
북풍과 오비해의 위치를 추정해보면 광개토대왕은 이렇게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을 따라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정에서 승리한 후 수도로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굳이 이렇게 먼길을 돌아서 개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지도에 후연 등 동아시아 지도 표시된다)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 너머엔 후연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연과 고구려는 한마디로 깊은 원한관계에 있었습니다.
(mc 로 줌인)
이 후연을 세운 선비족 모용씨는 광개토대왕이 거란 정벌에 나서기 50여년 전.
고구려의 수도를 공격해서 궁궐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을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고조 할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까지 가져갑니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거란정벌을 마치고 이 길로 돌아온 것은 후연에 대한 무력시위였고
이것은 바로 후연을 공격하기 위한 서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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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삼국사기에 기록 14 (2-3초 보고)
광개토대왕의 거란정벌 후 후연과 고구려는 유례없는 공방전을 거듭한다. 이 공방전속에 고루려의 전략이 숨어
있다.
쳐들어가는 이미지 7 고구려가 본격적인 후연공략에 나선 것은 402년 숙군성 전투.
조양+지도 12 (2초후)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북쪽의 조양으로 진군한다. 조양은 당시 후연의 수도였다.
탑 5 수많은 이민족이 이 지역을 차지했지만 지금도
거리 8 이곳에는 후연의 고도임을 알려주는 흔적이 남아있다.
용성간판 풀샷 6 용성, 그것은 바로 후연의 도성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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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자리 팬 12 (2-3초 보고)
한때 강성했던 후연의 도성은 이미 허물어진지 오래고 그 자리는 사과밭으로 변해 있었다.
일행 걸어가고 3 402년 고구려군이 이 용성 동북쪽에 있는
성벽 9 숙군성을 공격하자 지방관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용성터 팬 11 숙군성마저 사라진 지금, 용성터는 고구려군의 행적을 알수 있는 유일한 지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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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우리가 광개토대왕때 가장 최대의 전과, 후연과의 공방전가운데 그것이 바로 숙군성 전투인데
이 숙군성을 현재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으로부터 동북쪽에 있었던 평주자사의 치소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후연의 도성이기 때문에 숙군성은 여기서부터 동북으로 떨어진 지역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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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길 8 (3-4초 보고) 402년 숙군성공격후 고구려는 전혀
피디 책보고 2 의외의 작전을 펼친다.
책 +기록 14(4초발생) (보고)
404년 고구려는 연군을 공격하여 백명을 죽였다.
연군은 놀랍게도 현재의 북경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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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양성터 팬 12 그런데 고구려는 5대 모본왕 대에 이미 북경인근 지역인 어양을 공격한 경험이 있다.
당시 이 지역은 한나라의 영토였다.
들어가는 발 6
어양 고성터 9 당시의 어양으로 추정되는 지역엔 고성터가남아있다. 성의 원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기와보는 사람들 9 지금도 밭고랑 사이에서 한 대의 토기와 기와조각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성터 팬 6 고구려는 이 깊숙한 곳까지 어떻게 들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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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팬 만리장성 10 (2-3초 보고)
어양의 바로 북쪽엔 중국이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 세운 만리장성이 있다
만리장성 16 (쭉 보고)
장성팬 거란쪽(지도) 15 하지만 장성 너머에 있는 거란족을 포함한 북방민족에게 만리장성은 장벽이 되지
않는다.
강팬 고북구 12 만리장성엔 북방민족이 중국으로 내려오는 통로여럿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고북구.고북구에서
북경까지는 겨우 한시간 반 거리에 불과하다.
표지판 5 그렇다면 광개토대왕도 이 통로로 들어와 후연의
길 트래킹 6 허를 찔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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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후연기록 19 당시 후연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후연은 거란을 친 후 3천리를 행군해서 고구려를 공격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해할 수 없는 군사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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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인터뷰 무려 3천리나 행군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것은 후연의 군대가 갈곳을 몰라서 헤매고 있는 기록을
나타내고 있는데 당시 후연이 거란과 싸웠을 때 거란의 군대가 많아서 졌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2년전 404년에 진서의 기록에 의하면 후연이 거란을 크게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과 2년만에 거란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거란 자체의 힘이 아니라 거기에 고구려의 군대가 합세해서 고구려가
북쪽에서 후연을 압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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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후연 공격 16 먼저 숙군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은 후연의 주력부대가 도성주위로 몰려들자, 이번엔 거란족을
이용해 연군을 공격한다. 한마디로 교모한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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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들어가는 이미지 14 (3-4초 보고)
그리고 드디어 그 이듬해인 407년에 고구려는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광개토대왕비 10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당시 고구려의 후연공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 13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적을 모두 죽이니 , 그 승리로 얻은 갑옷이 1만여벌이나 되고 군수품과 장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당시의 작전은 무엇이었을까?
사방 합전 12(4초 사방) 비문이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는 이 부분을 중국학계의 광개토대왕비 권위자인 왕건문은
사방이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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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 인터뷰 비문에 보면은 407년 조항에 사방합전이란 글귀가 나오는데요 사방이란 것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수군작전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전략적인 천재였습니다.
특히 그분이 사용했던 전술은 원거리 기동습격전술이 있었고 수륙양면작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은 396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칠 때 광개토대왕군은 육군과 약 3로로 추정되는 수군을 거느리고 전격
작전을 벌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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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백제정벌(수군) 11 거란을 정벌한 그 이듬해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이끌고 백제정벌에 나섰다.
수군그래픽 8 이때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막강한 수군부대를출정시킨다.
CG 백제공격작전 11 이렇게 육군과 수군이 한꺼번에 여러갈래로 공격해 들어가는 작전을 씀으로서 광개토대왕은
승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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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고구려군+비 18 (2-3초 보고)
백제공략 11년뒤인 407년 후연공격에서도 광개토대왕 특유의 원거리 기동습격작전과 수륙양면작전은 그대로
사용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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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인터뷰 후연과의 공격을 보면 후연을 배후에서 공격하려는 시도가 보여집니다.
395년에 거란을 이미 굴복시켰기 때문에 고구려는 거란을 통해서 거란과 합세해서 북쪽에서 후연의 중심지를
공격하는 여러 방면에서 함께 합공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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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합공 15 후연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의 뛰어난 전략,
사방합전. 10년전 거란정벌은 바로 이 전략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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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 4]
[VCR 사방합전 설명하는 CG , MC 화면으로 걸어 들어오고)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략하는 과정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치밀하고 장기적인 전략속에서 진행된 후연 총공세, 그 결과는 어떨까요?
우리는 바로 이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가리키면서)
후연의 전 지역에 걸쳐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을 때 후연의 수도 용성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납
니다. 이 과정에서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추대됩니다. 중국의 기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있습니다.
(후연의 수도 용성에서 기록 빠져 나오고)
"풍발이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이 왕이 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실질적인 주역은 바로 풍발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왕을 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된 이 고운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고운의 할아버지는 후연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끌려간 인질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고운은 바로 고구려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인 풍발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엉뚱하게도 고구려사람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사실말입
니다.
고구려의 대군이 후연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때 수도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이 왕으로 추대됐다?
광개토대왕이 거란 정벌을 위해 염수에 갔던 그 비밀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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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
덕흥리 고분 5 지난 1976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견된 이
문열고 8 고분은 1600년전 현재의 요서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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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안의 벽화보여지고 13 (3-4초 보고)
널길을 지나 앞방으로 들어서면 무덤의 주인공을
진 11 만날 수 있다. 이름은 진.
그는 중국인 망명객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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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아웃에서 묵서명 14 그런데 이 덕흥리 고분에서 주목할 것은 무덤의 주인공 바로 위에 씌여진 600자의
묘지명 이다.
묘지명 -영락18년 7 묘지명은 진이 영락 18년 즉 광개토대왕시기인 408년에 세상을 떠났고
소대형 7 소대형이라는 고구려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유주자사 8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에 고구려의 유주자사를 지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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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팬 13태수벽화 17 무덤의 한쪽 벽면에는 주인공의 생전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벽화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3명의 태수가 진을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다.
벽화에서 태수 나오고 8 이 태수들이 온 지역은 어디인가?
위성지도로 들어가고 13 유주 영역은 당시 후연의 영토였던 북경인근으로 밝혀졌다.
고구려가 이곳에 진을 파견한 것은 후 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시점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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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철 인터뷰 그런데 이 고운의 정권은 용성일대만을 다스리는 외소한 정권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지방은 무정부상태나 다름이 없는거죠.오나전히 힘의 공백상태인제 이때를 이용해서 고구려는
유주 자사진을 보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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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미지 15 (2-3초 보고)
고구려가 대공세를 펼친 407년 7월 후연의 수도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한다. 쿠데타의 배후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자치통감 +기록 21 당시 후연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한동안 쿠데타 정권은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다.
새로운 북연왕조가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이듬해 5월이 되어서였다.
유주자산 진 12 바로 그 극도의 혼란기를 이용해 고구려는 전격적으로 진을 유주자사로 임명하고 특수임무를
부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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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철 인터뷰 후연 정권이 선비족의 나라였죠. 그리고 지방관 태수들은 한족이니까 지배층하고 피지배층
태수이하가 다릅니다. 후연이 망했을 때 지배층은 거의 망하고 한족출신 태수들이 다스리는데 여기에 유주자사
진을 보내면은 한족출신 태수들이 래속을 쉽게 받아서 그 지역을 고구려가 장악할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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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 래조도 팬 진 15 결국 유주자사 진은 후연의 혼란기에 아주 짧은 기간동안 설치된 일종의 임시군정책임자
라고 볼 수 있다.
태수에서 글씨 나오고 14 13태수가 유주자사를 만나러 온 목적이 각기 다른 것도 그가 아주 짧은 기간 이 지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7 그리고 10여년에 걸린 고구려의 후연 공격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기록 18 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인 408년 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의 정의를
나누었다.
광개토대왕 이미지 8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고구려의 속국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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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그 당시에 고구려는 중국에 대등하다고 하는 중국에 대응하는 동방에 패자다고 하는 그런 의식이
있었습니다. 주변세를 정복할때도 중국의 천자나 마찬가지고 주변국가를 신하국으로 만들고 바로 조공지배를
하는 원칙, 그 나라는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동부여, 신라 , 가라 이런 나라들을 신하의 국가로 만듭니다.
이것이 광개토대왕비에 많이 나오는데 후연도 똑같은 경우입니다. 후연도 신라나 마찬가지로 신하국으로 간접
지배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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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는 이미지 6 (보고)
위성지도 31 광대한 고구려 건설을 위해 요서진출은 광개토대
화살표 (11) 왕의 최대 과제였다.
거란과 후연 (12) 그 과제를 풀기 위해 광개토대왕은 395년 염수지역의 거란족을 정벌하고 그곳을 배후기지로
마침내 후연을 무너뜨린다.
팬 지도 똑바로 (7) 고구려의 요서진출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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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하 트래킹 9 (2-3초 보고)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탐사단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기록 10 (2-3초후)
후연의 유역인 대릉하 유역에 고구려의 큰 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석 5 문제의 큰성이 있는 중국 의주의 개주촌
걸어가는 풀샷 3 (보고)
안내 받아서 가고 8 (보고)
언덕풀샷 팬 4 성 동쪽 언덕에 오른 탐사단은
돌 팬 일행 11 바로 눈앞에서 놀아운 흔적을 발견했다
(보고)
돌 훑고 12 언덕에 떼를 지어있는 이것은 고구려 특유의 돌무덤이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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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하나 14 무덤의 형태만으로도 고구려식이 분명했다.
고구려는 이렇듯 구릉지역에 떼를 지어 돌로 무덤을 쌓았다.
줄자 재보는 교수 9 (2-3초 보아)
무덤의 크기를 재보았다.
(보고)
줄자타이트 6 길이는 2미터 20센티미터. 수많은 고구려 유물이
돌무덤 팬 확인 10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곳에서 탐사단은 모두
13기의 고구려식 돌무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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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인터뷰 적석묘가 나왔었다는 것은 이것은 중국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우리가 고구려식이라
는 점을 생각할 수 있고 ,앞으로 또 연구를 해봐야되겠지만 만약 이 적석묘가 고구려식이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고구려의 성이라고 했을때는 요서지방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구려식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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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개주성 지도 9 후연의 수도인 조양 인근에 위치한 개주성
요하를 훨씬 넘어 대릉하 서쪽에서 우리는
언덕 위에 서있는 일행 6 고구려를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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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 클로징]
(MC 걸어온다, 서서히 줌인)
자 이것이 우리가 확인한 고구려의 서쪽 영역입니다. 물론 고구려가 직접 지배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영역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구려가 직접지배 못지 않게
이 지역에서 고도의 통치술을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중국이나 일본학계에서는 되도록이면 고구려의 영역을 축소시키려 했습니다. 중국의 교과서에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그려져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요서진출은 의도적으로 외면되어 왔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분명히 나와 있는데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고구려의 요서진출은 논란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요서지역 개주에서 확인한 고구려성은 아주 커다란 의미를 갖습니다.고구려의 영역이 요서지역
에 이르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은 고구려의 흔적은 거대한 고구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지도 한번 보고 걸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