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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881,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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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남아시아 |
공식명칭 |
파키스탄 회교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Pakistan |
기후 |
건조성기후, 고산기후, 온대하우기후 |
인구 (기준년도) |
199,085,847명 (2015) |
수도 |
이슬라마바드 |
인종 |
신드인, 펀자브인, 파슈툰족 |
언어 |
신디어, 우르두어, 펀자브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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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 대통령 |
종교 |
이슬람교(97%), 힌두교, 그리스도교 |
화폐 |
파키스탄 루피 (PKR) |
국화 |
재스민 |
대륙 |
아시아 |
인도대륙 북서부에 있으며,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다.
서쪽은 이란,
북쪽은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은 중국, 동쪽과 남동쪽은 인도,
남쪽은 아라비아 해와 접해 있다.
최북단에 자리잡은 대고원은 히말라야 및 트랜스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의 인더스 평원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번창하는 농업지역이다.
여러 해 동안 군사정권의 지배가 계속되었으나
1988년 민간 정부가 다시 들어섰다.
파키스탄의 대표적인 언어는 펀자브어이며,
전국민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없다.
문맹률이 높아 라디오가 가장 중요한 통신매체 역할을 하며,
관영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20개 이상의 언어로 방송하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1인당 GNP는 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주요작물은 밀이며, 사탕수수도 널리 재배된다.
지도
파키스탄
국기
인도대륙 북서부에 있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다.
남북길이 1,600km, 동서길이는 880km이다.
서쪽은 이란,
북쪽은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은 중국,
동쪽과 남동쪽은 인도,
남쪽은 아라비아 해와 접해 있다.
이란
시아파 이슬람교이며 유대교·조로아스터교 등을 믿기도
한다. 해발 460m 이상의 고원지대이고 10% 정도가 경작지이다.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10%에 해당되는 풍부한 석유매장량이 이란 경제의 기반이다.
여러 이슬람 왕조들이 오랜 기간 통치했으며, 19세기에는 영국 등의 경제적 지배를 받았다.
1979년 팔라비 정권을 무너뜨린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다.
1980~90년까지 치렀던 이란-이라크 전쟁은 막대한 경제 파탄을 가져왔고, 이후 정부의 국정운영은 점차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인종 집단은 페르시아인들이고 그 외 아제르바이잔인, 쿠르드족, 루르족, 바흐티아리족, 발루치족으로 구성된다.
공용어는 페르시아어이지만 매우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공식 국교는 시아파 이슬람교이지만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들도 있다.
화폐 단위는 리알(rial)이다
이란의 지형은 평균 고도 460m가 넘는 고원지대이고,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지표면의 절반 이상이 염분 사막과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다.
전 국토면적 가운데 약 10% 정도가 경작 가능하며, 25%는 목초지로 적합하다.
세계 석유매장량의 10%가량에 해당되는 풍부한 석유매장량은 이란 경제의 기반이다
단원제를 채택한 이슬람 공화국이고, 국가의 종교지도자로 구성되는 여러 감독기구가 있다.
국가와 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이지만 최고 권한은 종교지도자(rahbar)에게 있다
이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문자로 기록된 역사와 문명은 BC 3000년경 엘람인들부터 시작되었다.
파르티아인들은 BC 247년에 제국을 건설했으나 AD 226년경에 사산인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7세기부터 여러 이슬람 왕조들이 통치했다.
1501년 사파위 왕조가 건국되어 1736년까지 지속되었다. 1796년부터 카자르 왕조가 통치했으나
19세기에는 러시아와 영국 제국의 경제적 지배 상태에 놓였다
1921년 쿠데타에 의해 레자 한이 권력을 잡았다.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근대화와 서구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소외시켰고 그 정권은 1979년에 전복되었다.
그 후 시아파 종교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고, 서유럽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두 나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이 났다.
1990년대 이후 정부의 국정운영은 점차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뀌었다자연환경 이란은 해발 460m 이상인 고원지대에 평균고도 2,0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실제로
저지대는 이라크와의 국경 주변에 있는 카룬 강 유역과
페르시아·오만 만 주변의 좁은 연안지대,카스피 해 주변의 연안
늪지대뿐이다북쪽 엘부르즈 산맥</A>에는
이란에서 가장 높은 다마반드
산)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화산이 솟아 있다. 엘부르즈 산맥은 카스피 해 연안을 따라 뻗어나가다가 동쪽 국경을 이루는호라산</A>(후라산) 산맥과 만난다.
호라산 산맥은 남쪽의 발루치스탄 산맥과
함께 동쪽 내륙 고원지대의 경계를 이룬다. 대부분 불모지인 고원은 광활한 염분 사막이 특징적이다. 이란에서 가장 큰 산맥은 자그로스 산맥</A>으로, 북서쪽 아르메니아 국경지대에서 뻗어나와 남동쪽 마크란 산맥까지 이어져 있다
대체로 강수량이 적은 지형으로 카스피 해 주변의 좁은 연안지역만 연강수량이 1,000㎜ 이상이며, 내륙의 염분 사막은 100㎜도 되지 않는다. 강들은 대부분 계절천이며, 내륙을 흐르는 물길들은 대부분 해안 늪지대로 흘러들거나 지하수가 된다.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은 카룬 강뿐이다. 지역에 따라 기온차가 아주 심해 페르시아 만 주변의 여름기온이 55℃인 반면, 북서부 아제르바이잔(아자르바이잔)의 겨울기온은 -37℃에 이른다
국토의 1/2 이상이 황무지로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염분 사막이다.
전국토면적 가운데 약 1/10이 경작지이며, 1/4은 목초지로 이용된다.
농경지 중 관개가 이루어지는 1/3가량은 대부분 사막과 산맥 사이의 변두리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국토의 약 1/8을 차지하는 삼림은 대부분 카스피 해 주변에 위치하는데, 수종은 떡갈나무·너도밤나무·린덴·느릅나무 및 활엽 상록수 등이 주종을 이룬다.
총인구의 45%를 차지하는 이란인(페르시아인)이 가장 인구가 많고 널리 분포된 민족이다.
서부 산악지대에는 정부의 동화 노력에 저항해온 유목민족인 쿠르드족</A>과 페르시아 원주민으로 보이는 반(半)유목민족인 루르족</A>이 살고 있으며, 에스파한(이스파한) 서쪽 자그로스 산맥에는 루르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흐티아리족이 거주하고 있다.
루르족과 바흐티아리족 모두 페르시아어 방언인 루르어를 쓰며, 발루치스탄에 사는 발루치족도 루르어를 사용한다.
이란에 거주하는 또하나의 민족 집단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고유 언어를 계속 쓰고 있다인구 가운데 투르크계의 비율은 적은 편이지만 이란인의 1/4가량이 튀르크어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3개의 주요 투르크계 민족집단은 이란 서북부 모퉁이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 만 동쪽 시라즈 지역의 카슈카이인, 동북부 호라산 지역의 투르크멘족 등이다.
소수의 셈족(유대인·아시리아인·아랍인)도 거주한다.
이란인들의 대다수는 이슬람교도로서 대부분 공식 국교인 시아파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족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이밖에 소수 종교인 그리스도교·유대교·바하이교·조로아스터교 등이 있다.
출생률은 높고 인구는 비교적 젊은 편으로 2/5 이상이 15세 미만이다.
연간인구성장률이 세계 평균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편이나, 중동에서는 평균에 가깝다
경제
이란 경제는 혼합경제체제로 재정은 대부분 석유 생산을 통해 조달된다
1990년대초에는 1980∼90년 오랜 기간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외채와 여러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석유수출이 재개되었고, 경제를 평화시 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에 착수해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국민총생산(GNP)은 중동에서 가장 높으나, 갑자기 증가한 인구 때문에 1인당 GNP는 평균 이하일 것으로 추산된다.
농업 부문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5에 지나지 않으며, 이란 노동력 가운데 1/4이 종사하고
있다.
경작기술이 취약하고 물이 부족한데다가 시장을 이용하기가 어려워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식량 생산이 국내 수요를 따르지 못해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작물은 밀·감자·보리·포도·쌀·옥수수·사탕무·사탕수수·담배 등이며, 목재도 해마다 상당량 생산된다.
근해 어업이 국내 소비와 수출(특히 철갑상어알)에 한몫을 한다. 석유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광업 부문이 GNP의 1/4 이상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1/5가량을 담당한다.
1950년대에 국유화된 이란 석유산업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 아바단에 있는 정유공장을 비롯한 유전·정유소·수출항 등의 시설 전반이 파손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1990년대초 석유 생산량은 1976년도 생산량의 1/2 수준으로 떨어졌다. 막대한 매장량의 천연 가스를 비축·보급하는 국영시설은 중동 최대규모로 꼽힌다.
석유와
천연 가스를 제외한 다른 광물자원은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밖에 직물(특히 전통 수출품인 직조 양탄자)·가공식품·자동차·전기기구·철·강철·시멘트 등이 생산된다.
1970년대에 석유 수출로 얻은 소득으로 산업 부문에 막대한 투자를 한 결과 경제발전이 가속화되어왔으나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 사회간접자본의 부실, 원료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전력의 4/5 이상이 국산 연료를 이용해 생산되며, 나머지는 수력발전으로 충당된다.
전국적인 전력 공급망이 197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건설 속도는 늦은 편이다1949년에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은 1979년 혁명과 함께 끝났다. 이란은 모든 주요산업·은행·보험회사를
국유화하고, 경제 자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따라 농업 부문과 일부 선별된 산업에 대해 막대한 투자를 약속했으나, 불안한 국내 상황과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중요한 경제 조치들의 실시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유 생산의 재개로 국가재정이 안정되었고 자유시장의 개시로 농업·공업의 국내 생산이 증가했다수출품은 석유와 석유 관련제품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주요수입품목은 기계(전기
제외)·철강·곡물·운송장비 등이며, 주요교역상대국은 일본·독일·이탈리아·프랑스·영국 등이다정치와 사회 1979년에 채택된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따라 최고 정치권력은 국가의 종교지도자인 '발리이에 파키'에게
주어지며, 파키의 지위를 맡을 인물이 없는 경우에는 3∼5명으로 구성된 종교지도자 의회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종교지도자(또는 종교지도부)는 헌법수호위원회 위원 성직자 12명 중 6명을 임명한다. 헌법수호위원회는
단원제 국회인 이슬람 자문회의(마질레스)에서 통과된 법안의 합헌성과 이슬람 교리에 대한 충실성 여부를 심의한다. 마질레스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270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지며,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행정부는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이끄는데 임기 4년의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선출되며,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한 후 마질레스의 승인을 받는다. 1987년 정당들이 해산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정당은 집권 이슬람공화당이었다. 최고
사법권은 대법원과 최고 사법위원회를 구성하는 종교 재판관들에게 부여된다
수도 밖의 위생 상태는 아주 나쁜 편이며, 소도시들과 농촌지역에서는 비위생적인 환경이나 의료진·의료시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성홍열·백일해·폐결핵·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이 널리 퍼져 있으며, 유아사망률도 세계 기준이나 중동 기준보다
상당히 높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 66세, 여자 69세이다
5년 동안의 초등 의무교육이 규정되어 있지만 농촌의 경우 부모의 반대 또는 시설부족 등의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많다.
중등교육 제도는 비교적 발전 수준이 낮은 편으로, 주로 소수의 학생들에게 대학입학 준비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는 데 그친다. 문맹률은 다른 아랍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언론은 이슬람 공화국 통신사에서 통제한다
문화예술
이란은 네자미, 페르도우시, 사디, 오마르 하이얌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해왔으며, 모스크를 비롯한 건축으로도 유명하다.
페르시아 양탄자는 아직까지 그 예술성과 장인정신으로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란에 사람이 정착한 시기는 구석기시대 초기(BC 100000년경)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문자로 기록된 역사와 문명은 BC 3000년경 후제스탄의 엘람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BC 2000년 이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이란인들이 나타나 여러 왕국을 이루기 시작했다
BC 728∼550년 메디아 왕조가 번영을 누렸으나, 키루스 2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에 무너졌다.
그후
중동지역에 광대한 제국을 세우고, 로마 제국이 나타날 때까지 가장 큰 제국으로서 번영을 누리던 페르시아대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사라졌고, 뒤이은
마케도니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도 원주민인 파르티아인들의 손에 차츰 무너져갔다(BC 247∼AD 226). 파르티아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제국을
세웠으나, 거의 끊임없는 로마와의 전쟁으로 약화되어 1,000년 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인들을 배출했던 파르스에서 온 이란 민족인 사산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사산 왕조가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른 후 세력이 약화되자,
아랍 이슬람교도들이 침략하기 시작해 640년에는 쉽게 이곳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850년 동안 이란은 사파르·사만·가즈나·셀주크 왕조를
비롯한 비(非)이란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502년 아랍 정복 이후에야 비로소 이란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란계 가문인 사파위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사파위 왕조시대에 국교로 제정된 시아파 이슬람교는 오늘날까지 이란의 국교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사파위
왕조시대(1502∼1736) 이후 벌어졌던 수많은 내전 끝에 1779년 카자르 왕조가 지배권을 확립했으나, 유럽의 정치 개입으로 이란의 장래는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즉 중동을 향한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이 인도 대륙에 세력을 구축하던 영국을 위협하자 이 두 국가가 이란에서 교역과 외교
문제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으며, 그결과 이란은 경제적으로 유럽의 두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카자르 군주인 나세르 옷 딘 샤의 지배에 항거하는 폭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무능한 그의 아들 모자파르 옷 딘샤는 1906년에 국회(마질레스)를 소집하여 헌법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은 기근과 경제적
붕괴로 1921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레자 한이 권력을 잡고 1925년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린 후 스스로를 레자 샤 팔라비</A>로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왕위에서 물러난 그의 뒤를 이어 아들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가 권력을 계승했다. 팔라비는 이란의 현대화·서구화 계획에 착수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소외되고 권력이 제한된 결과 1970년대에 그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1979년에는 결국 정부가 무너지고 팔라비는 망명길에 올랐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아파 지도자 루홀라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1979년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을 주도했다
혁명 후 이슬람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법이 제정되었고, 서유럽은 이란에 대해 더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1980년 이라크군이 기존의 국경선을 규정한 조약(1975)을 파기하고 이란을 침공하면서 두 나라 경제를 모두 파탄으로 몰고 간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막대한 인적·물적·경제적
손실을 끼치며 계속되다가 1990년에 종전되었다. 1989년 호메이니가 죽고 1990년 전쟁이 끝난 후 이란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이란과 한국과의 관계 1962년 10월 수교에 합의했으며, 1967년 4월에
한국의 테헤란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중동지역에서 한국의 건설진출이 처음 이루어진 나라이며, 1969년 5월 우호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한국과
문화협정(1974. 7)·경제기술협력협정(1975. 7)·무역협정(1976. 2)·수산협력협정(1977. 5, 1979.
5)·사회보장협정(1977. 5) 등 7개 협정을 체결했다. 북한과는 1973년 4월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남북한 등거리정책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북한과 밀착해 상호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통상에 있어서는 1996년 현재 대한 수입
8억 8,390만 3,000달러(선박류·섬유류), 대한 수출 16억 3,435만 4,000달러(원유·금속광)이다. 1997년 현재 한국인 교민은
44명, 체류자는 215명이다
이슬람의 종파 중 하나. 한국이슬람중앙회의 공식 표기에 따르면 '쉬아'이다. 영어로는 시아 이슬람(Shia Islam), 시아파(Shi'ite)[1]라고 한다.
수니파 다음으로 가장 큰 종파라지만 신도 숫자로 따지면 확실히 소수종파로서, 인구는 2010년대초 기준으로 대략 2억여명 정도로, 전세계 무슬림의 10%-13%를 차지하고 있다. 시아파 신도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니거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이란
사실상 세계 시아파의 구심점. 대부분의 인구가 시아파.
이라크
시아파 인구가 60% 정도로, 이란 다음 가는 주요 시아파 국가이며 카르발라 등 주요 성지도 있다. 수니파도 30~40%에 달한다. 사담 후세인과 다에시 세력은 수니파, 현집권층은 시아파.
레바논
인구의 50%가 무슬림, 그 중 절반인 25%가 시아파. 인구 비중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헤즈볼라로 대표되는 레바논의 주요 정치, 무장(...) 세력을 이루고 있다.
시리아
인구 비중이 10% 남짓이라 걸프 연안의 수니파 왕정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소수인 알라위파가 수십년 째 다수 수니파를 찍어누르며 장기 독재 중이다. 사실 알라위는 종교적으로 이슬람(시아)의 일부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많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란의 종교 지도자가 인정해줬기 때문에 일단 시아로 본다.
아제르바이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경우인데 튀르크, 시아파, 구소련[2]의 세 가지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타 시아파 국가들이 시아 종주국인 이란과 매우 친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대표적인 수니파 대국인 터키와 매우 친밀하며 러시아와의 관계도 완만한 편이다. 일단 이란과의 사이도 나쁘지는 않은 편.
인도
무슬림이 많은 인도 공화국에도 5000만에 가까운 시아파 신도들이 있지만, 타종교 인구가 넘사벽인 세속국가 인도에서 소수파인 무슬림인데다가, 인도 무슬림 사회에서도 수니파에게 한참 밀리는 인구라 영향력은 크지 않다.
수니파와 함께 이슬람교의 주요 양대 종파이다. 양대 종파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슬람 전체로 봤을 때 시아파의 숫자는 상당히 적은 편이다. 전체 무슬림의 10% 정도. 그래도 수니파 다음으로 큰 종파이다. 이란,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이라크에서 주도적이며, 레바논, 예멘 등도 시아파 비중이 수니파랑 절반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애초에 수니&시아 이외의 이슬람 종파들은 쩌리라서...[4]
수니와는 달리 쿠란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에 하위 종파가 많다. 가장 주류는 12이맘파(이마미야)이고, 그 외에 예멘의 자이디야파, 과격한 이스마일파[5] 그리고 시리아의 알라위파 등이 있다.
최고 지도자가 반드시 무함마드의 정통 후손이어야 한다[6]는 혈통주의적인 면이 있다. 이는 칼리파를 어떤 위치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수니파
예언자가 무함마드로 끝났으며, 칼리파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일 뿐이라고 간주했다. 당연히 쿠란을 해석하거나 법적 판단을 할 권리는 없었다.
시아파
예언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자들이며 칼리프는 이 말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위라고 생각했다. 이는 칼리파에 신성을 부여한 것이며 당연히 무함마드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칼리파는 이제 없어졌으니 이맘이 이를 대신한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수니파의 이맘과는 크게 다르다.
수니파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있는 무슬림이면 아무나 될 수 있으며 직위라고 할 것도 없다. 예배의 인도자일 뿐이며 혼자 예배할 때는 스스로가 이맘이 되며, 가족이 함께 예배를 할 때는 가족 중에서 가장 웃어른이 이맘이 된다. 기독교에 대입해서 설명하면, 개신교 비슷하게 성직자는 율법과 신학의 전문가일 뿐 영적 위상은 평신도나 다를 바 없다.
시아파
신성의 직위이며 무함마드로부터 '비전의 지식'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무함마드가 무오류의 예언자였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맘 역시 무오류의 인간이 되는 셈. 기독교에 대입하자면 가톨릭이나 정교회처럼 교회 체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고, 성직자들 또한 단순한 전문가가 아니라 신성과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종파 규모가 반대다
언젠가 개종한 시아파 중에 새로운 예언자(마흐디)가 강림할 것이라는 구세주신앙 비슷한 것이 있기에 무려 천오백년간 수니파에게 탄압당하면서도 아직도 끈질기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마흐디'를 누구로 보느냐는 점 때문에 시아파는 분열을 거듭했다.
시아파들에겐 수니파인 척 가장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일코 교리. 수니파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교리다. 이 교리가 있는 이유는 시아파가 비록 양대종파라고는 하나 수니파에 비하면 소수종파에 지나지 않기에 수니파로부터의 차별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
정치적 이유로 분리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적인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대표적인 차이가 상속론(al-wasiya)인데,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는 것. 이 전통에 따라 시아파의 이맘은 선임자의 유언에 따라 선출된다.
알리에 대한 신격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어 알리의 지위가 무함마드와 비교해 다를 것이 없으며, 알리는 무오류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게 된다.
시아파의 사상을 닦은 자는 예멘 출신 학자인 압둘라 이븐 싸바 알 야흐디인데, 야흐디는 상속론의 이론을 재정비하는 한편, 재림론(al-rajah)을 주장했다. 무함마드가 알리로 재림했다는 것. 시아파의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이들의 분파인 12 이맘파의 경우에는 구세주가 돌아와 세상을 구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다.
또 그 외에 시아파는 이슬람교 성인(이맘)들을 인정하는 관습이 있다. 마치 기독교의 보편 교회처럼 성인들이 이슬람 신자들의 기도에 도움을 준다고 여기는데, 바로 이 점도 수니파를 분노하게 만드는 생각이라고 한다.
수니파
개신교와 비슷하게 개인과 알라 사이에는 일절의 우상숭배가 들어 가선 안 되며, 죽은 자는 알라에 대한 기도에 있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
시아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시아파 교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죽은 성인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그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계인으로 대신 빌어 준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교리적 차이만이 아니라 종교적 인물의 초상화(알리와 후세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함마드까지도)의 활용이나 기타 여러 의례적 차이들이 많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수니파는 시아파를 "이런 이단 새끼들!!" 하면서 이를 갈고 시아파는 "저런 덜 떨어진 꼴통들!" 하면서 이를 갈고 있는 실정. 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우다 보니 현재 시아파랑 수니파는 서로보다 가톨릭과 더 친할 지경이다.[7]
이슬람의 양대정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과 교리, 그것도 기성 체제를 뒤엎는 것 궁극적 목표로 하는 믿음을 갖춘 시아파는 '내부의 배신자'로 몰릴 위협을 항상 안고 있었다. 중세에 들어서는 아주 이런 레이드 공격이 정례화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수니파들이 "불신자들아, 이슬람으로 개종해라!" 라고 외치면서 알 카르크의 시아 모스크 등을 습격했다. 마치 무슬림이 기독교도와 쉽게 결혼할 수 없듯이, 수니파는 시아파와 결혼할 수 없었으며 시아파는 수니파의 예배를 인도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시아파가 도축한 고기는 할랄로 인정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즉 시아파는 아예 무슬림 취급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시아파를 겨냥한 테러는 대부분 수니파 테러 단체들이 먼저 일으킨 경우가 많은데, 이는 종파 갈등으로 인한 보복뿐만 아니라 ISIS, 알 카에다 등 글로벌 테러 단체들이 지하드를 펼치는 데 있어서 배교자 겸 우상 숭배자나 다름없는 시아파를 박멸한다는 의미가 맞다.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같은 악랄한 IS 지도자도 "기독교인은 종교세를 내면 살려주되, 시아파는 그냥 죽여라"고 설교했으며, IS 대변인 아부 무함마드 알 아드나니도 시아파를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이며, 종파 갈등이 아닌 거룩한 종교 전쟁이라는 발언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이 분쟁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패권 이유와 함께 중동 전역을 뒤흔드는 수니파-시아파 이슬람 간의 묵은 교리적 갈등 및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광신에 기반한 원한감정이 작용하고 있는 게 맞다. 실제로 이란, 사우디 두 나라 집권세력의 이슬람 근본주의적 정체성만 생각해봐도.이슬람 세계의 정사분쟁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시아파의 시초이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혈연적으로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최초의 남성 무슬림이었고, 무함마드에 대한 믿음도 깊었으며 능력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 이었으니 당초부터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주목 받았지만, 무함마드 사후에는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알리 지지파들은 당초부터 이에 불만을 품었는데, 정통 칼리파는 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는 이에 승복하였고, 이후 2대 칼리프 우마르의 즉위도 지지하였다.
제3대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사망한 뒤에, 그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시아파 분리의 계기가 되었다.
우스만의 뒤를 이어 당초부터 많은 지지를 받던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우스만의 6촌인 무아위야가 우스만 암살에 복수를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궁지에 몰린 무아위야는 쿠란의 낱장을 창 끝에 붙이고 낭송가들이 뒤를 따르면서 쿠란을 낭송하게 하며 알리의 군대로 돌진하도록 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알리의 군대는 쿠란을 더럽힐까봐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알리는 이에 무아위야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알리는 같은 무슬림 내에서는 매우 신사적이고 관대한 인물로, 자신의 권력보다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거역하는 정적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도 무함마드의 마지막 아내 아이샤와 관대하게 협상한 적이 있었고. 하지만 이런 알리의 관대한 태도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은 급진적이고 젊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알리에게 실망했다면서 알리 진영에서 이탈하면서 이탈자라는 뜻으로 '하리지파'로 불리게 된다.
알리의 세력이 분열되면서 여유를 얻고 세력을 확대해나가던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에서 칼리프를 칭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리지파는 무아위야를 암살하려 시도하고, 알리는 무아위야와 싸우면서 하리지파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세력이 피폐해졌다.
결국 하리지파의 인물인 Abd-al-Rahman ibn Muljam는 무아위야의 회유에 넘어가서,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던 알리를 독을 바른 단검으로 찔러서 살해하고 말았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칼리프 지위를 이어받았다. 무아위야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하산의 세력을 토벌하려 하였고, 하산은 어쩔 수 없이 협상을 할 뜻을 밝혔지만 같은 편에게 공격당해서 부상을 입었다. 몇 차례 전투를 거친 다음 하산은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 평화와 화합을 위하여 무아위야에게 항복하고 칼리프 지위를 포기하였다. 하산이 이후 죽게 되자 시아파 내에서는 무아위야의 음모로 인한 독살설에 나오게 되었다.
이라크 카르발라에 있는 이맘 후세인 모스크. 현재 시아파의 대표적인 성지이자, 마치 시크교의 황금사원처럼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이 된 곳이다. 이곳엔 세계 각지에서 항상 성지순례하러 오는 시아파들로 북적인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죽고 나서 그 동생 후세인이 알리 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680년 다마스쿠스에서 무아위야가 죽고 야지드가 칼리파에 오르는데, 당시까지 칼리파는 공동체에서 투표로 뽑히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세습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세습 칼리프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이다.
이라크의 쿠파에서 후세인의 지지자들은 야지드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였다. 후세인은 메카에서 야지드의 군대를 피하고 있었는데, 요청을 받고 쿠파로 이동하였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야지드는 군대를 파견했다. 추종자들과 함께 이동하던 후세인은 쿠파의 도착을 앞두고 카르발라에서 야지드가 보낸 3000명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이 때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야지드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세인의 추종자들은 물을 구할 수 없었다. 후세인의 형제 압바스[8]가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을 구하러 가서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우고 돌아갔다. 압바스는 후세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강에서 물을 뜨면서도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 야지드 군은 압바스가 물을 가지고 돌아가면 후세인과 추종자들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압바스를 공격하였다. 압바스는 왼팔에 물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에 맞아 왼팔이 떨어지자 오른팔로 들었고, 오른팔도 칼에 맞아 잘리자 입으로 물통을 물었다. 그러자 화살을 쏴서 물통이 망가져 물이 쏟아지고 압바스는 눈에 화살을 맞았다. 야지드 군이 머리를 메이스로 내리치자 압바스는 결국 말에서 떨어졌고 "Ya Akkha!"("형제여!") 라고 외치며 죽음을 맞았다.
전설에 따르면, 결국 궁지에 몰린 후세인은 단신으로 야지드의 군대에 싸움을 걸었고 무수한 적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적이 많아 후세인은 머리에 돌을 맞고, 가슴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후세인은 얼굴의 피를 닦고 알라를 향하여 호소하였다. 후세인은 포위를 뚫었지만 결국 큰 부상을 입은 그의 말이 쓰러졌고, 나무 아래에 있던 후세인을 야지드의 군대가 붙잡아 갔다. 후세인은 참수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를 처형하려던 자(Shimr ibn Dhiljawshan)에게 "오늘 당신은 기도를 마쳤는가?"라고 물었다. 이때는 3번째 기도 시간이었다. 후세인은 기도를 할 시간을 요청하였고, Shimr는 후세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후세인은 참수 되었다.
시아파 신도들은 카르발라의 참극을 애도하며, 후세인을 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과 슬픔을 참회하는 뜻에서 '아슈라(Ashura)'라는 행사를 가진다. 이 의식은 후세인의 순교를 묘사한 '애가'를 낭송하고, 타지예(ta'ziyeh, 수난극)라 불리는 연극으로 이 사건에 대하여 공연을 한다. 또한 단체로 음악 박자에 맞춰 칼이나 채찍으로 스스로를 치면서 자해를 하는 마탐(matam) 의식이 포함되기도 한다.
카르발라의 참극은 단순히 이슬람교가 분열된 '정치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시아파에서 해석된 이 사건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과거의 예언자들이 겪었던 수난'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며, 아슈라에서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현세의 불의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내세의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억압받는 '현실'에서 미래의 구세주(마디)를 약속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그리하여 후세인의 죽음인 카르발라의 참극은 '영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며, 시아파의 종교적 정체성, '영성'과 연결된 중대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결국 후세인은 죽고 그 자손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한 우마이야 왕조는 누가 봐도 정통성이 부족했다. 알리를 지지하던 시아파는 지속적으로 '찬탈자'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서 저항 활동을 벌였다.
시아파가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던 것은 우마이야 시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마왈리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을 잘 이용한 덕. 시아파는 '개종자중 구세주 강림설'을 퍼뜨리며 개종자들에게 큰 선교 효과를 가지고 왔다. 8대 칼리파 우마르 2세의 3년의 선정으로 인해 이런 현상은 많이 타파됐지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 시아파는 그 틈을 이용해 세를 꾸준히 불렸다.
한편, 무함마드의 삼촌 압바스의 자손인 압바스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는 멀어졌지만, 무하마드와 비교적 가까워서 하심 가문의 일족이므로 존경 받는 위치에 있었다. 압바스 가문의 당주 무하마드는 '하시미야'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는데, 이 비밀 결사는 같은 반체제 운동 집단인 시아파와 협력 전선을 펼쳤다. 하시미야의 조직원으로 라산에 파견되었던 아부 무슬림은 8000명을 이끌고 거병하여 세력을 펼쳤고 이라크에 도달했다. 시아파 역시 이 거병에 함께 하였다.
물론 우마이야 왕조 역시 이 반체제 운동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대응에 나섰다. 무하마드의 뒤를 이어 당주가 된 아브라함 이븐 무하마드는 우마이야 왕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 등 14명은 탈출에 성공하여 후세인과는 달리 잡혀 죽지 않고 이라크 쿠파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라산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쿠파를 점령하였고,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패배를 거듭하다 대패하였고 결국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어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압바스 왕조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힘을 보탠 시아파들은 결국 압바스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을 칼리프로 추대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압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가문보다는 무함마드의 가까운 혈통이지만 '알리의 후손'은 아니기 때문이다. 압바스 왕조는 시아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다시 시아파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물론 칼리프의 권위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개국공신 아부 무슬림 등 역시 탄압을 당했다.
시아파는 분파가 매우 많다. 기본적으로 알리-알리의 큰 아들 핫산-작은 아들 후세인 순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정하지만, 후세인 다음 '이맘'의 지위를 계승한 자손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논쟁개싸움이 많이 있다.
현존하는 시아파의 대부분은 이란에서 융성한 12이맘파이다. 이 분파는 지역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예멘의 경우는 자이드파가 주류이다.
크게 보면 10여개 정도 파벌이 되고, 역사적으로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파벌까지 합치면 정말 현기증 나게 많은 숫자가 있다.
통칭 카이산파. 알리의 셋째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Muhammad ibn al-Hanafiyyah)를 이맘으로 추종했던 집단이다.[9] 후나피야는 카르발라의 참극으로 후세인이 죽은 뒤 알리 가의 당주가 되었고, 그 부하 알 무크타르(Al-Mukhtar)가 후세인의 복수를 내걸고 무아위야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마디'로 추앙받았다. 무크타르는 일시적으로 거대한 카이산파 세력권을 건설햇지만 무아위야 왕조에 토벌되어 전멸당했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가 죽은 뒤 카이산파는 그가 죽은게 아니라 모습을 감춘 것이며, '마디'로서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파벌, 무함마드의 자식을 이맘으로서 세우려는 파벌 등으로 분열이 계속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성립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다른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았다.
누구를 이맘으로 세우느냐는 문제로 분열이 많아 세력이 쇠퇴하다가 결국 12이맘파에 흡수되어 소멸하게 된다. 사실 카이산파가 '숨겨진 이맘' 이론과 '마디 재림론'의 원조격이다.
Zaydīyah
통칭 자이드파.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 이븐 알리(Zayd ibn Ali)를 이맘으로 추종하는 파벌. 12이맘파와 자이드파의 분리는 5대 이맘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Baqir)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둘 다 알리 이븐 후사인의 아들인데, 무함마드 알 바키르는 우마야 왕조 치하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재야에 머물려 하였고, 자이드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서 대항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자이드 파는 사파비 왕조 이전까지는 시아파 가운데 가장 큰 그룹이었으며, 현재도 시아파에서 12이맘파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그룹콩이다. 예멘에 자이드파 신도가 많다. 2014년에 벌어진 예멘의 후티 반란은 시아파 자이드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교리상의 특징은, 자이드파는 후세인 이후의 이맘은 '무오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마르, 우스만 등 수니파 정통 칼리프나 그들의 가르침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자이드파의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는 비교적 제일 수니파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Isma'ilism
8세기 후반에 성립하였다. 이스마일파라고도 불린다.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 이와는 달리 12이맘파는 무사 카딤(Musa al-Kadhim)을 7대 이맘으로 세웠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사후에 그 자손이 이맘을 계승하였는데, 이스마일파의 전승에서는 이들은 아바스 왕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정체를 숨겼다고 알려져 있다. 8대 이맘, 9대 이맘, 10대 이맘이 정체를 숨겼으며, 이들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기록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반인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압둘라 마흐디 빌라흐(Abdullah al-Mahdi Billah)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고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가 되었다.[10]
카이로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하킴의 실종 이후 실권을 잃었고 군인과 관료들에게 휘둘렸다.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압바스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파티마 칼리프를 더 이상 세우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멸망하였다.
압바스 왕조 치하에서 시아파 이맘들은 탄압받았는데, 감금당하거나 독살당하는 등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맘의 혈통임을 주장하는 파티마 왕조가 튀니지에서 봉기, 이집트까지 점령하고 카이로에 도읍을 하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압바스 왕조의 헤게모니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파티마 왕조에 대항하여 후우마이야 왕조까지 칼리프를 자칭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세 칼리프가 공존하는 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시리아에 주로 분포하며,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에도 소수 신도들이 있다. 실종된 파티마 왕조 6대 칼리프 하킴이 사실 마흐디이며, 그는 지금 모습을 감추고 있고 언젠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는 파벌이다. 교리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며, 가르침에서 여러모로 이슬람에서 동떨어진 것이 많다. 사실, 이 때문에 대다수 근본주의 성향 무슬림들은 드루즈파를 일종의 떨어져 나간 사이비 종교로 취급하고 주류 이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
Mustaali/ Taiyabi
파티마 8대 칼리프 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에서 동생 무스탈리(Musta'li)를 추종한 자들의 집단이다.
오늘날 대부분 아가 칸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니자리파와 달리 여러개의 분파(Bohra)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다. 신자의 대부분은 예멘과 인도에 분포한다
Nizāri
파티마 8대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빌라하(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에서 형 니자르(Nizar)를 추종한 자들의 집단이다.
반란 직후 니자르는 살해푹찍되어 생을 마감했지만, 추종자들은 니자르는 모습을 감췄을 뿐이고 언젠가는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맘'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하산 사바흐이며, 유명한 어새신들이 바로 이들이다. 한때 상당한 세력을 쌓아올렸지만 훌라구의 서정으로 참패하여 정권이 붕괴하였다.
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르 파에서 44대 이맘 하산 알리 사하(Ḥassan ʻAlī Shāh)(1800~1881)가 페르시아의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 칸(Aga Khan)베이비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 칸은 나중에 인도로 이동하였으며 (현재 근거지는 영국이다.),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현재 아가 칸 4세, 1936년생)
'아가 칸'은 영토는 없지만 막대한 부와 엄청난 수의 추종자[11]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일국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12]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니자리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니자리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있던 니자리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게 되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크며, 이스마일=니자리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통칭 마흐디파, 자파리파. 현대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13]하는 12이맘파는 후세인의 아들들 가운데 알리 이븐 후사인(Ali ibn Husayn Zayn al-Abidin)을 정통으로 보았다.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버지가 후세인이고, 어머니는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의 딸로서, 페르시아의 황녀인 샤흐르바누(Shahrbanu)로서, 전설에 따르면 샤흐르바누는 페르시아가 패배한 뒤 우마르 혹은 우스만 혹은 알리의 노예가 되었는데 알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주고 누구와 결혼할 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였다. 샤흐르바누는 알리의 아들 후세인을 선택하여 혼인을 하였다. "그리하여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랍인의 최고 혈통인 쿠라이쉬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던 것이다"라고 12이맘파는 주장한다.
12이맘파가 현대까지 살아남은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그리고 그 대부분이 과거 페르시아의 중심지인 이라크와 이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도 12이맘파의 교리 자체가 자신들을 정복한 세력인 아랍인들에 대항하기 위한 이란인들의 이란 민족주의(이 당시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지방 통치자들의 이해와 결합되었기 때문이지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승을 바탕으로 '무함마드께서는 아랍에서 시작하셨지만 아랍인들이 무함마드의 후손을 저버렸고 우리 이란인들이 진짜 무함마드의 후예다'라는 인식이 이란과 이라크 지역 시아파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알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여겨지는 시아파의 이맘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었다. 시아파 전설에 따르면 대부분의 이맘이 아바스 왕조에게 독살 당했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의 10대 칼리프 알 무타와킬(Al-Mutawakkil)의 치세에 시아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Ali al-Hadi)는 한때는 수니파랑 시파아 전 이슬람의 대통일을 위하여 칼리프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바그다드로 소환되었고, 사마라에 저택을 주워졌는데 칼리프의 마음이 바뀌어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어 독살되었다. 알리 하디의 아들 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Hasan al-Askari)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자손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아파 이맘의 대는 공식적으로는 끊어졌다.
그리고 12대 이맘에 대한 시아파의 전설은 이렇다. 참고로 수니파에서는 12대 이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산 알 이스카리는 자손이 없이 죽은 듯이 보였지만, 노예를 가장하여 아라비아를 여행[14]하던 동로마 제국의 공주 나르지스(Narjis)와 결혼하여 아들을 보았다.[15] 하지만 압바스 왕조의 탄압을 우려하여 아들을 낳은 것을 비밀로 하였다. 그 아들이 바로 12대 이맘 무함마드 이븐 하산 알 마디(Muhammad ibn Hasan al-Mahdī). 마디는 5살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는 알라가 마디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 모습을 감춘 것("Ghaybah")이며, 마디는 미래에 이사(예수)와 함께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류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답습해 더 쎈 수니파 제국을 건설해버렸기에 저항은 끊어지지 않았고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비아랍계 지방과 동아나톨리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산골 깡촌에서 세력을 불렸다.
아바스 왕조 중기에 일시적으로 페르시아 시아파 12이맘파 맘루크들이 부와이 왕조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었다.
시아파인 사파비 가문이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이란에 건국하면서 이란 지역에서 12이맘파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이란에는 시아파 왕조가 몇 차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페르시아 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사파비 이전에도 시아파 왕조로 압바스 왕조, 파튀마 왕조등이 존재했으나 시아파는 1~5% 남짓한 극소수였고 그 당시엔 다 같은 무슬림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종파간 대립이 격화되어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 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은 수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순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이 구도는 현대 이란, 그리고 현 무슬림 세계의 수니 시아의 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자프리파(Jafri)가 분열되면서 12 이맘파에서 떨어져 나간 방계집단 정도 된다.
자세한 건 알라위파 문서로.
현재 사우디를 비롯한 수니파, 특히 다에쉬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대두하여 지즈야를 바치지 않는 이교도의 생존권 자체를 부정하며 워낙 미쳐돌아가고 있어 세계의 평가가 크게 떨어진 반면, 시아파 이란은 최소한의 정치적 처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수니파=강경파, 시아파=온건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수니파가 이슬람 절대다수를 차지해서 근본주의 극단파 역시 많을 뿐이다. 애초에 가톨릭이나 정교회, 개신교를 믿는 국가들이 다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듯 수니파를 따르는 국가라고 해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시아파, 특히 이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낫다 뿐이지,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을 둔 정권의 한계와 내부 강경파 때문에 이란에 대한 서방의 경계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시아파가 강경파이고 수니파가 온건파로 평가받았던걸 생각해본다면 상전벽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온건 정도가 다소 부각되어 보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수니파 광신도들이 테러를 많이 저질러서 깽판을 적게 부리는 시아파가 온건하게 보일뿐이다.
새해 벽두부터 중동에서 들려온 소식도 바로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국교 단절을 선언하면서 역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소식인데요, 뉴스 따라잡기 오늘 이 시간에는 이슬람교의 대표적인 2개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이란인들이 수도 테헤란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비난하며 시위를 벌이는 소리입니다. 이들은 사우디 정부가 폭동선동혐의로 수감 중이던 저명한 시아파 지도자를 포함해 50여 명에 가까운 시아파 인들을 처형한 것을 강력히 항의하고 있습니다.
결국 흥분한 시위대는 테헤란에 있는 사우디 대사관으로 몰려갔고, 시위는 방화와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우디 정부는 이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원래 전에도 이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1988년에도 국교가 단절됐다가 3년 만에 다시 복원된 적도 있었습니다. 중동 지역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 두 나라는 호르무즈 해협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좀처럼 메워지기 힘든 깊은 골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국가들을 대표하는 종주국이고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이기 때문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네, 수니파와 시아파는 모두 이슬람교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둘 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을 사용하고 있고요. 근본적인 교리나 사상 면에서 아주 큰 차이는 없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후계자의 정통성 문제입니다. 즉 교회의 권리가 누구에게 이어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인데요. 여기서 비롯된 갈등은 점점 더 골이 깊어지면서 1천4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언제, 어떻게 갈라진 걸까?”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지게 된 건 632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죽은 다음의 일입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를 이끌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이냐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죠. 수니파는 이슬람교의 지도자는 회중이 뜻을 모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이슬람교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는데요. 하지만 2대 교주는 당시 신망을 얻고 있던 무함마드의 조력자, 아부 바크르가 됩니다. 그러나 암살되고요. 이후 두 명의 후계자가 더 살해된 후, 결국 알리가 이슬람교의 지도자, 칼리프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오늘날 수니파는 칼리프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칼리프, 의견을 모아 선출하는 지도자의 개념이죠. 이 칼리프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체도 가능합니다. 반면 무함마드의 혈통을 강조하는 시아파는 이맘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맘의 뜻은 아랍어로 안내자라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이 이맘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무결점의 존재로서 어떤 문제나 교리에 대해 절대적인 해석과 판결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수니파는 보다 현실적이고, 시아파는 순교와 희생에 보다 가치를 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시아파 국가 이란에서는 종교 지도자가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이맘 제도와 인식에 근거하는 겁니다.
"수니파 국가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현재 전 세계 이슬람 신자들은 약 15억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요. 그 가운데 85%가 수니파 신자들입니다. 이집트, 수단, 리비아, 차드, 오만, 아랍에미리트, 터키, 파키스탄 등이 수니파 국가들이고요. 사우디아라비아가 수니파 종주국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도 사우디에 있죠.
“시아파 국가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시아파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억2천만 명에서 1억7천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요. 이는 전체 이슬람 신자들, 무슬림의 약 10분의 1 정도 되는 겁니다. 이란이 대표적인 시아파 국가고요. 바레인도 시아파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집권층은 소수인 수니파가 차지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죠. 바레인이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동조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제르바이잔과 예멘,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시리아 같은 나라도 국민의 대다수는 시아파들입니다. 이라크도 바레인처럼 대다수는 시아파지만 오래도록 집권계층은 소수인 수니파가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시아파가 집권했고요. 현재는 이란과 함께 대표적인 시아파 국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간 갈등”
사우디아라비아로 대표되는 수니파와 이란이 전면에 나서고 있는 시아파는 중동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늘 충돌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을 두고도 양 진영은 철저히 갈라져 있습니다.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현 시리아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반면, 사우디는 아사드 정권과 싸우는 반군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예멘에서도 사우디가 이끄는 수니파 국가 연합군과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요. 전문가들은 사우디와 이란의 국교 단절로 앞으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이 더 심화되고 역내 불안정을 고조시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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